영영, 귤귤귤귤



   영은 그냥 영인데, 영영은 무언가 있을 것 같았다. 수챗구멍을 타고 내려가면 우주로 이어질 것 같이. 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땅,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하늘 아래 거기는 어떻니.

   귤 하면, 귤귤귤 어깨를 기대고 있는 상상을 한다. 둘러앉아 구워 먹곤 했는데. 어느새 입을 모아 숨을 죽인다. 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수록, 하면 할수록 나빠지는 것 같아. 대충 이런 게 사는 건가, 고개를 젓는다.
   우리가 찾던 미지수가 사실 희망이 아닐까, 영보다 영영이 더 의미 있을 것 같이.
   귤껍질이 모여있다, 어깨를 감싼 적 있다는 듯이.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라는 듯.

   귤은 귤이고, 꿈이 아니라고 웃으며 인사하고 문 닫고 나와버리자. 우리 영영 아무 죄가 없어버리자, 뒤돌아서.
   귤, 귤귤 하고 이름을 부른다. 벼랑 끝에서 영 영 하고 메아리가 들린다.





   바나나는 빙그레, 초코는 서울우유



   1.
   딱 정해놓은 것도 누가 물어보면 망설였어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시작만 어려운 것도 아닌데

   고양이가 새벽 내내 울었어요
   눈감으면 눈뜨라고, 눈뜨면 얘기하자고
   바라봐요 예쁘고 안쓰럽고 미안하고
   내가 아주 좋아하지 고양이

   대답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2.
   홉 유 해피, 홉 유 해피 기도했는데
   나는 보았어요,
   헌금이 없는 아이에겐 생일파티도 없다는 걸
   나도 모르게 고개 숙이고
   꼬박 스물 몇 해가 지나요

   자라면서
   축하하고 기록할 일이 많았는데
   시를 쓰는 사람에게도 시는 달가운 선물이 아닌 것 같았고
   그런 시는 어떻게 쓰이는지
   한참 빙빙 헤맸네요
   그러면 뭘 맴돌고 있는지는 알게 될 줄 알았는데

   작은 글귀로 행복해지고 싶어요

   3.
   전부 기억하는 건 너무 무거워요
   더위 먹고 빵빵해지는 배처럼
   먹은 것 없이 배불러요
   더위를 크게 겪고 나면 급격히 줄어드는 체중처럼
   정말 어쩔 수 없는 계절을 겪고 있는 걸까요

   4.
   오늘은 좀 괜찮아요
   처음 눈 뜬 것처럼 환해요
   어제는 어제의 내가 기억하고 있겠죠
   오늘은 오늘만 열심히 살면 되는 거겠죠?
   조금씩 껄끄러워지고

   5.
   어느 날 열린 문, 닫힌 문, 구멍 뚫린 모든 것들이
   과하게 거대하고 두텁고 낯설게 느껴진다면
   마치 법 앞에서

   잘하고 있는 건가요
   손을 들고 결국 하지 못한 말은 이런 것이었을까요
    갈아엎고 싶은 어제와 아직 못 꺼낸 말들,
   그러니까 모두 질문으로 부치고 싶고요
   그 모든 것들에 걸쳐 서 있습니다

   오늘은 처음 눈 뜬 것처럼 환해요
   아침에야 잠든 고양이를 발견하고
   어제를 차곡차곡 지나 오늘의 내가 인사하고
   홉 비 해피, 홉 비 해피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기도 한다는 걸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기 시작하네요

이은지

어차피 모나 있는 세상, 동그라미가 되자,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 나만 보고 내 목소리만 듣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말을 조금 더 줄이기 시작했죠. 쓰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쓰는 날이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2020/06/30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