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의 온도
2화 21도, 위계의 수호자들
이곳에서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와 공간으로 스며듭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고 모두가 듣습니다. 김대리가 말한 대로 혼잣말일 수도 있겠죠. 혼잣말은 ‘알아차림의 언어’라고도 불리니까요. 박주임은 이따금 텅 빈 벽에서 팀장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야, 이거 진짜 또라이네. 군대는 갔다 왔냐?” 그럴 때면 박주임은 관등 성명 붙이듯 고향과 나이, 출신 학교, 그리고 사는 곳과 결혼 여부, 출산 계획을 줄줄이 나열합니다.
“이거 뭐 하는 물건이야? 기상천외하네. 난 신입 때 토하면서 마셨어. 내가 물로 보여?” 이직한 지 한 달 뒤 뒤늦게 입사 환영회가 있던 날, 박주임이 돌고 돌아 온 술잔을 거부하자 팀장은 대뜸 말로 멱살을 잡았습니다. 팀장은 그날 낮에 박주임의 기획안을 돌려주며 안타까운 듯 말했죠. “얜 대체 누가 뽑았냐? 나이는 어디로 처먹은 거야?” 공부와 노동은 고귀한 행위라고 배웠건만 이곳에서는 위계질서, 서열 구도, 패거리 문화와 찰떡같이 붙어다니며 곳곳에서 깽판을 부립니다. 파티션 바깥인 인턴의 자리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넌 옷이 그거밖에 없어? 시집이 취직 아니냐? 그따위면 제대로 취직할 수 있겠어?” 인턴은 보폭을 낮춘 채 다가와 에어컨 온도를 올리고, 박주임은 못 본 척합니다. 팀장이 주창하는 사무실 적정 온도는 21도.
자신이 “관심 사병”이라고 불린다는 걸 박주임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는 군대가 아닌데 어째서 그런 말이 통용되는 건지 생각할 새 없이 박주임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폭언을 퍼붓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곳에 위계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이따금 두더지처럼 제자리에서 일어나 수평적 언어를 읊조린다 해도 사무실에 떠다니는 막말에 의해 음량은 낮아지고 종국에는 메아리도 없이 두들겨 맞게 됩니다. “팀장보다 먼저 가냐? 직장 놀러 다녀? 멍청하면 용감하다더니.” 퇴근길에 사무실을 나서려던 박주임을 불러 앉힌 말은 질서와 연대를 강조합니다. 조직이라는 명분이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1)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대를 구축합니다.
“그 친구 원래는 편집자로 채용됐는데, 난 처음부터 반대했다고. 경력이 이쯤인데 이 정도면 값싸다고 회사에서 들였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을 왜 뽑아, 닭으로 치면 다 죽게 생긴 노계 같은 사람을. 싸고 좋은 게 어디 있나? 노계가 질기긴 또 얼마나 질긴가? 고집이 세서 커뮤니케이션이 안 돼. 아차 싶어 자르자니 좀 있으면 쉰 되는 사람을 어디로 내쳐? 내가 교정직으로 옮기자 했지. 그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니까. 옜다, 너 처박혀서 그거나 해라, 했더니 좋아해. 자기는 그게 편하다고 해. 삼 년을 있어도 조중균씨는 융화가 안 돼. 문제가 많거든,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거든.”2)
이곳에서 조중균씨는 “노계”가 되었습니다. 부장은 연달아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놓으면서도 자신은 시혜를 베풀었다고 강조합니다. 말이 지나간 자리에 모멸감이 싹틉니다.
예린씨는 사무실에서 노골적으로 찬밥 취급을 받았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일을 잘 못한다고 평가되는 것, 그것도 첫 직장에서 일을 잘 못한다고 낙인찍히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상황이 겹쳐 일단 상사가 그런 견해를 갖게 되자, 스스로에 대해 홍성식만큼 자신감이 없던 예린씨는 점점 더, 진짜로 일을 못하게 되었다. 반년 사이에 그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달라졌다. 내성적이지만 때로 굉장히 발랄하게 웃는 해맑은 사람이었는데, 자꾸 눈치만 살폈다. 회의에서도 의견 개진을 못했다. 팀장이 진행 상황을 물어보면 당황하며 대답조차 우물쭈물했다. 그녀는 업무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자신감을 잃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견해를 말하지 못했다.3)
모멸감은 상층을 점유한 자들이 전략적으로 퍼트리는 공기입니다. 탕비실을 다녀온 팀장이 신경질적으로 에어컨 온도를 내립니다. “또 건드리기만 해.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릴 테니까.” 차디찬 공기가 미스트처럼 흩뿌려지며 사방에 스민 말들과 결합합니다. 이 말과 온도를 견디며 가만하게 보내는 나날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박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에어컨으로 다가가 온도를 26도로 맞춥니다. 파티션 안쪽에서 묵힌 말들이 날아옵니다. 박주임은 가만히 서서 적정한 말을 고민합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지만, 곧 말할 겁니다. 말하지 않고 듣지 않을 때 인간은 조직과 질서를 만들어내 위에서 아래로 망치 같은 말을 떨어트리니까요. 자, 그럼 이제. “쟤 왜 저렇게 싸가지 없게 말하는데?”
일단공작단
유재영은 소설을 쓰고, 최고라는 책을 만듭니다. 서로 가장 많은 말을 주고받는 상대입니다. 대개는 다정한 말로 서로에게 온기를 전달하지만, 이따금 차갑거나 뜨거운 말을 던져 파문을 일으킵니다.
2019/09/24
22호
- 1
- 2019년 7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은 ‘사용자 또는 노동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 2
-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동네, 2016, 51쪽.
- 3
- 김세희, 「가만한 나날」, 『가만한 나날』, 민음사, 2019, 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