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일상키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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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꽤나 더워진 주말 오후, 마지막 일상키트가 신촌에서 열렸다. 2주에 한 번, 다른 사람들이 모인 게 벌써 여섯번째였다. 마지막 주제는 많고 많은 일상적인 것들 중에 키-ㅌ 팀이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인 것, 즉 ‘문학’이었다. 키-ㅌ 팀은 개개인의 삶이 문학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삶, 즉 매일 이어지는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며 그 다름이 쌓이고 더해지는 과정에서 문학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했다. 정말 그럴까? 문학을 곧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학을 사랑하는 여섯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시작할 때 생겨나는 어색함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간단한 자기소개 후 팀원 A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색연필을 책상에 늘어놓았다. “이게 웬 종이에요?” “오늘 이야기 나눌 주제가 문학이거든요. 이야기 나누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이미지, 아무거나 자유롭게 그려주시면 돼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문학을 좀더 잘 보여주는 수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문학이라는 단어에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종이책을, 누군가는 선물 받은 전자책 리더기를 가방에서 꺼냈다. 일상키트를 시작한 지 약 3개월, 키-ㅌ 팀의 출발점이었던 ‘문학은 일상이다’라는 생각에 대해 대화를 시작했다.



   “영화 대사나 노래 가사 같은 것도 일종의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꼭 종이책으로 된 문학작품을 읽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면서 대사에 집중해 의미를 곱씹어보거나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주의깊게 듣는 것도 일상에서 문학을 향유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_궁둥

   “저는 ‘종이책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종이책 시장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근에 문학 수업에서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문학은 일상이라기보다 소수만이 향유하는 취미생활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_드림

   “저만 해도 요즘에는 텍스트를 잘 안 읽어요. 소설이나 시만이 아니라 잡지에 실린 가벼운 글도 포함해서요. 그나마 최근에 많이 읽은 걸 꼽으라면, 제가 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그런데 제 글을 보면서 ‘읽는 만큼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확실히 하게 되더라고요. 많이 안 읽으니까 글도 잘 안 써지고 쓰더라도 비슷한 얘기만 반복하게 되는 것 같아서, 최근 들어 뭐든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어요.”_짤랑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많은 작가들이 공무원이나 회사원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글을 쓰더라고요. 글을 쓰기 전에 반드시 1시간씩 운동을 한다거나, 옆방에서 글을 쓰더라도 회사원이 회사에 출근하듯이 양복을 차려입고 작업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게으름뱅이에게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보고 꾸준하고 성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아요.” _맹글

   “학교에서 ‘아동문학과 환상예술’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게 있었어요. 기존의 많은 아동문학이 어른의 시각에서 쓰였다는 거였어요. 아동의 마음이 아닌 책을 사주는 부모의 마음에 들어야 아이에게 그 책이 전달될 수 있는 현실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어요. 예컨대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동화가 사랑받아온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엄마의 희생과 모정’이라는 내용이 부모들의 마음을 저격해서라는 거죠.” _세오

   “좋은 문학작품을 읽어보면 뻔한 말들로 사랑 고백을 해도 아름답게 잘 표현이 되어 있잖아요. 뻔하고 익숙한 말들이 서정이 되고 메타포가 되고…… 그런 작품을 볼 때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접하고 알아야 좋은 글을 쓸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통을 알아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잘 알고 은유할 수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같아요.” _와사비

   평소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다들 여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했고 다채롭게 이야기가 흘러갔다. 우리가 나눈 대화에서 컴퓨터가 주요하게 꼽은 토픽은 ‘문학’ ‘원작’ ‘동화’ ‘작가’ ‘회사’였다. ‘회사’라는 토픽 외에는 ‘문학’ 하면 쉬이 떠오르는 밀접한 단어들이었다. 다음은 선정된 토픽과 단어들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이다.



*

   팀원들은 ‘문학’ ‘원작’ ‘동화’ ‘작가’ ‘회사’라는 토픽을 가지고 스크립트에서 등장한 단어를 골랐다. 다음은 팀원들이 각자의 개성을 살려 만든 시선 지도이다. 문학이라는 단어가 하나하나 분해되어 각자의 발치에 새롭게 쌓여갔다. 그 조각들을 쌓아나가는 손끝에서 우리의 문학은 저마다 아주 다른 길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A의 시선 지도. “우리 사이에 남겨진 말들이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쓰지 않는 그것들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신할 줄 아는 너를,”(김이강, 「마르고 파란」 부분)


   2018년 X월 X일 수요일.
   수요일만큼 애매하고 싫은 날은 없다.1) 주말이 되려면 아직도 먼 것 같고, 그렇다고 회사에 급한 일이 많은 것도 아닌 일주일의 중간 그 언저리. 늘 수요일이 되면 어딘가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 학교에 다닐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인데. 하긴, 그때는 매일을 내가 채워나가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일상이 너무나도 뻔하기 그지없다. 흠, 아닌가. 어쩌면 내가 수요일을 싫어하게 된 건 ㄱ이 졸업을 축하한다며 선물해준 책 때문일지도. ㄱ은 제일 좋아하는 책이라며 『키다리 아저씨』를 주었다. “이거 완전 애들 책 아니야?” 하면서도 내심 기뻤다. ㄱ은 학교 문학 동아리의 몇 안 되는 열성 회원이자 회장이었고 그런 ㄱ이 동아리 사람 외의 사람에게 문학 이야기를 한다는 건 특별히 아끼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흔치 않은 일이니까!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 시 한 편이 나왔다. 제목이 뭐더라, 우울한 수요일. ㄱ은 그 부분에 연두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옅게 그어두었다. ‘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회사 다니면 수요일이 제일 싫다더라구!’ 연필로 살짝 적어둔 메모가 마음에 들었다. 그후로 수요일이 싫어졌지만 어쩐지 싫지만은 않았단 건 여기에만 적는 비밀.
   ㄱ에게 연락이 왔다. 졸업 이후 ㄱ은 나와 이야기를 할 때 문학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문학이 뭔데?”라고 한다면 할말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ㄱ이 일요일에 일이 있냐고 물었고 같이 전시를 보러가자고 했다! 문학 전시라고? 뭐, 어쨌든 좋다. 오늘이 수요일, 나흘이면 책 한 권 정도는 다 읽으려나. 집에 가자마자 ㄱ이 준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ㄱ이랑 할말이 많았으면 좋겠다.
   아! 너무 좋은 거 아니야, 진짜? 문학을 좋아한다는 ㄱ이 나는 너무 좋다. 이 정도면 나에게 문학이란 ㄱ이라고 해도 될 정도. 퇴근하고 집 가는 길에 팩이라도 사가야겠다. 어휴, 옆 자리까지 심장 뛰는 소리 들리겠네. 정말!
  

B의 시선 지도.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때때로 카드점은 우리가 스스로를 마주하고 길을 찾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좋은 문학 역시도 그러하다.


   전시를 합니다. 일종의 ‘아카이브’라고나 할까요. 어떤 전시냐고 굳이 물으신다면, ‘문학적인’ 전시라 답하겠습니다. 전시물은 종이에 펜일 수도, 흑백 컬러 프린트물일수도, 캔버스에 유화일 수도, 오일 섞은 실리콘일 수도, 어쩌면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비슷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지를 힘차게 뻗는 최승희의 몸짓일 수도, ‘지하로부터의 수기’일 수도, 가좌동 아파트 건축 현장에 널브러진 배관 자재와 모터일 수도 있습니다. 헬로 월드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의 컴퓨터 언어일 수도, 월차를 내고 감행한 5인조 보이그룹의 투어 예매권일 수도, 나혜석의 이혼 고백서일 수도, 교양 글쓰기 수업 제출을 위해 퇴고 중인 ‘쪽글’일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 예언자의 복음서일 수도, 어디선가 가져온 돌 조각들의 군집일 수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듣게 된 저예산 도색영화 속 교성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법 위반을 무릅쓰고 녹음한 4월 12일자 비평 수업의 음성 파일일 수도, 감독의 파렴치한 현실 재현에 치를 떨었던 영화의 대사일 수도, 예민함의 정도가 맞지 않아 자꾸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의 지나가는 한마디일 수도 있습니다. 담담한 필체로 공책을 가득 메운 일기일 수도, 익명을 빌미로 회사 욕을 잔뜩 늘어놓은 블로그 포스트일 수도, 유튜브에 올리려고 편집 중인 영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무엇을 하나요?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은?”이라고 묻는 데이지 뷰캐넌에 대한 당신들의 대답일 수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라는 흔해빠진 세헤라자데식 수사에 대한 나의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나와 당신들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소재로 씁니다. 그러니, 너무 거창한 걸 기대하지는 마세요. 문학적인 전시를 합니다.

C의 시선 지도. 어두운 방 안에서, 반짝이는 종이의 무게는 제각각이었다.


   ㄴ와의 채팅 내용.

   ㄱ : 이번주 일욜에 뭐해?
   ㄴ : 아무것도 안 해.
   ㄱ : 이번에 되게 문학적인 전시가 열렸대. 보러 가자.
   ㄴ : 문학적인 전시? 무슨 전시지.
   ㄱ : 몰라? 그냥 카피에 그렇게 써 있던데?
   ㄴ : 검색해봤는데 별 정보는 없네. 일단 작가전은 아닌 듯. 작은 개인전인가봐.
   ㄱ : 문학적인 게 뭐지? 궁금하네.
   ㄴ : ‘문학적 : 문학과 관련되어 있거나 문학의 특성을 지닌. 또는 그런 것.’2)
   ㄱ : 문학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겠네.
   ㄴ : 감수성을 자극하고 심금을 울리는 것?
   ㄱ : 단어와 문장의 정교한 배열?
   ㄴ :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것?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
   ㄱ : 드라마틱한 것?
   ㄴ : 그건 반대인 듯. 일상적인 것? 예민한 것?
   ㄱ : ㅇㅈ. 작가나 주인공이나 독자나 일상적인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8할이니까.
   ㄴ : ㅋㅋㅋ 갑자기 심오해졌다. 이제 범위가 더 커지는 거지. 창작자와 작품의 윤리적 상관성이라든가.
   ㄱ : 작품 속 등장인물의 타자화 문제라든가.
   ㄴ : 신념을 위해 도덕을 버린 사람들이라든가.
   ㄱ : 편의를 위해 윤리를 저버린 사람들이라든가.
   ㄴ : 아, 엄청 다른 문장이네.
   ㄱ : ㅋㅋㅋ 문학적…… 뭘까?(이모지)
   ㄴ : ㅋㅋㅋㅋㅋㅋ
   ㄱ :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ㄴ : ㅋㅋㅋㅋ 가보자. 뭔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기분.
   ㄱ : ㄱㄱ 기대된다. 노잼이라고 나 욕하지 마라. (이모지)
   ㄴ : (이모지)
   ㄱ : (이모지)

*


   새하얗던 종이가 어느새 저마다의 일상, 아니 어쩌면 ‘문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것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누군가는 마주앉은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누군가는 추천받은 책 목록을 한 면 가득 꼼꼼히 적어 넣었다. “제가 말씀드린 책, 꼭 다 읽으셔야 해요. 후기 들려주세요.” 대화가 끝났을 무렵 모두들 조금 들떠 있었고 종이 위 기록을 기억하려는 듯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카페를 차례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따스하고 조금은 불그스레한 빛이 서로의 얼굴을 눈부시게 했다. 오늘 우리의 하루는 문학이었을까?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헤어짐의 인사를 나눴다. 그건,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주변의 것들을 다 문학이라고 여기다보면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길거리에 핀 한 송이의 꽃은 문학인가부터 시작해서 넓게넓게 나아가다보면 결국 문학은 결국 개인의 사적인 삶 하나가 되지 않을까 라는,
   아주 문학적인 생각이 드네요.” _와사비

   누군가 문학이 뭐냐고 물으면,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을 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래도 좋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거, 문학인가? 그럴지도, 아닐지도.


키-ㅌ

‘키-ㅌ’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이 기술을 도구로 문학을 재해석하기 위해 모인 팀이다. 무언가를 조립해서 만들 수 있도록 부품을 모아놓은 세트인 ‘kit’에서 착안하여, ‘키-ㅌ’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2018/08/28
9호

1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 중에서.
2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