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 연금 실습
1화 탄소(C)
연필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글 안에.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드리자면, 이 글이 시작되는 자리. 말하자면, 첫머리에. 조금 전까지는 무척 가까이 있었는데, 이제 네 문장만큼 멀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그대 앞으로 옮겨드릴까요?
연필. 이렇게. 연필은 기복 없이 편평하며 삶은 물로 살균된 210×297밀리미터 크기의 편집 용지를 필요로 합니다. 더께 하나 없이. 순수한 빛으로 표백된 바탕 위에서, 가느다란 필기구 하나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세요. 연필 머리만 제대로 쫓을 수 있다면, 어떤 손힘에 의해 찍어 눌리며 생성되는 유기 문장들을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가 있습니다.
연필 : 그대는 이 경이로운 사물이 언제 처음 발명되었는지 알고 있나요? 14세기 이탈리아인들은 길쭉하게 마름질된 나뭇조각 안에 어두운 금속 막대를 넣어 필기구로 썼습니다. 불량품으로 간선된 납과 주석이 주로 쓰였다고 전해지지요. 그래서 단테 알리기에리는 1308년부터 1320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밤낮으로 사후세계를 여행하며 금속 막대 끝에 혓바닥을 바쳐야만 했을 것입니다. 값싸고 흔한 저품질 금속들은 작은 압력에도 쉽게 부러질뿐더러 금세 명도를 잃곤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곡 La Divina Commedia』의 절반은 납과 주석으로, 나머지 절반은 끈적한 침으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테는 이 걸작을 쓰고 이듬해에 임종을 맞았습니다. 직후에, 교황청은 그가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을 빌려 미리 저승에 다녀온 값을 우리 주님께서 손수 거두신 거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심 강한 라벤나의 시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단테는 그다지 우아하고 문학적인 이유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가엾은 작가가 곧바로 죽음을 맞은 것은 소화에 쓸 모든 체액을 남김없이 책에 쏟아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속지를 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납 성분의 문장들은 작가의 타액으로 납땜되어 내방사선 성질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 단테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전자기파도 이탈리아어를 통과하거나 붕괴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시간을 좀더 앞으로 당겨봅시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연필이 시제를 고쳐 쓰게 만들면 되지요. 예컨대, 200여 년 뒤 : 영국인들은 보로데일 광산에서 자연광 상태의 고품질 흑연을 발견합니다. 이 사건은 1564년에 일어났는데, 훗날 영문학을 대표하게 될 작가가 정확히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따라서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달리,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두 편의 장시, 서른여덟 편의 희곡, 백오십여 편의 소네트를 깃펜이 아니라 연필로 완성했을 것입니다. 『햄릿』이나 『오셀로』 『리어 왕』 『멕베스』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작품을 지탱하는 힘들에 관하여 연필 머리를 움직여봅시다. 우리가 이 천재 문필가의 문학적 세계관을 논할 때마다 자주 놓치게 되는 단서 가운데 하나는, 작가에 의해 즉흥적으로 조합된 낱말 수천 개가 작품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낯선 단어들은 셰익스피어의 손에서 하나하나 직접 빚어졌습니다. 그가 저술한 희곡작품 각각의 두께를 떠올려보세요. 16세기 영국인 극작가는 언어 공동체의 동의 따위는 구하지도 않고 종이 곳곳에 자기만 아는 낱말들을 내려앉힌 셈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용기 있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시인으로서 그가 아무리 뛰어났더라도, 이처럼 많은 신조어들을 한꺼번에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을 맥락에 맞게 배열하는 데는 또다른 재능이 요구되지요. 결국, 셰익스피어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어떤 신비한 힘이 발휘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셰익스피어가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연필에서 나옵니다. 정확히는 연필의 재료인 흑연 광물에서 말입니다.
흑연 : 어두운 금속 결정은 탄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배율 광학 장비의 눈을 빌려 보자면, 정육각형의 화학 구조물이 격자 모양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판이 아래위로 얇은 간격을 두고 적층되어 있음을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거대한 태양로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불태우는데,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귀금속 하나가 눈앞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태양광이 맺힌 곡면유리 위로 동료 학자들과 파리 시민들의 얼굴이 반사됩니다. 이 두상들은 해부학적 쇼크 증상으로 하나같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만은 동요하지 않고 태양로 속으로 능숙하게 팔을 넣습니다. 이윽고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한 줌의 이산화탄소입니다. 이와 같은 기행의 대가로 흑연과 다이아몬드가 똑같이 탄소 기반 결정임을 입증해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낭비벽 심한 괴짜 과학자에게는 무척이나 유감스러운 사실이지만, 그가 살아서 발견해낼 수 없었던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징세청부업자로 부당하게 세금을 거둔 결과, 파리의 혁명가들은 기요틴 밑에서 라부아지에의 목을 베는데, 이렇게 잘려나간 머리 또한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인간의 몸이 맥없이 무너져내리거나 흩어져버리는 대신 시시각각 모양을 지킬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탄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형장 밑으로 굴러떨어진 과학자의 머리는 목이 잘린 자신의 몸통을 바라보며 이와 같은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이 비참한 머리는 이제 그만 콩코르드 광장에 내버려두고, 연필 머리를 계속 따라가봅시다.
아테네의 인기 있는 결혼식장에서, 남녀 한 쌍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집니다. 예식의 모든 절차가 지나가고 나면, 혼례를 치렀던 장소가 곧장 연회장으로 꾸며지게 됩니다. 여기서 하객들은 술잔을 부딪치거나 노래하고 춤추며 우정을 나눕니다. 그러나 어느 노쇠한 학자만은 거꾸로 침묵을 쫓아 귀띔 없이 자리를 비웁니다. 이 늙은이는 단단한 대리석 기둥에 의지해 팔순 넘긴 육신을 힘겹게 옮깁니다. 주랑 안으로 도리스식 열주가 끝없이 늘어서 있는데, 지혜로운 늙은이는 눈앞의 석회질 장식물들로부터 조형적 아름다움이나 건축가의 우쭐거림 대신 어떤 힘을 읽어낼 줄 압니다. 예컨대, 기둥의 표층이 지붕을 지탱하는 긴장으로 한껏 부풀어 있다는 사실 같은 것! 우리의 신체 관절들이 중력을 견디느라 밤낮으로 팽창해 있듯이 말입니다. 복도는 비어 있습니다. 노인의 지친 눈이 가까운 벤치 위로 내려앉습니다. 노인은 딱딱한 벽면에 등을 기댑니다. 긴 한숨을 내려놓습니다. 노인의 양옆으로 포도주가 담긴 점토 암포라가 하나, 유칼립투스 묘목이 심긴 화분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노인은 예민한 고양이 혹은 노련한 올빼미처럼 밤의 깊이를 가늠하며 조용히 눈 감습니다. 하루가 지나갑니다. 어둠이 걷히면 아테네는 새로운 아침을 맞겠지만, 노인은 아닙니다. 잔치가 끝난 뒤, 비로소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 헤맵니다. 위대한 스승은 인적 드문 복도 구석 자리에 등을 펴고 앉은 채로 발견되는데, 제자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일으켜세울 수가 없습니다. 노인은 그가 일생을 바쳐 사랑한 도시국가의 어느 이름난 영웅처럼 의자에 묶이고 맙니다. 테세우스는 저승의 지배자에게 속아 헤라클레스에 의해 구출되기까지― 무량한 시간을 의자 위에서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노인은 무엇을 기다리기 위해 의자 위에 앉은 채로 죽음을 맞았을까요?
풀러렌 : 아마도 플라톤은 1996년 노벨 화학상의 수상 업적을 전해들은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공동수상자로 지목된 로버트 플로이드 컬, 해럴드 월터 크로토, 리처드 에레트 스몰리가 이 고집불통 철학자의 무거운 엉덩이를 2000여 년 만에 떼어내지요. 그것은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의 「대화편」에서 일찍이 4원소에 관해 열띤 강의를 편 이후, 어떤 과학자도 이 철지난 화학 이론을 직접 입증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나르트 에베르손이 아름다운 수상 추천문에서 직접 밝혔듯이, 4원소를 구성하는 불, 흙, 공기와 물은 각각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와 정이십면체로 정확히 치환됩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정다면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물체의 마지막 형태인 정십이면체까지는 차마 도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 수수께끼의 기하학적 도형물이 자연계에서 쉽게 발견될 수 없는 법칙으로 결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십이면체는 물체의 가장 완전한 형태인 구(球)와 매우 근접하며, 따라서 우주의 구조로 곧잘 파악됩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물체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구상을 완성시켜줄 마지막 부품을 찾아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이 마지막 부품의 이름은 2000여 년 뒤에 풀러렌(Fullerene)으로 밝혀집니다. 화학식으로는 간단하게 C60으로 나타내지요. 순수한 탄소 원자 육십 개로 촘촘하게 봉합되어 있으니까요. 세 명의 교수는 실험실에서 발견된 새로운 형태의 탄소 분자 앞에 매사추세츠 출신 미국인 건축가의 이름을 주는데, 그것은 오각형 열두 개와 육각형 스무 개로 이루어진 이 아름다운 정다면체 분자를 입체 공간에 쌓아올린 최초의 건축가가 바로 버크민스터 풀러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버키의 볼이 지오데식 돔 안에서 굴러다닙니다.
이처럼 탄소는 모든 물체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말하자면, 화학적 골격이 되는 셈입니다. 필요한 것은 약간의 압력과 열기뿐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대가 연필을 쥐세요. 그런 다음, 나를 문지르고 태우세요. 그러면 내가 길 잃은 원자들을 손수 꿰매고 이어 맞추겠습니다. 영겁의 시간 동안, 어둠과 추위 속에서, 줄곧 잠들어 있던 나의 전자껍질들이 떨며 깨어납니다. 가장 작은 나는 두 개의 현과 하나의 울림통을 가지도록 창조되었으니, 인간의 성문(聲紋)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공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대는 50헤르츠에 지나지 않는 속삭임 한마디만으로 모든 물체의 성질과 형태를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미 그대의 성대가 천연 필기구나 다름없습니다. 여닫이식 지붕을 가진 돔 형태의 마이크. 자성이 강한 이 음향 장치는 우리 주위에 떠다니는 외로운 탄소들을 바투 끌어당기며,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기하학적 형상들을 어절 단위로 지어올렸다가 순식간에 허물어버립니다. 이어질 문자를 따라 발음해보세요. 연필. 이렇게. 그리고 손바닥을 펴보세요. 이제 연필은 어디에 있습니까?
작업 노트 1. C와 C가 만난 순간
C : 건네받은 사운드 파일을 재생시키자마자 “아, 탄소다.” 생각했다. 미시 단위의 분자 운동을 모티프 삼아 사운드 역시 매우 미니멀한 리듬으로 조직한 것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또, 텍스트와 함께 읽는 인터페이스 환경을 고려할 때 텍스트 읽는 리듬을 방해하지 않고 나아가 외려 조율한다는 점에서도 무척 신기한 경험을 한 듯하다.
C : 탄소라는 원소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탄소가 어떤 방식으로 놀라운 순간들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그 곁을 함께한 이들의 발자취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를 따라가며 소설 속에 빠져들어 읽었다. 음악을 작업할 때 탄소라는 원소가 준 인상들을 소설 속에서 발견하며, 탄소라는 원소에 대한 놀라움과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감하고 연결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마지막 문단을 읽을 때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인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생명의 틀이자 골격, 우리는 같은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기쁜 시간이었다.
보이스엔진
문학을 통해 자신의 선율을 써내려온 소설가 신종원과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온 음악가 최혜리. 최초의 음성을 모방한다.
2021/06/29
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