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전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서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여성이 주체가 되어 서사를 끌고 가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수요가 증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서사를 창작할 때 “플롯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도맡았던 역할을 여성등장인물로 대체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 쉽게 말해서 단순한 미러링만으로는 깊이 있는 여성서사가 탄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때 SF는 그러한 현실의 여건을 딛고 여성서사의 장으로써 활용될 수 있다. SF라는 장르가 “전통적인 젠더 역할을 벗어나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데 가장 전망이 좋다”2)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도 SF 장르는 2010년대 이후 활발히 창작되어 새로운 여성서사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였다.3) 그 예로써 전수경의 『우주로 가는 계단』(창비, 2019)과 김초엽의 『원통 안의 소녀』(창비, 2019)를 살펴보면서 어린이청소년 SF가 여성서사의 장으로써 활용될 때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주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실감이 주는 상상력

   『우주로 가는 계단』은 주인공 지수가 수미 할머니와 과학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여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상실감을 치유하고, 과학자가 되어 평행 우주를 연구하는 꿈을 품게 되는 이야기다. 수미가 평행 우주를 여행하는 탐험가이고, 지수가 오르내리던 계단 비상구가 평행 우주 터미널이란 사실은 작품의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장편 동화의 긴 호흡으로 독자들이 지수에게 이입하고, 지지를 보냈기에 독자들은 그 진실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실감’이다.
   SF 장르에서 실감이란, “과학 소재를 발굴하는 데에서 오는 현실감 혹은 현장감이다.”4) 이 작품은 천문학이나 천체물리학을 서사 안에 녹여냄으로써 인물과 서사를 깊이 있게 쌓아가는 데 성공한다. “지금의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공상적인 소재나 배경을 종종 도입하면서도 동시에 언젠가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감”5)을 통해 지수가 수미를 만나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지수와 수미의 공통 관심사가 과학이라는 설정은 눈여겨볼 만하다. “작품이 특히 과학기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일 때 지금까지 어린이청소년 SF에서 여성-엄마 과학자는 대개 부정적인 캐릭터로 그려졌”6)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미는 비혼 노년 여성 과학자로서 지수를 자신과 대등한 과학자로 존중하는 인물이므로 새로운 여성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지수가 그런 수미를 롤모델 삼아 과학자의 꿈을 키워간 것도 새로운 여성서사라고 할 만하다.
   “성별 고정 관념에 따라 진로 선택에 차이” 김지혜,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71쪽 를 보이는 현실 속에서 SF는 기존의 젠더 역할을 벗어날 수 있는 선택지를 줌으로써 여자아이들을 적극적으로 과학의 장으로 끌어왔다고 할 수 있다. 지수의 친구 민아도 CSI를 즐겨 본다는 설정 덕분에 추리와 합리의 영역으로 더 많은 여자아이를 끌어당길 수 있다.

   3. 막연한 대상을 상상하기

   SF가 제공하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막연한 대상에 대해 현실감을 강화하는 방법은 사건과 배경을 구체화하거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법으로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8) 이때 ‘막연한 대상’을 여성, 아이, 노인, 장애인, 성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로 치환해보자. 우리는 사회적 약자처럼 우리의 시야에 띄지 않는 존재들을 대개 실재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현실에 따라 인식과 가치관이 달라서 사회적 약자가 받는 차별에 대해 둔감하고, 그들이 겪는 곤란함에 공감하기 어렵다.
   이에 『원통 안의 소녀』는 우리의 상식을 깨트리고 상식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해 상상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다. 이 작품의 주인공 지유는 기술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로, 마찬가지로 첨단 과학 세계에서 배제된 노아와 연대한다. 두 사람은 “결연: 혈연이 아닌 선택에 따른 관계”9)로 이루어져 여성들의 관계 맺음에 폭을 넓힌다. 이는 여성 인물 간의 새로운 관계 맺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현실에서 존재가 지워진 자들의 자리를 더듬어 보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지유는 미세 먼지를 정화하는 나노 입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투명한 플라스틱 원통 안에 갇혀서 도시를 돌아다녀야 한다. 사회와 지유 사이를 가로막는 물리적 벽은 아이러니하게도 노아의 탈출을 돕는 핵심으로 작용한다. 이는 지유가 자신을 차단한 도시의 방식 그대로 도시의 체제에 균열을 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실에서 여성은 유리절벽이나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지유의 약자성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그 탈출 장면에서 여성뿐만 아니라 약자성이 중첩된 독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존중받는 경험을 할 수 있다.

   4. 바깥을 향할 자유

   남성은 독서를 통해 외부 세계로 나갈 자극을 받지만, 여성은 독서를 통해 내면적인 탈출구를 얻는다.10) “여자는 언제나 욕망에 이끌리지만 행동규범에 의해 구속받”11)기 때문이다. 하지만 SF는 현실의 문법을 전복할 수 있는 장르이다. 또한, 실감과 막연한 대상을 상상하게 하는 힘을 통해 어린이청소년문학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에게 입체감을 불어넣고, 현실의 ‘여자의 적은 여자다’ 구도를 뒤집어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음을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수는 평행 우주 여행자 수미를 만나 매 순간 자신을 억누르는 중력에서 벗어나 2025년 9월 27일로 향했고(『우주로 가는 계단』), 지유는 노아와 합심하여 노아의 탈출 계획을 도움으로써 도시 밖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원통 안의 소녀』). 이는 어린이청소년문학 안에서 SF가 여성서사의 장으로써 기능할 때, 독자들(특히 여자아이들)에게 궁극적으로 ‘바깥을 향할 자유’를 선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상력이란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가 실현할 것이라는 예언적 선언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성 역할 고정 관념이 남아 있어 여자아이들에게 성역할에 따라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게 하지만, SF는 여자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마음껏 꿈꿔보라고 독려한다. 그러므로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 SF가 여성서사의 장으로써 더욱 활발히 창작되어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해볼 수 있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계층, 장애, 인종, 성 정체성, 성 지향성 등 여러 가지 정체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여자아이들을 SF 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만날 날을 기대해본다.


한윤정

날뛰고 소리치기를 좋아하던 꼬마 아이가 자라서 여성서사와 SF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둘을 합친 평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의 여자 어린이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공명할 수 있는 어린이청소년문학을 읽고 무한한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작품들이 제게 건넨 감동을 정직하게 글로써 풀어내려 봤습니다. 쓰는 동안 제가 즐거웠던 만큼 독자 여러분도 재밌게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2020/07/28
32호

1
리타 펠스키, 「플롯」,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여이연, 2010, 159쪽
2
위의 책, 160쪽
3
김유진, 「최근 어린이청소년 SF의 세 가지 과학 : 문학」, 『자음과모음 2019 가을호 SF 비평의 서막』, 자음과모음, 2019, 참조
4
곽재식, 「SF 서사의 특징과 전략」, 『창비어린이 2019 여름 특집 아동문학의 새로운 서사 전략』, 창비, 2019, 53~54쪽
5
위의 책, 54쪽
6
김유진, 「최근 어린이청소년 SF의 세 가지 과학 : 문학」, 『자음과모음 2019 가을호 SF 비평의 서막』, 자음과모음, 2019, 43쪽
7
김지혜, 「1부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3장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71쪽
8
곽재식, 「SF 서사의 특징과 전략」, 『창비어린이 2019 여름 특집 아동문학의 새로운 서사 전략』, 창비, 2019, 65쪽
9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30쪽
10
리타 펠스키, 「독자」,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여이연, 2010, 참조
11
위의 책, 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