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를 구성하는 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恨국어가 된다. 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恨국에 산다. _『웅크린 말들』 들어가며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의 가문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농자(農者)였다.
   하늘 아래 근본인데 소작농이었다. 흙을 일궈 소출을 내면 지주의 곳간에 쌓고 남은 곡식으로 아버지의 아버지를 먹였다. ‘농자가 천하지대본’인 땅인데 농사짓는 사람을 근본으로 대접한 적 없는 시간들을 이어붙이면 땅의 역사가 됐다. 농자들이 소유해본 적 없는 그 아름다운 문장은 땅이 아니라 하늘의 작문이었다. 땅을 빌어먹는 자가 천하의 근본인 세상이었으니 땅을 빌려준 자들은 천하를 깔고 앉은 천상의 대본(大本)들이었다. ‘없는 세계’를 믿도록 말을 뿌리는 기술이 땅을 부리는 정치였다. ‘있는 세계’에서 농자는 그저 천상을 먹여 살리는 ‘농사짓는 놈(者)들’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농부(農夫)였다.
   천하지대본인 농자도 갖지 못한 근본의 자격을 근본도 모르는 농자의 아들이 지녔을 리 없었다. 지아비(夫)는 코에 뚜레 꿴 소를 몰아 논을 갈았고 지어미는 돌을 캐며 흙을 골라 밭을 맸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의 어머니도 농사를 지었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만 농사짓는 백성(農民)이었다. 농부로서 아버지의 아버지가 대를 이어 물려받은 것은 가난이었고, 농부도 못 되는 아버지의 어머니가 대대로 물려받은 것은 ‘이름 없음’이었다. 농부와 그의 ‘농사짓는 아내’는 봄에 가난을 뿌리고 가을이면 주렁주렁 맺힌 가난을 수확했다. 곳간에도 다 들이지 못한 가난을 어린 아들에게 입이 미어터지도록 먹였다.

   아버지는 농군(農軍)이었다.
   군인이 통치하는 시대엔 농부도 군인이어야 했다. 군인이 총과 칼을 들고 국가의 명령에 살고 죽을 때, 농군은 삽과 괭이를 들고 ‘증산’의 과업을 전투처럼 치렀다. <잘살아 보세>를 군가처럼 부르며 소출량 달성에 매진한 아버지에게 군인의 나라는 저곡가 정책으로 되갚았다. 도시로 불러올린 농군의 딸들을 저임금 노동자로 쓰기 위해 쌀값 상승을 억제했다. 농군 아버지는 쌀을 헐값에 넘기느라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농군의 딸들은 아버지의 쌀을 싼값에 사 먹으며 밤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도시의 머슴이 돼버린 농촌을 떠나 낮은 포복으로 땅 밑을 기며 석탄을 캤다.

   아버지는 산업역군(産業役軍)이었다.
   개울에 검은 물이 흐르고 거미줄에 탄재가 걸리는 마을에 와서도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농군을 탈영한 아버지는 동원탄좌(강원도 정선군 사북읍·국내 최대 민영 탄광이자 1980년 사북항쟁의 현장) 광부가 돼서도 산업입국(産業立國)의 연료를 대는 군사여야 했다. 등에 동발(갱도 붕궤를 막는 지지대)을 지고 노보리(경사진 막장 갱도를 뜻하는 일본식 탄광 용어)를 기며 석탄을 캤던 아버지는 폐에 탄재가 차곡차곡 쌓여 딱딱해지는 병을 앓았다. 숨 쉴 때마다 목구멍으로 쇳소리를 밀어 올렸던 아버지는 스스로를 죽여 유산처럼 물려받은 이름들을 죽였다.

   아들은 산업전사(産業戰士)였다.
   농군으로 살기 싫어 산업역군으로 일하다 죽은 아버지의 외동아들(1957년생)은 역군도 모자라 전사였다. 그는 백운산 운탄길(채탄한 석탄을 운반하는 길)을 매일 십 리씩 걸어 다니며 초등학교만 마쳤다. 열여섯 살 때 쫄딱 구덩이(영세 하청 탄광) 난장 잡부가 됐다. 아버지처럼 평생 탄재를 먹게 될까 두려웠던 아들은 백 바가지(안전모가 노란색으로 통일되기 전 관리직 사원들이 쓰던 하얀색 안전모·생산직을 멸시하는 관리직을 빗댄 표현)를 두들겨 패고 서울로 도망갔다가 3년 만에 연어처럼 회귀했다. 케프(안전모)를 쓰고 간드레(카바이드 등·candle의 일본식 발음)를 달고 케이지(수갱탑을 오르내리는 일종의 엘리베이터)를 타며 아들은 유전처럼 산업전사가 됐다. ‘증산이 애국’이란 구호가 탄광 곳곳에서 전사들을 독려했다.

   전사는 노가다가 됐다.
   2004년 동원탄좌가 문을 닫자 아들은 건물 옥상에 매달려 물탱크를 청소했다. 38번 국도 건설현장에서 도로를 닦았고, 고랭지 배추밭에서 품을 팔았다. 산을 타며 나무에 기를 쓰고 매달려 오미자를 땄다. 다시 그는 개청부(직영 탄광 광부들이 하청 탄광 광부들을 비하해 부르던 표현)가 됐다. 쫄딱 구덩이를 벗어나 그토록 원하던 동원탄좌 정규직이 됐지만 폐광 뒤 그는 쫄딱 구덩이로 돌아가 동발을 졌다. 운탄길을 오가며 다닌 초등학교를 허물고 강원랜드(국내 유일 외국인 출입 카지노)가 들어섰을 때 그는 ‘일반정비’ 담당이 됐다. 온몸에 탄재를 묻히고 오르내리던 칠이공(강원랜드가 위치한 해발 720미터 고지)에서 깨끗한 옷으로 바꿔 입은 그가 ‘퇴직 광부에게 허락된 일반적인 일’에 투입됐다.

   언어는 때로 선동이었고 자주 기만이었다. 과거 그를 ‘산업전사’라고 칭했던 언어는 현재의 그를 ‘노가다’라고 불렀다. 석탄 증산을 ‘애국’이라며 독려했던 언어는 어느 순간부터 감산과 폐광이 ‘합리화’(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라며 말을 바꿨다. 언어를 정의하는 권력은 그와 동료들의 정체성을 극단으로 뒤바꾸며 언어를 감염시켰다. (…) 정치가 언어를 소처럼 부릴 때 그들은 소처럼 일만 하다 삭아갔다. _14쪽, 28쪽


   그는 막장보다 젠장(막장 인생 때보다 스산해진 폐광 뒤 삶을 비유)에 빠졌다.
   ‘약속의 땅’ 랜드(직원들이 강원랜드를 부르는 표현)에서 그는 쓰레기를 치우고, 세제와 왁스로 바닥을 닦고, 화단과 진입로의 풀을 뽑았다. ‘기물정비’(설거지) 쪽에서 일손이 달리면 그릇도 씻었다. 카지노는 폐광을 거부할 수 없었던 탄광촌 주민들이 대정부 투쟁을 벌여 얻어낸 대체산업이었다. 그들이 유치한 랜드에서 정규직이 된 광부는 한 명도 없었다. 탄재가 걷히고 물이 맑아진 사북에서 강원랜드가 ‘청탁랜드’(2012~2013년 채용된 518명 중 493명이 부정 청탁)가 되는 동안, 그는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수도·전기가 끊긴 아파트(동원탄좌 사원아파트·2014년 철거)에서 유령처럼 살았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숨어 살던 아들도 아버지처럼 죽음을 불러들여 유령이 되려 했다.

   천하지대본의 후손 중 안산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다.
   경기도 안산은 계획도시(1976년 박정희가 서울의 공장과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수도권에 신공업 도시 건설 지시)였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막장을 견디던 아들들이 폐광 뒤 안산으로 옮겨 가난한 공단 노동자가 됐다. 사북·태백·영월 등 폐광지역과 안산을 오가는 직행버스가 노선을 열어 두 땅을 연결했다. 안산의 공장들은 강원 지역 학교들에 구인 공문을 보내 추천을 요청했고, 공문을 받은 공업고등학교들은 졸업생들을 안산(반월공단)으로 보내 취업시켰다. 안산 초기 인구 40퍼센트를 강원도 이주민이 채웠다. 탄광이 없는 안산에 폐광 광부들을 치료하는 진폐전문병동(안산중앙병원)이 생겼다. 재안산 강원도민들이 체육대회를 열면 강원도지사가 참석해 인사했다. 2014년 4월 16일 ‘그 바다’가 폐광의 땅에도 밀려왔다. 강원도청과 정선군청에 분향소가 설치됐다.

   세월호에 아들딸을 묻은 유족들 중엔 강원도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들이 있었다. 그 배의 항적은 韓국의 시간을 떠받쳐 온 恨국 아버지들의 경로와 겹쳤다. 농부일 땐 ‘군사’였고 광부일 땐 ‘전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들이 ‘근로’하는 노동자가 돼 2014년 4월 恨국의 심해에서 아들딸을 잃었다. _나오며


   시체 장사하는 세금도둑이 됐다.
   천하의 근본을 선대로 둔 후손들이 ‘이름의 경로’를 돌아 恨국의 끝에서 얻은 호칭은 세월호 거지였다. 순수 유가족인지도 의심받았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두 달 만에 ‘참사’(표준국어대사전 “비참하고 끔찍한 일”)는 정권의 언어(청와대 누리집 용어 사용)에서 사라졌다. 다시 두 달 뒤 ‘사건’(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받을 만한 뜻밖의 일)도 증발했다. ‘사고’(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가 홀로 세월호의 비극을 규정하는 용어가 됐다. 우연히 발생한 ‘교통사고’(주호영 당시 새누리당 정책위원장·같은 당 홍문종 의원)가 ‘참사’와 ‘사건’을 밀어내며 정권의 책임을 지웠다. 해양수산부는 법원의 교통사고 보상 기준에 따라 희생자 위자료를 계산했다. 세월호는 ‘참사’를 ‘사고’로 뒤바꾼 정치적 ‘사건’ 한가운데서 침몰했다.

   세월호가 향하던 섬에 멧부리 박이 있었다.
   배에 실린 철근 426톤 중 278톤의 목적지는 건설 중인 제주해군기지였다. 평화의 섬을 군사시설로 만드는 데 쓰일 철근들이 세월호 과적의 원인이 되어 304명의 생명을 바다 깊이 가라앉혔다. 그날(2014년 4월 16일)도 멧부리 박은 소형 카메라로 해군기지 공사장을 촬영했다. 강정 앞바다를 막은 방파제 위에 철근들이 수직으로 꽂혀 있었다. 태풍 너구리(그해 7월 9일 상륙)가 제주 바다에서 날뛴 뒤 찍은 영상에선 녹슨 철근들이 바람에 휜 갈대처럼 드러누워 있었다. 4개월 뒤엔 공사장 인부들과 포클레인이 철근들을 바로 세우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세월호 침몰에 따른 물량 부족이 철근 교체 대신 재사용을 불렀을지 모른다고 멧부리 박과 주민들은 의심했다.

   160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 47킬로그램의 남자는 왼쪽 손가락이 세 개뿐이었다.
   멧부리 박(본명 박인천)은 멧부리 바위(서귀포시 강정천과 바다가 만나는 일대)에 살아서 멧부리 박이었다. 그는 공사 초기(2013년 1월 1일)부터 해군기지를 감시해온 야생의 파수꾼이었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말벗도 없는 바위틈에 천막을 친 채 작은 카메라로 공사 현장의 불법을 주시했다. 기지 완공 뒤엔 들고나는 군함들을 관찰하며 공사 전후의 환경 변화를 읽어냈다. 처음부터 천하지대본이라곤 없는 섬이었다. 제주는 수탈의 땅이었다. 유배의 땅이었고, ‘역적’(1901년 이재수의 항쟁)의 땅이었다. 육지 왕조에겐 정복과 복속의 대상이었고, 육지 정권에겐 학살(제주 4·3)과 낙인의 대상이었다. 강정의 농자들이 지은 쌀은 토벌대(강정마을에도 3곳의 학살터)의 식량으로 쓰였다. 멧부리 박은 프레스 공장 노동자 시절 왼손 중지와 약지를 기계에 잃었다. 산업재해도 인정받지 못한 그는 세 개뿐인 손가락으로 카메라를 받치며 푸른 섬과 푸른 바다의 파괴를 감시했다.

   푸르다고 모두 생명의 색은 아니었다.
   배고파 못 살겠다며 푸른 새벽에 목숨을 끊은 푸른 나이의 남자(2013년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최종범)가 있었다. 에어컨과 냉장고를 수리한 뒤 받는 그의 건당 수수료는 분급(이동 시간·수리 전후 시간· 상담 시간 등을 빼고 수리 시간에만 분 단위로 적용)으로 계산됐다. 그와 동료들은 24시간 편의점(고객들의 밤낮 없는 수리 요구 전화에 시달리는 처지)이었고, 넥타이 맨 거지(말끔한 복장과 달리 가난에 허덕이는 현실)였다. 노조 인정과 노동 조건 개선을 촉구하는 그들을 삼성은 MJ(2018년 검찰이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삼성의 노조 와해 문건에서 ‘문제 직원’을 뜻하는 용어)라고 불렀다. 고객을 ‘또 하나의 가족’으로 여기겠다던 기업은 회사를 비판하지 않는 직원들만 KJ(가족 직원)로 여겼다. 조합원들의 NJ(노조) 탈퇴를 유도해 회사의 그린화를 완성할수록 청정한 녹색은 시퍼렇게 오염됐다. ‘불온 학생들’을 강제징집해 학교를 푸르게 가꾼다던 녹화사업(전두환 정권)이 시대를 건너 ‘1등 기업’에서 되살아났다.

   천하지대본의 족보에도 끼지 못했다.
   농사짓는 지아비만 농사짓는 백성으로 불릴 때 농부도 농민도 아니면서 농사일만 하다 늙어간 지어미와 그 딸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생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딸들의 첫 이름은 여공이었다. 자기 공부를 포기하고 오빠와 남동생의 공부를 책임지며 공단의 값싼 노동력이 됐다. 그들은 이었다. 아침 일찍 공단으로 날아가 미싱을 돌리고 부품을 조립한 그들은 밤늦게 지친 날개를 늘어뜨린 채 벌집(쪽방)으로 돌아와 서너 명씩 포개 잤다. 공단에서 잘리면 터질 듯한 출퇴근 버스안내양이 돼 밀착하는 남자 승객들을 견뎠고,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엔 애기 엄마가 돼 집 안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때가 되면 식당 아줌마로 돌아와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고, 공단에 일자리가 나면 공장 아줌마로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단순노동에 투입됐다. 업체의 생산 물량이 줄면 연락 올 때만 나가 일하는 호출형(상시 출근 파견직으로 고용됐으나 물량이 부족할 땐 집에서 무급 대기)이 됐고, 아줌마로도 불리지 못하는 나이가 되면 청소 할머니가 돼 공장 건물을 쓸고 닦았다. 공단 주변을 맴돌며 수십 년간 호칭만 바뀐 그들은 한 번도 이름이 중요한 적 없는 그냥 여자였다.

   천하지대본의 지위를 하사한 천상지대본들이 있었다.
   언어는 韓국을 비추기도 하지만, 恨국을 비틀기도 했다. 韓국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恨국을 조롱하기도 했다. 천하지대본의 혈통이 농자와 농군과 산업전사와 MJ로 이어질 때, 그 혈통에도 끼지 못한 ‘그냥 여자들’이 여공과 안내양과 호출형과 할머니로 나이를 먹을 때, 그들을 천하의 근본으로 불러준 천상의 근본들은 천하지대본들을 밑변 삼아 농노리아(농노+롯데리아)와 강도날드(강도+맥도날드)와 등골빼네(등골 빼다+카페베네)를 건설했다.

   韓국에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당한 사람들은 恨국의 외딴 방으로 돌아가 ‘깎인 뼛가루들’을 쓸며 소리 없이 운다. 언어가 삶을 반영하지 못할수록 韓국은 恨국을 떼어내고, 韓국어로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자들은 恨국어를 양산한다. 韓국어로 가득 찬 韓국에서 恨국인들은 말할 언어가 없고, 恨국어가 팽배한 韓국에서 恨국인들은 살아낼 수가 없다. _나오며


이문영

《한겨레》 기자로 일한다. 『웅크린 말들』을 썼다. 기록하고 전하는 일이 갈수록 두렵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