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에 출간된 배수아의 신작 소설집 『뱀과 물』(문학동네, 2017)의 표지는 나로서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표지에는 기름하고 매끈한 나신의 여성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데, 막상 그녀의 얼굴은 어둠에 뭉개진 듯 보이지 않는다. 성적 매혹과 스산한 공포를 동시에 발산하는 이러한 여성의 몸 이미지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배수아의 이름과 나란하게 놓인 것은 어딘가 생경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내게 배수아는 소설의 인물과 서사, 언어에 배어 있는 성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삭제함으로써 글쓰기의 젠더적 문법을 새롭게 실험한 『동물원 킨트』(이가서, 2002)의 작가로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배수아 작가가 처음부터 그런 글쓰기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 결혼제도로의 편입과 독신 사이를 불안하게 서성이는 여성들, 성적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성적 자유주의를 당연하게 실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배수아 또한 들려주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성적 해방을 외치던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가 시작되자 그는 이른바 ‘여성적인’ 목소리를 지우기 시작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공평치 않다. 그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도 아니지만 남성도 아닌 중성적인 글쓰기의 영역으로 향한다. 2002년에 출간된 『동물원 킨트』는 바로 이러한 전회의 중심에 있는 작품이다. 그는 소설 바로 앞에 실린 일종의 창작 노트이자 독자를 위한 일러두기 비슷한 글에서 1인칭 화자의 성별을 미규정 상태로 남겨놓는 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드물게도, 이 글은 분명하게 미리 생각되어진 면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별을 규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소극적인 면으로 본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녀)는 남자도 또한 여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개입한다면, 성 정체성의 의도적인 거세이다. 성별이 결정되지 않으면 주인공의 사회적 입장, 정서적인 상태,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 작가나 독자가 소설을 접할 때 느끼게 되는 무의식적인 동일시, 그런 점들이 방해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는 자의식이 확고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주인공의 전형에서 멀어질 것이다. 결정적으로 말해서 성별이 없는 인간이란, 지금 현재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그(녀)에게 성별을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성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모든 정서의 상태를 부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혹은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 대답은 다음 문장이다. 그 자체로서의 현실과 그 기준이란, 유행이나 다수결 혹은 파티에 초대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금박 글자의 명함처럼, 글을 쓰고 있을 때의 나에게는 가장 무시하고 경멸해야 할 대상이 된다.

    주인공의 성별을 정해놓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도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와 같은 양성적 인간을 창조하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시도하는 것은 인물의 성 정체성을 아예 거세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킨트, 즉 아이다. 킨트는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성별 이분법의 상징계에 편입되지 않는 규정될 수 없고 자유로운 개인의 이름이다. 물론 인물의 성정체성을 소거하는 실험은 위험천만한 작업이다. 작가가 말하고 있다시피 “성별이 결정되지 않으면 주인공의 사회적 입장, 정서적인 상태,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 작가나 독자가 소설을 접할 때 느끼는 무의식적인 동일시, 그런 점들이 방해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것은 “성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모든 정서의 상태를 부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언어에서 성정체성을 탈각시키려는 노력에서 작가가 우려했던 대로 ―아니 그가 기대했던 그대로― 현실적 핍진성을 결여하여 부자연스럽고, 독자의 실감도 공감도 거부하는 낯선 서사가 탄생한다.

   배수아의 이 선언은 한국 문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장면이다. 배수아의 경우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이런 전략은 이후 황정은을 위시하여 여러 한국 소설가들에게서 꽤 오랫동안 지배적으로 작용하였다. 낯선 중성적인 이름과 이니셜에 가려져 성별이 불분명하고 뚜렷한 몸체도 지니지 않은 것만 같은 아이들은 2000년대 한국 문학의 문학적인 것을 이루는 중요한 얼굴이었다. 이것은 소설뿐만 아니라 시도 마찬가지였는데, 황인찬 시인의 말을 빌리면 2000년대 한국 시는 “다성성(多聲性)을 지향하는 동시에 무성성(無性性)을 지향하고, 어른이 아닌 아이의 목소리를 지향” 1)하는 미적 전략을 활용함으로써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즉 무성적이고 탈성화된 문체는 2000년대 한국문학에서 ‘낯설게 하기’―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문학성의 핵심 요소로 규명했던―에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그 당시 여성성과 결부된 시적 자원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미적 판단을 증거해준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 수동적이고 감상적인 여성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전복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여성상조차도 어딘가 낡고 관성적인 기운을 발산하게 되었다. 문학성이란 정답을 비껴가려는 삐딱한 욕망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90년대에 미학적 새로움을 보여주었던 ‘여성성’의 시학은 거꾸로 2000년대의 여성 작가들에게는 피해가거나 뒤집어보고 싶은 정답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작가들이 모색한 길이 배수아의 저 선언처럼 무성적이고 탈성적인 언어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문학 안에서의 이분법적 성별체계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페미니즘적 혹은 퀴어적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동물원 킨트』에서 주인공 ‘나’의 성별이 미결정 상태로 있음으로 하여 ‘나’가 타인들과 맺는 관계 또한 그간의 소위 정상적인 이성애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 독특하고 불온한 색깔이 입혀지기는 한다. 그래서 이 서사는 성별 이분법을 그대로 뒤집어놓거나 살짝만 변주해놓은 숱한 페미니즘적 혹은 퀴어적 서사보다 실험적이고 급진적인 데가 없지 않다. 여성성은 분명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오랫동안 폄하되었기 때문에 재평가되고 긍정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예찬하는 쪽으로 빠지게 되면 여성성은 본질화되어 여성을 다시금 가두는 덫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작가의 젠더 초월적 글쓰기는 외려 해방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배수아가 관습적 성별에 구속되지 않는 말하기를 궁리한 것은 넓게 보면 성 뿐만 아니라 가족, 국적, 계급, 문화적 정체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영역을 어떻게 열어젖힐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수의 언어, 일상의 언어에 영합하지 않는 개인적이고 고립적인 글쓰기의 발명에 있었기에 여성이라는 범주는 기꺼이 포기되고 소거되었다. 이미 여성이란 범주조차도 배수아적 개인에게는 성가시고 폭력적인 족쇄였던 것이다.

   하지만 2015년 한국사회를 뒤흔들어놓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이란 범주는 뿌리 깊은 여성혐오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과 피해의 현실을 최대한 드러내고, 여성의 경험이 갖는 특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인 범주로 다시금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2000년대 문학을 지배했던 무성적 문체는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성별을 소거한 글쓰기가 실은 성차와 이에 따른 차별과 폭력이 엄존하는 현실까지도 소거해버린 것으로 재평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황인찬 시인은 2000년대 시의 무성성의 시학이 성차를 지우는 보수성에 머물러 버린 것은 아닌가 묻는다.2) 실제로 중성적, 무성적 말하기가 이전의 남성적 말하기와 정말로 거리두기에 성공했는지, 일신된 남성적 말하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성적 말하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고 세밀하게 고민하고 상상해야 하는 현재, 여성성을 생물학적 여성의 특징에만 한정 짓거나 근본주의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이분법적인 성별체계를 강화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참조점도 우리에겐 분명히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 탈성화된 시학은 페미니즘 문학사에서 유보적인 역사성을 갖는다. 문학의 형식면에서까지 다른 젠더적 문법을 모색했던 그 시적 상상력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방향으로 문학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지양되어야 할 생산적인 안티테제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경진

독일 문학 및 이론을 연구 · 번역한다. 문학의 윤리적인 것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으며, 문학과 문학성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성에도 관심이 많다. 2016년부터 계간지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 중이고, 번역서로 W. G.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문학동네, 2013)과 아감벤의 『도래하는 공동체』(꾸리에, 2014)가 있다.

2018/03/27
4호

1
김신식 ·이자혜 · 황인찬, 「미지x희지 Vol.1: 쩌는 세계-이자혜 · 황인찬,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인터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가을호, 문학과지성사, 152쪽.
2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