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아이에게는 체육 시간이 제일 힘들다. 선생님의 시범 동작을 따라 하는 것도 물론 민망하지만, 수업 시작 전이 고역이다. 밖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한껏 들뜬 아이들 때문에 운동장이 한바탕 수선스러워진다. 자기들끼리 장난치고 뛰어다니다가 혼자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비웃거나 동정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오늘도 어깨가 움츠러든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는 걸 보면 엄마 아빠는 좋은 사람이 분명하지만, 내가 낯을 많이 가린다며 날 자주 애 취급하곤 한다.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날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엄마 아빠는 어김없이 친구 사귀는 법에 대한 연설을 늘어놓는다.
  “짝꿍한테 슬쩍 마이쮸를 주면서 이름을 물어보는 게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지.”
  “필통이 예쁘다고 칭찬해줘봐. 적당히 호들갑 떨면서 말하는 게 핵심이야.”
  1학년 때부터 들어온 것들이라 새롭진 않지만, 아무리 들어도 도통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결국 제대로 해낸 건 없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고학년이다. 더이상 사교성 좋은 친구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자기들의 초등학생 시절 추억을 앞다투어 말하는 엄마 아빠 앞에서 숟가락을 꼭 쥐며 ‘마이쮸 작전’을 실행해보기로 다짐했다.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이쮸가 녹아서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손에 꼭 쥔 채 교실로 갔지만, 짝꿍이 먼저 활짝 웃으며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른 계획도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는데 딱 하나, ‘같이 하교할 친구 만들기’는 성공했다.
  “유주아! 혼자 뭐해!”
  아이들 무리에서 승연이가 머리 위로 손을 높이 흔들었다. 승연이 친구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잘못한 게 없어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볼 때면 꼭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민망한 탓에 반갑게 아는 체할 수 없어서 엉덩이 옆에서만 손을 살짝 흔들었다. 승연이는 미간에 힘을 주고 내 머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머리 잘랐네? 진짜 잘 어울려!”
  “원래 저렇지 않았어?”
  “그니까. 단발인 줄 알았는데.”
  승연이가 맞았다. 원래는 어깨에서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더 길었는데 주말에 엄마 아빠가 쇼핑하는 동안 심심해서 어깨선에 딱 맞춰서 잘랐다. 알아봐준 건 고맙지만 덕분에 다들 내 머리에 관심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귀찮게 매일 아침 감지 말고 이틀에 한 번만 감을걸. 씁쓸한 마음에 급하게 뒤도는데,
  “아!”
  발을 떼다가 삐쭉 솟아 있는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모랫바닥이라 넘어져도 별로 아프진 않았을 테지만 소리를 내는 바람에 아이들의 주의를 끌게 된 게 문제였다. 빨리 자리를 피하려고 후다닥 벤치로 향했다.
  “주아야! 괜찮아?”
  승연이가 어느새 내 앞으로 와서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쑥스러워서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얼떨결에 왼쪽 턱에 있는 점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 어……”
  “다행이다, 후, 나,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
  “어떤 거?”
  “따라와봐.”
  승연이가 대뜸 내 손을 낚아챘다.
  두근두근―
  ‘심장은 원래 왼쪽 가슴에 있는 건데……’
  심장이 손으로 이동한 듯 손에서 심장이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둔감한 승연이는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 곧 수업 시작해!”
  “괜찮아. 오래 안 걸려.”
  승연이는 우리 반에서 달리기가 제일 빠르다. 내가 뛰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느낌이 이상했다.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단숨에 운동장 옆에 있는 풀숲에 도착했다.
  “하, 여기야?”
  “이거 봐!”
  승연이가 해맑게 웃으며 손가락을 쭉 뻗었다. 승연이의 검지 끝이 가리키는 곳을 눈으로 따라갔다. 불그스름한 갈색빛이 감도는 조그마한 무언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꿈틀거렸다.
  “지렁이……?”
  고개를 쭉 빼고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미세하게 가는 줄이 새겨진 기다란 몸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껏 봐온 지렁이들보다 훨씬 더 윤기가 났다.
  “자리에서 빙빙 돌아.”
  “그러게.”
  “계속 돌고 싶은 거 아닐까?”
  “아니야. 아주 빠르게 돌고 있잖아.”
  지렁이는 자기 꼬리를 좇아 작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이 만든 궤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부리나케 뛰어서 땅바닥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왔다. 승연이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직― 직―
  지렁이가 만든, 깊게 파인 동그라미 옆으로 땅을 파서 길을 터주었다. 지렁이는 나뭇가지로 만든 짧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담차게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풀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장난스레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우쭐대자, 승연이가 연신 손뼉을 쳐주었다.
  “지렁이 천재, 유 천재! 유주아!”
  반짝―
  그때, 승연이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가 빛나고 곧이어 풀숲 밖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 입을 쭉 빼고 나뭇가지를 땅에 내려놓았다.
  “얘들아, 전부 운동장으로 모이자!”
  때마침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주아야, 갑자기 왜?”
  “……”
  “무슨 일인데?”
  “아니야.”
  아닌 게 아니다. 승연이는 인기가 아주 많다. 남자애들은 승연이한테 장난치고 싶어하고 여자애들은 승연이와 같이 급식을 먹고 싶어한다. 지금은 다른 여자애들을 제치고 승연이의 베프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어제는 승연이가 나를 팽개치고 같이 다니는 여자애들 셋과 문방구에 가서 우정 반지를 맞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승연이가 당장 반지를 빼서 땅에 묻어버렸으면 좋겠다.
  ‘나랑은 토끼풀 반지도 같이 만든 적 없으면서.’
  오늘 수업에서는 아이들의 요구로 축구를 하게 되었다. 승연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패스를 주고받았다. 나는 공을 피해서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승연이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골!”
  승연이가 마침내 골을 넣었다. 승연이는 나랑 같은 팀도 아니면서 내게로 뛰어와서 나를 끌어안으며 방방 뛰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지만, 필사적으로 웃지 않았다. 내가 웃든 말든 신경도 안 쓰이는지 승연이는 신나서 다시 운동장 중앙으로 향했다.
  “짜증나.”

짜증나도 너무 오래 짜증나 있을 수는 없다. 승연이한테는 왠지 그럴 수 없다. 결국 또 승연이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학교가 끝났다.
  “윤승연, 오늘 같이 빙수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승연이 짝꿍이 승연이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발을 굴렀다.
  ‘애도 아니고 맨날 찡찡대.’
  늘 승연이 옆에 딱 붙어 있으려고 하는 승연이 짝꿍이 거슬려서 째려보는데 김우진이 신발장으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김우진이랑 나는 이번 달부터 새로 짝꿍이 되었는데 행동이 굼떠서 답답할 때가 많다. 저번 수학 수행평가에서 내가 마지막 문제를 풀지 못한 것도 김우진이 수행평가지를 천천히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안 감는 건지 유난히 반질거리는 머리통이 오늘따라 거슬린다. 김우진은 다른 사람들이 남의 머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거야?
  “야, 너 머리 안 감지?”
  “너보다 자주 감아.”
  나의 공연한 시비에 김우진은 익숙하다는 듯 대충 대꾸하고는 미적거리며 신발을 갈아 신었다.
  “팔에 뭘 묻히고 다니냐.”
  김우진의 팔꿈치 아래쪽에 언뜻 갈색빛이 돌았다. 미술 시간에 물감을 묻힌 것이 뻔했다.
  “응, 안 물어봤어.”
  김우진이 쌩하고 뒤돌았다. 아니, 느림보 김우진은 새애애애앵 하고 뒤돌았다. 김우진의 싱거운 반응과 여유로운 태도에 약이 올랐다.
  “어제 반지 맞추고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었잖아. 다음주에 가자.”
  멀리서 승연이가 자기 짝꿍을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짝꿍이 아기도 아닌데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야, 김우진! 너 신발 끈 제대로 묶고 다니라고! 몇 번을 말해!”
  시끌벅적하던 복도가 조용해졌다. 나도 모르게 너무 크게 소리를 질러버리고 만 것이다.
  “너나 똑바로 묶어. 바보냐.”
  김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고는 태평하게 다시 걸어갔다. 고개를 숙여 발을 보니 왼쪽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여전히 주위는 고요했다.
  ‘아씨…… 진짜 쪽팔려.’
  볼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봐도 얼굴이 빨개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의 관심을 또 끌어버리다니. 이제 신발 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양손으로 살짝 짧아진 머리카락을 붙잡고 재빨리 볼을 가렸다.
  “주아야, 괜찮아?”
  다친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른 것뿐인데 괜찮은지는 왜 물어보는 거야? 걱정 어린 승연이의 눈을 보니 괜스레 화가 났다.
  “왜 자꾸 걱정해?”
  “그게 무슨……”
  “짜증나게 하냐구, 왜!”
  가방을 고쳐 매고는 승연이를 휙 지나쳐서 곧장 교문으로 향했다.
  “주아야!”
  “……”
  “유주아!”
  “……”
  “왜 그러는 건데!”
  한참을 걷다가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추었다. 승연이의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승연이가 나한테 소리를 지르다니……’
  물론 내가 먼저 신경질 부려서 그런 거라는 건 알지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승연이가 야속했다. 승연이는 그새 내 앞으로 와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주아야, 내가 뭐 잘못했어?”
  “……네가, 그러니까, 너는……”
  조금 화가 난 듯한 승연이의 표정을 보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우물쭈물하자 승연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 쉬었다. 반지가 다시 반짝였다. 순간 서러움이 목구멍을 타고 아주 빠르게, 승연이가 달리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북받쳐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서러움은 금세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울컥하는 힘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나랑은 반지 안 해?”
  “……어?”
  코끝이 찡하고 울렸다.
  “왜 나랑은 반지 안 하냐고!”
  “그건 그냥 애들이……”
  눈물이 오른쪽 볼 위로 흘러내렸다.
  “나도 너랑 반지 하고 싶단 말이야!”
  하교하는 아이들 틈에 우뚝 서서 엉엉 울었다. 엄마 아빠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우는 건 유치원 발표회 날에 사자 분장을 하고 춤췄을 때 말고는 처음이다. 얼굴이 온통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나서도 한참을 더 울다가 왼쪽 코가 막히고 잠시 후에 오른쪽 코가 마저 막힌 뒤에야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콧물은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이렇게 울고 나니 한결 개운해졌다.
  한 발짝 앞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승연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승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투정을 부린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대뜸 사과해버렸다.
  “뭐가?”
  “……소리 지른 거랑, 아까……”
  질투해서 미안하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웠다. 승연이는 퉁퉁 부었을 내 두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손을 와락 잡고 나를 다시 풀숲으로 이끌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승연이라서 겁이 나진 않았다.
  풀숲에 도착하고, 나는 승연이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승연이가 잠시 가쁜 숨을 돌리고 말했다.
  “있잖아.”
  “응?”
  목에서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승연이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켜가며 침묵을 견뎠다.
  “내가 네 점을 먹어도 될까?”

*

점? 내 코와 팔과 등에 있는 것과 같은 쪼끄맣고 검은 점을 먹는다는 말인가? 점은 물티슈가 다 마를 때까지 비비고 샤워할 때 박박 문질러도 안 지워지는 건데 어떻게 먹는다는 거지?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자세히 물어보는 건 멋이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놀란 입이 벌어지지 않게 입술에 힘을 주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는 승연이가 나를 기다려주었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면 뭐라고 되물어야 할까.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무슨 점?”
  길게 얘기하면 목소리가 떨릴 수도 있으므로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물었다. 승연이의 입가에 미세하게 미소가 걸리고 눈가에 애굣살이 부풀어올랐다.
  “네가 주고 싶은 점.”
  후…… 늘 이런 식이다. 처음 만난 날부터 느닷없이 자기 이름을 맞춰보라고 하질 않나. 승연이는 틈만 나면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네 점을 먹으면 나한테 같은 위치에 점이 생겨.”
  “……”
  “네가 골라줘. 어디에 만들어주고 싶어?”
  점을 먹고, 점이 생긴다니. 이런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봤다. 하지만 승연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 장난칠 때면 몰라도 지금은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해가 잘 안 가고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제 어떤 점을 줄지 고민할 차례이다.
  나는 점이 아주 많다. 몸에 있는 점을 볼펜으로 다 이으면 용이나 호랑이가 그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다른 사람들보다 점이 많은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보다. 승연이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점을 찾아주려고. 보기를 늘리려고.
  승연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색연필로 마구 칠한 듯 진한 눈썹과 자세히 보면 살짝 울퉁불퉁한 코가 보였다. 얼굴에 있는 점은 오직 왼쪽 턱에 있는 점 하나뿐이었다. 그 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승연이의 눈을 마주치기 부끄러울 때마다 보던 점이 설마 다른 애가 준 점이었던 걸까? 조금 샘이 나서 그 점을 노려보았다.
  “이건 누구 점이야?”
  “엄마 점.”
  “너희 엄마 돌아가셨잖아.”
  “엄마가 죽기 직전에 줬어. 점을 먹으면 점 주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거든.”
  “어땠어?”
  “그냥…… 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어.”
  안쓰러운 와중에도 그 점이 내 또래 아이가 준 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스스로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미안해.”
  “뭐가?”
  “안심해서……”
  승연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점을 빨리 주어야겠다. 비장하게 승연이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마, 코, 인중, 오른쪽 턱까지 개학 날 앉을 자리를 고르듯 신중하게 관찰했다.
  “사인펜 가져와서 찍어봐도 돼?”
  “안 돼.”
  “왜?”
  “당연히 안 되지.”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어디에 점이 생기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나는 내 코에 있는 점을 가장 좋아한다. 그 덕에 조금 새침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른쪽 볼에 난 점이 좋다. 마침 승연이는 웃을 때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인다. 그렇다면…… 결정했다!
  “내 볼에 있는 점을 줄게!”
  승연이가 활짝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눈 감아봐.”
  승연이가 내 눈두덩이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심장이 눈꺼풀 위로 옮겨간 듯 두 눈이 두근두근 뛰었다.
  쪽―

주변의 움직임이 한순간에 멈추는 것 같았다. 아닌가? 아주 빠르게 지나간 거였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만 들렸다.
  “승연아, 거기서 뭐 해!”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승연이 짝꿍이 자기 친구들과 함께 손을 흔들며 이쪽을 향해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승연이 짝꿍이 지금껏 수도 없이 그래왔듯 또 내 세상을 침범했다.
  “어, 어어!”
  “왜?”
  “점, 점을……”
  “점을 뭐?”
  “……떨어뜨렸어.”
  우리는 당황해서 서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등장한 승연이 짝꿍 때문에 승연이가 입술로 물고 있던 점이 떨어진 것이다. 돌처럼 굳은 승연이 뒤로 다가오는 짝꿍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쟤는 진짜 끝까지……’
  괘씸해서 이제 더는 봐줄 수가 없다.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나는 승연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고 승연이 짝꿍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승연이 지금 나랑 놀잖아! 안 보여? 오늘은 나랑 놀기로 한 날이라고!”
  풀숲을 넘어 운동장까지 아까 신발장에서와 같은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짝꿍은 멈칫하더니 곧 나를 째려보고는 구시렁거리며 자기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안 봐도 자기들끼리 빙수를 먹으며 내 뒷담화를 할 게 뻔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빨리 점을 찾아야 한다.
  “점이 딱딱해?”
  “주아야, 너 방금…… 아니, 말랑말랑해.”
  “버블티에 들어 있는 그, 타피오카 펄처럼?”
  “응, 그거처럼.”
  “그럼 아마 멀리 굴러가진 않았을 거야. 이 주변에 있을 텐데……”
  승연이는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내가 점을 찾아야 한다. 가방을 벗어 던지고 풀숲을 샅샅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돌멩이 사이사이를 살펴보고 나뭇잎 하나하나를 다 들춰봐도 점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 진짜 어디 갔지?”
  나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올리는 습관이 있다. 답답한 마음에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려 한 움큼 잡으려는데,
  “주아야! 찾았어!”
  찾았다고? 승연이가 있는 곳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승연이는 가만히 앉아서 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승연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슴푸레하게 반질반질한 것이 보였다.
  “이건…… 지렁이잖아.”
  아까처럼 지렁이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유달리 매끈한 몸통을 보니 아까 그 지렁이가 틀림없었다.
  “중심을 봐봐.”
  두 눈에 힘을 주고 지렁이가 만드는 원 가운데를 쳐다보았다.
  “우와!”
  그곳에 점이 있었다. 승연이가 손을 뻗어 점을 집어내자, 지렁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유유히 사라졌다.
  고맙지만 어리둥절했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체육 시간에 아이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은 것부터 방금 지렁이가 점을 찾아준 것까지…… 평생 일어날 신기한 일이 오늘 다 몰아서 일어난 것 같다.
  “신기하다, 진짜……”
  “너도 신기해.”
  승연이의 말에 웃음이 났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곧 승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점을 반대쪽 손바닥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건해 보였다. 나는 긴장되어서 허리를 쭉 펴고 두 손을 허벅지에 딱 붙였다. 승연이는 엉덩이에 나뭇잎을 잔뜩 붙인 채로 쫙 핀 손바닥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헙……”
  손바닥에 있는 점을 입에 훅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궁금해져서 왼쪽 눈만 조심스레 떴다. 작게 뜬 눈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승연이는 가만히 서서 입을 오물오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아주 작은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는 듯했다.
  “젤리처럼 씹어서 먹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이러면 맛을 더 오래 느낄 수 있거든. 천천히 녹여 먹는 거야.”
  “무슨 맛인데?”
  “귤 맛. 점마다 맛이 다르네. 엄마 점은 포도 맛이었는데.”
  “끈적끈적해?”
  “아니, 미끈미끈해.”
  “안이 텅 비어 있어, 아니면 꽉 차 있어?”
  “꽉 차 있어.”
  꿀꺽―
  승연이의 입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느낌이야? 이상해?”
  “그냥, 점이 온몸을 다 도는 느낌?”
  내 점이 승연이의 피를 타고 온몸을 여행 중인 걸까? 승연이의 오른쪽 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오오!”
  솜털을 비집고 점이 올라왔다. 점은 서서히 진해지더니 어느새 내 볼에 있던 것처럼 진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서 얼굴을 살펴보았다. 내 볼은 원래부터 점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고개를 들어 다시 승연이를 보았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 위로 생긴 보조개 사이에 점이 있었다. 살짝 들어간 자리에 돌처럼 콕 박혀 있는 작은 점 덕분에 웃음이 더 예뻐 보였다. 점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무슨 기분이야?”
  “네가 느끼는 기분.”
  심장이 온몸에서 두근거렸다. 내 일상에 새로운 리듬이 생긴 것 같았다.

“아빠, 나 오늘 빨리 가야 돼. 이따 저녁에 보자. 안녕!”
  “주아야, 밥은 먹고 가야……”
  쿵―
  아침밥을 강박적으로 챙기는 아빠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승연이와 학교에 일찍 가서 다시 지렁이를 찾아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소란스러운 하루였지만 화목한 가정답게 어제도 평소처럼 엄마 아빠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아빠가 반찬을 집다 말고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들킨 건가, 싶어서 조금 긴장했는데 엄마가 ‘뭘, 평소랑 똑같구만.’ 하고 대충 넘겨서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한테 점이 있든 없든 엄마 아빠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았다.
  기쁜 마음으로 교실로 들어섰다. 승연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교실에는 나 빼고 두세 명 정도가 더 있을 뿐이었다. 조용한 교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가방을 메고 문 앞에 서서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책상도, 의자도, 칠판도, 창문도 어제와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어!”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엄마 아빠도 내 점에 그다지 관심 갖지 않는데 반 애들이 과연 내 점에 신경 쓸까? 전혀. 내 머리카락이 긴지 짧은지도 모르는 애들이 점이 생기고 없어지는 걸 눈치챌 리 없다. 그렇다면…… 나는 곧장 사물함으로 달려가 주황색 사인펜을 꺼냈다.
  ‘친구 없는 것도 뭐 나쁘지 않네.’
  나의 점이 있던 곳, 승연이의 점이 있는 곳. 거울이 없어도 단번에 찾을 수 있다. 사인펜 뚜껑을 뽕 따서 텅 빈 오른쪽 볼 위에 점을 콕 찍었다.
  “유주아, 뭐하냐.”
  어느새 교실로 들어온 김우진이 눈을 껌뻑이며 나를 쳐다봤다.
  “……점 찍었는데? 승연이랑…… 똑같이.”
  “……”
  “뭘, 뭘 봐.”
  조금 민망해져서 자존심 상하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김우진이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향했다. 곧이어 꾸물대며 가방 지퍼를 열더니 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김우진이 짧게 뜯은 스카치테이프를 내밀었다.
  “자가 아니라 테이프잖아.”
  “재미없다, 유주아.”
  “이걸 왜 주는 거야?”
  “점 위에 붙이라고. 그냥 놔두면 지워지잖아.”
  김우진이 테이프를 내 손가락 위에 올려주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하다니 오늘은 조금 잘 해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점 위에 테이프를 붙였다.
  “유주아!”
  승연이가 교실 문 앞에서 나를 보며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 흔들었다.
  “어? 너, 점!”
  “맞아!”
  승연이는 역시 나의 점을 바로 알아챘다. 승연이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처음 스마트폰이 생겼을 때보다 신나고, 좋아하는 아이돌이 컴백했을 때보다 설레고,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할 때보다 두근거렸다.
  좁은 교실에서 우리는 단 몇 발자국 만에 서로의 앞에 섰다.
  “몽글몽글.”
  승연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맞아.”
  내 마음은 몽글몽글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명의 어린이 '유주'와 '승연'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최해솔

1999년에 태어났습니다. 2023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제 인생 첫 청탁입니다.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열심히 썼습니다.
세상 모든 주아와 승연이와 우진이와 거슬리는 승연이의 짝꿍까지 응원합니다. 주아와 승연이의 세상이 모두의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주아처럼 점이 많은 사람인데, 얼굴에 있는 점을 누구 주지도 못하고 열 개 넘게 뺀 게 요즘 들어 부쩍 아쉽네요. 여러분은 점 뺄 때 신중하시길……

2024/05/15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