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와 함께 어지럼증이 시작되었다. 심할 땐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결국 회사 근처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방문했다. 어지럼증은 귀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도기정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양냉면을 먹으며 그런 말을 했다. 기정이 냉면을 좋아했고 나는 좋아하는 음식이 없었다. 입사 3년 차까진 먹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젠 뭘 먹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기정은 나에게 번아웃이 온 게 분명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네 걱정이나 하라고 대꾸했다.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건 기정도 마찬가지였다.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접수 직원은 증상부터 물었다. 나는 어지럼증으로 방문했기에 체온 측정은 제외되었다. 초진 접수표를 작성하고 북적북적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병원 안으로 환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은 체온 측정을 마친 뒤 간호사가 건넨 비닐장갑을 착용했다. 코로나 의심 환자라는 의미 같았다. 나는 마스크를 끌어올려 콧등을 잘 덮었다.
   김라미씨, 1진료실로 들어오세요.
   40분 동안 기다린 끝에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진료실 문을 여니, 치과에서 볼 법한 거대한 리프트식 의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온갖 진료 기구와 모니터 장치가 있었다. 나는 긴장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의사가 나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나는 나의 어지럼증에 대해 설명했고, 밤이 되면 더 심해진다고 덧붙였다.
   혹시 고속버스를 타면 더 어지러우신가요?
   저는 지하철만 타는데요.
   서울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이명이 있으세요?
   네. 자려고 누우면 귀에서 소리가 들려요. 예전부터 그랬어요.
   의사는 고심하는 표정을 짓다가 내 얼굴에 커다란 고글을 씌웠다.
   검사를 해보죠.
   고글을 쓰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미미한 빛이 왼쪽 하단에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웠다.
   의사가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래야 검사가 잘돼요.
   나는 알겠다고 답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김라미,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그런데 이런 생각도 ‘생각’인가?
   지금 생각을 하고 계신 거 같아요.
   뜨끔했다. 나는 죄송하다고 말한 뒤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멍하게 있으려 해도 오후에 해야 할 업무가 자꾸만 떠올랐다. 기업 공시는 중요한 일이었고, 오류가 발견되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팀장은 오전부터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지금 가야 하냐고 물고 늘어졌다. 업무 과정상 크로스 체크가 필요했는데, 팀장은 내게 자료를 공유해주며 자신이 놓친 오류를 내가 꼭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적 부담이 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멍하게 있으세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공시에 관해 계속 생각했다. 틀린 숫자나 빠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잘 확인해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크로스 체크를 해도 발견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되었다. 점점 업무 생각에 깊이 빠져들고 있을 때,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어려우세요?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렵네요, 라고 답했다. 의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좋아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원래는 멍하게 있어야 결과가 잘 나오는데, 환자분은 그게 아예 안 되세요. 차라리 좋아하는 걸 떠올리게 하면 의식적으로 앞을 보는 행위를 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번엔 좋아하는 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길게 침묵하자, 의사도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환자분은 좋아하는 게 없으세요?
   좋아하는 것이라…… 공시를 무사히 끝내는 것. 아슬아슬한 발언을 일삼는 인사팀 김부장이 퇴사하는 것. 식대가 인상되는 것. 내일 출근할 때 비가 안 오는 것. 정시에 퇴근하는 것. 죄다 회사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게 안 떠오를까.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검사에 실패하는 게 아닐까, 실패한 환자는 나뿐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의사는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검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암시였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의사가 말했다. 요즘 영화 뭐 보셨어요? 〈탑건〉 보셨어요? 〈토르〉는요?
   그의 어조가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둘 다 보지 않았다고 정직하게 답했다. 그의 영화 취향이 느껴져 코멘트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것까진 하지 않았다. 그가 〈헤어질 결심〉은 봤냐고 물었다. 나는 봤다고 말하다가 도기정의 우는 얼굴을 떠올렸다.
   친구가 울어서 저도 눈물이 났어요.
   됐어요. 잡혔어요.
   의사가 고글을 벗겨주며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정 신경염이네요.
   어쩐지 심각한 병명처럼 들렸다. 나는 즉시 물었다. 그게 뭔가요?
   의사는 전정 신경염의 원인과 증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양손을 들어올리더니 캐스터네츠 모양으로 만들어 여러 번 구부렸다가 펴면서 내 오른쪽 귀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주었다. 전정 신경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신호가 뇌까지 잘 전달되지 않는 상태라고 했다. 의사는 설명을 마치더니 갑자기 내게 핸드폰을 꺼내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지시대로 유튜브에 접속해 재활 운동 영상을 찾아보았다.
   영상에 나오는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재활 운동을 하세요. 떨어진 기능은 회복되지 않지만, 환자분의 노력으로 불편을 느끼지 않고 생활할 수는 있어요. 처방 약은 심하게 어지러울 때만 드시고요.
   나는 감사하다고 말한 뒤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비가 2만 원 넘게 나왔지만 어지럼증의 원인을 명확히 알았으니 아깝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도기정에게서 톡이 왔다. 병원에 잘 다녀왔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네가 우는 모습을 떠올려서 검사에 성공했다고 답장을 쓰다가 이내 지웠다.
   
   도기정이 반지를 맞추자고 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랬다. 기정은 내 등짝을 한 대 내리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왜 때리느냐고 묻지 않았고, 그건 왜 때리는지 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리는 터놓고 말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보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평양냉면을 먹었다.

*

   재활 운동을 하기 위해선 X 표시가 그려져 있는 명함 크기의 종이가 필요하다. 주요 운동은 X 표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연이어 상하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이 운동을 매일 하면 어지럼증에 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업무량이 많은 날은 재활 운동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도기정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회사원이 있어?
   나는 접시 위의 함박스테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귀퉁이가 한입 크기로 잘라져 있었다. 여전히 입맛이 없었다. 기정은 접시를 거의 다 비웠지만 나는 샐러드만 여물처럼 씹어 먹었다.
   공시는 마쳤지만 뒤늦게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크로스 체크로도 발견하지 못한 오류가 있었다. 팀장과 나는 벌금이 얼마나 나올지 고심하느라 새치가 늘었다. 내년 연봉 협상은 물건너간 일이 되었다고 말하며 팀장은 종일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이 입을 열 때마다 절망의 강물이 좁은 사무실에 흘러넘쳤다. 나는 크로스 체크를 해도 발견할 수 없는 오류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무력함을 느꼈다.
   기정은 내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네가 벌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내는 거잖아.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그 말은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기정은 내 몫의 함박스테이크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나는 기정에게 물었다. 너는 일이 안 힘들어?
   힘들지.
   근데 안 힘들어 보여.
   내색을 안 하니까.
   왜?
   몰랐어? 내색하면 더 힘들어지는 거.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내색하면 더 힘들어진다…… 나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며 도무지 멍하게 있지 못해서 힘들었고, 그런 와중에 너를 떠올리니 금세 결과가 나오더라고 말했다. 기정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랬니, 라고만 말했고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나는 왜 너를 떠올리면 멍해질까?
   기정은 피클 접시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건 마음속에만 두는 게 나아.
   무슨 뜻이야?
   마음속 깊이 묻어두라고. 썰물 때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앉는 거지.
   기정은 그렇게 말하며 포크로 함박스테이크 소스를 찍어서 접시에 작은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밀물이 차오르면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는 거야.
   기정은 그렇게 말하며 포크로 하트를 뭉갰다.
   지금 영화 얘기하는 거야?
   기정은 고개를 천천히 젓더니 갑자기 재활 운동은 잘하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화제를 바꾸려는 기정의 노력을 짐짓 모른 척하며 매일 두 번씩 한다고 답했다. 점심시간에 겨우 한 번 할 수 있었고, 자기 전 침대 앞에서 한번 더 했다. 하루에 20분씩 두 번, 세상이 기울어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재활 운동을 마치면 하루를 통틀어 가장 순수한 시간을 보낸 기분이 들었다.
   기정은 내 몫의 함박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배부르네. 좀 걷자.
   
   우리는 각자의 직장으로부터 중간 지점에 있는 충무로에서 자주 만났고 종종 명동이나 대학로까지 함께 걸었다. 걷다가 카페에 들어갈 때도 있었고, 말없이 걷기만 할 때도 많았다. 내가 길게 침묵해도 기정은 말 좀 하라며 다그치는 법이 없었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기정이 오줌이 마렵다고 말했다. 나는 등 뒤의 대한극장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극장 로비에서 기정을 기다리다가 종이를 꺼내 재활 운동을 시작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기정이 자기도 한번 해보자고 말했다. 어지럽지도 않으면서 왜 하려는 거냐고 물었더니, 기정은 술도 안 마셨는데 약간 어지럽다고 답했다. 나는 종이를 가방에 넣으며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만 걷자는 말은 하지 않았고 기정도 카페에 들어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어떤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무겁게 침묵하며 걷고, 서로를 돌아보다가 다시 침묵했다.
   우리는 동대문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나는 걸으며 다른 재활 운동을 시작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3초, 정면을 보고 3초,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3초를 유지하는 운동이었다. 3초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기정이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이것도 재활 운동이라고 말했고 기정은 곧바로 나를 따라 했다. 왼쪽으로 함께 고개를 돌리고 하나 둘 셋, 정면을 바라보고 하나 둘 셋,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하나 둘 셋. 다른 사람들이 보면 쟤들은 왜 저렇게 걸을까 의아해할 만한 광경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와서 기정에게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기정은 계속 나를 따라 했다. 같은 방향을 보며 걸으니 열 맞춰 행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동대문에 도착했을 땐 우리의 손에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기정도 나도 카페인에 취약한 체질이면서 커피를 좋아했다. 몸이 조금만 무겁게 느껴지면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또다시 찾아올 불면의 밤을 어떻게 보낼지 걸으며 의논했다. 밤새 통화할 수도 있지만 그건 이미 해본 방법이고 효과가 전혀 없었다. 수다를 떠느라 밤을 새운 적이 자주 있었고 출근하며 서로를 깊이 원망했고 회사에서도 정신을 못 차리다가 업무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 뒤로 우리는 밤에 통화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니 각자 보내야 하는 불면의 밤인데,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보는 편이 가장 낫다고 말하면서도 그건 하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밤새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기정은 자기도 그렇다고, 잠이 오지 않아서 억지로 보는 거지 재미를 느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차라리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어.
   워커홀릭인 기정의 말에 나도 그렇다고 답했다. 잠이 너무 오지 않을 땐 차라리 회사에 가서 밀린 업무를 하고 싶었다. 일을 하고, 또 하고, 계속 하면서도 나는 늘 일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기정은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가 능력이 없나?
   무슨 뜻이야?
   남들은 금방 끝내는 일을 우리는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야 겨우 해내는 건지도 몰라.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강하게 부인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하면 진짜 우울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기정은 우울하다고, 그렇지만 회사에서 밝은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꾸했다. 회사에서 밝은 생각을 하다니, 그 말 자체가 이상했다. 회사에서 밝은 생각을 하는 인간은 대표이거나 과중한 업무 때문에 정신이 나간 직원일 것이다.
   이번엔 내가 오줌이 마려웠다. DDP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화장실만 쓰고 나왔다. 기정은 로비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기정은 내게서 조금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업무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표정이 심각해서 그런 전화인 줄 알았는데 반말을 하는 걸 보니 아니었다. 기정은 그래, 그럴 수 있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 말들을 하다가 곧 보자, 하고 말한 뒤 통화를 마쳤다. 나는 누군지 물었고, 기정은 대답을 피했다.
   누군데 그래?
   기정은 그게 왜 궁금하냐고 묻더니 벤치에 잠깐 앉았다 가자고 말했다. 나는 대답을 피하는 기정이 수상해서 누군지 집요하게 물었고 기정은 아는 동생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아는 동생인데?
   기정은 딴소리를 했다. 난 좀 쉴 테니까, 넌 재활 운동이나 해.
   나는 끝까지 캐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어지럼증 때문에 참았다. 별로 중요한 대화도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왜 궁금해하고, 기정은 왜 숨기려하나.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지 별게 다 신경 쓰였다.
   벤치 앞에 서서 가장 어려운 재활 운동을 시작했다. 한쪽 발을 다른 발 뒤에 일렬로 붙인 뒤 양손을 교차해서 어깨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몸은 곧바로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기정이 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집중해, 하고 외치기도 했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눈을 번쩍 뜨면 기정이 애처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정의 얼굴을 보며 다시 중심을 잡았지만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온몸이 흔들렸다.
   기정이 말했다. 신기하네. 눈을 감으면 왜 그렇게 흔들려?
   나도 모르겠어.
   그냥 나를 계속 봐. 그게 낫겠어.
   연습하면 언젠가 되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몸을 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어졌을 때 기정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눈 뜨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나는 그렇게 했다. 눈을 뜨지 않고 기정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었다. 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심이 잡혔다. 기정은 내 손을 한참 동안 잡고 있더니 힘없이 놓았다. 나는 눈을 떴고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기정을 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고 기정은 더워서 그런다고 답하며 내 눈길을 피해 앞서 걸었다. 나는 기정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워서 우는 사람도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

   팀장이 잠적했다.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코로나 때문에 외부 식사가 금지되었지만, 팀장은 혼자 점심을 먹겠다며 사무실을 나가 네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게 했다. 인사팀 김부장이 그를 찾아 난리가 났지만 끝까지 둘러댔다. 사라진 팀장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는 지난주에 이석증에 걸렸다. 아침에 눈을 뜨니 심한 어지럼증이 밀려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가족이 운전하는 차에 실려서 병원에 갔는데 이석증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전정 신경염보다 이석증이 더욱 심한 어지럼증을 유발한다는 걸 알았기에 그를 동정했다. 밀린 업무 탓에 팀장은 연차를 하루만 썼고, 오늘은 한나절 동안 잠적하다가 나타났다. 어디서 뭘 했는지 묻지 않았다. 셔츠가 땀에 젖은 채로 나타난 걸 보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회사 근처 천변을 걷다가 온 것 같았다. 전에 한번 그곳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팀장의 업무나 나의 업무나 과중하긴 마찬가지였다. 팀장은 모회사에서 수시로 내려오는 업무 지시에 치여서 병원 갈 시간도 내지 못했다. 와중에 자꾸 재발하는 이석증 때문에 괴로워했다. 결국 팀장은 야근용 비품인 라꾸라꾸 침대를 가져와 사무실 구석에 펼쳐놓고 스스로 치환술을 했다. 떨어져나간 이석의 위치를 원래대로 복구하는 치료였다. 원래는 병원에서 받아야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는 팀장은 유튜브 영상을 보며 스스로 치료했다. 나도 내 자리에 서서 재활 운동을 했다. X 표시를 보며 초점 잡는 훈련을 했다. 눈을 감고 양어깨에 두 손을 올린 뒤 균형 잡는 훈련도 했다. 팀장과 나는 둘 다 귀에 이상이 생겼고, 병자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신입 직원만 멀쩡했다. 신입은 자신의 슬픈 미래를 떠올렸는지 양쪽 귀를 두 손으로 감쌌다.
   팀장은 과중한 업무량과 공시 오류 때문에 이석증에 걸렸을 것이다. 나 역시 번아웃을 앓을 시간이 없어서 번아웃 증상을 무시했던 것 때문에 전정신경염에 걸렸을 것이다.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 이 한마디로 모든 걸 정리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일은 줄어들지 않고, 나의 업무 처리 속도는 절대로 빨라지지 않으며, 업무의 난도는 점점 높아지기만 하니까.
   도기정에게서 톡이 왔다. 연차를 냈고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중이라는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뭐든 계획을 세워 행하는 J형 인간인 도기정의 충동적인 행동에 나는 놀랐다. 따라오라고 말하려나 싶어서 기다렸지만 카톡 창은 내내 잠잠했다.
   기정은 알고 있다. 내가 크로스 체크에 실패했다는 것을. 팀장이 찾아내라고 한 것을 찾아내지 못해서 우리 팀이 병실이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실패한 크로스 체크가 한 가지 더 있다는 건 모를 것이다. 어쩌면 알기에 여행을 떠났다고 나를 도발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DDP 앞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던 기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지 끝까지 물어봐야 했을까.
   나의 처리 결과를 뒤튼 오류와 기정의 처리 결과를 뒤튼 오류는 같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오류는 그 어느 것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기정은 나를 용서해줄까. 너의 오류는 나의 오류를 지적하지 못하는 용기 부족에서 비롯된 거라고 말하면 기정은 나의 등짝을 또 때리겠지.
   
   나는 기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초점을 잡자. 정확하게 보자. 나는 지금 무얼 보고 있나. 무얼 봐야 하나. 워커홀릭의 삶을 선택하며 서로의 진심을 들여다보려는 시간을 없앤 우리에겐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늦은 오후 무렵 기정에게 톡을 보냈다. 크로스 체크를 다시 해보자고. 이번엔 반지가 아니라 말로써 해보자고. 평양냉면 면발에 휘감겨 있던 너의 혀와 나의 혀는 이제 다른 걸 탐색해봐야 한다고. 부끄러움은 잠깐이고, 사랑은 영원하다 생각했지만 용기내 보낸 나의 톡을 기정은 읽지 않았다. 숫자 1이 나의 눈에 날카롭게 꽂혔다.
   열차에서 내려 지하철역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도기정 없는 서울이 오른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이서수

매일 소설을 쓰고, 가끔 다른 일도 합니다. 잘 쉬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닌지 가끔 염려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 저를 지켜주겠지요.

2022/10/25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