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가 물리치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는 분명히 그렇게 썼다.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올린 사진은 그날 아침 출근길에 찍은 횡단보도, 빨간 신호등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났고, 그는 무료했다. 같은 시간대에 매일 치료를 받으러 오는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워 무릎에 온찜질팩을 올려놓고 있었다.
   백승수가 그래서 어떻게 될 거 같아?
   커튼 안쪽에서 셋 중 한 명이 말했다.
   할아버지, 저 또 진짜인 줄 알았잖아요. 주무세요.
   진짜야.
   두 번째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가 대답했다.
   드라마죠. 만든 얘기. 그러니까 가짜요.
   용식이 사랑이 진짜배긴데. 동백이 얘기를 가짜라고 할 수 있어?
   용식이 자체가 가짜라고요, 할머니.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진짜 사랑이라는 말에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동백이가 왜 가짜야.
   세 번째 침대에 누워있는 아저씨가 대답했다.
   드라마 끝나면 동백이고 용식이고 없으니까요.
   왜 없어? 동백이랑 용식이는 잘살고 있겠지.
   드라마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는 동백이나 용식이가 셋의 지인인 줄 알았다. 또 속았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더욱이 몰랐다. 셋이 향미의 슬픈 사연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때, 그는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런 누나가 아직도 세상에 있는지 믿을 수 없었고, 본 적도 없는 향미의 동생에게 분노했다. 그러다 보면 동백이도 용식이도 향미도 모두 그가 아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백승수나 운영팀장은 최근에 알게 된 사람들이다. 이 병원으로 직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는 이 셋이 삶의 어떤 부분을 공유한 사이인 줄 알았고, 무료한 나머지 그들의 이야기에 저절로 귀 기울였는데, 그러다가 알았다. 동백이든 향미든, 백승수든, 그들은 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 속에 있었고, 셋은 새로운 그들을 계속 불러왔고, 그는 무료했다.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리치료실의 문이 열렸고, 사라가 들어왔다.

   물리치료 받으러 오셨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가 물었고,
   박효진입니다.
   사라가 대답했다.
   그는 사라를 침대에 앉히고, 어디가 불편한지 물었다. 사라는 말없이 바지를 걷어올렸는데, 다리가 심하게 부어있었고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었다.
   어쩌다 다치셨어요?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어요.
   헛디디는 게 무섭죠. 다음에 넘어지면 바로 냉찜질을 하세요. 미세 골절을 방치하면 실제로 뼈가 부러지기도 합니다. 믿음 같은 거죠. 잘못된 믿음 같은 거.
   그는 사라의 다리에 온찜찔팩을 올려주며 일부는 말했고, 일부는 말하지 않았다. 사라는 30분 동안 코를 골면서 잤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사라는 같은 시간에 왔고, 매번 코를 골면서 잤다. 일주일은 무료하게 지나갔고, 그 사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붓기는 많이 빠진 거 같은데, 통증은 좀 어떠세요?
   사라가 일곱 번째 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 그가 물었다.
   낫겠죠.
   사라는 졸린 눈으로 무심하게 대답했고,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겨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싶었나, 사라에게 그의 인스타그램에 올려둔 동영상을 보여줬다.
   족부 관절 운동 안내 영상이에요.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실 것 같아서요.
   사라에 대한 오기는 아니었다.
   사라는 그날 바로 그의 인스타그램에 팔로우 신청을 했고, 족부 관절 운동 안내 영상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날 그에게 팔로우를 신청하고, 그 영상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은 사라뿐이어서 그는 사라가 박효진인 것을 바로 알았다. 사라의 인스타에서 그가 처음으로 본 사진은 눈 쌓인 땅과 하얀 하늘. 흰 지평선. 끝없이 하얗기만 한. 그 사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니었다면 온통 하얗기만 한 하늘과 땅의 경계를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똑같이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다니. 그는 생각했고, 그 사람이 사라인지 알 수 없었다.

    더 깊은 밤과 덜 어두운 밤이 계속됐다.
   내내 눈이 내렸다.

   그 사진 아래 있던 문장들. 계속 밤.
   그는 거의 반자동적으로 이전 게시물들을 시간 역순으로 따라 읽기 시작했다. 어떤 게시물은 사진만 보았고, 어떤 게시물은 사진도 대충 보았다.

   +82. 대한민국은 어쩌다 국가번호도 82가 되었을까.

   이런 문장은 짧아서 읽어졌다.

   어색하고. 미묘하고. 가끔은 긴장되는. 곧이곧대로. 왜 그렇게밖에. 뭐 그럴 수도.
   그런 것들을 지나. 새해가 온다.

   이런 문장은 뭐래, 싶어서 읽었다.

   아픔답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이 아픔답다는 것으로 입력된 지 모르고 진행되는 문장. 아픔답다는 것은 자유. 오타, 이후. 자유. 왜곡. 어떤 것의 안쪽.

    이런 문장은 그도 오타를 자주 내는 편이라 공감하면서 읽었고, 이 문장 위에는 한글 창에 아픔답다는 것, 이 왜곡된 채 찍힌 사진이 있었다.

   외롭다는 말의 반대말이 뭔지 알아?
   어젯밤 누군가에게 문자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외롭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외롭지 말라는 말은 마치 네가 외로워 보인다는 말 같아서. 주제넘게 상처는 주고 싶지 않아서. 외롭지 말라는 말 대신 그 반대가 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번거롭다.
   외롭다의 반대는 번거롭다라니.
   네가 외롭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겠지만.
   당신, 올해는 번거로우시길. 이렇게 말하는 건 좀.
   하고 누군가에게 답을 보내고.
   그렇다면 나나 번거로울까 했지만. 번거로운 건 지치는데 싶어서 생각조차 번거로워졌다.

   이런 문장은 뭐랄까, 그래, 번거로웠다.
   대체로. 대체로 그랬다. 읽는 동시에 증발하는 문장들. 사라의 팔로워는 2명. 이러니 2명이지 싶어서 그는 웃었다. 오히려 이 2명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팔로워는 3000명. 그는 그가 물리치료사 중에 팔로워가 가장 많은 사람일 거라고 자부한다. 그가 그의 팔로워 숫자에, 그가 올린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에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며, 여유롭게, 다음으로 본 게시물에는 이런 문장들이 써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갑자기 터지는 웃음.
   앞쪽에서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채도가 각기 다른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는 이 말들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사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인스타로 소통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구나. 그럼 인스타를 왜 하지? 궁금했다. 최근 게시물로 돌아가서, 흰 지평선 사진을 잠깐 다시 보았고, 처음 보았을 때처럼, 누군가를 떠올렸고, 믿는다는 것, 누군가를 지우려고, 바나나는 바나나 지구는 지구, 계정 주소를 읽었다. sarah00. ‘좋아요’를 눌렀다. 빨간 하트 옆에 숫자가 3으로 바뀐 것을 보면서 그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 뒤로도 몇 개의 게시물을 더 봤고, 금세 흥미를 잃었고, 특이할 것 없는 계정만이 기억에 남았다.

   다음날 같은 시간, 사라는 여덟 번째 치료를 받으러 왔고, 똑같이 30분 동안 코를 골면서 잤지만, 이제 그에게 사라는 일곱 번째 치료를 받으러 왔던 사라와 같은 사라는 아니었다. 그는 이때부터 박효진을 사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사라가 물리치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바로, 사라다, 사라의 계정을 떠올렸다. 동시에 흰 지평선이 떠올랐고, 북극으로 갈 거야. J의 말이 떠올라서 빨리 다른 생각을 했다. 그 사진 속에 서 있는 사람이 사라였을까, 저런 체형의 사람이었나. 사진으로 돌아가 얼굴을 확대해보고 싶었다. 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검지와 중지를 벌려, 그사이에 희미하게 보이는 사라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박효진님,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사라를 침대에 앉히면서 왜 사라일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전기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사라가 코를 골며 자는 30분, 온찜질 시간이 지나고, 그는 사라가 누워있는 침대의 커튼을 열었다.
   운동은 해보셨어요?
   그는 사라의 다리에 전기 치료기를 연결하며 물었다.
   인스타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사라가 그에게 되물었는데, 그는 공격을 받았다고 느꼈고, 동시에 사라가 그의 팔로워 수에 놀랐구나 싶어서 만족했다.
   열심히? 열심히는 아니고. 재밌잖아요.
   대답하면서 그는, 번거롭다, 싶어서, 아, 이렇게 번거롭기로 작정하신 건가요?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도 모르게 불쑥,
   그 사진 속 사람, 박효진님인가요?
   물었다. 곧바로, 그는, 이건 아닌데, 생각했다. 인스타 이야기를 현실로 이렇게 바로 끌고 오는 건 그답지 못했다.
   사진이요?
   사라가 물었다.
   아, 저도 인스타 들어가 봤거든요. 그 왜 눈밭에 사람 서 있는 사진이요.
   그는 오히려 더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과장되게 웃었고, 각자의 커튼 안쪽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다른 환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재미있어 할 것이 상상돼서 민망함을 느꼈다.
   아뇨, 모르는 사람.
   사라가 웃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해서 그는 더 민망해졌다.
   그런데 인스타를 왜 하세요?
   그는 공을 사라에게 넘기고 싶어서 물었다. 자신이 민망해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라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가 웃었다. 사라도 웃으면,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뜰 것이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하니까 뭔가 감추는 거 같다고.
   뭘 감추시는데요?
   글쎄요, 뭘 굳이.
   그런데 왜 시작하셨어요?
   그 누가 그러더라고요. 근데 굳이 살잖아. 굳이 만나고. 굳이 헤어지고.
   그래서?
   그랬나.
   그는 갑자기 사라와의 대화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 별거 아닌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서 질문한 사람을 도리어 난감하게 만드는 사람들. 진지하기만 할 뿐 본질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 가상을 가꾸면 현실이 바뀐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부담이 싫었다.
   아,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정리하고 나오세요.
   그는 갑자기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커튼 바깥으로 나왔다. 사라가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물리치료실의 문을 열고 나갈 때, 그는, 번거롭다는 단어마저 사라의 인스타에서 본 단어였다는 것을 떠올렸고, 그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열어, 사라가 나간 문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눌렀다. 닫힌 문 사진을 업로드하고, 그 아래, 그런 날이 있다. 이렇게 썼다. 302명의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줬고, 그는 민망함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만족했다. 그런 날이 있는 것이다. 평균 300여 명의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좋아요를 눌렀다. 그가 올린 게시물에는 무조건 300개 이상의 ‘좋아요’가 달렸다. 그는 안도했다. 사라는 언제까지 치료를 받으러 오는 걸까. 그는 갑자기 사라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좀 와라, 생각하면서 퇴근했고, 친구를 만나 맥주를 한 잔 마셨는데, 맥주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면서 사라의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다. 여기 왜 또 들어온 거냐. 그는 새 게시물이 없는 창, 여전히 끝없는 지평선, 흰 지평선 사이에 서 있는 한 사람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랑? 그게 뭔데? 비열하게 웃는 얼굴. 그는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비행기는 두 시간 넘게 움직이지 않는다. 불이 켜졌다 꺼지고, 시동이 꺼졌다 켜지고. 히터가 나오다 에어컨이 나온다. 안전벨트 등이 켜졌다 꺼진다. 꺼졌다 켜진다. 나는 어떤 말을 잘 알아듣고, 어떤 말은 끝까지 모른 척한다. 알아들은 말이 슬퍼서 그릇을 닦다가 발꿈치를 올렸다 내린다. 비행기의 모든 문은 닫혀있고, 이륙도 하지 못한 비행기에서 착륙의 분위기가 난다. 갑자기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짐을 꺼내고, 모두가 뒤를 돌아본다. 금방 조용해진다. 이제 제발. 제발 그만 좀 해. 운명이 있다면.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할 때. 운명에. 나는 단호하고 싶었나. 단호하지 못했나.

   그는 길어서 어제는 읽지 않은 게시물을 읽었다. 이 글은 나란히 꽂힌 접시를 찍은 사진과 함께 업로드되어 있다. 그가 접시들의 색깔을 일별하고 있을 때 맥주가 나왔다. 친구와 맥주잔을 부딪치면서 그는 괜히 발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제발 그만 좀 해. J가 있는 도시를 상상했다. 집어던진 접시들.
   부장이 자꾸 주말에 등산을 가재. 아니 산악회를 들라고. 왜 나한테 자꾸 등산을 가재.
   야, 단호하게 말해. 단호하게. 왜 말을 못 해.
   그는 그가 방금 단호하다는 말을 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친구에게 단호하라고 말했다. 게시물의 문맥상 단호하다는 다소 갑작스럽게 나왔고, 그는 이 게시물에서 무슨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단호하다’는 그에게 의문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접시들. 운명이 있다면. 빨강 하나, 검정 셋, 초록 둘.
   야, 정신 차려. 우리 부장 얘기야, 지금. 너네 병원에 오는 환자 얘기 아니고. 누군 말할 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냐.
   친구가 담배를 들고 일어섰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따라나설 필요가 없다. 친구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장 욕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사라의 인스타로 돌아갔다. 그가 아는 인스타 중에 팔로워 수가 제일 적은 인스타. 아직 이 빈곤한 인스타를 독파하지 못해서 자꾸 들어가는 것이지, J 때문은 아니다. 그는 생각했다. 신혼여행은 북극으로 갈 거야. 정말 로맨틱하겠지. 세상의 끝. 지구의 끝. 그는 다음 게시물에서 북극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단어들을 넣고 끓여서 잼을 만들면 잼이 되는 창.
   눈구름, 눈, 그치지, 좀, arctic, 북극이라는 말, 해, 기다리는, 해.
   북극에 왔더니 해가 뜨지 않는다. 해가 뜨질 않으니. 좀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잼이 끓으면 책을 펼쳐서 맨 뒷장에 발라야지. 북극립눈구름해리구는지그수. 카스텔라보다 바게트. 질긴 바게트를 질겅질겅 씹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쨈 바른 책을 둘둘 말아 혀로 핥아먹으면 해가 잠깐 뜬 것처럼. 달아. 기도를 하고 싶어질까. 입술에 남은 쨈 때문에. 입이 붙었나. 기도는 기도를 부르고. 나는 기도를 좋아해. 기도를 하는 동안은 잠깐 모든 순간이 밀봉되는 기분. 눈을 감고, 다섯 장의 카드를 뽑았다. 해, 달, 구름, 있다, 없다.

   친구가 돌아왔다. 다섯 장의 카드 얘기는 뭘까, 그는 그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사라는 접시를 만든다. 접시에 그림을 그린다. 접시 사진을 찍어 올린다. 이 게시물에는 흰 접시 다섯 개가 가마에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섯 장의 카드. 해, 달, 구름, 나머지 둘은 뭐였더라. 동백이, 용식이. 그는 그 둘이 갑자기 떠올라서, 그들이 정말 아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어이가 없었다.
   근데 그 부장이 어제는 심지어 등산복을 사러 가자는 거야, 주말에. 아니 내가 왜 쇼핑까지 같이 해줘야 돼. 그리고 요새 누가 주말에 쇼핑하러 돌아다녀. 인쇼 하라고 인쇼.
   힘없는 네가 참아야지 별수 있냐.
   그가 친구의 술잔에 술을 채울 때, J의 인스타에 새 게시물이 떴다. 그와 J는 더이상 서로의 팔로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날 밤, 취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J의 인스타에 들어가서야,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
   이 문장을 읽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으며, 6개월 뒤 결혼했다.

   그는 결혼 소식을 인스타에 올렸다. 풍선으로 가득 찬 방 사진을 올려놓고,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을 했고, 사라와 한집에 살고 있다, 고 썼다. 사라도 그도 사실 결혼 생각은 없었다고. 사라와 처음 만난 날, 둘은 술을 마셨고, 사라네 집으로 함께 갔다고. 그는 그날 작은 충격을 받았는데, 사라는 딜도를 수집하는 사람이었고, 딜도가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그는 그날 처음 알았다고 썼다. 사라의 침실 한쪽에 색색깔의 다양한 모양의 딜도가 전시되어 있었다고. 그는 그날 딜도를 사진으로 찍어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도 썼다. 그건 거의 예술에 가까웠다고도. 사라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썼다. 다음 날 아침 사라의 인스타에는 사진이 한 장 올라왔는데. 빨간색. 단지 빨간,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온통 빨간, 사진 밑에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고 썼다.

   실망시키지 않는 가상.
   절대 배신하지 않는 가상.

   이런 진상. 그는 이 글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인스타에 똑같이 빨간 사진을 올렸고, 이런 진상. 둘은 그렇게 커플이 되었다고. 그런데 왜, 어쩌다,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모든 결혼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결혼은 그렇게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어쩌다보니. 그는 그렇게 썼다. 스몰 웨딩. 둘은 양가 부모님만 모시고 간단하게 식을 올렸다고. 1200개의 ‘좋아요’. 그래, 그는 좋았다. 그래도 좋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결혼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지인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대체로. 대체로 사라와 그는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 그의 팔로워는 4300명이 되었고, 사라의 팔로워는 1500명이 되었다. 그가 사라와의 결혼을 알리며 쓴 둘의 사연이 그의 팔로워들 사이에서 사라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했고, 그중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사라의 팔로워가 되었다. 그는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필터를 이용해 사진을 찍지 않아도, 포샵을 하지 않아도, 그의 사진은 그가 올리는 많은 사진들 중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그가 올리는 어깨 관절 운동 영상이나, 목 관절 운동 영상보다 그의 계절별 코디 소개 영상이 두 배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다. 그는 몇 차례 엔터테인먼트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이 사라의 외모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사라의 인스타에 사라의 사진은 없었다. 사라의 사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 따르면 사라는 사진 찍기를 극도로 싫어했고, 자신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그에게도 절대로 사진을 올리는 일은 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라 같은 사람은 없다. 그는 사라에 대한 글을 올릴 때면, 꼭 이렇게 덧붙였고, 사람들은 이 말에서 사라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꼈다. 어느 날, 딜도는? 신혼집에 사라가 모은 딜도가 있는지 묻는 질문이 그의 인스타에 댓글로 올라왔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실망시키지 않는 가상이 아니라 거의 가상에 가까운 현실이다.
   질문이라면 사실 그는 받는 편보다 하는 편이 익숙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그가 인스타에 짧은 질문을 올리면, 다음날 사라가 자신의 인스타에 답을 올렸다.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와 사라의 6개월의 연애는 인스타에서 그들이 주고받은 수많은 질문과 대답으로 충만했다.

   당신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아무리 어려운 질문에도 사라는 답했다.

   당신이 믿는 것은?
   당신.
   신념이 중요한 시대라는 것. 그리고 정신.
   사라는 답했다.
   그들의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인스타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인스타에 나란히 올라와 있는 빨간 사진이었다. 그리고, 2년 만에 그들은 이혼했다. 그는 이혼 사실을 결혼했을 때와 똑같이 인스타를 통해 알렸다. 그는 그의 삶의 기자였고, 그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작가였으며, 훌륭한 사진가였다. 그는 그를 향해 플래시를 터트렸고, 그에 대한 뉴스를 전달할 의무와 권리를 느꼈다. 그는 그 누구보다 그 뉴스들에 슬픔과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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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기가 있는 거 같아. 두어 달 전에 사라가 말했다. 물렸어? 나는 거실 창을 닫으며 물었다. 더위 한풀 꺾였다고, 모기가 생기나 봐. 모기약 주문해야겠다. 사라는 거실 불을 껐고, 나는 영화를 틀었다. <그래비티> 주인공이 막 우주에 떠올랐을 때였다. 등이 너무 따끔거려. 사라가 등을 긁기 시작했다. 나는 사라의 등을 쓰다듬었고, 그만 보고 잘까, 물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다 말았고, 침실로 들어갔고, 곤히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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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모기약이 배달되어 왔다. 사라는 콘센트마다 모기약을 꽂았고, 집에는 무향의 모기약 냄새가 떠돌았다. 무향인데 왜 냄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 이놈의 모기. 모기가 너만 무나 봐. 나는 모기에 물리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 모기를 보지도 못했다. 모기들이 너무 극성이야. 이 모기약이 안 듣는 거 같아. 사라는 일주일 뒤 결과적으로 모기약의 모든 종류를 사 모으게 되었다. 밤새 모기향을 피웠고, 스프레이를 분사했으며, 여전히 콘센트마다 모기약을 꽂아두었다. 머리가 아파. 조금만 참아. 모기가 있어서 그래. 나는 특히 모기향을 견디기 힘들었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사라는 모기가 있다고 했다. 대설주의보가 내렸고, 한파가 시작됐다. 이렇게 추운데도 왜 모기가 있는 거지. 영하 13도의 날씨에 사라는 모기향을 피웠다. 등이 너무 따가워. 모기 맞아? 모기야. 모기면 보여야지. 모기라니까. 너 모기 본 적 있어? 내가 따갑다고. 따가워. 따끔하고 문 다음 가려워. 이게 모기가 아니면 뭐야? 보여줘. 뭘? 모기 물린 데 말야. 됐어. 뭐가 돼? 등이 따갑다고. 그래, 그러니까 등을 보자고. 넌 내가 모기도 아닌 걸 모기라고 한다는 거야? 아니, 내 눈엔 안 보이니까. 모기야, 내가 물렸어. 내가 모기에 물렸는데, 모기가 없다는 거야? 물린 내가 있는데 문 모기는 없다고? 그게 아니고. 그러면 우리 동영상을 찍어보자. 모기가 있는지. 하루 종일 거실을 찍어보자고. 동영상에 모기가 찍힐 리 없잖아. 사라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나는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재생 버튼을 누르고,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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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기는 없었다. 아무것도 날지 않았다. 동영상은 정지 화면 같았다. 사라와 내가 출근해 있는 10시간 동안 찍힌 것이라고는, 거실에 해가 들고 환해졌다가, 빛이 줄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는 과정뿐이었다. 그 사이 모기는 어디에서도 날지 않았다. 이거 봐, 모기 없지? 그러게 없네. 사라는 쉽게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날 밤, 사라가 우리 오랜만에 영화나 볼까 해서, 내가 영화를 틀었을 때. 아, 따가워. 어디서 또 들어왔나 봐. 사라는 등을 긁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여전히 우주에 떠 있었다. 모기 아니라니까. 봤잖아. 영상 찍을 때는 없었나 보지. 아니면 안 찍혔거나. 아무튼 어디서 또 들어왔어. 모기향 좀 피울게. 모기 아니라고.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기 아니라고. 모기야. 모기라니까. 사라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모기 아니야, 모기 아니라고. 그럼 내가 미쳤다는 거야? 모기가 없는데 모기가 있다고 한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모기가 없다는 거야. 없어, 진짜 없다고. 진짜 물린 건 나야. 물렸다고 나는. 내가 물렸는데 네가 왜 모기가 없대? 모기라고. 사라가 소리쳤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조용히 좀 해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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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의 첫 마디를 기억한다. 이혼해. 퇴근 후 마주 앉은 식탁에서 사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혼하자고. 장난해? 갑자기 무슨?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고 같이 살겠다고 생각한 거야? 저 지경을 만들어 놓고? 사라는 나에게 내가 올린 글들을 보여주었다. 여러 말 필요 없고, 이혼해. 사라는 캐리어에 옷들을 챙겨 담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그가 그의 이혼에 대해 올린 글이다. 네 개의 글 앞에는 모두 텅 빈 거실 사진이 있었는데 모두 다른 시간대에 찍은 사진이었다. 새벽에, 한낮에, 저녁에, 밤에. 찍힌 텅 빈 거실. 그는 인스타에 그가 이혼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자세히 올렸고, 많은 사람이 그와 사라를 걱정했다. 드물게. 근데 무슨 이혼을 소설처럼 얘기하시네요. 이혼이 장난임? 이런 건 좀 안 올리면 안 되나? 같은 댓글이 눈에 띄었지만 더 많은 응원 댓글에 묻혔다. 사라의 계정은 그가 이혼을 알린 직후 삭제되었다. 그들 부부의 이야기는 그의 인스타를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모기는 쉽게 없었던 것이 되었다. 사라는 과민한 사람이 되었다. 사라는 그때 어떤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사람이 되었다. 사라는 피부병을 앓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모기 때문에 이혼한 최초의 부부가 되었다. 사람들은 다음 해 여름에도 모기를 보면 문득 그들 부부의 이혼을 떠올릴 것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뜨겁고 애틋하고 다정했던 만큼 사람들은 그들의 이혼을 안타까워했고 그것이 없는 모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그들의 이혼은 모기와 더불어 농담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는 이혼 직후 직장을 옮겼다. 직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의 팔로워는 이제 5000명이었고, 그는 주로 유머를 올렸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터지는 그런 사진들. 글은 최대한 짧은 문장만 썼다. ‘좋아요’의 숫자도 늘었다. 그가 새로 일하게 된 물리치료실에도 같은 시간에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비슷하게 아는 사람을 공유했고, 그들에게는 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더이상 J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병원 오면 치료받느라 힘들고, 집 가면 애새끼들 때문에 힘들고, 사무실에선 뭘 해야 될 지 모르겠어서 힘들고, 교회 가면 인간들 때문에 힘들고, 인생 왜 이렇게 힘드냐.
   목청이 유독 좋은 사람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치료를 받으러 와서 매일 똑같은 말을 했다.
   힘들다는 말을 들어도 그는 힘들지 않았다.
   내가 이 병원에 얼마를 쳐 부었는데, 너네가 나를 이따위로 대접해. 부원장 나오라고 해, 부원장.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손님에게도 그는 화내지 않았다. 왜 부원장일까. 원장이 아니고 부원장인 이유는 뭘까. 그는 그 환자의 도수치료를 하면서 생각했다.
   그는 이제 J의 인스타에 들어가보지 않았고, J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이따금 사라가 그리웠다. 사라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사라가 실제로 그의 곁에 함께했던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사라의 인스타뿐이었다. 그는 사라를 누구와도 함께 만나지 않았다. 사라가 사라지고 그는 사라에 대해 생각했다. 사라가 실제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 사라는 있었나, 없었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있다, 없다. 있었다. 없어졌다. 없었다. 없다. 그에게는 다를 것이 없었다. 나머지 두 개의 카드. 있다, 없다, 였다. 그는 갑자기 생각해냈다. 사라는 그에게 기쁨을 주었고, 고통을 주었다. 때로 그는 정말로 사라를 사랑한다고 느꼈으며 사라의 말들을 이해했다. 사라의 모든 말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의 말도 어딘가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사라를 통해 J를 완전히 잊었다. 사라에 대한 사랑. 그는 지난 2년 동안 그의 인스타와 사라의 인스타를 열심히 관리했다. 사라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사라에 대한 글을 올릴 때, 그는 정말로 사라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자 사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 다시는 없을 사랑이 되었다. 세상에 사라 같은 사람은 없다. 그는 사라를 믿었다. 실망시키지 않는 사라. 절대 배신하지 않는 사라. 이제 사라의 계정은 사라졌고, 어디에도 사라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서 그는 더욱 사라가 그리웠다. 사라와 나누던 대화가 그리웠다.

   3년 전 박효진이 물리치료실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왔을 때, 그는 읽었다.

   믿는다는 것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페달을 밟았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해의 패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지
   아름다운 자와 아름다움에 매혹된 자

   아니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지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 자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믿는 자

   아니

   아니는 응의 짝, 모르니의 짝
   다시 둘로 갈라지는 가지 끝

   돈, 다른, 비주얼
   쉽게 관심과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5000억에 경매된 그림, 절반의 구름, 초록 눈동자

   가도 가도 모래뿐인 마음은
   자도 자도 해 뜨지 않는 극야는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오류를 발견하는 과정일 뿐이다
   생각하던 습관이 나를 끌어당긴다
   시간의 점선을, 단속적 귀환을, 고유한 직선으로, 회복 불능의 침입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습관의 힘은

   여름 궁전에서 쉬지 않고 우는 까마귀
   잎을 잃은 나무들
   막말로

   막말로로 시작되는 말은 어느 때나 하지 않는 편이 좋다

   피도 땀도 아닌 마음을
   액체에 가깝다고 생각해

   마음이 움직일 때 눈물이 넘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마음이 마음대로 되나,
   마음이 마음대로 흘러,
   대체 마음을 어디에 쏟고 사는 거니

   말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도 닿고 싶지 않아
   메아리에 닻을 내린 배

   잃어버린 반지는 누군가 주웠을 것이다
   사실 반지는 땅에 묻혔는데도

   바나나는 바나나 지구는 지구

   피를 쏟으면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새가 날든 말든
   기도는 계속된다

   J의 인스타에는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막말로, 너 나랑 결혼까지 생각한 건 아니잖아? 끝이야 뻔한 거 아니었어? J가 말했었다. 사랑? 그게 뭔데? 붙잡는 그를 향해 J가 그의 식탁 위에 있던 몇 개의 접시를 던졌다. 믿는다는 것. 포기하길 다행이네. 그는 J가 있는 곳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썼다.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어떤 사건도 원하지 않았다. 어떤 사건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J는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그는 J 때문에 직장을 옮겼고, J와 꽤 오래 같은 병원에 근무했다. J는 그에게 사건 그 자체였다. J가 하는 모든 말이 그의 삶을 움직이게 했다. 그를 살아있게 했다. J와 아직 친구였던 어느 날, 퇴근길에 J가 술에 취해 말했다.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
   그에게 이 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 말의 의미도. 플라톤도 헤겔도, 예술도 진리도. 가상도 본질도. 그날 들었던 어떤 말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 난 이 말이 이상하게 좋았어. 그냥. 시를 쓰고 싶었거든. 어릴 때. 본질에 본질적인. 그 말이 좋더라고. 본질이 뭐든.
   그는 진지한 J의 옆얼굴을 보았다.
   누구 인스타에서 본 말이야. 누가 올렸더라고. 없었던 건데 있게 되는 거. 잊었던 걸 기억하게 하는 거.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하는 거. 알 수 없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 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거.
   J가 그의 손을 잡았다.
   사랑도 그렇지 않나. 없던 건데 생긴 거잖아. 원래 나한테 없던 게 분명한데 어디서 생기나. 너에 대한 사랑은.
   J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친. 그는 그가 믿었던 사람을, 그의 믿음을 비웃고 싶었다. 사랑? 그게 뭔데? J가 되물었을 때, 그때도 그는 저 말을 떠올렸었다. 재밌자고 한 말이지. 네가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을 줄 알았나. J가 비열하게 웃었다. 가상이 본질에 본질적인 거랑 사랑이 무슨 상관이야. 주정이지. 딱 봐도. 그냥 개소리. 야, 솔직히 술 취하면 무슨 말을 못 하냐. 거기다 대고 너는 무슨 사랑? 나 원래 그런 거 몰라. 가상? 본질? 그런 건 더 모르고. 시는 포기한 지 오래지. 시가 뭐냐? 그는 때때로 오기가 솟았다. 무엇에 대한 오기인지 알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진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어서 직장을 그만뒀다. 잘못된 믿음. 너를 믿었다는 것. 내가 너를 믿었다는 거. 그는 이 뼈저린 실수를 돌이킬 수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종 J를 떠올렸다. 몇 달 동안 누워만 있었다. 믿는다는 것. 그는 J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정강이를 미친 듯이 차고 싶었다. 용식이의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짜증이 일었다. 바로 그때 박효진이 물리치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효진이 코를 골며 자는 30분 동안 그는 J의 인스타의 글을 노려보고 있었다.

   박효진의 계정은 sarah00이고 이 계정은 여전히 존재한다. 팔로워는 이제 13명. 박효진은 그의 인스타에서 단 한 번, 족부 관절 운동 영상에 ‘좋아요’를 눌렀다. 새로 뜨는 게시물들을 다 확인하지도 않았다. 박효진은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사라는, 사라라고 불리는, 이름이 사라인 사라는, 계정 주소가 사라인 사라는, 그가 올린 게시물의 ‘좋아요’ 수만큼 많을 것이다.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 이 말을 J의 인스타에서 읽은 밤, 그는 sarah99, 인스타에 새 계정을 만들었다. 별 뜻은 없었다. 사라. 그는 그가 최근 가장 많이 들어가 본 인스타의 계정을 떠올렸다. 그가 박효진의 인스타에서 북극의 사진을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북극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인스타에 들어갈 때마다 J를 떠올릴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박효진의 인스타에 그렇게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게시물도 유심히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박효진이 북극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을 알았고, J가 북극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그 우연 때문에 그는 박효진의 인스타에 자꾸 들어갔고, 박효진을 계정명인 사라로 생각하게 되었고, 같은 이름의 계정을 만들었고, 사라를 사랑하기로 했다. 믿으면 진짜가 된다. 그는 빨간 사진을 찍어 올렸다.

   실망시키지 않는 가상.
   절대 배신하지 않는 가상.

   가상은 언제까지 가상인가. 가상은 어디까지 가상인가. 가상이 현실을 조종한다 해도. 가상이 현실을 뿌리까지 바꾼다 해도. 가상이 아무리 강력해도. 가상은 가상인가. 그는 이런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가상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가상에 충실했다. 존재의 등장과 퇴장에는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우연은 의심을 남긴다. 의심은 미련을 남긴다. 세상 어디에도 사라 같은 사람은 없다. 사라를 그리워하는, 가상을 그리워하는, 사라진 사라를 그리워하는 현실의 그가 있을 뿐. 그에게 사라는 온전한 사라, 박효진과 무관한 사라다. 오로지 그가 만든 사라. 그는 sarah가 들어가는 모든 계정의 인스타에 들어가보았다. 어디에도 그의 사라는 없다. 사라가 옆에 있다면. 사라에게 속삭일 수 있다면. 그는 사라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 그는 이 문장을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오해했다. 그에게는 그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새로운 믿음이 필요했다. 매번 새롭게 주어지는 다섯 장의 카드.

   그는 점심시간 직후 인스타에 접속해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 sarah2020.
   물리치료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윤해서

새벽부터 새벽까지 걸었다.
때로 진통제가 필요했다.

2020/01/28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