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빌라는 방음벽이 설치되지 않아 다른 가구에서 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옆집 사는 이웃이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 순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 매주 수요일마다 어떤 채널을 시청하는지를 알게 된다. 부실한 벽을 타고 들어온 소리는 바로 옆에서 이웃이 일하고 먹고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된다.
   마치 이웃과 한집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빌라 한 채에 함께 살고 있으니 실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맞지만 새벽녘 중얼거리는 기도 내용을 엿듣는 일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기르는 개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도 별로다. 어떤 일로 들뜨고 웃는지 기분이 상하고 급기야는 욕을 하게 되는지 대놓고 청취하는 셈이다.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이웃의 소리 때문에 이사를 오고 난 뒤 한동안은 잠을 제대로 자기는커녕 환한 낮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윗집에 사는 이웃은 다행히도 그리 활동적인 사람이 아닌지 움직이는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고 가끔 누군가와 통화를 해도 그야말로 용건만 간단히 나누고 짧게 끝냈다. 문제는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몸집이 커서인지 움직이는 동선이 훤하게 파악되었다. 걸음 소리는 바닥을 울렸고 절약에는 관심이 없는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는 유난히 세차게 들렸다.
   이웃은 설거지할 때 노래를 부른다. 샤워를 할 때도 노래를 부른다. 대개는 빠른 곡조의 음악이다. 아침에는 천천히 움직이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 가장 기분이 좋다. 심심해지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떨 때는 한 시간도 넘게 통화를 한다. 보통 최근에 일어난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고 사건을 협소한 주제로 정리한 뒤 그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좋아한다. 비슷한 성향의 친구가 있다니 다행이네,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이웃의 통화를 엿듣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는 당황한다.
   듣지 말자고 생각하니 소리는 더 들리는 것 같다. 이웃이 소리를 낼 때마다 내 쪽에서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웃은 제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든지 나가지 않든지 개의치 않고 점점 더 소리는 커진다.
   그러니 나의 소리는 점점 더 작아진다.
   내 집에 내가 내는 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이웃의 소리로 가득 찬다.

   “아몬드 오일을 써보세요. 그게 수분공급에는 최곱니다.”
   인사만 하고 지나치려는데 이웃이 말을 건다. 불쑥 꺼낸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자, 답답하다는 듯 설명을 곁들인다.
   “피부가 건조하고 자꾸 간지럽다면서요.”
   나는 이웃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나와 이웃의 관계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가요?”
   “어제 전화로요, 친구 같던데.”
   어제 친구와 나눈 통화내용을 엿들은 모양이다. 아니 통화내용이 벽을 타고 흘러들어간 모양이다. 당황해서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계단을 내려간다. 방음이 되지 않은 탓에 이웃 간에 뭘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을 어쩔 수 없는데, 그걸 아는 척하는 건 무슨 심보인가 싶어 기분이 좋지 않다. 집에 돌아간 뒤에는 다른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음악을 틀어 놓았다. 볼륨이 너무 큰가 싶어 소리를 낮추었다가 틀어놓은 음악조차도 어쩐지 내 취향을 들키는 것 같아 전원을 끈다.
   잠시 후 답가처럼 삼백삼호 이웃집에서 틀어놓은 음악이 들려온다.
   우연이겠지만 마치 문을 닫은 채 음악 소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과 정말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빌라 앞 공터를 자기 집 마당으로 생각하는 모양인지 담배도 빌라 앞에 나와서 피우고 빌라 앞 공터에 빨래를 널고 주말에는 이동식 평상을 깔아놓고 거기에서 낮잠도 잤다. 나물을 다듬기도 하고 전화통화도 밖에 나와서 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지 싶었는데 그만두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고스란히 관람하는 꼴이었는데 정작 관람의 대상이 된 이웃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고 그 모습을 보는 내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보이는 것은 이웃이고 보는 것이 나인데 기분은 정반대였다. 내가 이웃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웃도 나를 훤히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문을 닫아도 이 집의 내부가 밖에 훤히 보인다고 느꼈다. 밖에 나와 있는 것은 그인데 내 집이 공개되어 있는 것처럼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이웃이 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이웃이 나올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의식이 되었다. 이웃이 나오는 순간 내 집 문이 열린다는 착각이 들었다. 문고리를 걸고 이중창을 전부 닫고 집안일을 하다가 지금쯤이면 이웃이 집에 들어갔겠지 싶어 창밖을 내다보면 여지없이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면 이웃은 나를 몹시 반가운 얼굴로 눈인사를 건네거나 손을 흔드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꽤 친밀한 사람인 것처럼 이웃의 제스처는 자연스러웠다.
   창문을 통해 말을 건네는 일도 있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우산을 챙기라고 할 때도 있었고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속내를 다짜고짜 털어놓을 때도 있었다. 이웃이 대화를 걸어오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했고 그러고 난 뒤에는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이웃이 나왔는지 들어갔는지 나와서 뭘 하는지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일부러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있으려니 화가 났다. 내가 왜 내 집에 있으면서 편치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창밖조차 내다보지 못하는지 기분이 상했다.
   이웃이 제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요구는 부당했다.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내 사생활을 침해했지만 근거가 애매했다.
   이웃은 가구를 손질하거나 고추를 말리거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성방가를 부르거나 행패를 부린 것이 아니다. 직접적 피해를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거기는 공유지였다. 이웃이 그곳에 있으면 안 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내 집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거기서 나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세차를 하던 이웃이 호스를 내려놓고 창 앞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기분이 들 수 있어요. 난 이 빌라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을 봤으니까요. 그 사람들 중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난 전에도 봤어요. 그런 사람이 꽤 있었다고요. 스트레스가 커지면 없는 것을 보기도 한다고요. 들린다고요. 당신이 본 것에 집착하면 안 되요. 들은 것에 집중하지 말아요. 보인다고 해서 실재한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들린다고 대꾸해선 안 된다고요.”
   이웃의 충고대로 창밖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기웃거리게 된다. 처음에는 이웃이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나 살피다가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계속 흘끗거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이제는 의심도 걱정도 아니고 그냥 이웃이 뭘 하는지 호기심을 느끼기도 하고 내 집을 둘러보듯 별생각 없이 쳐다볼 때도 있다.
   이웃은 전화를 하고 물을 마시고 세차를 한다.
   그런데 그가 정말 전화를 하고 있는 건가.
   내게 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가.
   그가 정말 물을 마시는가.
   내게 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건 아닌가.
   그가 정말 세차를 하는가.
   세차를 하는 행위를 통해 혹시, 내게, 뭔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닌가.

   믹스커피를 한 잔 마시고도 졸음을 쫒지 못해 졸고 있는데 손님이 레일 위에 물건을 놓았다. 레일 위에 놓인 코드를 찍고 계산된 총금액을 알려주는데 상대의 얼굴이 낯익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이웃이다.
   “반갑습니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이다. 내가 일하는 마트는 집과 꽤 떨어진 블록에 있다. 전에 일하던 마트에서 상사와 트러블을 겪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이웃이 이곳까지 물건을 사러 온 건 왜일까. 근처에 볼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달갑지는 않다.
   나는 부러 퉁명스런 말투로 만 칠천오백 원이라고 일러주고, 얼굴을 피한 채 봉투에 형광등과 계란, 유리 물병을 담는다. 내가 언짢아진 것을 눈치챘는지 그가 미안해하며 설명한다.
   “실은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대답을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일단 말을 해보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백이호 이웃이 나를 모욕했어요.”
   사백이호는 좀처럼 마주치는 일이 없이 간혹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만 들리는 집이다. 디제이는 연주자와 곡명 정도를 말해주는 클래식 라디오다. 종종 들려오는 연주곡에 귀 기울이다가, 엊그제는 처음으로 음반 가게를 찾았다. 마음에 드는 곡이 흘러나와서 디제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곡명을 받아 적었다. 연주자의 이름은 헛갈렸다. 점원의 도움을 받아 시디를 구입했고 이제는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에 꼭 듣는다.
   빌라에 사는 이들 중에는 사백이호 이웃과 가장 취향이 비슷하고, 그래서 혹시라도 가까이 지낸다면 사백이호가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단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고 집을 들락거릴 때마다 복도에, 계단에, 빌라 입구에서 마주치는 건 늘 삼백삼호였다. 그런데 백이호가 삼백삼호 이웃을 모욕했다고 했다.
   이웃은 인상을 쓰며 마치 내가 사백이호라도 되는 듯 흥분했다. 내가 자기편이 되어 줄 거라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이웃이 말하기를 내가 자기 집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집에 들어갔다고요?”
   “무단침입을 했다는 겁니다. 내가 자기 집에 들어갔다고요. 그 사람은 내가 보기에 제정신이 아닙니다. 아니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요.”
   이웃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갈 이유가 대체 뭐 있겠어요?”
   내가 궁금한 것은 그가 그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였다.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이웃이 말하는 도움이라는 것은 증언이었다. 그가 나의 선량한 이웃이었다는 한마디라고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고 스스로 흡족했다. 생각해보겠다는 말이 있는 한 어떤 대화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이웃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생각해보고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그냥 당신이 아는 대로, 내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걸, 내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간 걸 못 봤다고 말해주면 되는데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이웃이 내 표정을 살폈다. 동의하는 기색이 없자 조금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안 그래요?”
   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이웃은 자기가 예상한 것과 다른 상황임을 깨닫고 봉투를 들고 황급히 마트에서 사라졌다.

   퇴근길에 집에 돌아가 저녁을 먹는데 아랫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소리는 아랫집에서 나는데 목소리는 삼백삼호다. 이웃이 오후에 내 일터에 찾아와 한 이야기를 그대로 아랫집 사람에게 하고 있다.
   아랫집 사람의 대응은 나와는 다르다. 자기도 사백이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사성이 없고 거만해서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삼백삼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좀 전보다 더 높고 더 큰 목소리로 자기가 지금 얼마나 억울한 상황에 처했는지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호응을 하며 열심히 듣던 이백이호가 과일을 좀 깎아오겠다며 일어섰다.
   칼이 사과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 칼날이 사과에 박히는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밥을 먹다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혹시 그들도 내가 뭘 먹는지 보고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 빌라에는 벽이 없는 게 아닌가.
   내 눈에만 벽이 보이는 게 아닌가.
   
   이백이호와 사백이호와 삼백삼호 그리고 나, 모두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웃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의 움직임을 느끼듯이 그들도 내 움직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빌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보듯이 말이다.
   “아닙니다.”
   아랫집 안방에 앉아있던 삼백삼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게 말한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 빌라에는 벽이 있어요.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지 않을 뿐 그것은 엄연한 벽입니다. 벽은 있어요. 그 벽을 허문 것은 당신입니다. 내가 그랬잖아요. 보인다고 다 진짜가 아니라고, 들리는 것에 모두 대꾸하지 말라고요. 내가 진즉에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티브이를 끄고 잤다고 생각했는데 켜둔 채였나 보다. 시끄러운 것은 못 견딘다,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괜한 말이었나 보다. 티브이를 켜놓고도 용케 잔 걸 보면 어제 몹시 피곤했나 보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거실로 나갔는데 이웃이 거실에 누워있다. 모로 누워 몸을 뻗은 채 팔을 굽혀 머리를 받힌 모양새가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편안해 보인다.
   그는 나를 보고도 별 놀란 기색이 없다. 다만 자세를 바꾸고 일어나 앉아 흐트러진 머리 모양새를 매만질 뿐이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대답을 찾지 못한다.
   “아, 소리가 너무 컸습니까?”
   이웃이 리모컨을 조정해 볼륨을 낮춘다.
   “미안합니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서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아요. 난 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수업시간에도 그랬어요. 선생님이 설명하는 게 어떤 부분은 잘 안 들렸어요. 그래서 집중을 못 한다고 곧잘 혼이 났죠. 따귀를 맞은 적도 있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 없다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중을 못 한 게 아닙니다. 난 귀가 잘 안 들려요. 그뿐입니다. 일부러 안들은 게 아니라고요.”
   이웃이 이른 아침에 허락도 없이 내 집에 들어왔고 내 티브이를 보고 리모컨을 마음대로 사용해놓고 단지 그 소리가 크다는 점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그의 청력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받은 오해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는 내게 구구절절 털어놓고 있다.
   나는 기가 차서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심호흡으로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평정을 되찾은 뒤에 당장 내 집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가라는 얘깁니까?”
   이웃이 물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요. 여기는 내 집이고 당신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지만 내 집에서 당장 나가주세요.”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손끝이 떨렸다.
   “요즘 예민해 보이시던데, 지금 당신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가 정말 당신 집이 맞는지를, 잘 봐요.”
   이웃이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 집을 당당히 둘러봤다. 마치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은 자처럼 만족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 집에 들어온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나더니 큰 선심을 쓰듯 음식 채널이 틀어져 있는 티브이를 가리켰다.
   “이건 내 티브이고요, 내가 2016년에, 그러니까 2년 2개월 전에 거금을 들여 9:16의 황금비율로 주말에 영화를 보기 위해 구입한 거죠. 이게 정말 당신 겁니까? 모르겠으면 이 리모컨을 잘 봐요. 이게 당신 리모컨 맞습니까? 당신 집 리모컨은 모서리가 둥그스름한데, 이건 그렇지가 않잖아요. 잘 봐요. 모서리가 아주 반듯한 90도라고요.”
   그가 리모컨을 내밀었다.
   “이게 정말 당신 겁니까? 아니죠. 이건 내 거예요. 내 리모컨입니다. 그리고 이건 내 티브이고요.”
   이웃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여긴 내 집입니다.”

최정화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글이 타인에게도 그러하리라고 믿는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과 이 세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더 오래 앉아있어도 끄떡없도록 운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다. 언젠가 우주를 꼭 한번은 보고 싶다.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