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대리.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내 이름은 이제부터 마대리다.
   우리 회사에서는 서로의 호칭을 성과 직급으로 불렀다. 윤대리, 명과장, 박차장, 황부장, 장이사까지 다양했다. 본명을 부르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실수로라도 본명을 부르면 고과 점수가 깎였다. 동료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명을 말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서로를 불렀다.
   마사원, 아니, 마대리. 승진 축하해!
   마대리 언니! 승진 축하드려요!
   사내 메신저에 연신 새 메시지 알림이 떴다. 나는 오늘부터 불릴 이름. ‘마대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여러분은 페르소나를 전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온전한 직원으로 존재해야 하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오로지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최선의 노력으로 책임을 다해 주세요.
   월요일 아침 회의 시간마다 사장은 지루한 말을 반복했다.
   이 회사에서는 명함에도 본명이 아닌 성과 직급을 조합한 이름을 인쇄했다. 업무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반드시 직급으로 이름을 대신했다. 최근에는 기업마다 직급을 없애는 게 트렌드라는데. 오히려 사회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직원들은 툴툴대면서도 정작 규칙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시시포스 출판사. 이곳은 대학 교재를 출판하는 소규모 출판사로, 대학 철학과와 국문과, 사회학과 등에서 필수로 선정되는 교재들을 펴냈다. 또한 대학교수들의 저서를 작가들의 자비로 출간해 주면서 초기 인쇄 및 제작 비용을 확보했고, 교수 지인들과 학생들에게 판매하는 수량으로 1쇄를 가뿐히 소진해 손익 분기점을 넘겼다. 그 외에도 정부 기관이나 학회 등에서 출판 용역 일을 꾸준히 받았다. 기본 삼십 년은 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였다.
   하지만 그만큼 회사 시스템이나 분위기가 매우 침체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즘의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시대적인 노동 악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 직원의 출퇴근 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사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하루 30분씩 공짜 노동을 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의무적으로 오전 근무를 해야 했다. 또 일 년에 두 번씩, 사장의 사유지인 수목원으로 워크숍을 갔는데, 처음 참석한 신입사원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워크숍을 빙자한 사장의 친목 행사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직원들은 사장과 사장의 지인들이 벌인 술판에 음식 나르는 일을 해야 했다.
   직원들은 모일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며 부당한 일에 분노를 표출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신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는 언제나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오갈 때마다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회사에 밉보일 일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부 옳은 말이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만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회사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5년째 근속 중인 나는 이 회사에서 편집장님과 우리 팀 팀장님 다음으로 가장 오래 다닌 직원이다. 장기근속의 비결은 이름 콤플렉스를 줄여 준다는 점이 컸다. 이곳에 입사하면서부터 매번 밝히기 부끄러운 이름을 쓸 일이 현저히 줄어들어 좋았다.
   마주봉.
   외할머니가 지어 주신 내 이름. 주봉(主峯)은 산맥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큰 꿈을 가지라며 지어 주신 이름이지만 뜻이 무색하게도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개명 신청을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적극적으로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이름 덕에 훗날 재물 복이 터진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부터는 개명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개명은 안 해도 되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회사에서는 내 이름을 상기할 일이 없었고, 밖에서도 굳이 내 이름을 밝힐 일이 거의 없었다. 야근이 잦아 친구 만날 일이 줄어들었고, 가족들과 전화 통화도 자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발급받을 때에도 이름 쓸 일이 많지 않았다. 스마트폰이나 계좌번호로 본인을 인증했으니까. 식당이나 카페에서 적립금을 적립할 때에도 핸드폰 숫자만 입력하면 끝이었다.

   마대리, 이사 잘했어?
   점심시간, 회사 근처 일본 가정식 식당에서 박차장님과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박차장님 질문에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 고장 난 것 빼고는 별일 없었어요. ‘이사’하면 제가 베테랑 급 부장인데요, 뭘.
   어제 낸 연차를 두고 박차장님과 나눈 대화였다. 사유는 이사였다. 결재를 승인하던 박차장님은 놀라면서 타일렀다.
   이사를 당장 내일 한다고?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미리 얘기했어야지.
   내일 뭐 급한 일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냥, 조용히 하려고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회사에 굳이 떠벌릴 필요가 있을까. 회사는 그저 일하러 오는 곳인데.
   아무튼 축하해. 이제 정시에 출근하겠네.
   정시요? 하하, 네.
   속으로 ‘그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엄밀히 따지면 정시에 출근하는 건 나였다.

   나는 회사에서 두 시간 거리의 남양주로 2년 전 이사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자취한 지 10년이 넘었고,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이사하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내 집 마련이 간절한 때에 우연히 공고를 보고 신청한 남양주시 행복 주택에 당첨됐다. 출퇴근 거리가 문제였지만,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호기롭게 계약하고 짐을 옮겼다.
   그러나 현실은 짐작과 달랐다. 힘에 부쳐 늦잠 자기 일쑤였고, 매번 차가 밀린다는 핑계를 대며 지각했다. 운전면허가 없어 반드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출퇴근 시간만 왕복 4시간이 걸렸다. 다른 직원들이 30분 일찍 출근할 때 나만 9시에 출근했다. 다른 회사였다면 정시에 출근한 것일 테지만 여기에서는 30분이나 지각한 셈이 되었다. 매일 아침 눈치보며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오래 일한 직원의 특권일까. 내게 주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일찍 일어나거나 서둘러 준비하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게 되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놓여 있는 듯했다. 그 상태로 내 일상은 매일 신호를 무시한 채 질주하는 오토바이처럼 흘러갔다.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숙고한 끝에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간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면 스스로 각성이 될 것 같았다. 이사했다고 해서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회사에서 주민등록등본을 확인할 일도, 누군가 집들이하자고 나설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이사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행복주택의 입주 계약 조건이 최소 2년 거주였고, 그때까지 기다리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다.
   
   전입신고랑 확정일자 잘 받았지?
   박차장님 질문에 뜨끔했지만 곧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요.
   나보다 일 년 먼저 경력직으로 입사한 박차장님은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오지랖이 넓어 과도할 정도로 상대방을 염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가식적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아마도 회사를 그만둔 팀원들을 내보내고 인력을 새로 뽑는 데 학을 떼어 나만큼은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도 박차장님과 합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 덕분에 우리 둘은 수많은 직원이 들어왔다 나가는 동안 끄떡없이 점심시간을 함께했다.
   이사하느라 고생했겠네. 빌라로 간 거야?
   네. 집값 맞추려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아파트는 어쩌고?
   친구한테 잠시 빌려주기로 했어요.
   다행이네. 어렵게 구한 아파트잖아. 그나저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아휴.
   고생은요, 무슨.
   나는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이사에 대한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예상을 빗나가는 질문이 나올 것만 같아 불안했다.
   박차장님, 여름휴가 아직 안 다녀오셨죠?
   이제 슬슬 계획 세워 봐야지. 마대리는 언제 가려고?
   추석 때나 갈까 생각 중이에요.
   참, 마대리.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봤는데, 이것 좀 봐.
   박차장님이 카카오톡으로 링크를 보냈다. 게시 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주봄씨를 찾습니다.’1)
   이게 뭐예요?
   계속 읽어 봐. 잘하면 마대리 대만 여행 공짜로 갈 수도 있겠어.
   게시 글을 자세히 읽어내려갔다. 대만 여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 놓았는데 사정상 못 가게 되어 양도한다는 이야기였다. 조건이 있었다. 성별이 여자일 것, 이름이 ‘마주봄’일 것. 영문 철자가 일치할 것.
   ‘마주봄’이라는 이름을 맞닥뜨린 나는 뜨끔했다. 잠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회사에 거짓말한 것은 이번 이사 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본명을 말할 때도 한 번 거짓말을 했다. 사장과 회사 사람들에게 본명을 ‘마주봄’이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면접을 보던 중 사장이 이력서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독특하다고 했다. 이름에서 ‘봉’자의 이응 받침을 미음 받침으로 잘못 보고 한 말이었다. 이름 덕분인지 면접이 술술 잘 풀렸다. 나는 결국 내 이름을 고쳐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면접이 끝난 후, 바로 합격 통보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입사 첫날, 회의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면서 나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떨리는 마음으로 내 이름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마주봉입니다.
   그러자 저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력적인 이름이다, 누가 지어 주신 이름이냐, 독특한데 이 회사에서는 못 쓰니 안타깝겠다……
   장편집장님이 나를 보면서 외쳤다.
   마사원씨는 앞으로 계속 마주봐야겠네!
   그러게요! 누가 지어 주신 이름이에요?
   당황스러웠다. 회사 사람들도 마주봉이 아닌 마주봄으로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본명을 고쳐 말할 틈도 없이 회의 시간이 흘러갔다.
   회의가 끝난 후 주민등록등본과 통장 사본을 주러 회계 담당자에게 갔다. 그때 서류에 정확히 기재된 내 이름을 마주한 나는 아차 싶었다. 내 본명을 알고 회사에 소문을 퍼뜨리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런데 담당자는 서류를 휙 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 자리로 가던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후부터 나는 줄곧 ‘마사원’으로 불렸고, 내 본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박차장님이 카카오톡으로 보낸 SNS 게시 글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작성자가 양도한다는 비행기 티켓은 다음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출발, 금요일 오후 7시 30분 도착인 대만 왕복 티켓이었다. 연차를 3일 낸다면 가능한 일정이었다. 글을 다 읽고는 박차장님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환불을 안 하고 양도한대요? 공연 티켓 양도하는 사람은 봤어도, 비행기 티켓 양도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끝까지 읽어 봐. 취소 수수료가 90%라잖아. 환불해도 의미가 없었겠지.
   매매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이름도 독특한데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았을까? 마대리 영문 철자 어떻게 돼? 일치하는지 확인해 봐.
   그 게시물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양도받을 수 있는 사람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음, 저랑 영문 철자는 똑같네요.
   이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했는지, 순간 나 스스로도 당황했다. 거짓말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걸까.
   진짜? 너무 좋은 기회다! 내가 지금 바로 댓글 달까? 여기 주인공 나타났다고.
   에이, 싫어요. 부담스러워요. 제 이름은 이제 ‘마대리’인데요. 그리고 저는 대만 별로예요.
   나는 애써 농담으로 화제를 전환하고는 고개 숙여 접시를 바라봤다. 서너 번 집어먹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접시가 거봉 알 3개를 제외하고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어 왔던 별명 ‘거봉’. 하필 이 과일이 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걸까. 거봉 알을 포크로 찍었다. 그런데 알들이 자꾸만 포크를 피해 미끌거리며 도망쳤다.

   종일 이사와 이름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얼른 이번주가 지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몸살 났다고 둘러대고 연차를 내 버릴까.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 주 금요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책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출간된 지 이십 년이 넘어 개정 출판하는 철학서였다. 대학교 2학기 개강이 한 달도 남지 않아 제작 기간까지 가늠하면 이번주에 꼭 마감해야 했다.
   퇴근 무렵이 되자 마치 이사한 다음날처럼 몸이 욱신거리고 뻐근했다. 근육통에 몸살 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축 처진 몸으로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재빨리 회사 밖으로 나왔다.
   만일을 대비해 평소 다니던 퇴근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갔다. 이사했다고 가정한다면 남양주가 아니라 합정으로 가야 했다. 걷는 내내 우리 집이 합정에 있다고 스스로 암시를 걸었다. 파주에서 버스를 타고 합정역에서 내려 골목길 깊숙한 곳까지 걸어갔다. 혹시 회사 사람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걷다보니 어느덧 저녁 8시가 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빌라들, 저 멀리 빛나는 편의점 간판과 세탁소 간판,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몇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합정역으로 갔다. 그리고 본격적인 퇴근길이 다시 시작됐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까지 갔다가 잠실역 버스 정류장에서 남양주 직행버스를 기다렸다.
   문득 스스로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이사했다고 거짓말한 게 과연 잘한 일인지 후회됐다. 그렇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거짓말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각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내일부터 지각만 하지 않으면 곧 이사한 사실은 잠잠히 묻힐 터였다.
   내일부터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곧바로 남양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회사 사람을 만나더라도 대충 둘러대면 될 일 아닌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버스가 곧바로 도착했다. 좌석도 대부분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낮에 박차장님이 보내 준 온라인 게시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사이 댓글이 수백 개 늘어나 있었다. 이참에 개명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텔 숙박권을 제공하겠다는 숙박 업체, 쓰지 못하고 놓아둔 교통 패스권을 제공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까지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윤대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마대리, 집에 가? 늦었네!
   윤대리가 반가워하며 내 옆 빈자리에 앉았다. 순간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윤대리는 내가 남양주에서 합정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듯했다.
   으응. 윤대리는 이 시간에 웬일이야? 남양주에 갈 일 있어?
   나 일주일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왔잖아.
   정말? 어쩌다 이 먼 곳까지……
   결혼 전에 남편이 이 동네 아파트를 분양받아 놨더라고. 최근에 입주 시작해서 이사했어.
   그랬구나. 출퇴근길 멀어졌는데 괜찮아?
   휴. 말도 마. 삶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마대리는 그동안 어떻게 다녔어? 나 또 이직해야 하나. 하하.
   농담처럼 이직 이야기를 꺼내는 윤대리를 보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우리 회사에서 누구보다도 야망이 크면서 내 앞에서는 쿨한 척을 하고 있었다. 윤대리는 내가 스터디 모임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윤대리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사는 동네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다. 얼마 후 윤대리도 내가 합정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집으로 가는 게 아니어야 맞았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나와 동갑인 윤대리는 석 달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옆 팀의 팀원이었다. 윤대리를 처음 봤을 때는 동갑이라는 반가움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얼마 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쟁 상대가 되었다.
   윤대리는 입사하자마자 스터디를 조직하여 사장의 신임을 두둑이 받는 중이었다. 격주로 화요일 점심시간마다 진행하는 스터디였다. 멤버는 윤대리가 직접 선택한 사람들로만 꾸려졌다. 자신이 눈독 들인 사람들에게만 회사 메일로 스터디 커리큘럼과 초대장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 메일을 받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다. 몇몇만 모여 스터디한다는 사실도 한참 지나서 박차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대리, 혹시 점심시간 스터디 모임 알아?
   스터디? 무슨…… 스터디요?
   아, 마대리도 몰랐구나. 윤대리가 조직한 스터디가 있더라고. 윤대리 팀 사람들이랑 디자이너, 마케터 몇 명이랑 같이 모여서 격주로 점심시간에 하나 봐.
   진짜요? 어떤 내용인데요?
   출판 트렌드 관련 내용 같던데. 마대리도 알잖아. 우리 회사 낡고 고리타분한 거. 경직된 회사 분위기를 바꿔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선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몰랐어요. 팀장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마케팅부 명과장이 얘기해 줘서 알았어. 나한테 스터디 같이 하자고 그러는데,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내가 껴도 되는지 싶어서 찜찜하더라고.
   그래요? 누구누구 하는데요?
   윤대리랑 그쪽 팀장 손차장, 그리고 권사원. 또 장이사 편집장님까지. 디자이너는 황부장이랑 김사원, 마케팅부는 명과장.
   쭉 듣고 보니 편집부는 나와 박차장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여 중이었다. 타부서 사람들은 일 잘한다고 소문난 사람들이었다. 순간 놀라움이 밀려들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윤대리는 짧은 시간에 실세를 꿰뚫고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편집장님까지 한다니 의외네요. 다들 그런 데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했대요?
   이제까지 세 번 했다나 봐. 윤대리 입사하고 나서 거의 바로 한 거지.
   다들 하겠다고 나섰대요? 그렇게 의욕 넘치는 사람들이었다니. 진짜 안 어울리네요.
   응. 나도 의외였어.
   얼마나 가는지 한번 두고 봐요. 얼마 못 갈걸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배신감과 패배감, 열등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젓가락을 집은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점심시간에 윤대리와 같이 밥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윤대리는 내게 스터디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주로 내 얘기를 들었다. 이 회사에서 주의해야 할 사람, 사장에게 해서는 안 될 실수들을. 윤대리는 의지할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눈빛을 보내며 맞장구쳐 주었고, 나는 그 눈빛을 받으며 꽤 흡족했다.
   박차장님과 나는 같은 팀으로 이 회사의 주력 업무를 맡았다. 스테디셀러로 인정받은 철학서, 매출이 안정적으로 확보된 대학 교재 등 효자 상품들은 우리 팀 차지였다. 반면 윤대리는 입사한 지 일 년 미만인 경력직들로만 꾸려진 팀에 속해 있었다. 출간하는 책들은 주로 재단이나 박물관 등 국가 기관에서 위탁받아 대행으로 제작하는 도서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은근히 옆 팀의 책들을 맡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고리타분한 대학 교재보다 이미지가 많이 들어가는 박물관 총서, 재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등이 더 세련되고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옆 팀이 맡은 책을 내가 담당하고 싶다고 티 낸 적은 없었다. 그 책들은 매출 성과가 크지 않을 게 뻔했고, 옆 팀 업무를 탐내다 내 포지션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윤대리는 무척 영리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낡고 고리타분한 회사에서 스터디를 조직해 참여까지 이끌어 내다니. 선배인 척하며 으스대는 나를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박차장님에게서 스터디 이야기를 접한 이후로 나는 밝은 웃음으로 대하는 윤대리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윤대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게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남편 얘기, 시댁 얘기, 사장과 팀장님 험담까지. 나는 피곤한 얼굴로 대충 호응해 주면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어머, 나 내릴 때 됐다. 동네 친구 생겨서 너무 좋다. 마대리, 앞으로도 종종 같이 퇴근하자. 내일 봐!
   으, 으응. 잘 가.
   결국 나는 윤대리에게 합정으로 이사했다고 말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뉘었다. 만약 윤대리가 내 이사 소식을 듣고 나면 그때는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복잡한 마음으로 일찍 잠든 나는 그동안 해왔던 거짓말이 들통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회사 사람들이 우연히 내 본명과 거주지를 알게 되었고, 내 정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당신 누구냐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고.
   나는 나를 증명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등본, 핸드폰 요금제 가입 명세서, 여권, 집 계약서까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었다. 꿈속에서 회사 사람들은 어떤 서류를 봐도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사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마대리 아닌가? 자네의 이름이 뭔지, 자네가 어디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네. 회사에서는 일만 잘하면 되지. 자네가 누군지는 무슨 상관인가. 안 그런가, 다들?
   사장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방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선 덕에 무사히 지각하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산뜻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기쁨도 잠시, 언짢은 일이 나를 반겼다.
   회사에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내가 다음주에 대만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인 SNS 게시물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티켓을 양도받아 무료로 다녀올 예정이라고. 나는 이 사실을 오전에 화장실에서 알게 됐다. 나를 마주친 편집부 권사원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마대리 언니, 다음주 대만 다녀오신다면서요. 그것도 공짜로요. 승진하더니, 좋은 일 연달아 일어나네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 어제 박차장님한테 다 들었어요.
   아, 그거……
   그런데 동영상 잘 찍으실 수 있겠어요? 마대리 언니가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한다니, 잘 안 그려져서요.
   유튜브라니?
   모르셨어요? 그 여행 조건이 영상 찍어서 업로드하는 거라던데. 유튜브로.
   처음 접한 정보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곧바로 박차장님에게 메신저로 물었다.
   팀장님, 화장실에서 황당한 얘길 들었는데요. 제가 다음주에 대만으로 여행 간다고……
   박차장님은 바로 답변을 보내왔다.
   응, 내가 소문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대리가 좋은 기회 놓칠 것 같아서. 소문나면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지 않겠어? 나중에 분명 나한테 고마워할걸. 부끄러워서 그러나본데, 한순간이야. 다녀오면 회사에 도움도 될 테고.
   회사에 도움이요?
   그래. 그 비행기 티켓 양도 프로젝트가 꽤 유명해졌어. 최근 언론에 자주 노출되더라고.
   박차장님이 메신저로 인터넷 링크를 보냈다. 링크를 클릭하자 ‘마주봄씨를 찾습니다.’ 프로젝트의 여러 미담 기사들이 떴다. 기사를 클릭하려던 찰나 내 자리 전화가 울렸다.
   네, 마대리입니다.
   마대리씨, 방으로 들어와요.
   사장님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나온 사장님의 인자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사장님이 어떤 일로 나를 부르는 건지 급히 떠올려 봤다. 이번주 마감하는 책 진행 상황을 물으려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걸까.
   사장실에 노크한 뒤 들어갔다. 사장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대리씨, 다음주 대만 갈 때 말이야. 부탁이 하나 있네. 우리 회사 좀 잘 홍보해 줘. 마대리도 알지? 우리가 좀 고리타분하잖아. 이번 기회에 언론 이슈 잘 받아서 매출도 올리고 쇄신도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떤가? 이참에 마대리 덕 좀 보자고.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사장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덕을 어떻게 보겠다는 건지…… 어리둥절한 채로 간신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뒤돌아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사장이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마대리. 어깨 좀 펴. 밝게 웃고 다니라고. 마대리는 욕심을 좀 낼 필요가 있어. 편집자는 트렌드도 알아야 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돼. 응?
   평소에는 나를 신임하던 사장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눈감아 주었고, 주요 업무는 무조건 내게 맡기면서 좋은 말만 해 주었는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변해 있었다.
   네……
   나는 힘없이 대답하고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이런 구닥다리 회사에서 트렌드는 무슨. 짜증이 치밀어올랐지만 뭔가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것 같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박차장님에게 물어보기 위해 메신저를 켰다.
   박차장님, 혹시 사장님한테까지 얘기하셨어요?
   왜? 사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차장님, 그러시면 어떡해요…… 혹시 프로젝트 게시 글에 주인공 저라고 알린 건 아니죠?
   그럼. 그건 마대리가 직접 알려야지.
   박차장님이 메신저로 대답하고는 링크를 또 하나 보냈다. 링크를 누르니 프로젝트 게시물로 연결되었다.
   어제 퇴근길에 확인했던 것보다 더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숙박과 교통수단을 제공해 준다는 댓글에 이어 만약 ‘마주봄’ 씨가 진짜로 나타난다면 여행 동영상을 찍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올리는 게 어떻겠냐는 새로운 의견도 보였다. 그것은 후원해 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 차원이기도 했다. 이 의견은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얼른 ‘마주봄’ 씨가 나타나기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박차장님이 사장님한테까지 얘기한 이유가 뭘까…… 박차장님의 경솔한 행동에 잠시 화가 났지만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최근 우리 팀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번주 월요일 회의 시간, 사장님이 하반기 주력 도서를 윤대리에게 맡겼다. 파격적인 업무 지시에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우리 팀의 박차장님이나 내가 맡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불문율이 점점 깨지는 중이었다. 새로 들어온 대리로 인해.
   나는 메신저로 박차장님에게 짧게 말했다.
   팀장님, 저 오늘 오후 반차 내겠습니다. 아침부터 속이 안 좋더니, 배탈 난 것 같아요.
   책 마감이 급했지만 중요한 건 거의 처리해놓은 상태였다. 가볍게 말을 내뱉었지만 스스로도 놀랐다. 이제 거짓말은 대수롭지 않게 할 수 있는 기침처럼 되었다. 반면 박차장님의 나를 향한 배려는 세심하고 깊어졌다.
   그래, 알았어. 마감이 코앞이니 컨디션 조절 잘해. 그리고 대만 가려면 내일까지는 댓글로 알려야 하는 거 알지? 오늘 집에 가서 잘 고민해 봐.
   출국 3일 전까지 주인공이 나타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티켓 양도가 불가능하다고. 데드라인은 이번 주 토요일이었다. 남은 시간은 단 2일뿐.
   집에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했다. 이참에 개명 신청을 할까. 최근에는 특별한 사유 없이도 대부분 받아주는 것 같던데. 인터넷으로 급히 검색해 보았다. 신청서를 법원에 접수한다고 해도 바로 처리되는 게 아니었다. 보통 2개월, 아무리 빨라도 최소 일주일은 걸렸다. 개명 신청이 완료된다고 해도 여권을 새로 발급받아야 했고, 여권 발급 소요 기간도 평균 일주일이었다.
   내 몸이 이대로 증발될 수 있다면. 교통사고 났다고 하고 당분간 회사에 출근하지 말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본명을 솔직하게 이야기할까……
   사장의 철칙대로라면 내 이름이 무엇이든 그건 아무 상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이 회사의 매출을 책임지는 장기근속 직원이었고, 그저 마대리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본명을 속인 건 신뢰 문제였다. 본명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앞으로 내가 하는 말들까지 신뢰를 얻지 못할 게 뻔했다.

   다음 날, 나는 옷을 두껍게 입고 출근했다. 박차장님에게는 몸살에 결막염까지 겹쳤다고 둘러댔다. 스스로 암시를 걸자 정말 내 몸이 그렇게 변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 기침을 몇 번 하고 나니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먼지 때문인지 잇달아 기침이 나왔다.
   박차장님이 나를 보며 사려 깊은 목소리로 걱정해 주었다.
   오늘 마감일인데 컨디션이 안 좋네. 조금만 더 견뎌. 마감 끝나면 우리 맛있는 거 먹자.
   네, 팀장님.
   나는 오늘 박차장님에게 점심을 같이 못 먹겠다고 할 참이었다.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잠깐 혼자 나갔다 오기로 마음먹었다. 되도록 박차장님과 마주치는 걸 피하기로 했다.
   연신 가짜 기침을 하며 한창 책 마감에 집중했다. 그러다 중간에 짬을 내어 사내 메일함을 클릭했다.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윤대리였다. 윤대리와는 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없는데…… 의아해하며 메일을 클릭했다.
   스터디에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이미 네 차례 진행했고, 나도 참여하면 좋겠다는 제안. 출판계 트렌드를 공부하는 모임이라며 커리큘럼을 첨부했다. 메일 말미에는 최근 자신이 이사한 동네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오늘이 바로 스터디하는 날이니,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으로 끝맺었다.
   윤대리가 갑자기 내게 이렇게 제안하는 이유가 뭘까.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사장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욕심을 가지라는 말.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며 자신만의 취향이 있어야 한다는 말. 윤대리를 염두에 두고 나와 비교하는 말이 분명했다.
   사실 스터디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윤대리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스터디에 참여하는 게 유리했다. 나는 잠시 망설인 끝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왜 처음부터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키면서.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박차장님에게 메신저로 말했다.
   팀장님, 오늘 점심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야 해서요.
   굳이 스터디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스터디 멤버로 선택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박차장님이 난처할 테니까.
   어? 나도 그 얘기하려고 했는데. 오늘 나도 약속이 있어서. 병원 잘 다녀와. 결막염은 다 나았어?
   아차차, 내가 결막염에 걸렸다고 했지. 거울을 보니 눈이 멀쩡했다.
   네, 오전에 안약 넣었더니 다 나은 것 같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후 박차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노트와 펜을 챙겨 2층 회의실로 내려갔다. 계단에서 윤대리를 마주쳤다. 윤대리는 내게 팔짱을 끼며 수락해 줘서 고맙다고,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작게 속삭였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눈을 마주쳤는데, 놀랍게도 약속이 있다던 박차장님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자, 오늘부터 마대리와 박차장님이 함께하기로 했어요.
   윤대리가 기존 멤버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케팅부 명과장님이 내게 물었다.
   마대리, 대만 여행 준비 잘 돼가?
   박차장님이 신이 난 듯 맞장구쳤다.
   그래. 나중에 나한테 엄청 고마워할 거라니까. 마대리,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면 내가 대신 댓글 달아서 알릴게. 이름 영문 스펠링도 똑같다며.
   그 말을 듣고 난 후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식은땀이 났다.
   아니에요, 딸꾹. 저는 대만 안 좋아해요, 딸꾹. 그리고 지금 일이 너무 많, 딸꾹. 많아서 그럴 여유가 없, 딸꾹. 없어, 딸꾹. 없어요.
   왜, 오늘 마감 끝나면 다음주에는 여유 있잖아. 그리고 사장님 지시를 거절할 셈이야? 이야, 마대리 다시 봐야겠는데.
   박차장님이 재미있다는 듯 빈정댔다. 그때 윤대리네 팀 권사원이 거들었다.
   마대리님, 혹시 돈 빌렸는데 안 갚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뭐 켕기는 거 있으시죠? 저 같으면 당장 간다고 나섰을 텐데 이상해요. 회사에서도 이렇게 밀어주는데. 안 될 게 뭐 있어요.
   박차장님이 덧붙였다.
   그래, 마대리. 이사하느라 비용 많이 깨지지 않았어? 이번 일 잘되면 마대리한테도 기회라니까. 연봉도 오를 수 있다고.
   순간 나는 윤대리 눈치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윤대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사? 마대리 남양주로 이사한 거였어? 예전부터 살던 거 아닌가?
   딸꾹, 딸꾹, 딸꾹.
   왜?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박차장님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고, 윤대리가 대답했다.
   어제 야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거든요. 글쎄 저희가 같은 버스를 탄 거 있죠. 제가 먼저 알아보고 같이 앉아 갔어요.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변명거리를 급하게 생각해 냈다. 새하얘진 머릿속을 쥐어짰다.
   아, 어제는 전에 살던 집에 택배 왔다고 해서 찾으러 갔던 거야.
   그런 거였구나. 동네 친구 생긴 줄 알고 좋아했는데, 아쉽네.
   후유.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권사원이 또 얄밉게 말했다.
   마대리님, 주민등록증 좀 보여주세요. 혹시 이름이 진짜 ‘마대리’인 거 아니에요? 명함 말고 주민등록증 보여 줘야 해요. 하하하.
   권사원 말에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농담인 줄 알았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나는 간신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요즘 누가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녀. 더군다나 난 지금 지갑도 자리에 놓고 왔다고.
   내 대답을 듣고는 윤대리가 이야기했다.
   자자,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이제 스터디 시작해 볼까요?
   천만다행이었다. 윤대리 덕분에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오늘의 주제는 SNS를 활용한 출판 마케팅 사례였다. 발제자인 윤대리는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책 리뷰를 올리거나, 유튜브로 책을 소개하는 등 크리에이터들의 활약을 소개했다. 그중 우리 회사 책을 소개하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며 앞으로 SNS 시장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때였다. 내내 스마트폰만 보고 있던 권사원이 갑자기 나를 보며 외쳤다.
   어? 이거 마대리님 아니에요?
   권사원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일 년 전 내가 중학교 동창들과 떠난 대만 여행 사진이었다. 내 친구의 SNS 계정이었다. 거기에는 분명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틀림없이 나였다. 누가 봐도 나.
   어? 대만 안 좋아한다면서 이미 다녀왔네?
   박차장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사원이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소름! 마대리님 이름이 ‘주봉’이었어요? ‘주봄’ 아니고요? 여기 해시태그에 ‘마주봉’이라고 써 있어요.
   나는 발끈하며 대꾸했다.
   권사원, 무슨 소리야. 그거 내 별명이라고.
   아, 죄송해요. 혹시 마대리님 계정 있는지 찾아봤거든요. 오타로 ‘마주봉’이라고 쳤는데, 대박, 근데 진짜 마대리님이 나온 거 있죠!
   권사원, 마대리한테 뭐 감정 있어? 왜 이렇게 얄밉게 구는 거야. 그리고 자꾸 그렇게 본명 부르면 고과 점수 깎이니까 조심해.
   윤대리가 다그쳤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저 같으면 당장 대만 여행 갈 텐데 답답해서요. 저라도 나서서 프로젝트 게시물 댓글에 마대리님 태그해서 알리려고 했죠. 여기 주인공 있다! 하고요. 제 고과 점수는 제발 지켜 주세요, 윤대리님. ‘마주봉’이 마대리님 본명이 아니라 별명이라잖아요.
   권사원이 말하자 모두들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우선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만요.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엇, 어디 가세요, 마대리님! 설마 도망치는 거예요?
   권사원의 얄궂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화장실로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변기에 뚜껑을 내린 후 앉았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았다. 덫에 걸린 쥐가 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았다. 잠시 멈추었던 딸꾹질이 또다시 시작됐다.
   딸꾹, 딸꾹, 딸꾹……
   그때 문득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마주봉! 마주봉! 마주봉! 마주봉!
   회의실에서 들려오는 함성 같았다. 나는 두 귀를 양손으로 막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새하얘진 머릿속. 곧 주변이 깜깜해졌다.
   잠시 후 까만 배경에 거봉 한 알이 서서히 나타났다. 거봉 알은 까만 배경 가운데에서 원을 만들며 굴렀다. 하염없이, 뱅글뱅글…… 나는 멍하니 눈을 뜬 채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라유경

수많은 대리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대리인지 고민했던 시간이 있다. 결국 내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대리에서 멈추었는데, 내 이름이 낯선 순간들이 문득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마다 김민기의 ‘봉우리’ 노래를 듣는다. 양희은이 부른 버전도 참 좋다. 글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더 좋다.

2021/02/23
39호

1
김민섭, 훈의 시대, 와이즈베리, 2018.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 내용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