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遊離)의 기록



   나의 고양이를 깨뜨린 사람이
   간밤에 불쑥 찾아왔다

   나무숲도 아니고 무지개다리도 아니고
   믿지도 않는 십자가 아래
   묻어두었던 고양이와 함께 왔다

   내가 없는 다락방에서
   피가 새어나오는 고양이를 베고 누워
   잠을 쿨쿨 잤다

   옷소매에서 고기 냄새가 나는데
   코드 빠진 냉장고를 뒤지고
   이빨 빠진 하이에나처럼 허겁지겁
   묽은 아침을 떠먹었다

   내가 없는 식탁에 앉아
   빨간 국물을 뚝뚝 흘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죄보다 두꺼웠는지
   대기권이라도 뚫을 듯
   로켓처럼 트림을 쏘아올렸다

   파랗게 이끼가 핀 전축을 틀고
   회전반을 되감으며 추억의 재즈도 꺼내 들었다

   내가 없는 정원에 앉아
   바닥에 떨어진 햇빛도 한 줌 주머니에 넣었다
   불에 그을린 창고를 뒤지고

   내가 없는 일기장을 펼쳐 읽고
   용서해 달라고 썼다
   무릎 꿇지는 않았다

   내가 없는 안락의자에 앉아
   시간을 돌려주고 싶다고 썼다
   품위는 잃지 않았다

   내가 없는 유리 상자에 죽은 고양이를 넣고
   용서해 달라고 울었다
   눈물 같은 닭똥을 흘렸다

   아침을 거꾸로 되감은 것처럼
   내 방의 유리벽까지 까맣게 얼룩졌다
   나는 걸레를 들고 나갔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내가 없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믿지도 않는 십자가를 품속에서 꺼내 흔들었다

   나는 옆집에 살았다
   폐가엔 가지 않았다

   귀신이 우는 밤이면
   이따금 닭장을 살피러 갔다
   모이는 주지 않았다

   간밤에 닭 한 마리가 탈출했다
   나는 닭똥을 치우고
   닭장 문을 걸어잠갔다

   밤의 유리를 통과해
   내가 없는 꿈속으로 들어갔다





   마스크



   의사를 보러 갔다. 나를 깊이 들여다보시는 의사의 눈을 보러 갔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의사의 안경을 보러 갔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집안 내력까지 탈탈 털어주시는 의사의 귀를 보러 갔다. 끝내는 액체처럼 흘러나오는 내 몸의 소리를 경청하시는 의사의 청진기를 보러 갔다.

   어떻게 혼자서 참으셨어요? 옷 좀 걷어보실래요?
   아니요, 벗지 않고도 합니다.


   손가락을 들고 있었다. 무표정한 메뉴판을 부위별로 스치듯 진료과를 골랐다. 새로운 병명이 붙으면 새로운 산책로가 생겼다. 꽃이 피면 밤이 깊었다. 어둠 속에 발이 빠졌다. 안경을 쓰고 꿈을 꾸었다. 청진기를 꽂고 낭독회에 갔다. 손가락을 떨고 있었다. 마감일이 다가오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밤마다 잠은 왜 못 잡니까? 여기 좀 누워보실래요?
   아니요, 서서 할 줄도 압니다.


   의사를 보러 갔다. 내장까지 깨끗이 목욕하고 갔다. 모아둔 열기를 지참하고 갔다. 손목에 밑줄을 그으면서 갔다. 하얗게 눈 내리고 종적을 지우면서 갔다. 지팡이를 깎아 더듬으면서 갔다. 희미하게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주사실로 불려갔다. 한 칸 두 칸 허리띠를 풀었다. 엉덩이를 한 장 내밀었다. 섬광처럼 바늘이 꽂히면 사랑에 빠졌다. 간호사에게 고백하지는 않았다. 다음에 또 오려고.

이민하

밤에는 어둡고 낮에는 더 어두워서 4개월 동안 잠만 잤다. 잠만 자다 끝까지 깨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깨워 주었듯이, 나도 불안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시를 모든 경계에 세워 두는 일. ‘마스크’를 잠시 벗고 숨을 몰아쉬듯 ‘유리의 기록’을 썼다.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일 년 넘게 이별 중인 새 시집과도 이제야 한 걸음씩 헤어지는 중이다.

2020/05/26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