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일상키트 ‘밥’    ●●●●○○


   몸이 노곤해지는 오후 3시 무렵, 다섯 명의 사람들이 신촌의 스터디카페에 모여 앉았다. 다들 밥은 드시고 오셨어요? 뭐 시킬까요? 누군가는 밥을 먹은 뒤라 졸리다며 아메리카노를, 누군가는 밥을 안 먹었으니 녹차라테를 마시겠다고 했다. 잠시 후 음료가 나오고 나서야 모두 한숨 돌리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선 ‘밥의 의미가 ‘생존을 위한 끼니’라기보다 ‘즐길 거리’, 즉 ‘유희’로 소비되는 것 같아요. 저만 봐도 친구들을 만나면 하는 게 ‘먹고, 먹고, 또 먹고……’예요.” _김비행

   “다른 나라에 갔을 때 채식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많았고 놀라웠어요. 저는 익숙하지 않아서 미국 갔을 때 실수 많이 했거든요. 여러 다른 나라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 채식주의자인 상대방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식단을 고른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예를 들어 치킨도 고기라는 걸 생각을 못했어요(웃음). 당연히 누구나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한국은 채식 혹은 채식문화에 대한 이해나 교육, 접근을 위한 여건 등이 최근에 활발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 같아요.” _구녕

   “저는 매일 한 끼를 가족들이랑 먹어요. ‘가족’의 의미가 ‘함께 밥을 먹는 것’에 있다고 생각을 해서요. 한 테이블 가족이 같이 앉아서 밥 먹는 시간을 갖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_오리

   “전통적인 가족 상이 오늘날에 이르러 많이 바뀌었죠. 매우 다양한 가족 구성원이 존재하고 저마다 지향하는 삶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가족이 갖는 여러 의미 중에서도 한집에서 같이 살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식구(食口)로서의 의미가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_베티


   우리는 ‘밥’이라는 테마를 둘러싸고 푸짐한 이야기 한 상을 나누었다. 평소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좋은 먹거리를 챙겨 먹는 것 외에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밖에도 먹을 것과 관련해 자기 관리, 운명, 미래에 대한 불안 등 생각지도 못한 주제로까지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어색한 사이도 밥 한 번 먹으면 좀 친해지는 것처럼, 비슷한 나이대의 우린 대화가 깊어질수록 서로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요가를 하고 있는데 진짜 좋아요. 생리통이 심했는데 요가를 하고 나서 괜찮아지고 있어요. 운동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운동이 있는 것 같아요.” _구녕

   “취미로 수영을 할까 하고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수영 학원에 다니면 물에 뜰 수는 있게 되지?’라고요. 근데 친구가 ‘안 되는 사람은 끝까지 안 뜨더라.’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수영은커녕 물에 뜨는 것도 안 돼서 친구가 ‘열심히 하면 돼!’라고 대답해주길 내심 바랬는데, 실망했죠. 물속에서 겁을 먹고 몸에 힘을 못 빼는 사람은 못 뜬다고 하더라고요.” _베티

   “먹을 것과 관련된 유사과학이나 맹신 중에 재미있는 게 많아요. 어렸을 때는 그런 얘기 있었잖아요. 생선가시 먹으면 안 된다는 말. 먹으면 가시가 혈관 타고 돌고 돌아서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으로 나온다는 말.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도 재미있지 않나요? 혈관 속으로 가시가 어떻게 들어가겠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그런 이야기들이 상상을 자극하고 흥미로워서 좋아했어요.” _크림

*


   ‘식’(食), 즉 먹는다는 것은 살면서 제일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의식주 중 하나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우리의 대화는 먹는다는 행위나 먹거리라는 대상을 넘어 식생활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이나 사회적인 문제 등등에 이르렀다. 서로의 이야기가 밥알처럼 다닥다닥 엉겨 붙었다. 컴퓨터는 대화의 주요한 토픽으로 ‘운동’ ‘채식주의’ ‘닭갈비’ ‘유사과학’을 뽑았다. 닭갈비 같은 특정 음식이 토픽으로 뽑힌 것이 의외였다. 또한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나왔던 유사과학이나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컴퓨터는 유의미하게 평가했다.

   다음은 선정된 토픽과 단어들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이다.
 



   키-ㅌ 팀원들은 ‘운동’ ‘채식주의’ ‘닭갈비’ ‘유사과학’이라는 토픽과 함께 스크립트에서 각기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시선 지도’를 만들고, 토픽에 대한 단상을 글로 남겼다.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듯 각자의 이야기가 지면에 채워졌다. 


A의 시선 지도. 나란히 서서 고등어를 굽고 잘 지어진 밥을 퍼 담을 때, 나는 그게 미래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여기가 맞다고 했다, 아니 맞아야 했다. 핸드폰을 켜 은정이 적어준 은정의 집 주소와 상가 건물에 적힌 주소를 재차 확인했다. 도로명부터 건물 번호까지 정확히 맞게 찾아왔는데…… 혹시 다른 입구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건물을 한 바퀴 돌며 찾아볼 의지는 없었다. 은정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조금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애초에 은정을 다시 만나겠다고 연락을 한 것부터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그러지 말걸. 이 모든 건 며칠 전 팀장이 가볍게 던진 말이 화근이었다.
   “그게 다 운동 부족이야, 지아씨. 아직 젊은데 그래서 되겠어? 나 보라구. 잘 먹고 잘 움직여야 힘을 쓰고 일을 하지. 안 그래?”
   그저께 점심시간이었나, 새로 입사한 회사는 번화가와 시장통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었고 유연하다는 근무환경은 어째서인지 자꾸 나쁜 쪽으로만 휘어져갔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하기 껄끄러워 매번 점심시간이면 경제적 이유를 들어 도시락을 싸서 다니거나 그마저도 귀찮은 날엔 다른 약속이 있는 척 둘러대곤 했다. 그런데 그저께 갑자기 팀장이 그놈의 ‘유연한’ 근무환경을 운운하며 점심 회식을 하자고 했다. “자기 입사 환영식인데, 자기가 빠지면 안 되지.” 첫 출근날부터 거리낌 없이 말을 놓던 팀장이 지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녁 회식 없는, 이런 회사 흔치 않다, 자기?”
   쉴새없이 말을 쏟아내며 팀장이 향한 곳은 시장통 한 구석의 오래되어 보이는 닭갈비집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조금 늦은 점심시간인데도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회사원들로 가게는 북적였다. 당연하다는 듯 넷씩 한 테이블을 잡고 앉았고 인원수대로 닭갈비 주문이 들어갔다. ‘어떡하지.’ 밑반찬, 그것도 나물 종류만 깨작거리는 지아에게 팀장이 운동 부족을 운운하며 자신의 팔뚝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자랑을 할 때에서야 지아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왔는지 깨달았다. 은정에게 연락을 한 건 그날 밤이었다.
   은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은정이라면 닭갈비집 대신 다른 식당을 같이 찾아다녀줄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은정의 연락처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은정의 답장을 기다리며 냉장고를 열어 남아 있는 재료를 눈으로 가볍게 훑고 찬장에서 보온 도시락을 꺼냈다. 내일은 꼭, 내일은 꼭.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유연해지고 싶었다.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은정이었다.


B의 시선 지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다양한 생각들은, 단출한 식탁을 풍부하게 채워준다.

   며칠간 밤을 꼬박 새며 씨름한 결과물이 잘못될까 두려워 손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98, 99, 100퍼센트. 저장 완료를 알리는 알림창이 뜨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감과 피로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도망가려는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자정에 영상이 올라가도록 예약 설정을 마치면 정말로 끝이다.
   유튜브에서 요리 채널을 운영한 지 어언 1년하고도 반. 대학 졸업 때까지만 해도 이 일이 내 생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취업난은 그저 남의 얘기인줄로만 알았건만 지원하는 회사마다 어째 줄줄이 낙방하고, 도망치듯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게 2년 전의 이야기다. 오랜 취업 준비생활 끝에 얻은 스트레스성 위염과 곤두박질친 자존감을 회복해보고자 급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타국생활은 예상보다는 할 만했다. 가난한 이방인이었지만 할인 마트에서 장을 본 재료들로 ‘과하게’ 잘해 먹은 덕택에, 귀국할 즈음에는 위도 깨끗이 나았고 손맛도 제법 그럴듯해졌더랬다. 동화에서 현실로 걸어나와 다시금 어떻게 이 연약한 생을 꾸려나가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독일에서 해 먹은 세끼 사진들을 보다가 얼결에 생각이 들었다. 요리 영상을 한번 만들어보자고.
   ‘이걸 과연 누가 볼까?’ ‘한국은 아직 비건 요리에 관심이 없지 않나?’ 반신반의하면서 올린 비건 요리 영상은 입소문이 나서 이제는 제법 구독자가 많아졌다. 아직도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차며 ‘마, 치아라!’라고 하시지만, 이 일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보람차다(또한 고되다). 채널 V 덕분에 한 끼를 든든히 잘 때웠다’는 자취생들의 댓글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암, 밥을 먹어야지 힘이 나고 말구요. 저도 그 맘 압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요리는 뭘로 할까? 초보 자취생도 금방 해 먹을 수 있는 비건 요리를 해볼까?


C의 시선 지도. 다양한 종류의 곡물을 이용해 단어의 경계를 만들었다. 느슨한 그물같이.

   1인 가구 생활자의 아침. 오늘도 ‘채널 V’를 재생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요리에는 관심이 없지만, 각종 조리법과 재료의 정량을 알려주는 또렷한 목소리와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방에 활기를 불어넣어 좋다. 오늘 저녁에는 오랜만에 지아를 만난다. 나갈 채비를 마친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지아는 등을 구부린 채 상가 벽면에 기대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핼쑥한 얼굴이다. 나는 지아에게 왜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우리는 근처 찌개집으로 들어갔다. 지아는 메뉴판을 한참 보더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은정아, 요즘 나 채식하고 있어.” “어…… 다른 데 갈까?” 우리는 네 군데의 음식점을 돌았지만 채식 메뉴를 파는 곳은 없었다. “어떡하지, 벌써 8시인데.” “……미안해.” 지아의 어깨가 수그러들었다. 땅이라도 파고들 기세다. 저렇게 의기소침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 아니. 괜찮아!” 재빨리 머릿속으로 근처 식당 메뉴를 떠올려봤지만 채식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으니 생각나는 게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 아침에 들었던 ‘채널 V’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초보자도 할 수 있는 비건 요리! 건강하고 맛도 좋아요.’ 유레카. 나는 지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우리집으로 가자! 내가 요리해줄게!”
   ……라고 나는 무얼 믿고 자신 있게 말했을까. 어설픈 칼질에 야채 모양은 엉망이다. 두부는 그나마 으깨면 되니까 다행인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몽땅 볶아버렸지만, 지아는 투정도 없이 잘도 먹는다. 말없이 밥을 먹고 담배를 한 대씩 핀 후 지아를 전철역까지 배웅한다. “고마워. 저녁 맛있었어. 남이 해준 밥은 너무 오랜만이라…… 여튼 고맙다.” 계단 밑의 불빛을 등진 지아의 얼굴이 아까보다 환해 보인다. 말없이 나눠 먹는 밥 한 끼가 어떤 말 한마디보다 위로가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나도 힘들 때 종종 요리나 해먹어 볼까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

   저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노곤해졌던 것도 잠시, 어느새 다시 배가 고파 올 즈음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근처에 유명한 칼국수집 있다던데, 들어보셨어요?” 다들 자신이 알고 있는 식당을 추천하며 화기애애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먹는 즐거움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어요.” _김비행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상투적인 질문이 오늘따라 든든하게 느껴진다.



키-ㅌ

‘키-ㅌ’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이 기술을 도구로 문학을 재해석하기 위해 모인 팀이다. 무언가를 조립해서 만들 수 있도록 부품을 모아놓은 세트인 ‘kit’에서 착안하여, ‘키-ㅌ’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