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랩
5화 초 챙
어느 순간 사라진 소녀의 이야기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또 한 명의 조연이 있다. 초 챙. 모두가 ‘해리의 첫사랑’으로 기억하는 소녀. 그녀는 사실 유능한 퀴디치 선수다. 초의 등장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 초를 향한 우드의 칭찬 때문인지, 초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인지 해리는 초 챙에게 한눈에 반한다. 이날 이후 해리는 초를 의식하며, 초에 대한 감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실수투성이인 네빌이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과는 달리, 초는 첫 등장 장면 이후 이렇다 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소녀이자 차지하고 싶은 대상, 해리에게 미소를 지어줌으로써 무언의 응원을 보내는 존재로만 묘사된다.
게다가 무진 고생 끝에 결국 케드릭에게 트리위저드 우승컵을 빼앗기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무도회에서 초 챙을 빼앗겼던 것처럼……1)
반짝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소녀가 문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2)
유능하고 당당했던 초는 무도회 파트너였던 케드릭 디고리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혼란을 겪는다. 방황하다가 해리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사귀지만, 둘은 이내 이별한다. 이때의 초는 이미 해리가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가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지 않다면?” 론은 평소와 다르게, 몹시 심술궂은 표정으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해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초를 좋아했어. 안 그래, 해리?”
지혜의 상징 래번클로 기숙사 소속이며, 아름답고, 유능한 퀴디치 선수이기도 한 초 챙은 그녀에게 부여된 긍정적인 묘사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이 유능함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해리와 사귀고 난 후 남자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징징거리는 나약한 캐릭터로 전락해버리며, 동아시아 여성에게 부여된 편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인종차별’ 의혹까지 일게 만들었다. 그렇게 유능한 퀴디치 선수에서 해리의 ‘전여친’으로 지위가 강등된 초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명백한 성장 서사를 가지고 조연의 한계를 넘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네빌과는 다르게, 초의 세계는 온통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초는 마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비치는 실루엣 같다. 잘 알 수 없기에 아름다운 존재. 다가가서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신비감은 사라진다. 해리는 초에게 자신이 기대하는 이미지를 마음대로 덧씌우고 그 이미지에 대한 감정을 키운다. 그랬다가 초가 자신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거나, 헤르미온느를 질투하는 등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실망하고 초를 떠난다.
초 챙의 조연 서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한계점은, 해리에게서 잊힌 초의 존재가 곧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그 너머 독자들의 기억에서도 잊혀버린다는 점이다. 해리의 시선 밖에서도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성장한 네빌과는 달리, 해리의 시선 안에서만 불투명하게 존재했던 초의 존재는, 해리가 시선을 거둠으로써 곧 서사에서 사라져버린다.
초 자신은 물론, 초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네빌에 비하면 한참 부실하다. 심지어는 대개 부정적으로 비친다. 초의 친한 친구가 결정적인 배신을 함으로써 해리가 이끄는 덤블도어의 군대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나 이로 인해 초가 해리의 눈 밖에 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초에게 부여된 설정은 대부분이 극의 전개를 위한 것이지, 초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퀴디치 선수라는 설정은 해리와의 대치점과 그의 러브 스토리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고, 케드릭 디고리와의 연애는 해리로 하여금 질투와 열등감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초의 친구는 극에 위기감을 몰고 왔으며, 해리가 초 와의 관계를 끝낸 일은 다른 친구들(네빌, 루나 러브굿, 지니)과 더욱 돈독해지는 데 영향을 준다.
결국 초의 경우는 본인만의 서사 없이 오로지 주인공과의 관계에만 의존하는, 편견으로 점철된 조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가 밝힌 ‘비하인드 스토리’(초 챙이 후에 ‘머글’과 결혼한다는 내용)는, 더더욱 그녀의 인생에 의문점을 갖게 만든다. 성장을 거듭하다 마침내 호그와트의 교수가 되어 해피엔딩을 맞이한 네빌과는 달리, 극의 전개를 위해 지극히 도구적으로 소비된 캐릭터 초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었다.
똑같은 조연이지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했던 이와, 자신의 생각과 세계관을 단 한 번 내비치지 못한 채 사라져갔던 이. 이 대립되는 서사에서 우리는 조연의 가능성과 한계를 또렷이 비교해볼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초 챙을 묘사하는 글 중, 그 어느 문장에서도 초 챙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글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하인드 랩’은 초 챙이 이 일련의 과정에서 느꼈을 감정을 유추하여 한 편의 글을 적어보았다.
*
“여보, 이런 게 왔는데.”
평범한 오후였다. 트로이와 산책을 나갔던 남편이 나에게 편지 뭉치를 내밀었다. 호그와트 마법 학교. 내가 떠나온 곳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호그와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남편은, 이 편지를 옛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온 청첩장이겠거니 생각하는 듯 했다. 편지를 열어보니, 호그와트의 새로운 교장이 선출되었다는 내용과 이를 기념하는 파티 일정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이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익숙한 이름과 얼굴들. 새 호그와트의 교장 네빌 롱바텀과, 그를 축하하는 얼굴들 사이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웅, 해리포터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날 기억하고는 있을까. 기억한다면 아마 ‘해리 포터의 첫사랑’ ‘그 라이벌의 연인’ ‘지금은 머글과 결혼해 잊혀진 마법사’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내가 어떤 과목을 좋아했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그런 것은 모두 잊어버린 채로.
포터와는 퀴디치 시합에서 처음 마주쳤다. 최연소 참가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안 그래도 유명 인사인 그애에게 관심이 집중된 경기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이겨주고 싶어서, 그애의 파이어볼트를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던 기억이 난다. 결과는 나의 패배였다.
그런 그 아이가 날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뒤쫓던 애가 갑자기 내 앞 와서 쩔쩔매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복도에서 몇 번 포터와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장면이 가십거리가 되어 교내로 퍼져나갔다. 친구들은 그애가 내 남자친구인 디고리를 질투한다며 웃기 바빴다. “트리위저드에서 우승한 다음 청혼이라도 하려는 것 아냐?” “어쩌면 다음 퀴디치에서 너한테 스니치를 건네줄 지도 모르지.” 그런 우스갯소리에 둘러싸이며 생각했다. 난 그애와 이런 게임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포터와 첫 데이트를 했던 카페 마담 퍼디풋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애와 다툰 이후 난 그곳엔 다시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 울면서 뛰쳐나간 일로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포터는 날 마주칠 때마다 곤란한 일에 처했다는 듯 머쓱한 얼굴을 하고 지나치곤 했다. 그건 처음 퀴디치 시합에서 만났을 때, 식당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의 표정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그걸 보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내 앞에서 울지 좀 마.”
포터는 그렇게 말했고 그날로 난 그애와 헤어졌다.
호그와트를 졸업한 후에 나는 머글 세계로 와 살았다. 머글 세계에서 나는 더이상 ‘해리 포터’의 꼬리표가 아니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조금씩 원래의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잘하는지 차츰 선명해져갔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활력을 되찾기 위해 나갔던 달리기 동호회에서였다. ‘혹시 해리 포터라는 사람 알아요?’ 지나가듯 내가 물었을 때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대신 그는 나와 나누는 일상들, 평화로운 이야기들을 사랑했다.
“올해도 나가는 거야?”
호그와트에서 온 것 외에도 초대장이 하나 더 와 있었다. 작년부터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아마도 마라톤 같은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달리는 게 좋았다. 한 가지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건 퀴디치의 수색꾼 역할과도 비슷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포기하지 않는 집중력은 내 강점이었다. 여자라 가벼워서 속도가 잘 난다거나, 파수꾼들이 공격하길 꺼린다는 것보다도. 그걸 다시 깨닫게 된 건 처음 대회 안내문을 가져와 준 남편 덕분이었다.
“이번엔 메달 따는 거 아니야? 매일 연습했잖아.”
남편이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남편은 내가 자잘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역시 운동선수야.” 하면서 나보다 더 즐거워하곤 했다.
“이번엔 꼭 딸 거야. 두고 봐.”
웃는 남편에게 보란듯이 그 자리에서 대회 신청서를 썼다.
저녁을 먹자마자 연습을 도와주겠다는 남편을 채근해 다시 뛰었다. 트로이까지 다함께 달리는 것은 오랜만이라 즐거웠다.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면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진다. 네빌 롱바텀이니 해리 포터니 이제 아무래도 좋다.
이곳에서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초 챙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에.
게다가 무진 고생 끝에 결국 케드릭에게 트리위저드 우승컵을 빼앗기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무도회에서 초 챙을 빼앗겼던 것처럼……1)
반짝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소녀가 문 앞에 서서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2)
유능하고 당당했던 초는 무도회 파트너였던 케드릭 디고리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혼란을 겪는다. 방황하다가 해리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사귀지만, 둘은 이내 이별한다. 이때의 초는 이미 해리가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가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지 않다면?” 론은 평소와 다르게, 몹시 심술궂은 표정으로 해리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해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초를 좋아했어. 안 그래, 해리?”
해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그가 머릿속에 그렸던 초의 모습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초가 아니라,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초였다.3)
지혜의 상징 래번클로 기숙사 소속이며, 아름답고, 유능한 퀴디치 선수이기도 한 초 챙은 그녀에게 부여된 긍정적인 묘사와 설정에도 불구하고 극 중에서 이 유능함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해리와 사귀고 난 후 남자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징징거리는 나약한 캐릭터로 전락해버리며, 동아시아 여성에게 부여된 편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인종차별’ 의혹까지 일게 만들었다. 그렇게 유능한 퀴디치 선수에서 해리의 ‘전여친’으로 지위가 강등된 초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명백한 성장 서사를 가지고 조연의 한계를 넘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네빌과는 다르게, 초의 세계는 온통 베일에 둘러싸여 있다. 초는 마치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비치는 실루엣 같다. 잘 알 수 없기에 아름다운 존재. 다가가서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신비감은 사라진다. 해리는 초에게 자신이 기대하는 이미지를 마음대로 덧씌우고 그 이미지에 대한 감정을 키운다. 그랬다가 초가 자신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거나, 헤르미온느를 질투하는 등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자 실망하고 초를 떠난다.
초 챙의 조연 서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한계점은, 해리에게서 잊힌 초의 존재가 곧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그 너머 독자들의 기억에서도 잊혀버린다는 점이다. 해리의 시선 밖에서도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성장한 네빌과는 달리, 해리의 시선 안에서만 불투명하게 존재했던 초의 존재는, 해리가 시선을 거둠으로써 곧 서사에서 사라져버린다.
초 자신은 물론, 초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네빌에 비하면 한참 부실하다. 심지어는 대개 부정적으로 비친다. 초의 친한 친구가 결정적인 배신을 함으로써 해리가 이끄는 덤블도어의 군대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나 이로 인해 초가 해리의 눈 밖에 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초에게 부여된 설정은 대부분이 극의 전개를 위한 것이지, 초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퀴디치 선수라는 설정은 해리와의 대치점과 그의 러브 스토리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고, 케드릭 디고리와의 연애는 해리로 하여금 질투와 열등감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초의 친구는 극에 위기감을 몰고 왔으며, 해리가 초 와의 관계를 끝낸 일은 다른 친구들(네빌, 루나 러브굿, 지니)과 더욱 돈독해지는 데 영향을 준다.
결국 초의 경우는 본인만의 서사 없이 오로지 주인공과의 관계에만 의존하는, 편견으로 점철된 조연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가 밝힌 ‘비하인드 스토리’(초 챙이 후에 ‘머글’과 결혼한다는 내용)는, 더더욱 그녀의 인생에 의문점을 갖게 만든다. 성장을 거듭하다 마침내 호그와트의 교수가 되어 해피엔딩을 맞이한 네빌과는 달리, 극의 전개를 위해 지극히 도구적으로 소비된 캐릭터 초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었다.
똑같은 조연이지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했던 이와, 자신의 생각과 세계관을 단 한 번 내비치지 못한 채 사라져갔던 이. 이 대립되는 서사에서 우리는 조연의 가능성과 한계를 또렷이 비교해볼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초 챙을 묘사하는 글 중, 그 어느 문장에서도 초 챙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글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하인드 랩’은 초 챙이 이 일련의 과정에서 느꼈을 감정을 유추하여 한 편의 글을 적어보았다.
“여보, 이런 게 왔는데.”
평범한 오후였다. 트로이와 산책을 나갔던 남편이 나에게 편지 뭉치를 내밀었다. 호그와트 마법 학교. 내가 떠나온 곳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호그와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남편은, 이 편지를 옛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온 청첩장이겠거니 생각하는 듯 했다. 편지를 열어보니, 호그와트의 새로운 교장이 선출되었다는 내용과 이를 기념하는 파티 일정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이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익숙한 이름과 얼굴들. 새 호그와트의 교장 네빌 롱바텀과, 그를 축하하는 얼굴들 사이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웅, 해리포터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날 기억하고는 있을까. 기억한다면 아마 ‘해리 포터의 첫사랑’ ‘그 라이벌의 연인’ ‘지금은 머글과 결혼해 잊혀진 마법사’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내가 어떤 과목을 좋아했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그런 것은 모두 잊어버린 채로.
포터와는 퀴디치 시합에서 처음 마주쳤다. 최연소 참가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안 그래도 유명 인사인 그애에게 관심이 집중된 경기였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이겨주고 싶어서, 그애의 파이어볼트를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던 기억이 난다. 결과는 나의 패배였다.
그런 그 아이가 날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뒤쫓던 애가 갑자기 내 앞 와서 쩔쩔매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복도에서 몇 번 포터와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장면이 가십거리가 되어 교내로 퍼져나갔다. 친구들은 그애가 내 남자친구인 디고리를 질투한다며 웃기 바빴다. “트리위저드에서 우승한 다음 청혼이라도 하려는 것 아냐?” “어쩌면 다음 퀴디치에서 너한테 스니치를 건네줄 지도 모르지.” 그런 우스갯소리에 둘러싸이며 생각했다. 난 그애와 이런 게임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포터와 첫 데이트를 했던 카페 마담 퍼디풋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애와 다툰 이후 난 그곳엔 다시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날 울면서 뛰쳐나간 일로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고, 포터는 날 마주칠 때마다 곤란한 일에 처했다는 듯 머쓱한 얼굴을 하고 지나치곤 했다. 그건 처음 퀴디치 시합에서 만났을 때, 식당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의 표정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그걸 보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내 앞에서 울지 좀 마.”
포터는 그렇게 말했고 그날로 난 그애와 헤어졌다.
호그와트를 졸업한 후에 나는 머글 세계로 와 살았다. 머글 세계에서 나는 더이상 ‘해리 포터’의 꼬리표가 아니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조금씩 원래의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잘하는지 차츰 선명해져갔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활력을 되찾기 위해 나갔던 달리기 동호회에서였다. ‘혹시 해리 포터라는 사람 알아요?’ 지나가듯 내가 물었을 때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대신 그는 나와 나누는 일상들, 평화로운 이야기들을 사랑했다.
“올해도 나가는 거야?”
호그와트에서 온 것 외에도 초대장이 하나 더 와 있었다. 작년부터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아마도 마라톤 같은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달리는 게 좋았다. 한 가지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건 퀴디치의 수색꾼 역할과도 비슷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포기하지 않는 집중력은 내 강점이었다. 여자라 가벼워서 속도가 잘 난다거나, 파수꾼들이 공격하길 꺼린다는 것보다도. 그걸 다시 깨닫게 된 건 처음 대회 안내문을 가져와 준 남편 덕분이었다.
“이번엔 메달 따는 거 아니야? 매일 연습했잖아.”
남편이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남편은 내가 자잘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역시 운동선수야.” 하면서 나보다 더 즐거워하곤 했다.
“이번엔 꼭 딸 거야. 두고 봐.”
웃는 남편에게 보란듯이 그 자리에서 대회 신청서를 썼다.
저녁을 먹자마자 연습을 도와주겠다는 남편을 채근해 다시 뛰었다. 트로이까지 다함께 달리는 것은 오랜만이라 즐거웠다.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면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진다. 네빌 롱바텀이니 해리 포터니 이제 아무래도 좋다.
이곳에서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초 챙으로 남아 있을 수 있기에.
비하인드랩연구소
김수현, 김원지, 장은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 속 ‘조연’을 마주한다. 조연을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를 아카이빙하고, 조연에게 전사와 후사를 덧입히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깊이 성찰해나갈 예정이다.
2018/11/27
12호
- 1
- 조앤 K. 롤링, 『해리포터와 불의 잔』 2권, 김혜원, 문학수첩, 2014, 61쪽.
- 2
- 조앤 K. 롤링,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2권, 김혜원, 문학수첩, 2014, 87쪽.
- 3
- 같은 책, 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