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결, 결의 시간
4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엄마 일기
신혼집은 볕이 잘 들었다. 재건축을 앞둔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 서면 낮은 아파트 사이로 하늘이 보였고, 키 큰 나무들이 우리의 보금자리를 감싸고 있었다. 결이는 그곳에서 7개월을 살았다. 더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재건축이 시작되어 전세 기간 2년만 채우고 떠나야 했다.
집을 알아보던 시기에 과천은 세 개 단지의 재건축이 동시에 시행되고 있었다. 과천에서 집을 구하는 것보다 하늘의 별을 따는 게 더 쉬워 보일 정도였다. 친구들은 하나둘 떠났고, 과천에서 버티기로 결정한 이들은 반지하 집이나 부모와 함께 사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반지하 집을 구했다. 다세대주택 단지에 들어오니 신혼집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짙은 회색 골목,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아주 잠시만 들어오는 빛, 누군가의 걸음걸이와 맞닿는 시선 등…… 적응이 쉽지 않았다.
시간의 결
- 1집
나성훈(아빠) : 우리가 어릴 적 살아온 집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
장은혜(엄마) : 나는 이사를 많이 다녔어. 아빠가 군인이었으니까. 군인 아파트에서는 문 잠그고 산 기억이 없어. PX가 있어서 좋았고 군인 가족만 갈 수 있는 목욕탕, 미용실, 식당도 있었어. 군인 아파트는 18평 정도로 크기가 비슷하거든. 직급이 낮으면 15평일 때도 있어. 아빠가 양양에서 근무할 땐 넓은 집에 살았어. 집 앞에 뜰이 있고 뒤편에는 창고도 있는 그런 집. 지금 생각하면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는데 단독 주택이고 경비도 잘 되어 있어서 좋았어. 과천에는 아빠가 전역할 무렵에 왔어.
나성훈 : 나는 어릴 때 목포에서 살았고 안양 와서 삼덕빌라라는 곳에 살았어. 그곳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4층짜리 빌라였는데 서로 다 알고 지냈어. 그러다 두번째 살았던 집이 반지하였고, 그곳에서 한번 더 이사 간 집에서 꽤 오래 살았어. 추운 곳이었어. 아빠가 돌아가셔서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돈이 없어서 보일러를 틀지 못했어. 냉골에서 산 거지. 뜨거운 물도 안 나오고, 압류도 들어오고…… 힘든 시기였어. 나는 집이 아늑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채 자랐어.
- 2집
나성훈 : 결혼하고 주공 아파트 6단지에 살 때는 어땠어?
장은혜 : 첫인상은 좋지 않았어. 화장실이 작고, 파란색 시트지가 잔뜩 붙어 있었고, 창틀도 낡았었잖아. 베란다 천장에서는 페인트 가루 떨어지고. 집 안 곳곳에 손이 많이 갔지. 하지만 꾸미기 나름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정도 쌓였어. 주변 환경이 한몫했지. 숲이 우거져 있고, 텃밭 가는 길도 가까웠으니까.
나성훈 : 그걸 차경이라고 하나? 주변 경치를 빌려 오니까 집 크기는 작아도 확장 되는 느낌이었어.
장은혜 : 둘이 지내기에 좁은 공간은 아니었어. 작은방에서는 작업할 수 있는 환경도 되었지.
나성훈 : 안정감을 많이 느꼈어.
나성훈 : 다음 집이 부림동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
장은혜 : 나도 생소했어. 지금 생각하면 결이 7개월 때 집 알아보러 다녔는데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한창 전세난이라 매물 나면 무조건 보러 가야 해서 결이 옷도 잘 안 벗겨 놨던 것 같아. 이 집은 조건이 나쁘지 않아서 결정했는데 초반에 너무 힘들었지. 냄새 나고, 소음에, 빛도 잘 안 들어오고, 골목 분위기도 싫고…… 동네에 들어선 순간 회색 이미지가 강했어. 주공 아파트 6단지는 겨울에도 푸릇푸릇했는데 말이야. 둘째 임신해서 입덧할 때는 냄새 때문에 힘들었고. 건물주나 이웃이라도 좋으면 모르겠는데 그마저도 별로였지.
나성훈 : 다른 선택지도 없었지. 나는 동네가 나쁘게 보이지 않았는데 살다 보니 점점 인상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
- 3집
나성훈 : 앞으로는 어떤 곳에 살고 싶어?
장은혜 : 우선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근처에 많이 살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같이 키우고.
나성훈 : 나는 무엇보다 화장실이 좋은 곳에 살고 싶어. 화장실이 불편하면 만사가 다 힘들어. 소음도 없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능하면 아무도 안 만나고 싶어. 이웃이 없었으면 좋겠어. 정말 친해서 더이상 소개가 필요 없는 사이면 모르겠는데 예의 갖춰야 하거나 볼 때마다 인사하는 사이도 싫어.
장은혜 : 나에게 집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사진 작업과 글쓰기에 편한 공간으로 구획하고 싶어. 개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아파트에 대한 미련이 크지는 않아. 아파트가 편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기울어가는 한옥집 고쳐서 사는 게 더 끌려. 불편해도 내 삶을 규격화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나성훈 :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어. 삶의 질이 떨어질 게 뻔하고 불편하고 힘들 것 같아.
장은혜 : 안 힘들다니까.
우리의 1호집. 과천 주공 6단지.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의 1호집. 과천 주공 6단지. 그곳의 결.
- 고향집
나성훈 : 결에게 과천은 어떤 의미일까?
장은혜 : 본적지.
나성훈 : 고향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장은혜 : 고향은 없어졌어. 재건축으로 사라졌으니까.
나성훈 : 과천이 결이에게 좋은 고향일지 모르겠다.
장은혜 :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겠지. 우리가 ‘너 여기서 태어났잖아’ 하고 말해주는 정도?
나성훈 : 그런 건 참 슬픈 것 같아. 어린 시절 풍경이 다른 도시 아이들과 비슷할 테니까.
장은혜 : 요즘에는 중소 도시만 해도 다 비슷하니까.
나성훈 : 대대적인 전환을 하면 좋겠어. 재건축한다고 브랜드 아파트 무작정 지어버리는 게 제일 좋은 것처럼 선전하지만 그건 결국 다 똑같아지는 거잖아. 획일적이지 않게 도시 설계를 하는 방식이 자본주의적으로도 더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 기억 속의 그 집
나성훈 : 결이는 과천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까?
장은혜 : 글쎄, 우리가 어디 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과천이나 안양 등 이곳 언저리에 살지 않을까?
나성훈 : 사실 나는 좀 지쳤어. 집값 때문에 주거 불안이 크니까. 좋은 기억이 남아 있어서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긴 하지만, 이곳보다 집값이 싼 지역에 가면 더 넓은 집에 안정적인 환경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
장은혜 : 한 집에서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10년만 살아도 불안이 덜 할 거 아니야. 2년마다 이사해야 하면 적응 기간도 3, 4개월 정도 필요하니까, 한 집에 사는 기간이 실질적으로는 20개월 밖에 안 되는 것 같아.
나성훈 : 그렇지. 우리나 아이나 한 공간에 대해 연속하는 기억이 없는 거잖아.
장은혜 : 안타까워.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된다면 그곳은 과연 어디여야 할까 고민도 되고.
결의 시간
우리의 1호집. 과천 주공 6단지. 이제는 흔적조차 추억이 된 곳.
우리의 2호집. 과천 부림동 다세대주택 B1호. 빛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
우리가 바라는 3호집. 나무와 풀이 가득한 곳, 아이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곳, 그리고 좋은 이웃이 사는 곳.
엄마의 시간
반지하 집에서 남편과 나는 우리가 ‘꿈꾸는 집’에 대해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아이가 둘이 되니 크기는 24~25평 정도 되었으면 좋겠다, 녹지가 많아야 한다, 친구들이 근처에 살고 자녀들이 우리 아이와 함께 자랄 수 있어야 한다 등.
가을에는 또다시 집을 구해야 한다. 부디 ‘즐거운 나의 집’이라 외칠 만한 집이 구해지길 기도하고 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 특별한 집
나는 결혼하고 나서 아파트가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아이가 생기니까 안정된 환경이 필요하잖아. 소음 덜하고 화장실 편하고 주변에 위협되는 요건들이 적은 상황. 내가 볼 때는 아파트 밖에 없거든.
육아 기간에 주거 부분은 특별 지원을 해주면 좋겠어. 저출산 시대라고 말하면서도 육아기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 없어.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단 한 번이라도 최대 1억이나 전세자금 절반을 국가에서 지원해주면 결혼생활을 더 쉽게 시작할 수 있고 돈 모을 여지도 생기니까. 만약에 첫애를 낳고 지원을 받았다면 둘째를 낳을까 생각도 할 수 있겠지.
우리가 어느 집에 살게 되든 그곳이 특징 있는 동네이길 바라기도 해. 우리가 기존의 과천을 숲의 도시라고 기억하듯이, 앞으로의 과천도 특색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사진글방
장은혜는 사진 찍고, 나성훈은 글 씁니다. 사진과 글을 도구로 세상의 작은 것들을 정성스럽게 담아냅니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