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4회 몸, 뼈와 피를 담은 가죽 자루라고?
몸, 내 삶의 최전선
정신을 몸의 ‘지적 기능’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몸에 관해서만큼은 가능하다면 유물론자가 되자고 마음먹는 중이다. 몸이 좋았던 시절이 이미 지났다는 얘기다. 살짝 부딪혔을 뿐인데 깨진 접시는 사실 오랫동안 무수히 부딪히면서 시달렸던 거다.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때 와장창 접시를 놓아버린 것. 깨진 후에야 아는 게 접시의 사정뿐이겠나.
몸은 묵묵하기도 하지만 손거스러미 같은 사소한 결함에도 온 신경을 모아 아프다고 느낄 만큼 예민하다. 그날 아침 내 팔은, 정말이지 ‘따꼼’하는 통증에 기습당했다. 밥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3주가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고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난 뒤에야 진정이 됐다. 짐작컨대 그즈음 했던 몇 권의 동시집 필사가 결정타였지 싶다. 이제는 한두 편만 옮겨 적자고 해도 뼈가 퉁퉁거리니 아닌 게 아니라 겁이 난다. 글 쓰는 자에게 팔은 실질적인 행위 주체다. 하긴 받들어 모셔야 하는 게 어디 팔 뿐이랴. 몸의 모든 기관이 곧 내 삶의 최전선이다.
2년 전 여성의 ‘사회역사적 몸’을 알고자 시작한 공부가 현재 내 몸에 도착한 상태다. 그 어디쯤에서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헝거』, 사이행성, 2018)를 만났다. 어린 시절에 몸이 겪은 상처를 자신의 몸을 지우는 방식으로 잊으려고 했다던 그녀의 이야기는 몸을 보는 시각을 교정해주었다. 당신이 보는 내 ‘몸’은 내가 살아낸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현재이고 당신 역시 그렇다. 나와 당신의 몸을 그렇게 보자 뜻밖으로 애틋해지고 처음 보는 당신에게 우정을 느끼는 게 나쁘지 않다.
그러나 청소년소설이 재현하는 ‘몸들’에겐 삶의 동료로서 우정보다 주먹을 꼭 쥔 응원을 보내게 된다. 아이들 몸이 아프고 병든 게 많은 경우 어른 탓인 걸 알기 때문이다.
잘 아픈 몸으로 살았으면
『2미터 그리고 48시간』(유은실, 낮은산, 2018)의 정음은 예닐곱 살 때 자기가 엄마의 혹이라는 말을 듣고 ‘슬펐지만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되었고 이제 열여덟이다. 정음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 치료를 위해 피폭 당한 후 48시간 동안 모두와 2미터 간격을 유지하라는 격리 권고를 받았다. 이 소설이 재현하고 있는 거리와 시간은 타인과의 안전거리인 동시에 정음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정음의 지난 10년을 듣게 되는데 그간의 시간이란 정음이 엄마와 타인을 위해 자신을 지우는 시간이었다. 추론을 통해 묻게 되는 건 강박에 가까운 도덕심 혹은 이타심이 갸륵하기는 하나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은 ‘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타당한가다.(물론 정음의 질병은 보이지 않고 정음 자신도 자기의 질병을 전시하지 않기에 타인은 정음의 사정을 모른다) 나는 정음이 잘 아프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정음은 자기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픈 몸에겐 썩 좋은 생각이 아닌 그것.
‘그레이브스 씨’는 이제 영원히 정음의 몸을 떠나버렸지만 정음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조금 덜 아플지는 몰라도 여전히 아픈 몸이다. 말 한마디에 자기를 지우며 살았던 정음이 타인을 그만 배려하고 자기 몸을 잘 아팠으면 좋겠다. 우리는 종종 마음이 먼저 다치고 다친 마음이 기필코 몸을 허무는 걸 본다. 최악은 몸과 마음이 같이 아픈 것이다. 하지만 몸이 회복되어야 마음이 회복된다는 것, 그래서 정음이 온전히 아픈 자기 몸에 집중하기를 바랄 뿐이다.
몸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기를
청소년의 몸, 더 자세하게는 싸움이라고 할 몸짓, 그 몸에 난 상처, 그들의 표정, 목소리,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욕설이 그들의 ‘말’이라는 걸 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곤의 엄마는 놀이공원에서 아들을 잃어버렸다. 열여덟이 된 곤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던 엄마의 손’ ‘적당히 땀이 밴 촉촉하고 보드라운 손의 촉감’이다. 불법 입양과 보호소와 소년원을 드나드는 동안 온몸이 가시가 되면서도 몸에 새겼기 때문에 그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감정을 담당하는 신체기관이 보통 사람보다 작아 통증이나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의 아주 작은 변화를 다룬 손원평의 『아몬드』(창비, 2017)는 이렇게 곤이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와 타인의 고통을 못 느끼는 윤재와 팔뚝에 난 솜털조차 감정에 반응할 것 같은 곤은 서로의 이면이다. 특별히 나와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몸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가. 더불어 말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고 온몸에 가시가 돋친 몸을 ‘쓰레기’라고 부를 것인가. 신체적 결함과 변형된 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고 이해하는 순간, 저 애처로운 몸은 ‘예쁨의 발견’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걷는 몸, 부디 오래 그러하기를!
신체적 한계나 결함을 이기는 몸의 유능함에 나는 언제나 감동한다. 정은의 『산책을 듣는 시간』(사계절, 2018)은 청각 장애인 수지와 흑백만 간신히 분간할 수 있는 한민의 이야기다. 수지는 청력을 상실했지만(선천적인 줄 알았으나 후천적 질병에 따른 장애였다) 다른 합병 증세나 전이되는 통증이 없고 인공 와우 보청기를 스스로 켰다 끄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청력만 상실한 수지의 장애는 다른 장애에 비해 신체적으로 조금 더 자유롭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겨우 십대 청소년인 수지가 완벽하게 홀로 설 수 있을까.
할머니가 죽고 엄마와 고모가 자기 삶을 찾아 떠나버린 뒤 온전하게 혼자가 된 수지는 ‘산책을 듣는 시간’이라고 이름 붙인 함께 걸어주기를 발명했다. 타인에게는 말을 하게 하고 자신은 함께 걷는 것으로 듣는 새로운 말하기 혹은 듣기의 산책이라는 삶의 방식. 수지는 듣지 못한다는 신체 기관의 무능을 듣지 않음으로 듣는다는 특별한 신체 능력으로 바꿔버렸다. 수지처럼 당신과 나의 몸이 최선을 다해 각자의 삶의 방식을 멋지게 연기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기를! 오래 그러하기를!
김재복
아동문학평론가.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내 몸이 꽤 다양한 몸을 연기해내고 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처럼 내 몸과 그렇게.
2019/06/25
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