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19회 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에게 문학잡지는 ‘접속사’입니다.
‘창작과 비평’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작’하고 ‘비평’만 떼어내어 중요하게 보는데요. 사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있는 ‘과’라고 생각해요. 《창작과비평》은 월간지 시대에서 계간지 시대를 만들었어요. 《창작과비평》 이전에는 잡지 명칭 중에 이런 방식으로 쓰인 게 없었죠. 이후에 《문학과사회》도 생겼고요. 그때의 잡지에 이런 방식의 명명이 통용된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잡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자와 저자를 처음 만나게 하는 장이잖아요.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잡지 ‘안에서’ 창작, 혹은 비평, 혹은 사회나 세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만나게 되니까요. 때문에 만남, 매개를 지시하는 ‘과’가 잡지의 정체성이고, 문학잡지의 현장이라는 생각이에요. 잡지가 어떤 현장이라면 그것은 이 ‘과’에 있는 거죠. 사실 우리말에서 ‘과’는 조사지만 영어의 접속사 ‘and’와 같은 의미도 있으니까 그렇게 볼 수 있어요.
‘접속사’를 보여줄 수 있는 사물이나 장소를 고민해보다가, 콘센트를 떠올려봤어요. 물론 사전을 펼쳐서 ‘접속사’ 항목을 찍어서 올릴 수도 있겠지만. ‘접속’에 대한 실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콘센트가 더 적합할 것 같았어요. 무엇과 다른 무엇을 연결하고, 통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작용이 생겨나게 하는 접속, 그리고 그 접속이 가능한 자리라는 점에서 콘센트인거죠.
《창작과비평》이 생각하는 문학과 사회과학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그 둘은 둘이 아니에요. 좀 전에 현장으로서의 잡지를 이야기할 때와 같은 맥락인데요. 실제 창작과 비평을 합쳐서 문학이라고 했을 때, 문학의 현장이라는 것은 그 둘을 연결하는 행위 안에 있죠.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다른 게 아니고요. 다만 그 둘이 하는 일이 서로 다르긴 하겠죠. 문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각각 분과 학문으로 보면 서로 다른 관심사와 논리와 제도로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창작과비평》에서 어떤 계기마다 써온 말이긴 한데, ‘큰 문학’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계와 현실에 대한 이해, 작품과 인간 내면에 대한 이해. 이 각각이 둘이 아니라 한 덩어리가 될 때 ‘큰 문학’이 가능하죠. 하지만 잡지에서 각각에 관한 이해가 구현될 때나 현실에서 그것이 실현될 때는 분과로 쪼개지는 경향들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실제 현장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니 자연히 그걸 반영하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 작은 문학과 작은 사회과학이 있고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는 큰 문학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기본적으로 문학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을 이해하는 관점이자 태도겠지요. 좋은 문학 작품이 항상 좋은 문학비평이자 사회비평을 겸한다는 건 상식이에요. 그렇다면 창작과 문학비평이나 사회비평 등 비평의 행위들도 사람살이의 어떤 문제와 전망을 탐사한다는 점에서, 즉 문학하는 일의 근본에서는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희는 각 분야의 전문성 내지 깊이는 추구해야 하겠지만, 가급적이면 그 사이의 긴밀도를 높여 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게 바로 ‘창비적 글쓰기’이기도 하겠고요.
《창작과비평》
창간년월: 1966년 1월
발행주기: 계간
백낙청(명예편집인), 한기욱(편집주간), 이남주(편집부주간), 강경석, 백영경, 백지연, 송종원, 황정아(이상 상임편집위원), 김사인, 김영희, 김종엽, 김태우, 김항, 백지운, 유재건, 유희석, 이일영, 이정숙, 이태호, 이필렬, 정주아, 한영인(이상 비상임편집위원), 김윤수, 백영서, 염무웅, 이시영, 임형택, 최원식(이상 편집고문), 이지영, 전성이, 이진혁(이상 계간지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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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