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허희정

   대학원생이 하는 일은 실로 다종다양한데, 그중 한 가지로 신도시에 갓 지어진 캠퍼스에 다녀오는 일을 들 수 있다. 송도까지 가는 데에만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리지만, 막상 송도에서 해야 하는 일들은 비교적 간단하게 혹은 시시하게 끝나곤 한다. 그러나 그것도 나름대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라서 그런지 해치우고 나면 배가 고파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를 나와서, 4호 근린공원을 지나서, 먹을 것이 있을 만한 곳으로.
   무릇 대학가란 술집이든 밥집이든 하다못해 편의점이든, 음식물을 취급하는 가게가 한둘은 있기 마련인데,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 근처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켜보니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길을 건너 두 블록 가량을 걸어 송도 프리미엄 아울렛의 식당가를 가든가, 길을 건너지 않고 앞으로 쭈욱 두 블록 가량을 걸어 버거킹을 가든가. (송도 프리미엄 아울렛에 있는 스타벅스는 제법 근사하다. 밥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아울렛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길을 건너려면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는 것을 기다려야 했고, 아직은 바람이 선선한 4월 초라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은 그래도 상당히 뜨거웠기 때문에,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머리 위에 햇빛을 가려줄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몇 번씩이나 방문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송도국제도시의 지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길을 건너는 대신 눈앞의 보도블록을 따라 주욱 걷는 것을 선택했다.
   날이 맑아서 걷기에는 좋았다. 얇고 곧은 나뭇가지 끝에 엷은 연두색의 이파리가 돋아나기 시작해서 보기에도 좋았다. 새로 외벽을 칠한 말끔한 아파트 단지, 갓 조경을 마친 근린공원의 어리디어린 나무들. 나뭇잎이 너무 작아서 광합성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사실 정말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나의 위장 상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엄청난 허기가 느껴졌다. 나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느리게 걸었다.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다 어린이집에 있을 시간이어서 그런지,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한 놀이기구로 채워진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 단지 울타리에는 커다란 영문 사인이 달려 있었다. Global city, Songdo.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찾아볼 수 없는 늦은 오후의 4차선 도로를 따라서 걷다보니 저 멀리 버거킹 사인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이런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지. 인디애나 주에 살 때의 일이었는데, 동생들의 겨울방학을 틈타서 가족들과 함께 미국 동부로 자동차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 놓인 도로는 매우 길고 넓은데다가 또 한산하기까지 해서,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지평선과 듬성듬성 나타났다 사라지는 눈의 흔적과 이파리를 모두 떨구고 서 있는 겨울나무들이 창밖으로 빠르게,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동시에 금세 지루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버거킹이든 맥도날드든 익숙한 사인이 보이기만 하면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곤 했었다. 왠지 모르게 버거킹 인천송도SK점의 간판을 보는 순간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말았다. 물론 나는 운전중도 아니었고, 운전면허도 없었고, 황량한 지평선을 따라 무슨 로드무비마냥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중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가용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의식한 모양인지, 버거킹 건물의 1층 일부는 주차장 공간으로 비어 있었다. 나는 누구나 좋아하는 와퍼 세트를 주문했고, 햄버거 쟁반을 받아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도 역시나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여고생 몇 명이 앉아서 아이돌 얘기를 하고 있었고, 문가 자리에는 남자 노인 둘이 묵묵히 감자튀김을 씹고 있었다. 갑자기 카우보이모자를 쓴 총잡이가 총을 꺼내들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말로 총잡이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와퍼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아마 화장실 앞에 서부극에나 나올 법한 살룬 도어(saloon door)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노인들은 간간히 실패한 주식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고생들은 인피니트에 대해서 끝없이 떠들었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 않았다. 회전율이 낮아서인지 와퍼는 축축했고, 와퍼와 함께 주문한 코울슬로도 축축했고, 제로콜라는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축축했다. 걸은 거리에 비해 대체로 불만족스러운 식사였고, 집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걸어온 만큼을 되돌아가야 했다.



   버거킹을 나와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는 길은 버거킹까지 가는 길만큼이나 길고 재미없었다. 오른편에는 슬레이트 칸막이가 쳐진 공사장이 있었고, 왼편에는 간간히 버스가 지나다니는 도로가 있었다. 인도는 간간히 파헤쳐져 있었고, 뿌리가 드러난 묘목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목이 말랐기 때문에, 나는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카페라떼를 사서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자재들을 덮어놓은 천이 가볍게 펄럭였다. 내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어서 나는 태양을 향해서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가는 셈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이랄 것은 없었고 눈이 많이 따가웠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다. 햇빛을 가려줄 지붕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다. 플라스틱 커피잔을 버리고 싶었는데, 마땅한 쓰레기통이 없어서 커피잔을 그대로 들고 버스를 기다렸다. 문득, 송도까지 왔으면서 송도 센트럴 파크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분명히 벚꽃을 구경하러 한번 가보자는 얘기를 누군가와 했던 것 같은데,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도심 속의 녹지를 지향하고 만들어졌다는 센트럴 파크는 그러나 내가 앉아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하지만 뉴욕 센트럴 파크에 대한 나의 기억 역시 대단한 구석이 전혀 없어서, 기껏 뉴욕까지 가놓고서는 갑작스럽게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일행들이 센트럴파크 곳곳을 구경하는 동안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끙끙 앓은 게 내가 센트럴 파크에 대해 가진 기억의 전부인 것이다.



   결국 버스가 올 때까지 나는 커피잔을 버리지 못했다. 색깔도 농도도 도무지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축축한 플라스틱 컵을 그대로 손에 쥔 채로,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는 사람은 많았다. 강의를 끝내고 돌아가는 강사들, 수업이 끝나서 서울로 놀러 나가는 새내기들. 불행히도 자리는 없었고, 나는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신고서점 가는 길

   양선형

33년 간 명맥을 이어오던 어느 오래된 책방이 사라진다. 사람의 손길과 책의 시간은 유예되었다. (총 7분 54초, 연출·촬영·편집·출연 김지환)

   이문동 주택재개발지구를 걸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신고서점에 가는 길이었다. 신고서점은 30년가량의 역사를 가진 헌책방으로 수많은 먼지 낀 장서들과 LP들을 보유하고 있다. 언젠가 나는 그곳 2층의 불문학 코너에서 낡은 책들 사이에 파묻힌 장정일을 목격했던 기억이 있었다. 신고서점 또한 곧 다른 장소로 이전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새 친구는 신고서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최근엔 녹화 버튼을 눌러놓은 채로 그곳 사장님과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늦은 봄이었지만 공기가 쌀쌀했다. 친구는 바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는 소망이 있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바둑의 진정한 묘미는 승패에 있지 않다. 그것은 게임에 임하는 두 플레이어 사이에 이루어지는 소리 없는 대화, 무한히 형성되었다 허물어지는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관계, 혹은 대화란 비어 있던 평면의 바둑판이 차츰 거기 위치할 바둑돌들에 의해 복잡하며 변화무쌍한 지도로 메워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홀로 있는 바둑돌은 그 단조롭고 매끄러운 형태처럼 어떠한 개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바둑을 두는 몸짓을 상상했다. 예컨대 나는 바둑판 위로 아주 가벼운 돌멩이 하나를 내려놓는다. 그것은 불시착일 수도 있다. 그 돌멩이는 손이 다녀간 자리, 그리고 나와 상대 플레이어 사이에서 교환되거나 불발될 생각의 궤적을 표시하는 잠재적인 지표가 된다. 운반한 돌멩이 한 개의 역학은 함께 공존할 돌멩이들에 의해 계속해서 달라진다. 나는 어린 시절 다녔던 바둑교실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생각했으며 바둑에 관한 친구의 애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바둑교실에서 나는 멍하니 바둑판 앞에 앉아 영문 모를 패배를 되풀이하는 꼬마 원숭이였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골목은 황량하고 구불구불했다. 쓰레기들이 사방으로 잡다하게 널려 있었다. 오르막길을 걸으며 나는 이문동에 관한 오래된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열여덟? 열아홉? 그 무렵이었고, 나는 외대에 다니던 아는 형과 함께 자주 이문동에 있는 여관에 투숙했다. 제일여관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지만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붙박이 에어컨엔 축축한 먼지가 타르처럼 검게 들러붙어 있었다. 당시 나는 비재학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지나치게 많았고, 학교에 등교한 형을 기다리며 종일 객실에 처박혀 내게 주어진 무기력을 남용하기 일쑤였다.
   여관 앞에는 분식점이 있었다. 아는 형과 나는 거기서 오징어튀김과 김말이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말아 포장했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스릴러 영화나 공포영화를 빌렸다. <알포인트> <검은 집> <기담> 같은 영화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가 묵었던 여관 역시 허름하고 더러운 골목에 있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영화를 호들갑을 떨면서 보는 타입이다. 에어컨을 틀고, 비좁은 객실에 뻗어 튀김으로 채운 배를 두들기며 시청하던 영화들. 귀신이 나오는 장면에서 소리를 꽥 지르며 아는 형을 끌어안으면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세게 밀치며 욕을 하던 형의 모습. 놀리거나 간지럽힐 때 형이 보이는 귀여운 반응은 당시의 내게 항상 최고의 재미를 선사했다.
   과거 아는 형과 나, 그리고 지금 친구와 내가 걷는 이문동 골목은 똑같이 괴괴하고 낙후되어 있었으며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친구는 이문동 주택재개발지구를 걷는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촬영하고 나면 보여줄게. 안 그래도 돼. 우리는 실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재개발지구에는 무수한 쓰레기나 폐품,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가구들이 골목 어귀와 모퉁이를 점령하고 있었다. 깨어진 유리 조각들, 가로로 버려진 매트리스, 구멍 뚫린 장롱, 절단된 전선들, 부서진 전파 수신기. 길에는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는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양이들이 가구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가로등 아래에 모여 있는 가구들은 마치 난파된 선박의 잔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물과 장소에 기억이 깃들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므로 무차별하게 쌓인 재개발지구의 쓰레기들은 무차별하게 방치된 기억, 소환될 가능성을 잃어버린 기억, 폐허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어떤 보존된 낡은 시간의 골조가 아닌, 폐허 상태를 지속하지 못할, 그러므로 폐허조차 아닌, 고유성을 상실한 채 커다란 쓰레받기에 의해 치워지기만을 기다리는 기억의 스트레스 상태를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자본주의는 폐허에서 폐허의 역량을 빼앗는다. 그것은 폐허를 매장한다. 망각은 원래의 면역 기능이 마비되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내가 딛고 있는 도시는 언제나 시간과 폐허의 매립지이다.


   잔해들은 떠내려간다. 그들 하나하나를 기록하고 호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커다랗고 비위생적인 더미(dummy)의 집적에 가깝다. 우리는 비좁고 위태로운 계단을 내려갔다.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에는 출입금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접근금지 테이프가 구역 전체를 에워싼 상태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나는 이 장소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내가 오늘에 관해 쓰게 된다면 무엇이 남겨질까. 어떤 것을 도둑맞고 어떤 것이 버려지며 어떤 것이 다시금 새로워져서 내게로 올까. 나는 이곳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어떤 거짓말을 감수해야 할까. 잔해들은 내게 경례를 하고 있을까. 합창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 뭔가를 독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느리고 아득한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날이 어둑해졌다. 친구는 구글 맵을 따라가다 익숙한 길을 발견하고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걸음이 빨랐다. 나는 친구를 따라가느라 호흡이 가빠졌다. 불이 켜진 유리창들이 있었다. 아직 모두가 이사를 나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재개발지구를 나오니 도로 건너편에 신고서점이 보였다. 서점 앞에는 입고될 예정인 헌책들이 노끈에 묶여 있었다. 사장님이 책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나는 신고서점에서 헌책 다섯 권을 샀다. 그중 한 권은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내가 몇 년 동안 구하는 데 실패했던 책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이제는 누구도 읽지 않을 것만 같은 책.


   베케트의 『첫사랑』에서 몰로이, 혹은 말론, 혹은 맥맨, 혹은 머피, 혹은 누구나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쌓여 있는 가구들을 목격한다. 그는 오랑캐꽃 맛이 나는 파네를 씹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집 밖으로 가구들을 내어놓은 날, 그는 그 길로 자신의 거주 공간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추방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파네를 씹으며 영구적인 배회에 착수한다. 베케트의 인물들을 생각하면 야외에 방치된 소파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있는 인간 형태의 키메라가 떠오른다. 집도, 말도 없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는 무능한 괴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단지 존재하기 자체만을 거듭해 수행하는 인간 아닌 것의 신체.
   나는 그 소설의 전체 내러티브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기억의 파편들에겐 기억의 파편들 나름의 삶이 있다. 파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동요한다. 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며칠 후 친구에게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재개발지구를 산책하는 모습을 정말로 촬영했다는 이야기였다. 일곱 번을 찍었는데, 모든 영상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해서 어떤 영상을 골라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한번 봐달라고,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찍었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말이다. 나는 써먹을 데가 생길지도 모르니 조금 기다리라고 말했다.

걷는다. 본다. 수집한다. 유유히 흘러간다. (총 9분 9초, 연출·편집·출연 김지환, 촬영 김지환 이준용, 사운드 박철우 장진수)



꿈의 수집

음악을 만드는 Goat the funky와 영화를 만드는 김지환, 소설을 만드는 민병훈, 양선형, 최영건, 허희정. 여섯 사람이 모여 일곱 장소를 표류합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새로 출발한 사람들이 다시 따라 걷습니다. 이로써 ‘꿈의 수집’은 ‘장소와 장소’ ‘장소와 개인’ ‘개인과 개인’이라는 세 가지 관계의 꿈을 읽어내보려 합니다.

2019/09/24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