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감독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노인은 예의 바른 말투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말했다. 나는 상대가 저자세로 나오면, 심지어 깍듯하기까지 하면 속수무책으로 마음이 상냥해진다.
   “제가 약속이 있어서……”
   약간 유연해진 목소리를 감지한 노인이 훅, 치고 들어왔다.
   “10분이면 됩니다.”
   나는 작게 한숨 쉬는 것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매번 이래 놓고 후회한다. 늙은 감독과 배우들은 젊은 감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마치 자신의 시간과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노인은 바로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80년 후, 미래에서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102년이죠.”
   “네?”
   마침 졸려서 얘기를 듣다 자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잠이 확 깼다. 그건 다행이었다. 노인은 내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좌표를 저 문 앞 복도로 찍었는데 화장실로 떨어졌지 뭐예요. 잠시 헤맸습니다. 3분이나 허비했네요. 이제 30분 15초 남았군요.”
   노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를 봤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내가 입을 떼기도 전 그가 재빨리 선수를 쳐 말했다.
   “아, 그리고 제가 누군지 궁금하실 텐데.”
   노인은 약간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당신의 아들이랍니다. 아버지.”
   점입가경이었다.
   “그러시군요.”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나를 노인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잘못 키운 막둥이를 쳐다보는 팔순 아버지의 회한에 젖은 눈빛이었다. 나는 반쯤 기대어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 고쳐앉았다. 그리고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꺼풀이 처졌으나 눈매가 길고 콧날은 섰지만 콧망울이 둥글었다. 도톰한 입술은 골초인지 색이 좀 어두웠다. 귀는 얼굴에 비해 큰 편이었다. 내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나, 어디서 본 듯도 하고. 단역은 그렇다 쳐도 어느 때는 조연도 못 알아봐서 난처한 상황이 많았다. 어떤 감독은 자기 영화는 물론이고 남의 영화에 나온 단역까지도 다 기억한다는데. 이런 저조한 기억력은 직업적으로 불리하다.
   “지금 오디션 연기 하시는 거죠?”
   “아닙니다.”
   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면접에 와서 떠드는 별별 헛소리들을 많이 들었지만 이런 신박한 개소리는 처음이었다. 알츠하이머가 무서운 병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있지도 않은 자식이 노인이 되어 미래에서 오다니. 게다가 아버지라니.
   “선약이 있어서, 그럼 이만.”
   나는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이 손목에 찬 크래노그래프 시계의 독특함에 끌렸으나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어떤 아내들은 자신의 남편을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데 왕가위 감독의 아내가 그랬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은 자료 조사를 위해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고. 그의 작품은 디테일한 역사 고증으로 유명하다. 내 아내도 나에게 늘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시간에 가산을 탕진하는 남자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아닌 시계였지만.
   “여전히 시간에 가산을 탕진하고 계시군요.”
   흠칫 놀라 노인을 쳐다보니 그의 시선이 내 시계로 향해 있었다. 장난기가 묻어난 미소를 지으며. 이런 얘기를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었나. 나는 노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몇 해 전 해외의 작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후 인터뷰를 종종 했으니.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얼른 문을 열고 나왔다.

   주혁과의 약속은 3시. 10분 남짓 시간이 남았다. 약속 장소는 내 사무실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건물이었고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노인이 따라붙을까 봐 나는 경보로 한달음에 커피숍 문을 열었다. 약간 숨이 가쁠 정도의 속도였다.
   “아이스, 카페라떼 주세요.”
   주문을 한 후 한숨을 돌리는데 벽에 단정하게 붙여 놓은 ‘노키즈 존’ 문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놀랍게도 노인이 서 있었다. 림프관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영화를 커피에 비유하셨죠. 인생이라는 쓴 샷을 픽션이라는 부드러운 크림으로 감싸는 것, 그게 영화의 본질이다 라고.”
   노인은 나와 달리 숨이 차거나 땀 한 방울 흘린 기색 없이 안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숨이 차기도 했고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밀크커피와 같다. 인생이라는 쓴 샷을 영화라는 부드러운 크림으로 감싸는 것’ 사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독일의 유명한 감독이 한 말이다. 그후 나는 우유나 크림을 넣은 라떼만 고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글을 읽었다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노인은 자연스레 내 테이블 앞자리에 앉았다.
   “좋아요, 어르신이 제 아들이라 칩시다. 미래에서 왜 온 건데요. 저한테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이번주 로또 번호를 알려준다거나, 이번에 찍을 영화의 스코어를 알려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면 앞으로 닥칠 재앙을 막으러 오기라도.
   “아버지가 여기서 무엇을 할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 마세요.”
   나는 당황했다. 주혁이 이 자식이 장난을 치는 걸까? 녀석이 유쾌한 성격이기는 하나 이렇게까지 공들여 농을 칠 정도로 우리는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한가하지 않다. 그럴 나이도 아니고.
   “제가 뭘 할 건데요?”
   나는 노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묶지 마세요.”
   순식간에 모세혈관이 확장되며 얼굴에 혈액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주혁만 빼고. 혈액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었다.
   “당신, 누구요?”
   노인은 이런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아들입니다. 오른쪽 귓바퀴에 이루공이 있죠.”
   자신의 오른쪽 귀를 내보이며 노인이 말했다. 과연, 바늘구멍 같은 작은 구멍이 보였다. 선천성 이루공은 우리 집안 유전이다. 아버지도 나도, 내 동생도 있다. 굉장히 사소하고도 은밀한 유전적 특징을 알고 있다. 하지만 100명 중 2~3명이 있는 흔한 기형인데. 내 시큰둥한 표정을 읽은 노인은 말을 이었다.
   “제 집에 수고양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는 짜증을, 노여움을 숨기지 않고 맞받아쳤다. 나는 여기서 이 남자와 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나, 출입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혁은 아직이었다.
   “삼삼이랍니다. 강릉 김가 33대손 중 둘째거든요.”
    엇. 이번엔 폐였다. 허파 꽈리들이 모든 산소를 내뱉고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뒷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은회색의 풍성한 털과 뾰족한 귀를 가진 고양이의 이름은 하루키였다. 녀석은 한눈에 보기에도 우람하면서도 도도한 것이 무엇보다 비싸 보였다.
   “이름이 왜 하루키야?”
   “노르웨이 숲 종이거든.”
   그런 종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노르웨이의 깊은 숲에서 자연 발생되었다는 고즈넉한 탄생 신화를 갖고 있는 녀석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가격에 녀석을 분양받았다. 그리고 혈통을 철통처럼 지켰다. 그 녀석에게 아내는 자신의 성을 부여했다. 강릉김씨 1대손이라고.
   “지금은 33대손까지 번창했지요. 사진이 있으면 좋으련만. 종이 여러 번 바뀌었어요. 혼혈이라 그런지 아주 건강하고요.”
   노인이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노르웨이가 먼 고향인 강릉김씨 1대손 하루키의 미래가 완벽한 혼혈이라니. 아내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약간의 쾌감이 느껴졌다. 딱히 딩크족을 선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될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나와 달리 아내의 입장은 꽤 분명했다.
   “자식을 갖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조건 중 두 개 이상이 충족되어야 한대.”
   아내가 가느다란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했다. 첫째, 양육에 대한 유희로서의 만족감. 둘째, 노동력으로서의 가치. 셋째, 봉양에 대한 기대감.
   “이 중에 해당하는 게 있어?”
   없었다.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으니 농경 사회의 가치였던 ‘자식 농사’와 관계가 없다. 국가가 제공하는 국민연금, 노령연금과 약간의 자산이 노후에 기다리고 있으니 보험으로서의 자녀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아내는 아이 우는 소리라면 딱 질색이라고 말했다. 조카는 잘만 보더만.
   나는 관객이 잘 들지 않는 독립영화를 찍었다. 아내는 조용한 하루키상의 엄마가 되었다. 때때로 친구의 자녀들이나 조카를 보면 애틋한 감정이 일었다. 바로 그게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다. 마음이 흔들릴까 봐, 내 안온한 삶이 무너질까 봐.

   “제가 왜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지 설득해보세요. 5분 드리죠.”
   나는 아직까지 돋아있는 목덜미의 소름을 쓸어내렸다.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리 세대는 위기에 몰렸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2020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84명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그후 인구는 해마다 모래시계처럼 줄어들었지요.”
   노인은 인구 감소로 인해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 그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다고 했다. 다만, 위기에 몰려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었다고.
   “늘 그렇듯, 관료들은 과학자들을 갈아넣었고 우리는 타임머신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노인은 손목에 찬 시계를 살짝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어이쿠, 15분 남았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타임머신을 만드는 게 출산율을 높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인가.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노인은 이런 나의 반응 따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모든 문제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였어요.”
   강경파는 과거로 가서 비뇨기과를 폭파해 버리자는 주장을 폈다고 했다. 특히 2020년대에 대유행이었던 1+1을 해주는 병원을 보란듯이 타깃으로 삼아 비뇨기과라면 얼씬도 못하게 하자고 말이다. 그들은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온건파는 부랴부랴 대책을 세웠는데 폭탄 테러범들을 쫓아다니며 훼방을 놓거나 그도 아니면 사람들에게 감정의 호소를 하는 것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우리는 이 작전을 미션 임파서블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지금 강경파가 속속들이 미래에서 과거로 오고 있다고 했다. 지금 저 문을 열고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강경파가 설치한 폭탄 테러에 당할 거라고.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고 무식한 방법인데요.”
   나는 그가 말한 작전명을 듣고 풋, 터지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말했다. 이걸 지금 나한테 믿으라는 건가.
   “말했잖아요, 그런 정권으로 바뀌었다니까. 아주 무식한 인간이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노인은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부끄러워했다. 80년이 지나도 지금과 다를 게 없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굳이 알게 되어 기분만 나빴다. 하지만 사실일 리가 없잖아. 그때, 주혁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친구이자 내 아내의 오빠이기도 하니까. 이 모든 건 녀석의 정교한 장난일 것이다. 나를 발견한 주혁이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얼마 전 봤을 때보다 배가 더 나온 것 같았다.
   “많이 기다렸어? 근처에 불이 났는지 소방차가 엄청 가데? 요즘 불이 왜 이렇게 자주 나나 몰라. 덕분에 차가 어찌나 막히는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혁은 앞자리 노인을 힐끔 쳐다봤다. 이 할아버지는 누구냐는 표정으로.
   “저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죽을 겁니다.”
   노인은 다짜고짜 주혁을 향해 말했고 주혁은 이 할아버지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어,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나 먼저 갈게. 난 오늘밖에 시간이 없거든. 아내가 안 하고 오면 안 하겠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혁은 노인을 한번 더 힐끔 쳐다보곤 냉큼 엘리베이터를 탔다. 비뇨기과는 바로 2층이다.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혁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나는 그가 한눈을 파는 사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잽싸게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려는 순간, 노인이 내 소매를 잡아챘다. 그리고 손을 꼭 잡았다. 아귀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아버지.”
   노인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렸다. 나도 간절한 표정으로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다. 저 화장실 좀 가면 안 될까요? 저도 지금 급한데 참고 있는 겁니다. 아니, 왜 참으세요 전립선에 안 좋아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그 연세에 전립선보다 더 중요한 게 뭐예요. 우린 남북 정상 회담장의 국가원수처럼 서로의 양손을 어색하게 맞잡은 채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좋아요,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 주혁을 따라 들어가 1+1의 할인 혜택을 받으리라 마음먹었다.
   “이름이 뭐죠?”
   “배태랑입니다.”
   놀라서 오줌을 조금 지리고 말았다. 만약 자식을 낳는다면, 아들딸을 낳아 인류가 관습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형태라고 일컫는 4인 가족이 된다면, 짓고 싶은 이름이 있었다. 그건 그 누구도 모르는 내 가슴 속에 있는 이름들이었다. 배태랑, 그리고……
   “호혹시, 다른 형제가 있나요?”
   노인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여동생이 있지요. 우린 이름 덕분에 어릴 적 놀림을 많이 받았어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특별한 사람들은 이름도 남다르다 그러셨죠. 그래도 그렇지, 배태랑과 배태리가 뭡니까.”
   흐흐 웃는 노인의 눈가에 섬세한 아코디언 같은 주름이 잡혔다. 이럴 수가.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놓칠 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놓쳤으나 노인이, 아니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낳은 적도 없는 아들이 잡아주었다. 70 이상, 80 이하 노인치고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순발력이 좋군요.”
   “아버지가 항상 강조하셨죠. 코어 근육을 키우라고.”
   나도 안 하는 운동을 시켰다니.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얘기하셨어요. 넌 오래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중요한 임무가 있다라고. 항상 의아했죠. 특별하기는커녕 저는 지극히 평범했으니까요.”
   나는 다시 한번 눈앞에 내 늙은 아들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170 초반의 신장, 65에서 70 사이일 듯한 몸무게. 적당히 벗어져 넓어 보이는 이마와 회색빛의 듬성한 모발. 세기가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군. 인간이 노화하는 방식은 여전히 순리적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늙은 남자였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젊었을 때나 어렸을 때도 범상함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중요한 임무란 뭘까. 나는 아들을 훈련시키는 사라 코너의 비장한 마음이 되어 아들에게 물었다.
   “왜 당신이 온 거죠? 미래의 사람들 대표로 뽑힌 건가요?”
   “뽑힌 게 아니고 자원한 거예요. 목숨을 걸어야 되거든요.”
   노인은 과거에 도착한 후 35분이 지나면 육체가 소멸한다고 했다.
   “이제 9분 남았네요. 앞으로 8분 56초 후 저는 죽어요, 아버지.”
   무슨 타임머신이 그렇게 허술하냐고 물으니 ‘아직 시험 단계’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사제’여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여든에 가까운 늙은 아들이라도 부모 앞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다니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를 다시 보니 좋네요.”
   그는 검버섯이 듬성듬성 피어난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내 눈앞의 아드님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내 신체 부위 중 하나인 가느다란 관을 묶는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정말 실제 하는 것일까. 이상한 트릭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저는 지켜야 할 게 있거든요.”
   아들은 50년 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그 전에도 몇 번의 연애를 해봤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고.
   “특별한 여자였어요.”
   세기가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군. 사랑에 빠지는 방식은 여전히 고전적이었다. 아들은 사랑을 막 시작한 남자의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그녀와 결혼했죠. 그리고 우린 이듬해 아들을 낳았어요.”
   아들의 아들은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는 짝눈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자로 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도 몇 번의 연애 끝에 이 여자는 다르다며 데리고 온 특별한 여자와 결혼을 했고 얼마 후 아들을 낳았다.
   “따지고 보니 약간의 속도위반이 있긴 했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요. 고 녀석 아주 귀엽더군요.”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 즉 증손자는 머리가 또래보다 월등히 커서 나올 때 제 어미를 꽤 고생시켰다. 이틀에 걸친 진통 끝에 산모가 기절하는 바람에 결국 제왕 절개를 했다. 자궁을 갈라 아이를 꺼낸 의사는 간호사에게 아이를 넘기고 후처치를 하던 중 간호사가 어머, 하고 작게 지르는 비명을 들었다. 15년 경력의 간호사였지만 그동안 받아 온 신생아 중 그렇게 큰 고환을 가진 아기는 처음 보았다고 했다.
   “누굴 닮았는지.”
   아들의 혼잣말을 들으며 나는 시선을 피했다. 옆 테이블의 남녀가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올 때부터 그 고생을 시키더니 이번에도 이 녀석이 사고를 쳤지 뭡니까, 아버지.”
   아들은 나에게 하소연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사고라는 게 혹시.
   “제가 증손주를 봤어요. 이번엔 딸입니다. 꼬물꼬물한 신생아인데도 알겠더군요. 머리통이 제 애비를 쏙 뺐습니다.”
   나도 같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고 녀석 참. 보지도 못한,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딸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이 유전자의 끌림, 이 가슴 몽글몽글한 기분은 뭐란 말인가.
   “그 아이가 어제 태어났습니다.”
    아들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동공의 검은색이 빛바래 탁해 보였지만 결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당신은 시간을 거슬러 나를 만나러 왔군요.”
   “묶지 마세요, 아버지.”
   웃음기를 지운 아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제게서 이 모든 걸 빼앗지 마세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칠팔십 대 노인들의 액션물을 찍는다면 재미있을까. 하지만 그런 영화가 성공할 리 없겠지. 그건 감독인 나 자신이 제일 잘 안다. 노인들만 나오는 영화는 노인들도 좋아하지 않겠지. 심지어 여주인공이 할머니다? 제작사가 펄쩍 뛰며 나를 쳐다보겠지. 이 감독이 몇 번 엎어지더니 드디어 맛이 갔군, 이라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정말 미래에서 왔다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우선 내 영화들은 어떻게 되었나. 앞으로 찍을 영화는? 나는 영화계에 획을 그은 감독이 되었나? 하지만 아들은 미래 발설 금지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왔다며 말을 아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의 기억뿐이죠.”
   내 늙은 아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아버지는, 하고 입을 떼려는 순간 이번엔 내가 선수를 쳤다.
   “그래도 저는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어요.”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2020년대 대한민국 부동산 가격 데이터도 보고 왔느냐고 묻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영어 유치원비는, 저기 붙어 있는 노키즈 존 딱지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정말 말 안 들……”
    말을 미처 끝맺기도 전 그는 정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빛바랜 사진처럼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결국 없어졌다. 증발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위층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였다. 그 압력으로 나는 뒤로 날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리와 등에 강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연기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뿌옇게 흐린 공간 사이로 날아간 문짝과 부서진 벽의 잔해들 틈으로 쓰러진 사람들과 비틀거리는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아수라장이었다. 왕가위 감독의 액션 장면처럼. 요즘 시나리오를 너무 많이 읽었나. 꿈을 꾸고 있나. 꿈이라면 너무나 고약한 꿈이었다.

김하율

아이를 낳고 나니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아졌다. 나는 원래 걱정 근심 따위 없는 사람이었는데. 80년 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타임머신은 성공할까? 대한민국은 온전히 존재할까? 그곳에서 우리의 배태랑, 배태리는 행복할까.

2022/06/28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