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번째의 죽음.

   10년 동안 그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때는 견실한 노동자였던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김주중씨.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농성 현장에서 집단 폭행당하고 구속된 그는, 이후 경찰로부터 노조원들과 함께 24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시달렸으며 재판은 10년이나 계속되었다. 살아 있다고는 하나, 숨쉬기 버거운 날들이었다. 복직을 기다리며 온갖 궂은일을 마다지 않았다. 낮엔 미장일을 하는가 하면 밤엔 택배 기사가 되는 식이었다. 쉴 틈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웠다. 살인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그는 지난 6월 27일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서른번째 죽음이었다.
   이 죽음을 당신은 자살이라고 부를 텐가. 나는 그의 죽음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의 뼈저린 희망을 본다. 우리의 파업은 정당했으며 세상이 그 고귀한 싸움을 알아줄 것이라는 희망.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회사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 하지만 10년 동안 그 희망은 차츰차츰 절망에 갉아 먹혔다. 차가운 시선과 버거운 굴레를 벗겨주는 희망은 끝내 불 지펴지지 않은 것이다. 그 이전의 스물아홉 싸늘한 목숨들처럼. 그는 죽어가면서도 얼마나 원통하고 안타까웠을까.
   나는 얼마 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날의 파업 현장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처참했다. 마치 오월 광주의 현장이 2009년 8월 5일 평택 쌍용차 공장 옥상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헬기는 저공비행하며 위협하고 끊임없이 발암물질 섞인 최루물을 쏟아부었으며 경찰특공대는 노동자를 경찰봉으로 두들겨 패고 방패로 내리찍었다. 대테러 장비로 분류되는 테이저건과 다목적 발사기까지 동원되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터였다. 김주중씨도 그때 저렇게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경찰들은 테러 진압하듯 강경하게 파업 현장을 분쇄하려 했을까. 최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러한 폭력 진압이 이명박 정권의 의도적인 작전이었다는 점이다. 그때 이미 노사 양측은 물밑 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 의견 조율을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국면 전환의 시범 케이스로 사용하고 싶은 청와대와 기무사, 국정원이 개입하여 마치 불순분자들 토벌하는 것처럼 폭력적인 진압 작전을 펼친 것이다. 기무사와 국정원이 파업 현장에 잠입하여 강행한, ‘이명박에 의한 이명박을 위한 이명박의’ 정치술수였던 셈이다.
   이 정치술수로 인해 수많은 노조원이 범죄자,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농성 직후에는 64명이 구속됐고 수백 명이 사법 처리되었으며 이후 상당수가 잿빛 같은 미래를 견디어야 했다. 어느 해고 노동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자리도 못 구했어요. 빨갱이라고 그 난리를 쳐놨으니. 전국에다가 도배를 했잖아요.”
   나는 그의 이 말에서 김주중씨의 험난했던 삶의 자취를 읽는다. 어디 당사자뿐이랴. 그의 가족들은 또 어땠을까.
   “그때 전단지 돌리러 서울에 가면 사람들이 안 받아요. 사람들이 안 받고 뿌리치고 가는 것, 그게 너무 슬펐어요. 우리 어려운 걸 외면한다고 받아들여졌지요.”
   다른 가족의 말이지만, 김주중씨를 비롯한 쌍용차 피해자 모든 가족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다.
   당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는 사회적 유배나 다름없었다. 당사자와 그 가족이 맺고 있던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었다. 평택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시끄러웠던 싸움이었으므로 오랫동안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 배척되는 생활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스러져간 임무창씨 가족의 비극을 지금도 기억한다. 2010년 4월, 임무창씨의 아내는 남편의 해고 후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엄마를 잃은 충격으로 임무창씨와 두 아이들은 모두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아내 잃은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일까. 임무창씨는 그 열 달 뒤인 2011년 2월에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가 이승에 남긴 것은 통장 잔고 4만원과 카드빚 150만원이었고, 집에는 쌀 한 줌과 라면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때도 세간에서는 이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부르며 안타까워했으나 그뿐이었다. 수많은 죽음들이 잇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2014년 11월 양승태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2심에서 해고무효 판정을 받은 쌍용차 해고를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김주중씨의 모든 희망이 꺾였으므로 나는 이를 사법살인이라고 규정한다. 양승태와 그의 대법관들은 사법농단과 부당한 재판거래를 통해 사법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불법적인 대법원 판결은 파기되어야 하고 아직도 남은 17억 손배청구소는 취하되어야 하며,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사법살인에 대해 응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결자해지의 날.

   8월 18일 ‘결자해지, 쌍용자동차 문제해결을 위한 범국민대회’ 꽁무니를 따라가면서 나는 몹시 서러웠다. 결자해지. 그래, 맞다. 결자해지다. 묶은 자들이 풀어야 한다. 한데 묶인 목숨들은 있지만, 묶은 자들은 없다. 너도나도 발뺌이다. 통탄할 노릇이다. 양승태와 그 일당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민주정부라고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난처하다는 듯 차일피일이다. 박근혜와 양승태의 부당한 재판거래로 쌍용차 노동자들이 피해 받았으니 나라는 마땅히 이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는가. 대열에선 “정부가 사과하라!”고 외치지만, 정부의 반향은 미진할 것만 같다. 이 정부도 손놓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부쩍 치켜든다. 그래서 선창을 따라 구호는 가팔라지는데도 왠지 눈물겹다. 이제 우리에게 싸움은 없어도 되는 것인가. 촛불 광장 때에 비하면 시민들 참여가 턱없다. 투쟁조끼를 제외하면 나처럼 참여한 시민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물론 나도 진정한 목격자는 아니다. 방관자다. 비겁하게 비켜 서 있었다. 최근 내 안위 바깥의 아픔에 그다지 눈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나를 나는, ‘보통의 나’라고 변명한다. 노동자, 농민 등 기층의 설움과 분노에는 애써 무지한 척하거나 무시해온 나를. 한때는 길거리투쟁에도 적극적이었으나 이젠 좀 쉴 때도 되었다고 스스로 문 닫아 걸었다. 하지만 민주정부라는데 누군가는 길거리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또 누군가는 굴뚝에 오르고 광고탑 농성을 지속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민주정부는 일부에게만 이르러 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내 삶 또한 안정적이지 않다. 언제든 흔들려 내동댕이쳐질 수 있다. 그러니 저이들 삶이 어찌 내 삶 아닐 것인가. 저이들 고통이 내 고통 아니라면, 나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쌍용차 노동자들도 한때는 보통의 삶을 꿈꾸던 나와 너이지 않았는가.
   대열은 길게 늘어나지 않았어도 폭염을 뚫고 가는 손팻말의 움직임은 뜨겁다. 덩달아 나도 갈라진 목을 오랜만에 틔워본다. “해고자 복직!” “명예회복!” 따라 외치면서 다짐한다. 이제는 우리가 살고 싶어서 죽는 삶들을 제대로 품어야 하겠다고. 생각해 보라. 10년 동안 버텨오면서 절규의 죽음 서른 번이 터져나오지 않았는가. 생명을 버려 타오른 삶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서른한번째의 죽음마저 타오른다면 어찌 우리가 얼굴 들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살아 있는 죽음들을 구해내야 한다. 남아 있는 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가신 이의 명예를 되찾아주어야 한다.
   대열이 청와대로 몸을 틀었다. 단결투쟁가가 붉게 붉게 솟구친다. 30년 전에 만든 ‘주먹 쳐든 노동자 이미지’의 붉은 깃발이 여전히 나부낀다. 유물이 되어야 할 것들이 아직도 길바닥에서 동지의 넋을 기리고 있지만, 나는 고맙다. 함께 살자고,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더이상 죽고 싶지 않다고 펄럭이는 것 아닌가. 부끄러움을 떨치고 나도 다시 두 주먹 불끈 쥔다. 씩씩했던 어제가 오늘로 이어진다. 땀을 훔치는 주먹들이 깃발이 되어 나선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완전 복직되고 죽은 이들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펄럭이겠다며 깃발들이 외친다. 사람들아, 보아라. 이렇게 해야 삶이다. 여기가 현장이다.

   마침내 이겼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119명 전원이 복직한다. 2009년 정리해고로 삶이 파탄난지 10년째, 그 지긋지긋한 방황이 끝났다. 마침내 이겼다. 9월 14일 오전 쌍용자동차 노·노·사(쌍용차노조·금속노조 쌍용차지부·쌍용차 사측)는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고자의 60퍼센트는 올해 말까지, 나머지는 내년 상반기까지 복직시키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다행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가신 이들도 기꺼이 박수쳐주고 계시리라. 쌍용자동차 싸움은 이렇게 마감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은 여전히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승리의 귀결이 이들에게도 뜨거운 연대로 가닿을 것이다.


정우영

여기 우리 함께 살기를 꿈꾸는 시인. 시집으로 『활에 기대다』 『살구꽃그림자』 등이 있으며 시평에세이 『시는 벅차다』 등 펴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일했으며 지금은 신동엽학회장을 맡고 있음.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