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단단한 물체에 흠집을 내서 길을 뚫는 장면을 상상했다. 개미굴처럼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통로. 내가 만들어낸 길을 따라 물이 흐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무늬가 생긴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 그러자 다룰 시집이 두 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뾰족한 바늘 대신 두 권을 함께 담을 그물망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망은 사람이 들기 이전에, 그것이 덮은 사물을 감싸 안는다. 꼭 사물이 아니더라도, 망에 갇힌 상태라면 답답하지 않을까. 답답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이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사물은 일종의 비유이다. 사물에 가까운 상태. 생물이나 식물도 사물에 근접해질 수 있다. 부자유하다면. 이동이 어렵다면. 그런데 그물망을 상상하니깐, 두 시인의 시가 책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잘 그려지지 않는 두 시집의 형상을 알고 싶었다. 어떤 이미지가 이 시집의 본모습일까 궁금했다. 진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머리에 힘을 주었다. 잘 아는 친구나 눈앞에 있는 사람에 관해서도 단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할 수 없으면서도 그랬다. 그래도 시집이라면, 여러 편의 시가 묶인 다발이니까. 사물이니까. 영혼이 있지 않을까.


1.

임유영의 『오믈렛』(문학동네, 2023)과 임정민의 『좋아하는 것들을 죽여 가면서』(민음사, 2021), 두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데 있다.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도권이나 중심인물의 자리를 상대에게 내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때의 부정은 사건의 주인공(이를테면 화자)이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나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임유영, 「포노토그래프」), “그러나 말했듯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걸 대체 누가 믿어줄지 모르겠지만”(임정민, 「벌 신(Bee God)」)이라는 고백에서처럼 ‘나’가 시인 본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리하자면, 두 시인의 시에서 ‘나’는 시인 자신이되 이야기의 주체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통상적으로 하나이다.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 나는 자기동일성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나’의 특성은 다수이거나 무(無)라는 가능성을 배제하며, 당연히도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알려지다시피, 시는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자기 고백적인 장르이다. 두 시인의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전면에 드러나 있다. 두 시인은 내가 아닌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두 시인의 태도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지쳤다(?). 사실 나는 계속 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자신을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때로는 이야기의 소재가 나와 멀고 떨어져 있을수록 나는 나의 어떤 특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에게 닿거나 지나왔거나 말하는 모든 장면에 나는 묻어난다. 어쩌면 나는 비워질수록 더 우주의 한 부분이 되어 강한 결속력을 가진다. 살아 있다는 실감. 무엇보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와 관련되었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내가 어떤 사실을 고백할 때 저절로 따라붙는 판단이 폭력적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나에 대해 말하기가 겁나며, 별로 재밌지도 기분이 썩 좋지도 않다. 그것보다는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내 마음에 드는 대상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장면이나 정의할 수 없는 과거의 시간, 좋고 싫음으로 구분할 수 없는 ‘너’에 대해 말하고 싶다.


2.

임유영의 시 「방랑자」에는 “최종. 끝. 끝의 끝으로 간다. 가고 말 것이다”라는 선언이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나’는 “거울 속 푸른 옷을 입은 여자”를 마주한다. ‘나’는 “갈색 눈동자”를 관찰하다가 곧 “죽은 사람”을 떠올린다. 죽음을 상상하고 “비밀이 없”는 시체가 그것 자체로 “폭로”임을 깨닫는다. 여기서 ‘끝’은 삶의 종지부인 죽음을 뜻할 것이다. 또한 불가능(표현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이라든가 물리적인 경계 너머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여자’는 끝이 난 이후와 연관되어 있다. 여자는 죽음을 선택하려는 듯하다. 나는 어쩐지 이 시를 읽고 난 다음 ‘나’의 정체가 죽음 자체처럼 읽혔다. 죽음(죽은 자)의 독백. 왜일까? 아직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여자는 죽음을 생각할 뿐이다. 나는 죽음이 화자 같아서 이 시가 정말 무서웠다. 시에는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계기나 원인이 나오지 않는다. 앞뒤 정황을 알 수 없다.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도 없다. 독자는 오로지 ‘나’의 독백에만 의지해 화자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를 예상할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민음사, 1997)에서 “시체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각인된다. 시체, 진중한 태도로 우리를 위협하면서 길게 누워 있는 그 시체에게서는 더이상 그가 살아 있을 때 우리에게 주던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직 두려움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만 훨씬 못하다”(64~65쪽)고 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훨씬 못한 시체(죽음)는 하나의 결여이며 읽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불안을 야기한다. 이러한 두렵고 불편한 감정은 ‘시체’의 폭로일 것이다. 목격한 이후가 이전과 같을 수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도 없다.
  나는 임유영의 시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게 담겨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타자란 마음의 또다른 이름인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사는 동안 어르고 달래야 하는 비물질이다. 마음에 난 어떤 상처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며 오히려 덧이 나기 일쑤.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고, 전혀 뜬금없는 방식으로 상황을 풀어갈 수도 있다. 마음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음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타자와 나의 거리감 역시도 마음과 같은 것 같다. 타자를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고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 또한 어렵다. 임유영 시에서 생략된 많은 부분은 타자와 마음이 지닌 어떤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나조차 제어할 수 없는. 「부드러운 마음」(50쪽)에는 개를 잃고 슬픔에 빠진 동자승이 등장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동자승이 울며 “두 번 다시 태어나지 말라”고 외치는데도 웃는다. “개가 땅을 파면 죽는다”는 소문처럼 일어난 개의 죽음 앞에서 동자승만 낙담하고 좌절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죽은 개를 애도하고 동자를 위로하는 시인의 마음이면서 상처 입은 동자의 마음이기도 하다.
  동명의 시 「부드러운 마음」(32쪽)에서 ‘마음’은 변화무쌍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 마음에 대해서만 생각한 것이었어요”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마음이라는 여과 장치를 통과한 장면들이 사실을 떠나 내용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은 “죽은 자의 얼굴”을 한 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여자아이일까봐 걱정하고(「포노토그래프」), 음악을 사랑하는 ‘너’가 음악을 들려주는 동안 “무언가 슬픈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서워한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한다. 과제가 주어진 것처럼. “잊은 듯한 느낌이 드는” 무언가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무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
  「라」에서 우리는 버섯 채취꾼을 따라 산행에 나선다. 우리는 산을 잘 오르고 눈이 밝은 버섯 채취꾼의 뒤를 따라간다. 채취꾼의 머릿속에는 좌표가 설정되어 있다. 덕분에 우리는 나무들을 옮겨 다닌다. 버섯을 채취하기 위해 “다른 나무와 덤불, 새로 죽은 나무 아래를 뒤져본다”. 버섯 채취꾼은 “해가 지기 전에 하산하기”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우리는 “채취꾼이 멈춰 설 때마다 멈춘 이유를 전부 알 수 없지만 그와 같은 쪽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그 순간 버섯 채취꾼과 우리가 보는 풍경은 같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버섯 채취꾼과 우리는 산에 함께 있다. 산이라는 넓고 거대한 자연 속에는 멧돼지, 살모사, 다람쥐도 살아간다. 시에서는 버섯 채취꾼 이외에 다른 인물은 언급되지 않는다. 채취꾼의 뒤를 쫓는 나 이외에 ‘너’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의 범주에는 버섯 채취꾼과 동식물들 전부가 속해 있지 않을까? 이 시에서 시선의 주체를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일컬은 것은 어떤 순간만큼은 ‘너’와 ‘나’가 같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는 동등함. 바라본다는 것은 속해 있다는 것의 다른 말. ‘너’를 통해 말할 수 있는 나. ‘나’는 ‘너’와 뒤섞인 마음 같다. 오믈렛처럼.


3.

임정민의 시에서 나의 경계는 모호하다. 거의 모든 독백이 ‘나’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데 나에 대한 정보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사건은 지속되지 않는다. 장소는 예고도 없이 바뀐다.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 중 하나는 ‘너’와 연인이라는 것인데(「좋아하는 것들을 죽여 가면서」), ‘너’에 대한 설명도 생략되어 있다. 같은 시에서 ‘나’는 “도망” 중이다. 밤에 비가 내린다. 화물열차를 타고 가다가 “나의 작은 방”으로 이동한다. 도망친다는 것은 도망 나온 장소나 사람으로부터 붙잡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다. ‘나’의 정체도, ‘너’도, 공간도 모두 한곳에 머물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나’는 “더 긴 시간이 흐른 후 소리가 멈추었을 때/ 나는 그 누군가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진술한다. 나 이외에 다른 누군가 함께 있는데 그게 ‘나’였던 것이다. ‘나’는 둘이 될 수 없다는 익숙한 사실에서 벗어나 있다. 임정민 시에서 ‘나’의 정의는 일반적인 상식을 따르지 않는다. 두 명 이상일 수도, ‘너’의 역할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나였고, 그것은 나의 재귀였고/ 사랑하는 나의 연인이었다”는 문장에서처럼 ‘나’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오간다. 시인이면서 화자인데, 화자가 늘 고백하는 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왜 ‘나’가 이렇게 무한한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우주와 같이 흩어진 시간이다. 사용자가 아니라 사용되는 자이다(“너를 위해/ 나의 사용법을 위해”). “스크린”(「공상과 포위」)이나 “배역”(「아날로그」), “소설(「벌 신(Bee God)」)” “대본”(「Loveless」)과 같은 단어는 연출된 상황을 가정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무대, 즉 이 공간 역시도 어딘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물풀”(‘시인의 말’ 중에서)이라던가 잔디(「HEENT」 「사물 시는 작게 말한다」), “거리의 녹색 코트”(「좋아하는 것들을 죽여 가면서」)와 “풀 위”(「크로나」)는 모두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풍경이다. 뛰어놀 수도 있고 앉아 쉴 수도 있다.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공간은 그것 자체로 어떤 속도감을 나타낸다. 누가 있든 없든 간에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잊게 한다. 시간의 경과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부재까지도. 머물다 간 존재의 흔적까지도 덮을 것이다. 오히려 이때의 공간은 누군가가 사라지면서 만들어지는 것도 같다. 너무 긴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미 많은 것이 축적되어서 인과가 사라진 것이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사라짐이라는 변함없음으로, 잘 끝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결국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저것이 나라는 믿음을”(「태화강 오후」)이나 “몸이 거의 사라질 때까지”(「검은 옷의 혼선에 서서」)와 같은 문장을 보면 나는 시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럼에도 시는 계속되고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이 시집에 독백이 유독 많은 점, 독백의 문장들이 청유형 어미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듣는 대상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께 읽어주세요. 많은 타인에 관한 이야기니까, 바로 너의 얘기니까”(「벌 신(Bee God)」)라는 문장은 시를 읽는 나를 지시한다. 나는 시를 읽는 자리에서 과거에 써진 시를 현재로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시는 닫힌 시간이 아니라 열린 시간 속에 있다. 나는 ‘너’가 될 수도, ‘나’가 될 수도 있다. 드러난 “무릎”(「벌 신(Bee God)」)이나 “어깨”는 얼굴이 가려진 시인이거나 책상 앞에 앉은 나일 것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시라는 “표면”(「1227」)을 펼치고. 여러 차원을 넘나들 수 있다. 많은 일이 끝난 시점이더라도, 더 몰입할 수 있으니까. 더 완벽해질 테니까.
  나는 특히 임정민 시에서 「벌 신(Bee God)」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에게 권유해서 읽히기도 했다. ‘벌 신’이 좋은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선 문체가 좋다. 손목을 보여준다든가 창경궁 온실을 언급하는 상황도 재밌고(나는 실제로 이 시를 읽고 보수공사가 끝난 창경궁 대온실을 다녀왔다), “연애나 사랑 얘기로 생각해도 좋아요. 그러면 결국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이젠 달콤함을 향한 인내만이 기술이 될 거예요. 그리고 불에 타는 느낌이 끝났어”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도 실감 난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신뢰하는 독자 박과 강에게 「벌 신(Bee God)」을 소개했을 때 반응이었다. 박과 강은 「벌 신(Bee God)」의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나서 울었다. 하는 말마저 똑같았다. 너무 시인이 보인다고, 시인이 읽혀서 슬프다고. 나는 이 시가 슬프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시를 읽고 감동한 모습에 「벌 신(Bee God)」이 더 좋아졌고 박과 강이 더 좋아졌다. 처음 박의 반응을 보고는 좋은 시를 추천한 것 같아 기뻤지만, 강 역시도 같은 반응이어서 내가 시를 잘못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나도 이들처럼 감상하고 싶은데. 그런데 나는 여전히 「벌 신(Bee God)」이 왜 좋은지, 내가 이것을 왜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오은경

2017년부터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한 사람의 불확실』 『산책 소설』이 있습니다.

임유영 시인의 『오믈렛』을 읽다가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정말 좋았습니다. 산문 형식에서 느낄 수 있는 시적인 부분을 자세히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임정민 시인의 『좋아하는 것들을 죽여 가면서』 역시 말을 건네는 듯한 문체나 한 편에 열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서부터 독특했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두 시집의 좋음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2024/06/19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