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이는 입가에 투명하고 커다란 침을 흘리며 잠들었고, 오랜만에 밖에서 마시는 커피는 맛이 좋았다. 바로 옆 벤치에는 서른 전후로 보이는 직장인들이 모여서 김지영 씨와 같은 카페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피곤하고 답답하고 힘든지 알면서도 왠지 부러워 한참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 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 하려고……
   김지영 씨는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왈칵왈칵 쏟으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왔다. 중간에 아이가 깨서 우는데도 모르고 집까지 정신없이 유모차를 밀며 달렸다. 오후 내내 멍했다. 아이에게 데우지도 않은 국을 먹였고, 깜빡 기저귀를 안 채워 옷을 다 버렸고, 세탁기 돌려놓은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원이가 잠든 후에 꾸깃꾸깃해진 빨래들을 널었다. 회식을 하고 12시가 넘어서 들어온 정대현 씨가 붕어빵 봉지를 내려놓고서야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일 밥을 먹지 않았다고 말하자, 정대현 씨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82년생 김지영』, 163~164쪽)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불평등한 사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의 한 장면을 새삼스레 호출한다. ‘82년생 김지영’이 차별의 최전선에 가로놓인 여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책을 읽게 된 나는 유독 저 장면이 오래도록 불편하였다. 소설이라기엔 너무나도 날것에 가까운 저 장면은 맘충으로 인한 피해사례가 온라인상에 우후죽순으로 속출하고, 맘충에 대한 처방으로 등장한 노키즈존이 논란이 되는 현실의 맹점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맘충이 여성혐오의 표현인가 하고 묻는다면 오로지 절반의 긍정만 가능하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맘충이 누군가의 엄마를 가리키는 것은 맞지만 모든 엄마를 가리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든 엄마를 가리켜 맘충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더라도 이를 제지하고 훈육하지 않는 일부 엄마들을 가리켜 맘충이라 부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를 벌레로 폄하하는 용어상의 외양만 따진다면 맘충이 여성혐오적 표현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표현이 지상의 모든 엄마가 아니라 ‘시민의식이 부재하는 일부 엄마’를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맘충을 둘러싼 문제를 여성혐오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사안의 어떤 중요한 측면을 가려버린다.
   그러나 맘충을 비난하는 측도, 맘충에 대한 비난에 저항하는 측도 이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 문제는 엉뚱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논쟁이 확산되면 될수록 맘충이라는 용어는 이를 사용하는 편의 논리에 가깝게 구부러지는 확증편향으로 작용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저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자. ‘맘충 팔자가 상팔자’라는 직장인 남성도,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라고 황망히 넋두리하는 김지영도, 노력에 비해 정당하게 인정받고 보상받지 못하는 각자의 삶에 응어리진 원한을 투사하는 매개로서 맘충을 전유한다. 맘충의 기원이 은폐되고 그 정의가 불명확할수록 이는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만큼 정작 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한이 생성되는 삶의 조건을 들여다보는 시야는 가로막힌다. 김지영을 맘충이라고 부르는 남성도, 맘충이 아니지만 맘충으로 불리는 김지영도 각자가 처한 삶의 고충에 대해 아무런 인과도 성립하지 않는 저 순간을 통해 제 삶의 팍팍함을 배설할 뿐이다.
   이처럼 맘충을 입에 담는 이도, 맘충이 귀에 걸리는 이도 정작 그 단어가 가로지르는 수많은 오해와 이해의 관계 지형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한다. 위 장면의 미덕이라면 그러한 무지와 무반성에 있어 성차는 전혀 무관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 장면은 너무나 불편하고, 또 불편한 만큼 현실을 많이 닮아 있다. 개개인의 삶을 파편화된 형세로 몰아가는 구조적 토대는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이나 이를 인식할 관심은 부재하기 쉬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재를 깨부술 상상력마저 부재할 때, 오로지 표면의 현상에 대한 통계적 사실과 이에 대한 즉물적 감각만이 서사를 점유한다. 요컨대 위 장면은 작가의 의도와 달리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어진’ 상황보다는 ‘운동장’ 자체의 성격에 대해 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장면을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갈등은 기울기가 아닌 운동장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82년생 김지영』에 운동장의 기울기에 대한 통찰이 부재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이 남녀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더라도 성차별의 굴레가 더해져 있는 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 전반의 구조적 제약에 대한 ‘이중 구속’에 처해 있다. 남녀가 공유하는 보편적 삶의 차원에서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어려움을 객관화하여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즉 이중 구속의 실증으로서 이 책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저 이중 구속이 실재한다는 전제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함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 페미니즘이 여성 고유의 어려움에 대한 해방에 앞장서야 함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여성을 비롯한 다른 사회 구성원 전반의 해방을 위한 투쟁까지도 견지해야만 여성은 온전하게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김지영은 자신의 삶을 이러한 이중 구속의 실체로서 인식하기보다는 단지 불가항력적인 것으로서 간신히 살아냄으로써 그 구속력을 무기력하게 재생산할 뿐이다. 이는 애초에 김지영이 한국사회 대다수 여성이 생애주기마다 겪는 부당한 현실 전반을 관통하려는 목적으로 조형된 인물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아가 김지영을 통해 통계적 사실을 일률적으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여성이 실제로 겪는 현실의 부당함이 극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뿐일까.
   친언니 김은영이나 대학 선배 차승연처럼, 김지영의 곁에는 김지영이 겪는 것과 동일한 차별을 겪으며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김지영이 겪는 차별을 대신 고발해주거나 어려움에 처한 김지영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김지영이 처한 차별의 일면을 환기하는 수준에 그칠 뿐, 김지영의 삶에 구체적인 형상으로 새겨지지는 않는다. 김지영의 삶은 이들의 목소리를 깊이 내면화하기보다는 그것에 의지하여 불편부당한 현실을 그대로 통과하기만 할 뿐이다. 김지영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차승연의 목소리를 빌려서야 제 삶을 고발하는 모습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지영은 차승연을, 차승연은 김지영을 매개로 해서만 현실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서로가 서로에게 매개로 기능하는 모습은 여성 연대의 한 가능성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타인의 목소리를 경유하지 않고 스스로를 현실에 직접 매개할 가능성, 이를 통해 자기 삶의 구체적 조건을 구심점 삼아 변화의 계기를 모색할 가능성을 좌절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 차별을 고발하는 목소리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불변하며 버티고 있는 현실의 정중앙에 분열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김지영은 성과인가, 한계인가? 이는 손쉽게 단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김지영이 갖는 성과와 한계는 일종의 제로섬과 같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다분히 여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였을 때 그 한계를 극적으로 고발하는 효과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발이 효과적일수록 여성이라는 한계는 극복되기보다는 다시금 공고해지고 재무장된다. 페미니즘이 문학으로부터 구체적인 운동성을 획득하고 실효를 거두고자 한다면 이를 돌파하기 위한 모색은 필수적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의 불합리한 현실의 조건이 여성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도 동일한 구속력을 갖고 있음을, 여성이란 그러한 사회 전반에 가해진 제약에 대해 이중의 구속에 처해 있음을, 그렇기에 여성의 삶에 주어진 제약을 탈피하려는 노력은 다른 어느 구성원의 노력보다도 현실의 질곡에 강고한 타격을 줄 수 있는 행위임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투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한을 투사하는 매개로만 그치고 있는 우리는, 그러니까 남녀불문하고 우리 모두는 실로 김지영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더는 김지영이지 않은 어떤 곳으로 서로를 이끌어가야 한다.

이은지

문학 고유의 해방적 가치를 찾기 위해 읽고 쓴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