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운한 일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했다. 이를테면 중앙차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오던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정면으로 돌진해온다거나, 아파트를 나서는데 23층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고무나무 화분에 머리를 맞는다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 그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오랜 습관 같은 것이었는데 일부러 그만두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는 걸 즐기기까지 했다. 결국 그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매번 작은 안도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머릿속의 불운이 더욱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그것은 나와 멀게 느껴졌고 그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뚜렷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상상이 아닌 실제 삶에서는, 떠올릴 수 있는 작은 불행은 물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불운까지, 그 어떤 것도 내게 닥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것만큼이나 유별난 불행도 가까이 오지 않는 법이었다.
   나의 평범함에 대해서는, 별로 덧붙일 만한 말이 없다.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나는 작은 공립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다가 일이 잘 풀려 법무부 문서실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문서실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문서를 정리하고 열람 요청이 들어온 문서를 찾아주는 일뿐이었는데, 물론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삼백육십오 일이 가기에 충분했다. 법무부에는 관리해야 할 문서가 차고 넘쳤다. 나는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한산한 가로수길을 따라 십오 분을 달려 출근을 했고 저녁이 되면 같은 길로 되돌아왔다. 주말이면 공원 둘레를 달리고 영화를 봤으며 가끔은 여자친구인 영선과 가까운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다. 영선과 나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결혼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으며 이후에는 그녀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영선은 주로 어린이책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는 그림 작가였는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우리는 저녁에는 요리를 하고 주말에는 함께 마트에 가며 바람이 불지 않는 선선한 날에는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칠 것이다……
   십 년 후라도 별로 달라질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안온하고 평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십 년 후에도 우리는 저녁에는 요리를 하고 주말에는 함께 마트에 가며 바람이 불지 않는 선선한 날에는…… 그런 삶을 사는 한편 나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운한 일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영선과 한낮에 알몸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희미하게 가스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녀에게 “가스 냄새나지 않아?” 하고 물었고 그녀가 “음……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뭔가 단단한 것이 팽창하다가 임계점을 넘어 마침내 터져버린 듯한 격렬한 굉음이 귀를 때리고, 우리는 도망쳐볼 틈도 없이 알몸인 채로 순식간에 까맣게 불타 죽게 되는 상상을 했다. 시내의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영선이 “그런데 말야……”라고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 했을 때는 그녀가 다음에 내게 파혼하자고 하는 상상을 했다. 나 사실 만나는 남자 있어, 예식장 취소 수수료는 내가 낼게,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샤워를 하고 욕실에서 나와 형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표시를 발견했을 때에는 어쩌면 부모님이 비행기 사고 같은 것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어머니와 아버지는 북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나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탄 뒤 공항으로 향하면서 아이폰으로 암스테르담 혹은 코펜하겐으로 가는 항공권을 구입하고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하는 방법을 검색하고……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형은 그저 내게 전동 드릴을 빌리려 했을 뿐이었다.

   나는 거의 언제나 그런 상상을 했고, 상상 가능한 모든 불운한 일들을 한 번쯤은 떠올려보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은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났다.
   나에게는 이유정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녀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녀는 많은 친구들이 세월에 쓸려나가는 동안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우정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겠지만 내가 그녀와 맺은 우정의 방식은 서로의 별 볼 일 없는 시절을 기억해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삶에서 대단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것들을 이뤄갈 때마다 서로가 예전에는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는지를 증언해주며 오늘날의 작은 성공을 축하하곤 했다. 우리는 상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기억의 창고에서 찾아내 서로를 당황케 하기를 즐겼다. 나는 그녀의 대학 합격을 축하해주었고, 처음 직장을 얻게 된 것을, 서너 해 전쯤에 그녀가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하게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얼마 전에 아이까지 낳았고, 나는 그녀가 아이와 함께 사회적 관점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어른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을 축하했다.
   영선과 나는 유정이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이를 보러 가기로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백일이 지나서야 그녀의 집을 찾았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제외하면 아기라는 걸 실제로 보는 게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선 그것이 너무 작다는 데 놀랐고, 말 그대로 주먹만 한 얼굴이 그만큼 다양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아기는 무엇이 불만인지 불평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고, 젖병을 물려주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이의 통통한 애벌레 같은 손가락을 만지며 신기해하자 유정은 내게 “한번 안아볼래?”라고 말했다. 그래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기는 너무 작고 약해 보여서 손으로 쥐면 금방이라도 어딘가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정은 내게 장난스럽게 몇번 더 안아보라고 권했고 나는 그래볼까, 아냐 관둘래, 사이에서 어물쩡거리다가 결국에는 손을 거두려 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의사소통에 어떤 혼선이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그 아이를 받았다가 놓친 것인지 어느 순간 나는 아이를 감싸고 있는 면포의 끄트머리를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고 내 눈에는 곡선을 그리며 머리를 바닥으로 향한 채 천천히 추락하는 아기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기는 곧이어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해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고 순진한 얼굴을 한 채 느린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만 그렇게 보였던 것이지 실제로는 아주 빠른 속도였고 곧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와 어깨를 거실의 타일 바닥에 부딪혔다. 아기는 잠깐 동안의 침묵 후에 발악하듯 울기 시작했는데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 혼미해진 정신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 일이 평소에 내가 수없이 해왔던 악의적인 상상일 뿐이라고 믿어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귀에 아기의 울음소리를 뚫고 유정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마!”

   세상에 나온 지 백일이 조금 넘은 유정의 아들은 그 일로 두개골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아직 정도를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후유증이 심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은 영구적일 거라고. 영구적인 손상…… 그 말은 아이가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아이가 결코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구급대원은 유정의 빠른 조치, 무엇보다도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칭찬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아이를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혹시 목뼈가 다쳤을 경우 척추까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현명한 대처가 없었다면 아이는 추가로 다른 곳을 다쳤을지 몰랐고 어쩌면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일 미터는 아기에게 재앙에 가까운 높이였고, 나의 망설임이 불러일으킨 사고는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진 아기는 수술실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당시에는 죄책감보다 부끄러움과 당혹감이 더욱 컸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병원 복도를 서성였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서성거리며 미안해하거나 당황해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결국에는 아기가 수술실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도 없었다. 유정은 내게 일단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몇번쯤 계속 그곳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유정과 그녀의 남편이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출근이라니, 나 때문에 이제 백일 된 아이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고 있어! 그러나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문서실로 갔다. 그리고 문서를 정리했으며, 요청이 들어오면 필요한 문서를 찾아 전달하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기를 떨어트렸다고. 일 미터 높이에서. 머리부터. 바닥으로. 덜 여문 아기의 두개골을 부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거실 타일 위로. 나는 그들이 던지는 농담에 웃기도 했다. 왠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순간적으로 정말이지 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 일이 현실이라는 걸,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만…… 나는 자주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아닌 것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그러면서 또 그 아이에게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서고에서 책을 찾다가, 집에서 혼자 저녁 준비를 하다가도 그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조금씩 보이게 될 징후들(내 상상 속에서 그것은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최악의 방식으로 구현되었다)을 떠올렸고 그때마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득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만큼,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유정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녀의 남편은 또 어떻고? 그는 자신의 아내의 친한 친구인 내게 늘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더이상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나는 이제 그저 아들의 삶을 망가뜨린 불한당일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영선 또한 볼 자신이 없었다. 영선은 나를 탓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할 수가 있어? 어떻게 갓난아이를 그렇게 떨어트릴 수가 있어? 그녀 또한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정 내외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나를 배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병원에 찾아가기 전에 그들에게 어떤 보상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금전적인 것 외에 내가 달리 보상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치료비 정도는 내가 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될지 감도 잡지 못했다. 삼백만 원? 오백만 원? 그렇게 큰돈을 유정이 받으려고 할까? 아니면 반대로, 그 정도로는 턱도 없는 것 아닐까? 나는 고심 끝에 빈손으로 터덜터덜 병원으로 향했다. 죽 같은 거라도 좀 사갈까 하다가 그만두었고(대체 이 상황에서 죽을 누가 먹는단 말야?) 꽃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곧 스스로를 타박하고는(꽃이라니…… 제정신이니?) 다 때려치우고 말았던 것이다.
   병원으로 찾아가니 아이는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괴상할 정도로 커다란 깁스를 했고, 수없이 많은 튜브들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이 얽혀 있었다. 보고 있자니 며칠 전만 해도 신비로울 정도로 작고 아름다웠던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고, 나는 밀려오는 감정의 폭풍을 견뎌내지 못해 그 자리에서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 내어 울었고, 내 옆에 서 있던 유정은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나는 울고 있는 와중에도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곳에 간 것은 유정에게 사죄하고,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우는 건 나고 도리어 그녀가 내 어깨를 잡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차마 유정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그녀의 남편을 병원 복도로 불러내 어떻게든 보상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일단 그에게 얼마가 되었든 병원비는 모두 내가 계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그는 괜찮다고, 그건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내가 사과를 하려고 하자 그것도 가로막았다. “사고였잖아요.” 그는 내가 더이상 말을 덧붙일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건 어쩔 수가 없잖아요.” 나는 차라리 그들이 내게 욕을 하는 게, 나를 때리기라도 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이어나갔다.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고 집에 와서 드라마를 봤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며 읽을 만한 책을 찾고, 포털 사이트에 뜨는 뉴스를 하릴없이 들여다봤다. 자전거를 타고 한산한 가로수길을 따라 출근을 하고, 다시 같은 길로 되돌아왔다. 심지어 결혼 준비도 그대로 이어나갔다. 영선과 나는 한동안 만날 때마다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려 노력했고 그중에는 그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매번 그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애가 회복은 하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지, 유정은 또 얼마나 상심이 클지, 상심을 떠나 고통스러울지 얘기했고 끝내는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죽일 인간이다, 라고 내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나서 영선이 그게 아니라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를 달래는 식으로 결말이 났다.
   그런 일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고 우리가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도곡동에 있는 드레스샵을 전전한 날, 드디어 영선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가 여러 차례 드레스를 갈아 입어보았을 때 내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한 것은 어떻게 넘어갔지만 턱시도를 입어보지 않겠다고 하자 더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 “왜?”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매번 반복되던 이야기를 그날도 꺼내고 말았다. “그애는 이런 삶을 살지 못할 거야. 그애는 우리 같은 삶을 살지 못할 거야……”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그 일이 있은 후에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데? 대신 죽기라도 하고 싶어? 그애 인생을 다 책임질 거야?” 우리는 대로변에서 소리를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럼 내가 어떻게 이 상황에서 너랑 같이 신나게 드레스를 고르러 다닐 수 있겠냐고.” 그러자 그녀는 말했다. “그럼 차라리 가서 빌지 그래? 매일 이러고 있느니 가서 잘못했다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비는 게 낫지 않아?”
   내게 정신 차리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아직 유정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을 자주 찾아가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유정에게 아이의 상태는 어떻느냐고, 너는 힘들지 않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저 가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오래 있지도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나는 영선의 말을 들은 그날 그녀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일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늦은 밤 유정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안부를 물은 뒤 곧바로 미안하다고 말했다(그녀는 병원에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나의 부주의함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버렸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다 하겠다고 말했다. 얘기를 시작하니 말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내가 머저리였다, 나는 여전히 머저리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나는 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사과를 하면 할수록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딘지 잘못된 방향으로, 깊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을 그만두지 못했고, 오히려 그런 기분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유정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말없이 듣고 있다가 내게 “사과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아냐, 다 내 탓이야. 미안해. 다 내가……” 그래도 내가 사과하는 것을 멈추지 않자 그녀의 말은 “사과하지 마”로 바뀌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유정은 내게 거의 애걸하듯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제발 사과하지 마……”

   영선과 나는 결혼한 뒤로 어느 날부터인가 유정과 유정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아야 했고 우리는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그런 사람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피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종종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 실패하곤 했다. 나는 때때로 그 일과 아주 멀어졌으며 그럴 때는 마치 그 일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는 조금 소름 끼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결국 그 일이 내게 일어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일은 물리적으로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참혹하고 불운한 일이었지만 내게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내가 겪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인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게 때때로 찾아오는 이 강렬한 죄책감, 그것이 찾아올 때마다 느껴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한 통증은, 그 아이를 떠올리면 밀려오는 발작적인 비애는 대체 뭐란 말이지? 나는 감각과 무감각,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 일 이후에도 여전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운한 일들에 대해 자주 상상하곤 했는데 그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 상상의 끝은 어떤 식으로든 늘 유정의 아이와 닿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이제 내게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불운을 뜻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존재했다. 나는 유정과 내가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우정을 유지해왔던 것과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느끼곤 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우스운 과거 대신 어떤 불행을 매개로 이어져 있었고 서로를 떠올리는 것은 어떤 불운을 상기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불운을 떠올리는 일은 서로를 연상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만나지 않게 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이어질 것이었다.
   나는 지난여름 영선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어떤 프랑스인 가족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꽤 오랫동안 웃고 떠들다가 문득 그 아이에 대해 떠올렸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아이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순간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어떤 영원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 해가 아니라 십 년이 지나고, 어쩌면 삼십 년이 지난 후에라도 내가 그 불운한 일에 대해, 그 아이에 대해 완전히 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찾아왔다. 나는 그전에도 그후에도 영원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정영수

감각과 무감각,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매번 길을 잃습니다. 무사하고 안녕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다사하고 위험한 삶을 살고 싶어요.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는 영원입니다. 내 글은 나보다 조금 낫기를 바랍니다.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