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몇 개죠?
  -손가락 세 개요.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병원이요.
  -성함이 어떻게 되죠?
  ‘누굴 바보로 아나’ 생각했지만, 답할 수 없었다.
  -류철민입니다. 선생님 성함이요.
  내 이름을 알려준 건 의사였다. 의사에 따르면 나는 3주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줄곧 혼수상태로 지냈다. 10시간이 넘는 대수술 덕에 위기를 넘겼지만, 기억을 관장하는 뇌기능이 손상됐다. 문제는 내가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어디서부터 기억을 못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며칠간 경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 일단, 보호자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의사가 나가고 이십 분도 되지 않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두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은 30대 여성, 다른 한 명은 20대 후반 여성. 30대가 달려오며, 눈물을 터트렸다.
  -철민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를 와락 안고 서럽게 말했다.
  -얼마나 무섭고 불안했는지 알아? 병실에 같이 있어도 자기는 아무 말 없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집은 텅 빈 채 컴컴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건 나다.
  여인은 한동안 넋두리하더니, 별안간 고해성사를 했다.
  -그날 그렇게 집에서 내보내서 미안해.
  어리둥절해하자, 말을 이었다.
  -기억 안 나? 내가 당신 보기 싫다고 내쫓았잖아. 오밤중에 갈 데 없는 사람을. 지난 3주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 잘 못했어. 몰아붙여서. 내 의심이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어.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더 거세게 안았다.
  -나 용서해줄 수 있어?

  기억이 사라지면 분노도, 서운함도, 오해도 사라진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뜨듯한 눈물을 내 뺨에 떨어뜨리며 키스를 했다. 이 광경을 따라온 여인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도 그렁하다. 그때, 키스하던 여인의 전화벨이 울렸다.
  -미안해. 정말 중요한 순간인데, 급한 전화라서. 잠깐만, 여보.

  그녀는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전화를 받으며 병실에서 나갔다.
  하나 알았다. 이 여자가 내 아내였구나.

  병실에 남은 20대 후반의 여인이 내 손등에 자기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돌아와 줘서 기뻐. 오빠.

  이번에는 여동생이 나를 안았다. 여동생 역시 무슨 잘못을 지었는지, 나를 안은 채 흐느꼈다. 어깨까지 들썩였는데, 어쩐지 사연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기억 안나?
  고개를 젓자 여동생이 넋을 놓고 울었다. ‘이것이 혈육의 정인가’ 생각하는 찰나, 동생이 내 손을 쥐었고, 얼굴을 쓰다듬었고, 반응 없는 나를 보며 더 크게 울며, 안고 얼굴마저 비볐다. 그러다 입을 맞추더니, 키스를 하고, 혀까지 들이밀었다. 당황해 밀쳐내며 말했다.
  -남매끼리 이건 아니잖아…… 요!
  여동생이 더 당황한 듯 반문했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기억 안 나?

  그녀가 알려준 사연은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


  병실에 누워 있는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 그러니까 1988년 봄.
  서울은 한창 올림픽 준비로 분주했고, 송파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올림픽 공원이 생겼고, 주경기장이 생겼고, 대회는 반년 남았지만 벌써부터 동네엔 오륜기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아파트값이 올랐다며 내심 기뻐했고, 그런 축제 분위기 탓인지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서 잊혀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세상은 축제로 향해갔지만, 나는 그 상황을 증오했다.

  아파트 단지에 핀 벚꽃들이 눈송이처럼 바람에 흩날리던 날, 연수 모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엄마의 빈자리를 새엄마가 채워주길 바랐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자리를 채워준 건 연수였다. 연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처럼 ‘나를 파괴하러 온 구원자’였다. 연수가 아파트 문을 연 날을 기점으로, 내 모든 가치관은 바뀌었다. 세상 도덕과 내 욕망이 충돌했고, 세상 기준과 내 정열이 부딪혔고, 세상 편견과 내 진심이 격돌했고, 부모 사랑과 내 사랑이 교전했다. 물론, 연수와 나는 패군이었다. 하지만 승군이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질수록, 우리 사랑은 더 깊고, 은밀해졌으니까.

  고등학생이 된 후,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육체를 공유했다. 새 부모의 애정이 깊어질 때에도, 그 상황을 반겼다. 그만큼 우리 둘 만의 시간이 늘어갔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 둘이 여행을 자주 갔고, 그때마다 우리 사랑은 세상의 기준, 규율, 윤리를 보란 듯이 비웃었다. 거리에 나가면 남매였기에 의심을 피할 수 있었고, 집에 있으면 연인이었기에 의심 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남매이자 연인, 친구이자 동반자, 가족이자 타인이었다. 같은 피가 1밀리리터도 흐르지 않았고, 혈액형마저 연수는 A형 나는 B형이었다. 이 사실이 처음엔 면죄부를 부여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마저 상관없게 돼버렸다. 친누나나 친여동생으로 만났다 해도, 내 감정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연수 역시 같았기에, 우리는 세상을 관객삼아 완벽한 연극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되면 무대엔 커튼이 내려오는 법. 커튼의 하강은 내가 성년이 되자 시작됐다. 연애에 도무지 관심 없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십여 년을 그런 채 지내자 어쩔 수 없이 선을 본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우리 연극에 내려올 폐막 커튼을 스스로 찢어버렸고, 결혼 후부터 우리는 끝나지 않을 연극을 다시 올렸다. 이렇게 제2막이 한창일 때, 내가 그만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오빠, 매주 화목 저녁에 수영하러 가는 거. 그거 우리 집에 오는 거야.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 있어. 나 정말 혼란스러워. 지난 인생을 송두리째 잃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내가 더 혼란스럽다. 지금 나보고 이걸 다 믿으란 말이야?

  -그런데, 새언니가 말한 거 뭐야? 오빠를 의심했다니.
  의심 안 하는 게 더 의심스럽지 않아? 우리 관계가 20년이나 됐다며?

  -엄마랑 아빠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생전에도 우리 관계를 몰랐어. 그만큼 두 분에게만 집중해서 우리에게 무관심했잖아. 그리고 오빠가 항상 말했어. 새언니는 놀랄 만큼 우리 남매를 좋아한다고. 아까도 의사 연락받자마자,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했어. 같이 가지고.

  여동생이 말을 마치자마자, 거짓말처럼 아내가 병실로 돌아왔다.
  -미안해요. 급한 통화라서. 그리고 통화하는 김에 혁수씨한테도 연락했어요. 깨어났다고요.

  아내가 들어오자마자, 여동생은 금세 십 분 전의 존재로 돌아갔다. 올케를 위로하는 착한 시누이이자, 오빠를 걱정하는 우애 좋은 여동생으로. 여동생은 20년 동안 연극을 해온 사람답게 능숙하게 아내를 위로했는데, 불과 몇 초 사이에 이렇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걸 보니, 그녀 말이 모두 사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올케 시누이 사이인 둘은 어색해지지 않으려 서로 챙기는 말을 건넸는데 그럴수록 더 어색해졌다. 물론, 그 어색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병실 문이 또 열렸기 때문이었다.

*


  -야! 류철민!
  다급히 달려온 남자는 다부진 몸매의 단신이었다. 눈 흰자위가 이미 빨갰다.

  -너 이 자식 이렇게 되면 어떡해. 나랑 하기로 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 다 물거품 되는 거 아냐. 어서 일어나 새끼야.

  미안하지만, 이게 일어난 거야. 그리고 새끼라니요. 대체 누구신데요?

  -친구야.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나랑 같이 뉴질랜드 가기로 했잖아. 거기 미세먼지도 없고 공기 좋다고, 우리 같이 가서 낚시하고 하이킹하자고 했잖아.

  혁수는 이때까지 등장한 인물 중 가장 요란했고 부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형제인데, 내가 어느 날 녀석과 함께 뉴질랜드로 가서 번지점프를 하자고 꼬드겼다 했다. 기가 찬 건, 녀석과 뉴질랜드에 가려고 함께 개설한 통장까지 있다는 것이다. 한창 내 앞에서 자기 신세의 억울함을 토할 때 간호사가 들어왔고, 수납문제로 보호자와 상담해야 한다고 하니, 아내와 여동생이 동시에 보호자를 자처하며 나갔다.

  -기억 안 나? 아무것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혁수는 눈물을 터트렸다. 나를 안고 통곡하더니, 큼직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촉촉한 두 눈으로 나를 한동안 뚫어져라 봤다. 그러고선 갑자기 내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 내가 밀쳐 내자 혁수가 슬프게 말했다.

  -정말 기억 안 나는구나.
  혁수가 알려준 사연은 또 한 번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


  여기, 성악설을 믿는 중학생 1학년이 있다. 그렇기에 세상엔 전쟁이 있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한다. 아마존은 물론이고, 이곳 송파동의 중학교에서도. 말라깽이 혁수의 육체는 동급생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그 시험지가 푸른색이면 잔혹성은 일상 수준, 붉은색이면 위험 수준이었다. 시험지 자체가 아예 찢어져버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시험지가 붉은 피를 토했고, 지옥 한가운데서 혁수는 삶의 구원자가 나타나 주길 바랐다.

  삶의 구원자는 어느 날 하교 길에 내려왔다. 여느 때처럼, 주머니에서 500원이 나왔다고, 50대를 맞던 중이었다(“주머니 뒤져서 돈 나오면 십 원에 한 대다!”). 쭈그려 앉아 맞으면서 “마흔다섯 대”라고 세던 중, 갑자기 때리던 녀석이 도리어 혁수 몸 위로 쓰러졌다. 놀라서 올려다보니, 철민이 다른 녀석마저 흠씬 두들겨 패고 있었다. 순간 혁수는 직감했다. 자기 삶에 구원자가 나타났음을. 하지만, 그땐 몰랐다. 철민이 자신을 파괴하러 온 구원자임을.

  혁수는 금세 철민과 단짝이 됐고, 온종일 붙어 다녔다.
  -혁수야. 운동해서 몸 키워. 내가 없을 때, 맞고 다니는 거. 싫다. 마음 아파.

  훗날, 혁수는 한 사극의 대사(‘아프냐? 나도 아프다’)를 보며 펑펑 울었는데, 평생 가슴에 간직해온 철민의 중학시절 고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귓가에 철민의 따뜻한 말이 떠나지 않자, 혁수는 집에 있는 아버지 역기를 들었다. 내친김에 아령도 들었고, 본격적으로 몸을 키웠다. 철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덕분에 몸집은 세상 누구도 얕보지 못할 만큼 커졌지만, 키가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이 몸에 158센티라고!

  철민이 흘린 말에 육체파가 될 만큼, 혁수는 철민을 신뢰했다. 신뢰가 신망이, 신망이 신봉이 된 후, 혁수는 깨달았다. 철민은 자신에게 종교라는 것을. 그때, 또 하나의 깨달음이 강림했다. 자신의 영혼은 남자의 육체에 결박당해 있다는 걸. 그것도 거대하고 짧은 육체에. 혁수는 철민을 잃지 않기 위해, 이 슬픈 비밀을 이십년간 간직했다. 하지만 불같은 정념을 가슴 속에만 간직하기엔, 스스로 타 죽을 것 같아 고백을 결심했다.

  심장이 다 타버릴 듯 가까스로 고백했는데, 의외로 철민도 고백할 게 있다 했다. 그 고백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철민은 의붓여동생과 금지된 사랑을 해왔고, 그 비밀을 덮기 위해 위장 결혼을 했다고. 그런데 이제 관계를 청산하고 싶지만, 여동생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고. 여동생은 버림받을 처지에 놓이자 돌변했고, 철민이 떠날 경우 둘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고. 물론, 그 폭로가 추억회고처럼 아름답게 포장될 리 없다고. 그렇기에 이제는 여동생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고, 자신은 철창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혁수는 남자의 몸에 갇혀 있고, 철민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가장 큰 아픔과 비밀을 공유한 둘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둘은 친구에서 가장 은밀한 동반자가 됐다.

  -그날부터 우리는 둘에서 하나가 된 거야. <번지점프를 하다> 같이 본 날, 니가 그랬잖아. 넌 이병헌이고, 난 이은주라고. 같이 뉴질랜드에 번지점프하러 가자고!
  어리떨떨해 하는 내게, 혁수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너, 월수에 요가 다니는 거, 나 만나러 오는 거라고! 이 바보야!
  혁수의 사랑과 자존심은 눈물이 되어 바닥에 뚝.뚝.뚝. 떨어졌다.
  그 와중에 나를 챙기려는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니가 말했어. 제수씨가 뭔가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우리 사이까진 모른다고.

  불안하게, 왜 이렇게 각자 사연이 다 들어맞는가? 이들은 모두 한 패인가? 혹시 내가 세상을 상대로 연극을 해온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상대로 연극을 펼치는 건가.

  다행히 한숨 돌릴 수 있었던 건, 노크 소리 덕분이었다. 문을 열어보니, 카트 위에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혁수가 꼭 그래야 한다며, 우린 원래 이런 사이라며, 밥을 내 입에 떠 넣어줬다. 눈 뜨고 만난 이가 모두 낯설고, 이들의 주장 역시 감당하기 어려웠다. 도무지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입에 안 맞아?
  마치 나에 대해 모든 걸 안다는 듯, 혁수는 자문자답했다.
  -그래. 입에 맞겠냐…… 넌 원래 이런 거 안 먹고, 아무거나 안 입잖아. 명색이 CIA 출신인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잠깐. 내가 CIA였다고?!

  그때였다. 한 백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


  -Are You OK?
  잠깐, 아무리 내 기억이 이상하다 해도, 한국에서 영어가 공용어로 쓰였나?

  -Well. I am fine physically. But Mentally, I am totally messed up(뭐, 그럭저럭 괜찮아요, 몸은. 그런데 정신은 완전히 뒤죽박죽이에요).
  그런데, 내 입에서 영어가 술술 나왔다. 어쩐지, 이후에도 계속 이 남자와 영어로 대화했다.

  -큰일이네요. 어서 기억을 회복하셔야 프로젝트에 차질이 없을 텐데.

  남자는 혁수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냐고 했다. 혁수는 이 잘생긴 남자를 흘겨보며 나갔다. 지금 질투하는 건가? 남자는 혁수가 나가자 병실 문을 잠갔다. 찰칵, 소리가 나자 혁수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철민아! 철민아! 괜찮아? 문은 왜 잠갔어?’

  남자는 병실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내게 다가왔다.
  -아니, 쓰지도 않으면서 물 아깝게……
  -저런, 기억 안 나십니까?
  남자는 탄식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대화했습니다. 보안유지를 위해.

  그럼, 지금 이게 도청 방지란 말인가. 설마, 내가 진짜 CIA?

  -기억하셔야 합니다. 당신만이 비밀을 알고 있다고요.
  남자는 몹시 다급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전 세계에 시행할 우리 프로젝트 말입니다. 지난 3년간 당신은 이 일 때문에, 뉴욕, 워싱턴, 암만,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이스탄불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어요. 이미 몇 번의 프로젝트를 실패했기에, 이번만큼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가족에게도 극비에 붙였어요.
  -제…… 제가 무슨 일을 했는데요?
  -이 일의 디테일을 아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그러니, 기억 해내셔야 해요!
  호흡이 가빠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단 말인가. 젠장, 그래…… 인정한다. 나는 CIA다. 머릿속에 그려졌다. 테러를 막기 위해, 북미와 동아시아, 중동을 오가며 활약하는 첩보요원. 금고에는 세계 각국의 화폐와 온갖 국적의 여권이 즐비하고, 일본인 사업가가 됐다, 중국 관료가 됐다, 싱가포르 무역상이 되는 내 모습이. 아마, 한국에서는 장기적인 비밀 임무를 실행하고 있었겠지. 어렴풋이 기억도 난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운동신경, 혁수를 구해줄 만큼 넘쳤던 정의감. 누구보다 뛰어났던 외국어 실력. 이제야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내 비밀이 내 신분이었다니. 그러니, 의심할 수밖에! 그런데, 혁수에게 이런 말도 했다니, 그는 진정 내 반쪽인가? 과거를 떠올리려 분투하는 사이, 남자는 내 앞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사소한 걸 놓친 건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확인하고, 하나씩 과거를 되찾자.

  -이 모든 게 제가 CIA이기 때문이죠?
  -CIA?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너무 당연한 걸 물었나?’ 역시나, 남자는 이내 수긍하듯 말했다.
  -그렇죠. 당신이 CIA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공부? 이쪽 세계에서는 훈련을 공부라 하나? 감방을 학교라 하는 것처럼!
  -공부?
  -네. CIA 출신이에요.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미국 요리 학교. 우리, 한국과 미국에 멋진 미들이스트 퀴진 레스토랑 체인 오픈을 준비하고 있었잖아요. 나중에는 중동 본토에까지 확장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남자는 어깻짓을 하며 열변을 토해냈다.
  -레시피랑 콘셉트 또 빼앗기면 안 된다며, 극비로. 디테일은 당신밖에 모른다고요. 어서 기억하셔야 해요. 비밀의 소스를!

  밖에선 아내가 혁수와 함께 문을 두드렸다.
  -여보! 문을 왜 잠갔어요. 도대체 스테판이랑 뭘 하는 거예요?

  아내가 녀석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럼 아내가 의심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란 말인가. 혹시, 이 남자와도 깊은 사이인가? 마침, 스테판이 내게 미소를 보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지 한 시간 밖에 안됐는데, 일 년은 흐른 것 같았다.

*


  잠시만 혼자 있게 해달라 한 뒤, 병실을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 딱하게 바라봤다. 정원 벤치에 앉아 생각을 시작했다. 과연 누구 주장이 진짜인지, 누구 말이 가장 신빙성 있는지. 그리고 대체 나는 누구인지…… 잠시 골몰한 사이, 담배 한 개비가 내 눈 앞에 들어왔다.
  -아, 괜찮습니다.
  -설마 흡연에 대한 기억도 지워진 건 아니겠지?
  옆을 돌아봤다. 푹 눌러쓴 소프트 햇, 커다랗고 짙은 선글라스, 코 밑까지 세운 코트 깃.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다.
  -한 대 피워보면 알거야. 몸이 기억할 거야.
  남자의 말은 마력처럼 나를 당겼다. 내 안에서 피가 끓는 게 느껴졌다. 한 모금 당기니, 내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엔도르핀을 분출시키며 과거의 나를 되찾는 듯했다. 시간이 없다.
  -어째서 아시죠?
  -내가 자네를 키웠으니까.
  남자는 지난 3주간 병실의 나를 지켜보고, 들어왔다 했다. 나는 가장 궁금했던 사실부터 물었다.
  -혹시 저는 CIA인가요?
  남자는 허탈한지 헛웃음을 지었다.
  -연기가 아니었군! 정말 기억 안 나?
  -그렇다면 저는 요리사인가요? 요원인가요?
  -둘 다지. 자네처럼 신분을 함부로 노출시키는 비밀 요원은 기관에서도 당황스러웠지만 말이야. 학교 탈세 사실을 포착해서 쥐어트니, 졸업증명서와 학적기록부를 만들어주더군. 다행인 줄 알라고. 요리 학교가 탈세를 안 저질렀으면, 자네는 위험에 노출될 뻔했으니까.
  -그럼 제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제 신분과 연관이 있나요?
  -연관? 그것 때문에 당한 걸세.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도.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대체 저는 누구입니까?
  남자는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비벼 끄며 말했다.
  -러시아 SVR 소속 대령 세르게이 알렉산드로 예바노비치.
  그러고 보니 우린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와서 스스로 의식조차 못 할 정도였다.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하얘졌다. 내가 이중 첩자라니……
  -제가 왜 러시아 대외정보국 요원이고, 또 CIA 요원일 수 있죠?
  -준비됐나? 긴 이야기가 될 텐데.
  어느덧 정원수 주변의 사위가 어둑해지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입을 열었다.

  -세르게이. 자네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어. 까레이스키였지. 이곳에서는 고려인이라고 부르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연해주 출생 고려인이야. 자네 가족 전체가 스파이였네. 먼저 어머니의 죽음부터 이야기해야겠군. 그게 이야기의 시초니까 말이야. 그래야 자네를 치고 달아난 녀석들 정체도 밝히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자네만 알고 있는 그 비밀 정보도 기억해낼 수 있을테니 말이야.

  예브게니의 말은 지난 한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의 사연 중에 가장 먼 과거로 나를 데려갔다. 그사이 해는 기울고, 하늘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처럼 타들어갔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기나긴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사연이 너무 장구해, 몇 문장으로는 도저히 압축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 계속…… 끝없이 이어졌다.

  〈끝〉

최민석

소설가는 가끔 심술을 부려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클리셰의 한 가운데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어울리지 않을 재료들을 한데 묶어 이종교배를 해보는 것인데, 이는 전작을 통해 몇 차례해보았다. 그래서 이번엔 ‘삼종교배’를 해보기로 했다. 재료는 ‘첩보’, ‘치정’, ‘(브)로맨스’. 뭔가 아쉬운 것 같아 하나를 더 곁들였다. 이야기의 끝이 다른 거대한 이야기의 서막이 되는 방식. 게다가 지면이 짧으니, 소동극이 좋겠다 싶었다. 이렇게 「기억 안 나?」가 탄생했다. 이럴 때 요즘은 이렇게 말하더라.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

2019/03/26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