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것으로는 거대한 것을 볼 수 없고 아주 거대한 것으로는 작은 것을 볼 수 없나니…… 아주 작은 시간으로는 거대한 시간을 느낄 수 없고 아주 거대한 시간으로는 작은 시간을 느낄 수 없나니……1)


종말의 이후가 있을까. 모든 것이 몰락한 세계에도 다음 장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종말 이후의 이후도 있을까. 그것도 있다면, 무한한 ‘이후’가 진정한 의미의 ‘맨 끝’을 끊임없이 유보하는 것이 이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라면, “‘이후’ 역시 또다른 끝과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 ‘작가의 말’ 부분) 중간역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는 종말이라는 단어도,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건 다 쓸데없는 말장난이 아닌가.
  그런데 만약 “아주 작은 것”과 “아주 거대한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어떨까.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의 어둠과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의 어둠이 닮아 있다면,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는 일상 속 죽음과 이별이 세계의 멸망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면 어떨까. 향내 가득한 장례식장을 불길이 치솟는 재난의 현장에 겹쳐볼 수 있다면, 우두커니 홀로 앉아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서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럼 우린 멸망의 이후를 조금 상상할 수 있을까. 이후의 이후를 잠시 엿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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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현대문학, 2024) 속 인물들이 견디고 있는 죽음과 이별은 세계의 멸망을 소분(小分)한 몫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들과는 싸울 수 없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들을 향해 소리를 지를 수는 없다. 항의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33~34쪽; 이하 이 책에 대한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만을 표기한다)다. 아이러니하게도 멸망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해서 오히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데,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크기와 형태로 소분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후의 허무와 무의미 속으로 ‘침잠’하지 않기 위한 고투는 소설 속 인물들이 저마다의 멸망을 감당하는 방식이다.
  한편 그들이 견디고 있는 상실은 이른바 멸망의 시대에 소설(小說)의 역할을 질문하게 한다. 예컨대 소설은 인류를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소설은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여왔다. 그러한 믿음이 긴 세월 인간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했고 또 읽게 했다. 전 지구적 위기 상황들이 거대서사와 총체성으로의 회귀를 요구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이장욱은 정확히 정반대의 방향으로 같은 길을 간다. 애초에 소설은 한 사람과 한 세계를 연결하는 일이라는 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예술이라는 듯이.
  그렇다면 우리는 소분된 멸망을 그리는 ‘작은’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이후를 버티는 ‘작은’ 인물들을 통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밀어낼 ‘작은’ 빛을 포착할 수 있을까. 정말 그게 거기 있을까. 그렇게나 거대한 것이 그렇게나 작은 것 안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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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복잡한 이유라든가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생각할 필요는 없다”(26쪽)는 문장은 이 소설의 모토라고 할 만하다. 중요한 것은 자세한 내용이 아니라 ‘끝’이라는 형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멸망-죽음-이별’의 세목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군더더기는 최소화되어야 하고, 최소화되었을 때조차 아름다워야 한다. 이장욱이 쓰는 ‘끝’은 간결하고 아름답다.
  삶은 언제 끝나는가. 둘이 쓰던 방이 혼자 쓰는 방이 됐을 때 끝난다. “얼마 전까지는 두 사람이 잠들고 두 사람이 깨어났는데 또 얼마가 지난 후에는 한 사람이 잠들고 한 사람이 깨어”(112쪽)날 때 끝난다. 홀로 남은 아내가 남편의 부재를 견디는 침실은 한 사람의 삶이 완전히 끝난 장소이자 다른 한 사람의 삶이 거의 무너진 장소다.
  사랑은 언제 끝나는가. 한 사람이 “마음이 식은 거야. 그렇지”라고 물었는데 다른 한 사람이 “별다른 대꾸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끝난다. 수많은 말과 마음을 주고받았을 두 사람 사이에 흘러가는 것이 “침묵”(41쪽)뿐일 때 끝난다. “복잡하지는 않아. 그냥 그렇게 된 거야”(26쪽)라는 고백은 단순해서 절대적이다.
  복잡한 삶과 사랑의 공식에 비해 죽음과 이별의 메커니즘은 잔인할 정도로 심플하다. 소설에는 이조차도 군더더기라고 말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헤어지는 꿈”(59쪽)을 꾼 연인의 대화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들은 ‘아직’ 헤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헤어진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왜’라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악몽인가?”
  “악몽이죠.”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떠났나?”
  “떠났지. 당신이.”
  “그렇구나.”
  “……”
  “끝이야?”
  “응. 끝.” (59~60쪽)

이렇듯 소설 속 인물들은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연’은 남편인 ‘모수’의 죽음 이후를, ‘천’은 연인인 ‘한나’와의 이별 이후를 견디고 있다. 모수는 살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한나는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더없이 소중했던 관계가 끝나버린 이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그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건 무얼까. 그건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 있다가 없어졌다는 뜻일까”(58쪽)와 같은 질문들을 기도문처럼 중얼거린다. 세계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지만 인물들은 ‘이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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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계는 언제 끝날까. 작은 끝과 거대한 멸망은 다를까. 이장욱은 세계의 끝 역시 간결하게 그려낸다. 세계는 “파도가 밀려오고 밤이 오고 다시 아침이 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멈”(45쪽)출 때 끝난다. 거기에는 행성 충돌, 대홍수, 핵전쟁, 화산 폭발이 없다. 그런 것 없이도 세계는 끝난다. 세계의 끝에는 “추리할 것이 아무것도 없”(15쪽)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무도’는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르는 섬”(14쪽)이다. “희미하고 뜨거운 바람”(22쪽)이 불어오는 무도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위와 방파제와 폐건물과 방치된 크레인”(42쪽)이 전부다. “티핑 포인트”를 지나버린 세계는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47쪽)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멸망은 마치 파도처럼, 바람처럼, 연기처럼, “고체보다는 액체에 가깝고 액체보다는 기체에”(51쪽) 가깝게 존재할 뿐이다. 인물들 역시 세계의 멸망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들은 철거명령이 내려진 허름한 여관의 옥상에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울 뿐이다. 서서히 가라앉는 세계를 바라보며 “이상한 공허감”(30쪽)을 느낄 뿐이다.
  “뻔하고 상투적이고 고리타분하고 그러므로 무감각한 주제”(48쪽)가 되어버린 멸망 대신 인물들은 결코 무감각해질 수 없는 상실을 견딘다. “수의와 관을 선택하고 조문객들에게 대접할 음식 세트를 골라 주문”(11쪽)한다. “사망신고”를 하고 “예금들을 정리”하고 “고지서를 보내오던 곳에 일일이 전화해서 우편물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요청”(19쪽)한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후 “방안의 가구처럼 시간을 보”(19쪽)내던 그들은 “일주일이 지나자” 가구처럼 지내기를 멈추고 “그다음 일주일”이 되자 집안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다음 일주일은 더 정상적인 생활을”(20쪽) 한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가까스로 삶으로 돌아온다.
  요컨대 이장욱의 소설에서 세계의 상황과 인물의 행동 사이에는 큰 간극과 낙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멸망과 사적인 상실은 절묘하게 겹치는데, ‘아직’ 멸망하지 않은 세계와 ‘이미’ 이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서로 전혀 닮지 않은 ‘페어(pair)’로서 소설을 떠받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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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회피가 아닌가. 사적인 상실에 골몰하는 인물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세계를 외면한 결과가 아닌가. 세계의 멸망에는 개별적인 죽음과 이별로 소분되지 않는 나머지가 있지 않나. 하지만 소설 속 천은 말한다. “안된 사람이 많다고 해서 안됐다는 게 의미 없는 말이 돼버”려서는 안 되지 않냐고. “죽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죽음이 의미 없는 말이 돼버”(37쪽)려서는 안 되지 않냐고. 다시 말해 아주 작은 것으로는 거대한 것을 볼 수 없고 아주 거대한 것으로는 작은 것을 볼 수 없는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죽음과 이별의 의미를 되살리는 일이다. “죽음이 흔해져버린 세계에서, 국가가 스스로를 방기한 세계에서, 잔여물들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불안과 우울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작가의 말’에서) 우리는 ‘작은’ 죽음과 이별을 더 많이 말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장욱은 각각의 상실을 서로 연결된 것으로 그린다. 예컨대 모수는 무명 배우 신분으로 방송에 출연한 천을 본 적이 있다. 시사 프로그램의 재연 배우로 출연한 천은 당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살인 사건의 살인자를 연기했고, 모수가 죽은 이후 연은 천이 연기했던 살인자의 방법으로 남편을 죽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또한 매일같이 일기를 썼던 모수는 자신의 노트를 방송국에 보낸 적이 있는데, 제보를 통해 비리를 알게 된 한나의 전 애인은 그 내용을 윗선에 보고하는 바람에 좌천당했다. 그는 머지않아 전염병에 걸렸고, 한나는 그의 곁을 지키기 위해 천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한나가 떠난 후 천은 연과 모수가 운영하던 여관에 와서 머무르고 있다. 연과 모수가 운영하던 여관은 이제 연이 혼자 운영하는 여관이다.
  소설 속에 이러한 예시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연결된 세계를 그리기 위한 작가의 억지일까. “모르는 사람이 오래 알던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인지 착오에 불과한 현상”인 걸까. “우리 어디서 만난 것 같지 않아요?”(38~39쪽)라는 상투적인 작업 멘트처럼 진부한 상상력일 뿐인 걸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장욱은 어쩌면 연결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예컨대 한나는 천에게 이별을 고하며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66쪽)하다고 말하는데,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이미 혼자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혼자가 되어야 한다”(67쪽)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혼잣말과 중얼거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연과, 현실과 연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천 역시 소설 내내 단 한 번도 ‘혼자’ 있지 않는다/못한다2). 그들은 언제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개별성과 총체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만나지 않았을 때조차) 산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고, 떠나간 이와 남겨진 이는 연결되어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 개별적인 상실은 각각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멸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작은’ 죽음과 이별을 더 많이 말하고 더 깊이 느낄수록, 실감할 수 없었던 ‘거대한’ 멸망의 형체 역시 더 뚜렷해진다. 그런 점에서 ‘아직’ 멸망하지 않은 세계와 ‘이미’ 이후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서로 조금 닮은 ‘페어(pair)’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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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세계와 인물들이 부지불식간에 연결되어 있다면, 그 세계와 인물들을 만들어낸 작가는 어떨까. 이 소설은 “기각”된 시점인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쓰였는데, “인물의 내면과 서사의 흐름을 종횡으로 장악할 수 있”는 서술자의 “전지적 능력”3) 덕에 다음과 같이 어색한 서술도 가능해진다. 서로 만난 적 없는 모수와 천이 사실 만난 적 있다고 말하는 서술자의 위치는 기묘하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의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본 적이 있고 허공을 향해 동시에 손을 뻗은 적이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그런 것이 삶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다”(28~29쪽). 이때 서술자는 인물이 모르는 인물의 상황과 내면까지 알고 있는데, 이렇듯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서술자는 인물뿐만 아니라 삶의 진리를, 세계의 운명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4)다.
  사실 이 소설에서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서술자는 작품을 지탱하는 대들보다. 앞서 말한 거대한 연결을 그리면서도 소설이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서술자의 공이 크다. 문제는 서술자가 정말로 전지전능하다면 이야기의 모든 불확실성이 닫혀버린다는 것이다. 인물과 세계의 운명이 모두 서술자의 손바닥 안에 있다면 이야기의 앞과 뒤가 닫혀버린다. 이에 대해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라비아 마법사의 술 이야기가 이해를 돕는다. 연은 “세상의 시간을 흔드는 술”에 대해 말하면서, 그 술을 마시면 “세상의 시간을 동시에 볼 수 있게”(51쪽) 된다고 덧붙이는데, 술을 마시고 “시간의 전모를 한꺼번에 볼 수 있”(53쪽)게 된 왕의 모습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을 채택한 작가의 모습과 겹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간’에서 ‘신’으로 경계를 넘어간 것인가.
  ‘왕-작가’는 선택해야 한다. “삶으로 돌아가서 삶을 긍정하고 진실의 일면만을 보고 살 것인가, 죽음을 택해서 삶을 부정하고 진실의 온 모습을 볼 것인가”(53쪽). 다시 말해 “왕으로 지배할 것인가, 신의 일부가 되어 침묵할 것인가”(54쪽).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연의 말을 빌려 추측할 수 있다. 연은 “진실의 온 모습”이나 “시간의 수많은 차원” 같은 이야기는 우습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진실의 일면이고 양면이고 하는 것은 관심 없어요. 진실의 온 모습 따위가 뭐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시간의 수많은 차원이라는 것도 웃기고 우스워. 우습고 웃기지. 그러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없을 테니까.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지 않을 테니까. (54쪽)

따라서 이 소설은 서술자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한다. 그것은 “인생”과 “내러티브”는 다르다는 사실, “삶은 기승전결의 플롯을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다. 구체적으로 그 선택은 “의미와 목적과 결과와는 무관한 수많은 ‘디그레션’”5)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총 열한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1부터 9까지는 연과 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그런데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마지막 10장은 ‘디그레셔널’한 존재, 즉 이미 죽은 모수의 유령이 ‘나’로 등장한다. 그에 따라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또다른 장인 0장 역시,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연이 쓴 것이 아니라 모수의 유령이 한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령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다만 그 이야기를 성실하게 받아적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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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망망대해란 무엇입니까. 스무 살의 어느 날 연인과 바라보던 수평선에 가까운가요. 가족들과 갔던 동해의 휴양지 풍경이 떠오르나요. 글쎄, 그런 걸 망망대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렇다고 해두죠.
  나에게 망망대해는…… 무겁게 밀려오는 파도의 세계입니다. 밀려와서 돌아가지 않는 물의 세계입니다. 물의 세계에 잠겨가는 사람의 표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무슨 말인지는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당신도? 우리는 지금 함께 망망대해를 건너가고 있잖아요. (10쪽)

이장욱의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은 결말이 시작인 이야기, 이후로부터 이전이 시작되는 이야기다. 소설의 시작이자 끝인 문장을 옮긴다. “그러니까…… 망망대해라는 건 무엇일까요”(9쪽, 125쪽). “무겁게 밀려오는 파도의 세계” 앞에서, “물의 세계에 잠겨가는 사람의 표정” 앞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할까. 작가일까. 배우일까. 몽상가일까. 어부일까. 생물학자일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단지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추리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세계의 끝에도 단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단 하루도 같은 적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단 한 번도 같은 적 없는 구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사람들이 쓰고 그러한 사람들이 읽는 예술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음 구름에서 쉬어 가요”(154쪽)라고 말하는 두 사람이 태우는 담뱃불 안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밀어낼 ‘작은’ 빛이 보이는 것도 같다. 정말 그게 거기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나 거대한 것이 그렇게나 작은 것 안에 있는 것만 같다.

하혁진

문학평론가.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고,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를 통해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나도, 당신도, 멸망을 겪어본 적이 있다. 나도, 당신도, “단지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서 “시제가 없는 편지”(이장욱, 「깊은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보기」, 『음악집』)를 써본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은, 편지를 쓰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낯설고 어색할 것이다. 매번 새롭게 아파함으로써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수신인도 없이 “수많은 사랑의 문장을 배달”할 것이다. 영원히 외롭게, “영원히 전달하는 사람”(「편지가 왔어요!」, 같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당신도……

2024/07/17
68호

1
이장욱, 「내 생물 공부의 역사」, 『음악집』, 문학과지성사, 2024.
2
소설의 제목에 포함된 ‘중독’이라는 단어 역시 표면적으로는 모수와 한나의 전 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후(Hu)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와 이어져 있는 인물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중독은 세계의 멸망을 증명하는 표상(바이러스)인 동시에, 그러한 위기를 타개할 돌파구(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과 인식)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따라서 ‘중독자들’은 모수와 한나의 전 애인뿐만 아니라 연과 천과 한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3
이장욱, 「3인칭 전지적 시점」, 『영혼의 물질적인 밤』, 2023, 문학과지성사, 41쪽.
4
이장욱, 같은 책, 41쪽.
5
이장욱, 「디그레션」, 같은 책, 39쪽. “실은 그 ‘디그레션’들 자체가 삶이라고 해야 한다. 삶은 삶이 존재하는 구체적 순간들의 평등한 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현재도 느낄 수 없고, 진짜 삶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삶의 무의미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