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른 봄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겠지만……
미영은 남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유품관리사 사업부장 오영종. 사무실 책상에는 똑같은 명함 네 개가 더 있다. 처음 남자를 맞이한 신입인 서주임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박 대리는 알아보고 나중에 전화를 주겠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나머지 직원들 역시 비슷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직원들은 각자의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와줄 이는 없는 듯 보인다. 이제 자신의 차례인 것이다. 다시금 남자가 내민 명함을 본 뒤 자리를 권한다. 사무실에서 오고 갈 말들을 떠올리자 등 뒤가 따끔거렸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씩 넘긴 뒤 남자는 최근 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은원 양의 유품을 가지러 왔다고 전한다. 김은원. 그런 이름이 있었나 미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성과 직위로 이루어진 호칭이 아닌 이름 석 자. 사무실에선 김 주임 또는 김 계장이라 불렸을 터였다. 미영은 남자가 말한 김은원이란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애저녁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한 분이 있는데, 현재 요양원에 계신다고 합니다.”
삼류 드라마에서도 쓰지 않을 법한 구구절절한 설정. 꺼림칙한 상황을 변명하듯 시시콜콜한 가정사가 덧붙는다. 그 안에 내포된 딱한 사정이 있는 이를 도와야 한다는 사람의 도리, 협박 같은 권유를 미영은 놓치지 않는다. 반쯤은 흘려들은 채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시선은 응접실 창밖으로 보이는 팔차선 도로에 고정되어 있다. 건널목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양 끝에 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날의 사고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저곳, 저들이 밟고 지나가는 횡단보도 위에서 일어난 사고 말이다. 그 날 도로에는 벗겨진 펌프스, 콤팩트, 지갑, 손수건과 화장용품. 소지품들이 뒹굴고 있었다. 중심에 쓰러진 한 여자. 여자가 있었다. 그녀에게선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는 모두가 술렁였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죽은 게 아니냐는…… 최악을 의미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내 침묵했다. 흘러내린 피가 아스팔트 위에 고였지만 흐르지 않았다. 차도는 거대한 주차장 같았다. 모든 것이 멈춘 채 시간조차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쓰러진 여자의 가슴이 작게 들썩임과 동시에 어디선가 비명과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짜 비명일지도 모른다. 자동차의 클랙슨이 울리고 소리는 옆에서 옆으로 번졌다. 경찰이 도착했고, 차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각자 목적지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은 이따금 도로 쪽을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미영은 가장 먼저 응접실 창가에 섰다. 사무실 내 도로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였다. 그녀는 여전히 도로에 방치된 채 홀로 떨고 있었다.
직원들은 사고 장소에서 가져온 불안을 말들로 쏟아냈다. 신호가 바뀌는 순간 여자가 뛰쳐나갔다는 목격담. 자동차의 고장으로 인한 급발진이 사람을 치었다고도 하는 추측. 다양한 말들이 오가고 옮겨졌지만,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 충족되면 그뿐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모든 관심이 사고에 쏠려 사무실 내 빈 한 자리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최근 온 파견 사원이었다. 몇몇 직원들이 이따금 그녀의 빈자리를 흘끔거렸지만, 누구도 그녀의 부재를 묻지 않았다. 다음 날도 역시. 삼 일째가 되던 날 팀장이 김 계장의 부재를 얘기했다. 그녀가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주석처럼 덧붙여졌다. 더 좋은 조건. 개인 사정. 신입직원이 갑자기 출근하지 않는 일은 흔했다. 모두 더는 묻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리가 비워졌다. 별것 아닌 사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건 시기의 미묘함 때문이다. 한 여자의 사고. 다른 한 여자의 부재.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녀의 빈자리를 흘끔거리던 시선.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으나 내뱉진 않았다. 쏟아진 이야기의 무게를 가늠치 못해 모두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미영님, ……서미영님. 서미영님. 반복해서 부르는 님을 붙인 호칭. 미영의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잠시 마주했던 시선이 비켜나갔다. 그 시선은 미영이 보고 있던 사고 장소를 바라보고 있다. 머쓱해진 미영이 짐을 찾아보겠다는 핑계로 일어섰다. 사무실에 들어서 팀장에게 현 상황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김은원이 누구냐 물었다. 미영은 최근 갑작스럽게 관둔 김 계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지 정말 죽었냐고 되물어 온다. 미영은 침묵했다.
“그래서 김은원이 죽었는데 뭐 어쨌다고?”
유품을 가지러 와? 이 사무실에? 사무실에 유품이 될 만한 것이 뭐가 있냐는 의아한 물음. 팀장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줘버리라 말한다. 뭐 대단한 게 있다고 대충 줘서 보내.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들고 오냐는 말을 끝으로 손을 내젓는다. 가보란 소리였다. 미영이 몸을 일으키자, 긴장된 열 개의 시선이 모였다 흩어졌다. 자리에 돌아와 먼저 김은원의 인사기록을 검색한다. 열 명이 넘는 동명이인이 조회되었다. 섬네일 사진이 있긴 했다.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과 미소로 웃고 있다. 미영은 입사일과 퇴사 일을 재조회해 본다. 조건에 가장 근접한 직원을 찾아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부재 메시지뿐이다. 휴대폰은 로밍 중. 외국으로 떠난 걸까? 지금 이 시기에? 미영의 시선이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미영은 지금 ‘괜찮다’라는 한마디가 필요하다. 보고란 누군가가 규정 해주길 바라는 행위에 가깝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책임을 나누는 행위. 몇 번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시시콜콜’이란 한마디에 다시 주저앉는다.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응접실로 들어선다. 손님은 정자세를 한 채 미영을 기다리고 있다. 표정을 살피며 고르는 거절의 말들은 하나같이 조심스럽다. “고인의 유품인데 유가족에게 확인해야 하지 않나 말씀을 하셔서요.” 변명처럼 덧붙인 말들은 거짓이다. 미영은 그녀가 정말 사고로 관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부재 후 비워진 짐들은 귀퉁이에 자리한 채 먼지만 맞고 있다가 조용히 비품실로 옮겨졌다. 언제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짐들은 눈앞의 남자가 찾으러 오기 전까지 모두가 잊고 있던 것들이다. 미영은 가족과 연락이 닿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치마 주머니에 넣었던 명함을 꺼내 유선 번호를 확인한다.
“이 번호로 연락을 드리면 될까요?”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업무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운다는 답변과 함께 영종은 아래 휴대폰 번호를 얘기했다. 유품관리사 오영종. 미영은 이름과 연락처를 다시금 확인했다. 특이한 직업이라는 미영의 말에 남자가 작게 웃는다. 단순한 청소부일 뿐입니다. ‘청소’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 단어의 의미. 죽음을 지운다는 행위가 고인의 삶에 대한 비하처럼 여겨져 바꾸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말을 마친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떠나는 남자의 등을 본 미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빠르면 세 시, 늦으면 다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청소 일은 대게 오후 네 시쯤 끝났다. 영종은 샤워를 마치고 외출준비를 시작한다. 식사나 하자는 동료들의 권유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외투를 걸치고 거리에 나서면 이제 그는 유품관리사 사업부장 김영종이다. 많은 이들이 영종에게 일하게 된 계기, 이유를 물어 오곤 했다. 그 날 영종은 마지막 구역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던 중 봉투 사이에 끼인 까만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규격 외 봉투. 무시해도 좋았다.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영종은 그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다. 다른 쓰레기 봉지 틈에 사이로 구겨 넣으면 될 듯 보였다. 시간은 많았고 어차피 누군가는 할 일이란 생각에 손을 내밀었다. 물체를 움켜쥔 순간 느껴진 서늘함.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깜짝 놀라 떨어뜨릴 뻔한 것을 다른 손으로 받쳐 든다. 순간 느껴진 미끄덩한 감촉. 하나하나가 피부에 새겨진다. 그것은 한때 '생명'이었던 어떤 것을 추측하게 했지만,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몹쓸 짓을. 욕이 목구멍까지 치달았다. 잠시간의 분을 삭인 뒤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강아지나 고양이의 새끼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동물이라 생각해도 영혼이 이렇게 저미는데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이었던 존재를 쓰레기 더미에 둘 수도 없는 일이라. 검은 봉지에 담긴 물체를 점퍼 안쪽에 넣은 채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위장에 뜨거운 돌덩이 하나가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영종은 세상에 정리되지 않은 죽음을 생각했다. 사명감은 아니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이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가끔 변화 없는 평탄한 삶을 생각하기도 한다. 직원들끼리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그런 삶.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거나 승진을 꿈꾸는 그런 일상. 지나친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을 버릴 수 있는가? 셔츠 단추를 잠그던 손이 멈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갸웃했다. 쉬운 선택이라 생각했으나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거리에 나설 때까지 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약속장소에 도착한 순간에도 영종은 결정짓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선배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환이다. 선배. 매번 듣지만, 매번 낯선 호칭. 주변을 둘러보자 저 멀리 손 흔들며 다가오는 지환이 보인다. 그는 오늘 평소에 자주 입는 청바지가 아닌 세미 정장을 입고 있다. 전혀 다른 낯선 모습에 선이라도 봤냐고 묻자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늙수그레한 아저씨를 만나는데 왜 이렇게 멋있게 하고 나왔냐고 되묻자 일 때문이라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영종에게 엄청 까다로운 고객이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랬던가? 이틀 전 만난 의뢰인을 떠올려 본다. 무엇하나 도드라짐 없는 수수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빽빽하게 자리한 주름들.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십 년 정도 젊은 느낌이다. 연령대를 추측하기 어려웠지만 길거리를 걷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대체 이런 부인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뢰인의 대부분은 집주인이다. 무연고로 사망한 세입자의 짐 정리를 맡기는 것이 일의 대부분이다. 가족의 유품을 정리해 달라는 의뢰는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흔치 않은 것이었다.
부인은 먼저 집 구석구석을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갈색의 탁자 위에는 화분이 놓여 있다. 두텁고 광택이 도는 잎은 누군가 소중히 키워온 것 같다. 깨끗하게 닦인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오래된 원목 가구들은 초칠을 한 듯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배어있는 집.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간 마주한 집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간 지환과 영종이 찾은 곳들은 ‘무연고’라는 글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소들이었다. 낡고 오랜 기간 방치된 그런 장소. 누렇게 뜬 벽지. 갈라진 장판. 곳곳에 드러낸 시멘트의 벽.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단 말이에요? 이렇게 되묻게 되는 그런 곳 말이다. 어쩌면 이 부인은 이삿짐센터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닐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두 사람은 업무 내용을 재차 설명했다. 부인에게 의뢰 내용을 한 번 더 되묻기도 했다. 모든 계약이 끝난 뒤 지환은 내일 혼자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괜찮겠냐고 영종이 묻자 문제없다고 답한다. 자신만만한 표정. 정말 별일 아닌 듯 보였다.
늦은 저녁 지환을 고민하게 만든 건 낯선 번호로 수신된 문자였다. 턱을 괸 채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 열한 시를 넘어가는 시간. 문자는 의뢰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방문 시 양복을 입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양복이라니. 지환은 다시 시계를 봤다. 양복도 없을뿐더러 늦은 저녁 구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복을 입고 일을 하는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지환은 어려운 상황을 상세히 기재하여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늦어도 좋으니 빌려서라도 입고 오라는 답신이 끝이었다. 지환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양복을 빌리기 위함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양복을 빌리고 세탁소에 다급하게 다림질을 맡겼다. 서둘렀지만 방문은 한 시간이 늦어졌다. 의뢰인에게서 별말이 없어 바로 일을 시작했다. 방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다. 가구도 물건도 없는 것이다. 고인이 활동한 단체에 대부분이 기증되었다고 부인이 전했다. 남은 대부분은 버려지는 것이다. 어차피 버릴 것이라면 대충하면 좋을 텐데 짐을 옮길 때마다 한마디가 덧붙었다. 실내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지 마라. 부서지거나 깨지면 안 된다며 양손으로 들어서 옮겨라. 하나하나 꼼꼼하게 싸서 포장이 풀리지 않도록 해라. 버릴 물건들은 수거 용품과 비수거 용품. 재활용품과 일반 쓰레기로 구분하라는 등이었다. 사소하고 색다른 주문에 지환은 일의 규모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게 끝?”
지환이 더는 말이 없기에 영종이 먼저 물었다.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남은 업무량을 물었다. 나머지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환은 일이 끝났다고 말했다. 사진보다 훨씬 정리가 잘되어 있었고 큰 가구 대부분은 이미 들어내고 없었다는 것이다. 정리한 건 안방의 가구, 옷가지, 이불 정도로 의뢰인이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면 한 시간 이내에 끝날 일이었다고.
“한 시간이 뭐야, 십 분이면 끝났을걸요.”
지환이 투덜거린다. 대부분 짐이 정리되어 있는데 사람을 불렀다고? 영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 많은 짐을 정리했으면서 이불을 개지도 않고 그냥 두었단 말이에요.”
“이불?”
“예, 이불이요.”
이불, 이불이란 말이지? 영종이 중얼거렸다. 덧붙이듯 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지 되물었다. 글쎄요. 지환은 일의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일하는 내내 떠들어 대던 부인이었다. 유난히 조용했던 건 들어낸 짐을 현관 앞에 하나하나 쌓아둘 때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옷과 그릇은 나중에 수거 업체에서 가지러 올 것이라 따로 두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지환이 들고 있는 이불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물었다. 그것은 버리는 것이었다. 워낙 까다로워 한 번 더 물었을 뿐이었다. 부인은 말이 없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 어느 순간 펑펑 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놀란 지환은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이불을 든 채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상하게 그 모습이 남았다고 지환이 전했다. 다음 의뢰인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지환은 계속 이상하다는 말과 왜 그랬을까? 라는 말을 반복했다. 영종은 일정을 되묻는다. 휴가를 내야 할 것이다. 교대해줄 직원들의 이름을 하나둘 떠올려 보았지만 쉬워 보이진 않았다.
*
미영은 ERP를 다시 보았다. 계산이 맞지 않았다. 어디서 차이가 난 것일까. 계산은 정확했지만 맞지 않다. 모순과 오류. 손끝에 들린 펜이 책상 바닥을 두들겼다. 사고. 사고가 생겼다. 예감은 불법적인 사건, 사고를 추측하게 했다. 보고는 진즉에 끝났다. 금액 차이가 커 몇 가지 서류만 대조해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괸 팀장은 말이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보겠다는 말로 끝을 맺은 뒤 가보라고 손을 내젓는다. 최근 그는 유난히 예민해졌다. 오늘 오전만 해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며 전표와 송장을 전부 반려시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미영의 손길이 점점 빨라진다. 며칠째 걸고 있는 전화는 반복적으로 부재중 메시지만 뱉어냈다. 미영을 본 팀장은 일이 없냐며 빈정거린다. 목소리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직원들은 종일 그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계장님, 유계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어깨에 손을 올리는 갑작스런 느낌.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돌아보니 서주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불렀다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차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했으나 그만두었다. 다들 눈치채지 못한 일이라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대신 최근 회사에 찾아온 영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서주임은 얼마 전 찾아온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은원이란 직원은 없잖아요.”
단기 파견직. 계약직. 프리랜서. 유동인구가 많아서일까. 그녀는 김은원을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고가 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비워진 자리. 현재 그 자리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주임. 그녀가 전임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영은 서주임의 이름을 생각하려 했다. 그리고 문득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팀장이 미영을 찾은 건 퇴근 직전이었다. 지시사항이 있다면 자리로 불러 전했을 것이다. 굳이 회의실로 부를 필요는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의 칠 할은 불안감이었다. 걸음마다 솟아나는 불안감을 내리누르며 회의실의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회의가 있다는 말을 박대리가 전했다. 언제 끝나냐고 물었지만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직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에도 미영은 회의실에서 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대리가 타준 믹스커피는 식은 지 오래.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은 시간, 팀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한 시간 만이었다. 손에는 얇은 종이가 한 장 들려있었다. 미영은 그의 얼굴색을 살핀다. 평소의 뚱한 표정이라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연신 턱을 문질러댔다.
“김계장이 사고가 난 것이 언제였지?”
지나가는 말로 팀장이 운을 뗀다. 최근 영종과의 일을 떠올린 미영이 알아서 처리했다고 답했다. “그래? 그런가?” 별 의미 없다는 듯 팀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다 못한 미영이 자신을 부른 용건에 관해 먼저 물었다. 답은 없었다. 대신 들고 온 종이를 미영 앞으로 내민다. 익숙한 형태의 사각 틀과 숫자의 나열. 전표. 전표와 장부의 사본을 든 미영은 두 서류를 대조했다. 같은 날 발행된 서류는 기록된 숫자가 다르다. 실 전표에는 장부에 기재한 액수보다 두 자릿수가 더 큰 금액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임의의 숫자를 공란에 기록한 듯 보였다. 미영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서류에 기재된 금액의 차이를 계산하며 속으로 되새긴다. 차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손에 땀이 차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천천히 다시 확인해 본다. 시선은 전표 오른쪽 위에 자리한 담당자를 확인한다. 미영의 이름과 팀장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 아래 기재된 서명. 머리를 갸웃해본다. 이렇게 큰 금액의 전표를 발행한 기억이 없었다.
“저는……”
“알아.”
미영의 말을 가로막으로 팀장이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얼굴을 쓸었다.
“위원장께서 장난을 좀 쳤다 하시는군.”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표정으로 미영은 팀장이 내뱉는 말들을 듣고 있었다. 이따금 추임새 같은 신음이나 탄성이 나왔다. 중간 말이 끊어지더니 팀장은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실내에서 금연이었지만, 굳이 지적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전표의 빈 곳에 글자를 써넣었다고 했다. 호기심에 설마 될까 싶어 장난을 좀 쳐봤다는 것이다. 윗선에선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사고가 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계약 건을 가져와 문제를 덮어왔다. 이번에도 비슷한 거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미영이 되물었으나 답이 없다. 긴 시간을 침묵한 팀장이 되물었다.
“김계장이 사고가 난 게 언제였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이어지는 팀장의 말에 미영은 침묵한다. 호흡을 조절한다. 앞선 질문이 단순한 안부를 물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진행 상황을 물은 것 역시 아니다.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다. 책임이 지워져도 아무 문제가 없는. 전표 위 미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건 옳지 않아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돈이 얼마인지 알아? 위원장은 그렇다 치자 그 책임은 누가 질 것 같아? 지금 내 자리보전도 힘들다고. 어르듯 팀장이 말했다. 잘 생각해봐. 이미 죽은 사람이야. 지금 일어난 일은 윗선 모두가 알고 있다고. 단지 그들은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고 있을 뿐이라 한다. 협박과 어르는 말이 반복된다. 설마 죽은 사람에게 회사가 책임을 전가하겠냐며, 조용히 그리고 적당히 살자는 말이 반복된다. 숨이 가빠와 미영은 가슴께를 움켜쥐며 쥐어짜듯이 말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더듬더듬 이어진 말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미영 자신도 알 수 없다. 횡설수설 이어진 말들은 그저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끝이 났다. 미영은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섰다.
*
의뢰인이 얘기한 주소에 도착한 영종과 지환은 지하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얼굴을 덮는 더운 공기, 묵은 공기 냄새, 습한 지하 냄새, 하수도의 악취. 다양한 냄새를 타고 올라오는 특유의 시취에 토기가 올라왔다. 평소처럼 방독면을 썼어야 했다. “연고가 있어서 방심했네요.” 지환의 말에 영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은 자신을 아들이라 소개했다. 그가 찾는 것은 문서였다. 땅문서와 집문서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했다. 보수도 나쁘지 않았다. 지환은 흔쾌히 일을 수락했다. 지금, 두 사람은 눈앞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 안방 문을 연 지환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무슨 일이냐 물으며 다가선 영종 역시 멈춰 선다. 방치된 방. 방은 고인이 살았던 시간과 그 이후를 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하소연 같은. “너무한데” 지환의 말에 영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은 대충 치운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집 안의 집기들을 들어내고 벽지를 뜯어냈다. 가구들을 들어낼 때마다 그리마들이 수십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빠르게 달아났다. 사람이 살았던 집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지환은 돈을 더 부를 걸 그랬다며 투덜거렸다. 가구를 들어내면서 서랍 내부의 짐들을 봉투에 담으면서 두 사람은 집문서와 땅문서를 찾았다. 가구의 서랍, 책꽂이, 책 사이사이를 훑는다.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포기. 지환은 항복의 표현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일이나 빨리 끝내자며 남은 짐을 옮긴다. 이불을 들어 올렸을 때, 바닥에 누렇게 말라붙은 종이 하나가 발견됐다. 지환은 서류를 들어 올렸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찾은 것 같은데요?”
지환이 서류를 흔든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서류에서 풍기는 악취에 영종은 고개를 돌렸다. 집 안 가구의 대부분을 옮긴 뒤 밖으로 나와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등 뒤였다. 그곳에는 그들이 짐을 날랐던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이웃이라 생각해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리는 반복해서 들렸고 돌아보자 의뢰인이 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한동안 멍해 있었다. 의뢰인이 손을 내밀었다. 지환은 밖에 내놓은 가구 위에 말리고 있던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 가까이 다가선 의뢰인은 역한 냄새에 코를 막는다. 표정이 험악해진다. 지환이 넉살 좋게 고인의 이불 아래에서 발견했다는 말을 전했다. 엄지와 집게로 종이를 집어 최대한 몸에서 멀리 떨어뜨린 의뢰인은 나머지 잔금을 입금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의뢰인은 건물로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유품 수거를 하던 그 건물이었다. 일층, 이층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 뒤 주변은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타들어 가는 담배의 끝이 손끝에 닿아 뜨거웠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나머지 짐들을 정리했다.
마지막 짐을 나른 두 사람이 목욕탕으로 향한다. 샤워기에서 물을 맞으며 영종은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오랜 기간 뇌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은 필요가 없는 것, 쓸모없는 존재로 분류되어 지워진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너무 장기간 보존하면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차차 지워진다. 불쾌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기억들을 지우면서 사람들은 새로이 살아갈 동력을 변명처럼 만들어낸다. 그럴 거였음 기억, 생각들을 수용성으로 만들면 좋았을 텐데, 의례처럼 하루를 마치며 씻어내는 순간 물과 함께 하루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백 만년 살 동력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찬물을 맞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떤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본다. 숨이 멎고 난 뒤 마르고 썩어 가는 몸. 흐르는 체액. 젖어 드는 이불. 천천히 이불을 적시고 항상 깔고 누웠던 집문서에 스미기까지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것은 하나의 징표였다. 떠난 이가 자식에게 남긴 삶에 대한 농담 같은. 웃어보려 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구겨진 종이 같은 아들의 표정뿐. 영종은 수압을 올렸다. 허황한 생각들은 비누 거품과 함께 흐르는 물에 흘려보냈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 영종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젊은 여자의 유품을 수거하는 일이 남았다. 예상대로 며칠이 지났지만 전화는 없었다. 짐을 옮기려면 직접 찾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영종이 몸을 일으키자 같이 가겠다고 지환이 따라나선다. 며칠간 그의 고생을 알기에 영종은 들어가 쉬라 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자동차 열쇠를 내민다. 괜찮다고 말한다. 별일 아니야. 불만이 가득 찬 표정. 늙은이와 다니더니 최근 지환은 걱정만 늘었다.
*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셨겠지만……”
기계적인 톤. 똑같은 인사말. 미영은 영종이 내민 명함을 받아든다. 전화는 여전히 로밍 메시지와 부재 메시지를 반복 중. 아직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했다. 김계장, 김은원. 문제 많은 이름을 중얼거리며 양미간을 손으로 누른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다. 퇴근 시간이었다. 남자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선 미영은 서주임이 건네는 비품실 열쇠를 받아든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구석에서 뽀얀 먼지를 쌓고 있는 짐들이 보인다. 쌓여있는 상자는 열 개가 조금 안 된다. 다급하게 관둔 직원들의 짐이었다. 미영은 그중에 한 상자를 들었다. 슬리퍼, 필기구와 노트, 회의록, 자, 탁상달력, 파우치 대충 그 정도였다. 공간 박스의 반도 되지 않는 흔적. 초등학생도 아니고 소지품에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을 테지. 팀장의 말처럼 대충 줘버려도 좋지 않을까. 미영은 상자를 들어 본다. 짐이 많은 상자는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다. 짐이 너무 적으면 영종이 의심할 것 같다. 적당한 무게의 상자를 들어 응접실로 향한다. 상자를 받아 든 남자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가족들과 연락이 되었냐고 물어왔다. 미영은 답하지 않았다.
영종은 짐들은 하나씩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유품을 확인하는 동안 미영은 응접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흘긋 미영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본 영종이 고층 건물이 풍광이 좋다며 칭찬을 했다. 막 해가 지는 회색빛 하늘의 풍광 그 아래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사진에 나올 듯한 도회지의 풍경. 사고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하는 건널목을 가리키며 미영이 말했다.
“저곳에서 난 사고였답니다.”
사고 당일 이곳에서 현장을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애도의 말을 전한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오후여서일까? 그림자 때문일까? 남자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지쳐 보인다.
“갑작스러운 사고였어요. 운이 나빴죠.”
주변에 선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말이죠. 이것은 변명일까. 한 단어 한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의도를 미영 자신도 알 수 없다. 눈앞의 남자는 잠시 미영을 바라볼 뿐 말이 없다. 그는 천천히 짐을 확인한다. 필통 속 필기구. 탁상용 달력의 일정을 훑는다. 반년 가까운 일정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슬리퍼. 노트.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손에는 한 장의 사진이 들려있다. 거리를 배경으로 친구인 듯 보이는 두 여자가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다. 누가 김은원일까. 남자는 다시금 사진을 본다. 사진 속 여자를 지나쳐 주변을 훑는다. 굽은 허리에 손을 얹고 길을 걷는 노파. 딸인 듯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손에는 마트로고가 새겨진 봉투가 들려있다. 익숙한 얼굴. 어디서 봤을까. 나무 아래 서서 담배를 피는 한 남자. 하회탈 같이 주름진 얼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 배경에 찍힌 모두가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영종은 머리를 긁적였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톡. 톡. 톡.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팔목에 찬 손목시계를 손톱으로 두드리는 미영이 보였다. 일곱 시가 넘는 시간. 사무실을 비워야 한다는 말에 책상 위의 짐을 다급하게 공간 박스에 넣었다.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선다. 건물을 나설 때까지 미영은 유품관리사라는 직업에 관해 묻는다. 특이하면서도 멋진 직업인 것 같다는 인사치레도 잊지 않는다.
“덕분에 잠시 그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걸요.”
거짓말이었지만, 거짓말도 사회생활의 한 가지 덕목이라 생각했다. 영종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영종의 말을 들으며 미영은 팀장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어쩌면 내일, 미영은 김계장의 이름으로 발급된 위조 전표를 만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조 전표 문제로 회사를 관두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그저 일일 뿐. 미영은 코트의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민다. 집으로 향하는 길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매년 이맘때쯤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 봄을 알리는 노래들. 벌써 봄인가? 나뭇가지마다 파릇한 빛이 돈다. 주변을 한 번 둘러 본 뒤 미영은 지하도에 들어섰다. 미영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영종은 건널목에 멈춰 섰다. 사고 장소라던 그 건널목이다. 차들이 도로 위를 지나칠 때마다 으드득하고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모래 혹은 그보다 조금 큰 돌. 뼈가 부서지는 소리 같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영종 역시 걸음을 옮겼으나 곧 멈췄다. 발끝에 닿는 시린 기운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걸음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쉬는 숨결에 생겨난 옅은 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상과 영하를 오간다는 뉴스. 꽃샘추위란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깜빡이던 녹색등은 어느새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모두 건널목을 건넜다. 차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영종만이 홀로 멈춰선 채다.
미영은 남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유품관리사 사업부장 오영종. 사무실 책상에는 똑같은 명함 네 개가 더 있다. 처음 남자를 맞이한 신입인 서주임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박 대리는 알아보고 나중에 전화를 주겠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나머지 직원들 역시 비슷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직원들은 각자의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와줄 이는 없는 듯 보인다. 이제 자신의 차례인 것이다. 다시금 남자가 내민 명함을 본 뒤 자리를 권한다. 사무실에서 오고 갈 말들을 떠올리자 등 뒤가 따끔거렸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씩 넘긴 뒤 남자는 최근 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은원 양의 유품을 가지러 왔다고 전한다. 김은원. 그런 이름이 있었나 미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성과 직위로 이루어진 호칭이 아닌 이름 석 자. 사무실에선 김 주임 또는 김 계장이라 불렸을 터였다. 미영은 남자가 말한 김은원이란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애저녁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한 분이 있는데, 현재 요양원에 계신다고 합니다.”
삼류 드라마에서도 쓰지 않을 법한 구구절절한 설정. 꺼림칙한 상황을 변명하듯 시시콜콜한 가정사가 덧붙는다. 그 안에 내포된 딱한 사정이 있는 이를 도와야 한다는 사람의 도리, 협박 같은 권유를 미영은 놓치지 않는다. 반쯤은 흘려들은 채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시선은 응접실 창밖으로 보이는 팔차선 도로에 고정되어 있다. 건널목의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양 끝에 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날의 사고를 기억하고 있다. 바로 저곳, 저들이 밟고 지나가는 횡단보도 위에서 일어난 사고 말이다. 그 날 도로에는 벗겨진 펌프스, 콤팩트, 지갑, 손수건과 화장용품. 소지품들이 뒹굴고 있었다. 중심에 쓰러진 한 여자. 여자가 있었다. 그녀에게선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지켜보는 모두가 술렁였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죽은 게 아니냐는…… 최악을 의미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내 침묵했다. 흘러내린 피가 아스팔트 위에 고였지만 흐르지 않았다. 차도는 거대한 주차장 같았다. 모든 것이 멈춘 채 시간조차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쓰러진 여자의 가슴이 작게 들썩임과 동시에 어디선가 비명과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짜 비명일지도 모른다. 자동차의 클랙슨이 울리고 소리는 옆에서 옆으로 번졌다. 경찰이 도착했고, 차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각자 목적지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은 이따금 도로 쪽을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미영은 가장 먼저 응접실 창가에 섰다. 사무실 내 도로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였다. 그녀는 여전히 도로에 방치된 채 홀로 떨고 있었다.
직원들은 사고 장소에서 가져온 불안을 말들로 쏟아냈다. 신호가 바뀌는 순간 여자가 뛰쳐나갔다는 목격담. 자동차의 고장으로 인한 급발진이 사람을 치었다고도 하는 추측. 다양한 말들이 오가고 옮겨졌지만,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이 충족되면 그뿐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모든 관심이 사고에 쏠려 사무실 내 빈 한 자리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최근 온 파견 사원이었다. 몇몇 직원들이 이따금 그녀의 빈자리를 흘끔거렸지만, 누구도 그녀의 부재를 묻지 않았다. 다음 날도 역시. 삼 일째가 되던 날 팀장이 김 계장의 부재를 얘기했다. 그녀가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주석처럼 덧붙여졌다. 더 좋은 조건. 개인 사정. 신입직원이 갑자기 출근하지 않는 일은 흔했다. 모두 더는 묻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리가 비워졌다. 별것 아닌 사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는 건 시기의 미묘함 때문이다. 한 여자의 사고. 다른 한 여자의 부재.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녀의 빈자리를 흘끔거리던 시선.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으나 내뱉진 않았다. 쏟아진 이야기의 무게를 가늠치 못해 모두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다.
……미영님, ……서미영님. 서미영님. 반복해서 부르는 님을 붙인 호칭. 미영의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잠시 마주했던 시선이 비켜나갔다. 그 시선은 미영이 보고 있던 사고 장소를 바라보고 있다. 머쓱해진 미영이 짐을 찾아보겠다는 핑계로 일어섰다. 사무실에 들어서 팀장에게 현 상황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김은원이 누구냐 물었다. 미영은 최근 갑작스럽게 관둔 김 계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지 정말 죽었냐고 되물어 온다. 미영은 침묵했다.
“그래서 김은원이 죽었는데 뭐 어쨌다고?”
유품을 가지러 와? 이 사무실에? 사무실에 유품이 될 만한 것이 뭐가 있냐는 의아한 물음. 팀장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줘버리라 말한다. 뭐 대단한 게 있다고 대충 줘서 보내. 이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들고 오냐는 말을 끝으로 손을 내젓는다. 가보란 소리였다. 미영이 몸을 일으키자, 긴장된 열 개의 시선이 모였다 흩어졌다. 자리에 돌아와 먼저 김은원의 인사기록을 검색한다. 열 명이 넘는 동명이인이 조회되었다. 섬네일 사진이 있긴 했다. 하나같이 똑같은 얼굴과 미소로 웃고 있다. 미영은 입사일과 퇴사 일을 재조회해 본다. 조건에 가장 근접한 직원을 찾아 자택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부재 메시지뿐이다. 휴대폰은 로밍 중. 외국으로 떠난 걸까? 지금 이 시기에? 미영의 시선이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미영은 지금 ‘괜찮다’라는 한마디가 필요하다. 보고란 누군가가 규정 해주길 바라는 행위에 가깝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책임을 나누는 행위. 몇 번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시시콜콜’이란 한마디에 다시 주저앉는다.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응접실로 들어선다. 손님은 정자세를 한 채 미영을 기다리고 있다. 표정을 살피며 고르는 거절의 말들은 하나같이 조심스럽다. “고인의 유품인데 유가족에게 확인해야 하지 않나 말씀을 하셔서요.” 변명처럼 덧붙인 말들은 거짓이다. 미영은 그녀가 정말 사고로 관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부재 후 비워진 짐들은 귀퉁이에 자리한 채 먼지만 맞고 있다가 조용히 비품실로 옮겨졌다. 언제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짐들은 눈앞의 남자가 찾으러 오기 전까지 모두가 잊고 있던 것들이다. 미영은 가족과 연락이 닿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치마 주머니에 넣었던 명함을 꺼내 유선 번호를 확인한다.
“이 번호로 연락을 드리면 될까요?”
남자는 고개를 젓는다. 업무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운다는 답변과 함께 영종은 아래 휴대폰 번호를 얘기했다. 유품관리사 오영종. 미영은 이름과 연락처를 다시금 확인했다. 특이한 직업이라는 미영의 말에 남자가 작게 웃는다. 단순한 청소부일 뿐입니다. ‘청소’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 단어의 의미. 죽음을 지운다는 행위가 고인의 삶에 대한 비하처럼 여겨져 바꾸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말을 마친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떠나는 남자의 등을 본 미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면 세 시, 늦으면 다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청소 일은 대게 오후 네 시쯤 끝났다. 영종은 샤워를 마치고 외출준비를 시작한다. 식사나 하자는 동료들의 권유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외투를 걸치고 거리에 나서면 이제 그는 유품관리사 사업부장 김영종이다. 많은 이들이 영종에게 일하게 된 계기, 이유를 물어 오곤 했다. 그 날 영종은 마지막 구역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던 중 봉투 사이에 끼인 까만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규격 외 봉투. 무시해도 좋았다.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었다. 영종은 그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였다. 다른 쓰레기 봉지 틈에 사이로 구겨 넣으면 될 듯 보였다. 시간은 많았고 어차피 누군가는 할 일이란 생각에 손을 내밀었다. 물체를 움켜쥔 순간 느껴진 서늘함.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깜짝 놀라 떨어뜨릴 뻔한 것을 다른 손으로 받쳐 든다. 순간 느껴진 미끄덩한 감촉. 하나하나가 피부에 새겨진다. 그것은 한때 '생명'이었던 어떤 것을 추측하게 했지만,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몹쓸 짓을. 욕이 목구멍까지 치달았다. 잠시간의 분을 삭인 뒤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강아지나 고양이의 새끼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동물이라 생각해도 영혼이 이렇게 저미는데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이었던 존재를 쓰레기 더미에 둘 수도 없는 일이라. 검은 봉지에 담긴 물체를 점퍼 안쪽에 넣은 채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위장에 뜨거운 돌덩이 하나가 가라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영종은 세상에 정리되지 않은 죽음을 생각했다. 사명감은 아니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이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가끔 변화 없는 평탄한 삶을 생각하기도 한다. 직원들끼리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그런 삶.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거나 승진을 꿈꾸는 그런 일상. 지나친 행복을 위해 지금의 삶을 버릴 수 있는가? 셔츠 단추를 잠그던 손이 멈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고개를 갸웃했다. 쉬운 선택이라 생각했으나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거리에 나설 때까지 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약속장소에 도착한 순간에도 영종은 결정짓지 못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선배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환이다. 선배. 매번 듣지만, 매번 낯선 호칭. 주변을 둘러보자 저 멀리 손 흔들며 다가오는 지환이 보인다. 그는 오늘 평소에 자주 입는 청바지가 아닌 세미 정장을 입고 있다. 전혀 다른 낯선 모습에 선이라도 봤냐고 묻자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늙수그레한 아저씨를 만나는데 왜 이렇게 멋있게 하고 나왔냐고 되묻자 일 때문이라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영종에게 엄청 까다로운 고객이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랬던가? 이틀 전 만난 의뢰인을 떠올려 본다. 무엇하나 도드라짐 없는 수수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빽빽하게 자리한 주름들.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십 년 정도 젊은 느낌이다. 연령대를 추측하기 어려웠지만 길거리를 걷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대체 이런 부인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뢰인의 대부분은 집주인이다. 무연고로 사망한 세입자의 짐 정리를 맡기는 것이 일의 대부분이다. 가족의 유품을 정리해 달라는 의뢰는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흔치 않은 것이었다.
부인은 먼저 집 구석구석을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갈색의 탁자 위에는 화분이 놓여 있다. 두텁고 광택이 도는 잎은 누군가 소중히 키워온 것 같다. 깨끗하게 닦인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오래된 원목 가구들은 초칠을 한 듯 은은한 광택이 돌았다.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배어있는 집.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간 마주한 집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간 지환과 영종이 찾은 곳들은 ‘무연고’라는 글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소들이었다. 낡고 오랜 기간 방치된 그런 장소. 누렇게 뜬 벽지. 갈라진 장판. 곳곳에 드러낸 시멘트의 벽.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단 말이에요? 이렇게 되묻게 되는 그런 곳 말이다. 어쩌면 이 부인은 이삿짐센터를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닐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두 사람은 업무 내용을 재차 설명했다. 부인에게 의뢰 내용을 한 번 더 되묻기도 했다. 모든 계약이 끝난 뒤 지환은 내일 혼자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괜찮겠냐고 영종이 묻자 문제없다고 답한다. 자신만만한 표정. 정말 별일 아닌 듯 보였다.
늦은 저녁 지환을 고민하게 만든 건 낯선 번호로 수신된 문자였다. 턱을 괸 채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 열한 시를 넘어가는 시간. 문자는 의뢰인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방문 시 양복을 입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양복이라니. 지환은 다시 시계를 봤다. 양복도 없을뿐더러 늦은 저녁 구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복을 입고 일을 하는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지환은 어려운 상황을 상세히 기재하여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늦어도 좋으니 빌려서라도 입고 오라는 답신이 끝이었다. 지환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양복을 빌리기 위함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양복을 빌리고 세탁소에 다급하게 다림질을 맡겼다. 서둘렀지만 방문은 한 시간이 늦어졌다. 의뢰인에게서 별말이 없어 바로 일을 시작했다. 방들은 하나같이 비어 있다. 가구도 물건도 없는 것이다. 고인이 활동한 단체에 대부분이 기증되었다고 부인이 전했다. 남은 대부분은 버려지는 것이다. 어차피 버릴 것이라면 대충하면 좋을 텐데 짐을 옮길 때마다 한마디가 덧붙었다. 실내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지 마라. 부서지거나 깨지면 안 된다며 양손으로 들어서 옮겨라. 하나하나 꼼꼼하게 싸서 포장이 풀리지 않도록 해라. 버릴 물건들은 수거 용품과 비수거 용품. 재활용품과 일반 쓰레기로 구분하라는 등이었다. 사소하고 색다른 주문에 지환은 일의 규모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게 끝?”
지환이 더는 말이 없기에 영종이 먼저 물었다.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남은 업무량을 물었다. 나머지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환은 일이 끝났다고 말했다. 사진보다 훨씬 정리가 잘되어 있었고 큰 가구 대부분은 이미 들어내고 없었다는 것이다. 정리한 건 안방의 가구, 옷가지, 이불 정도로 의뢰인이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면 한 시간 이내에 끝날 일이었다고.
“한 시간이 뭐야, 십 분이면 끝났을걸요.”
지환이 투덜거린다. 대부분 짐이 정리되어 있는데 사람을 불렀다고? 영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 많은 짐을 정리했으면서 이불을 개지도 않고 그냥 두었단 말이에요.”
“이불?”
“예, 이불이요.”
이불, 이불이란 말이지? 영종이 중얼거렸다. 덧붙이듯 다른 특이 사항이 없는지 되물었다. 글쎄요. 지환은 일의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일하는 내내 떠들어 대던 부인이었다. 유난히 조용했던 건 들어낸 짐을 현관 앞에 하나하나 쌓아둘 때였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옷과 그릇은 나중에 수거 업체에서 가지러 올 것이라 따로 두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지환이 들고 있는 이불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물었다. 그것은 버리는 것이었다. 워낙 까다로워 한 번 더 물었을 뿐이었다. 부인은 말이 없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 어느 순간 펑펑 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울음에 놀란 지환은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이불을 든 채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이상하게 그 모습이 남았다고 지환이 전했다. 다음 의뢰인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지환은 계속 이상하다는 말과 왜 그랬을까? 라는 말을 반복했다. 영종은 일정을 되묻는다. 휴가를 내야 할 것이다. 교대해줄 직원들의 이름을 하나둘 떠올려 보았지만 쉬워 보이진 않았다.
미영은 ERP를 다시 보았다. 계산이 맞지 않았다. 어디서 차이가 난 것일까. 계산은 정확했지만 맞지 않다. 모순과 오류. 손끝에 들린 펜이 책상 바닥을 두들겼다. 사고. 사고가 생겼다. 예감은 불법적인 사건, 사고를 추측하게 했다. 보고는 진즉에 끝났다. 금액 차이가 커 몇 가지 서류만 대조해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괸 팀장은 말이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보겠다는 말로 끝을 맺은 뒤 가보라고 손을 내젓는다. 최근 그는 유난히 예민해졌다. 오늘 오전만 해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며 전표와 송장을 전부 반려시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미영의 손길이 점점 빨라진다. 며칠째 걸고 있는 전화는 반복적으로 부재중 메시지만 뱉어냈다. 미영을 본 팀장은 일이 없냐며 빈정거린다. 목소리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직원들은 종일 그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계장님, 유계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어깨에 손을 올리는 갑작스런 느낌.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돌아보니 서주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불렀다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차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했으나 그만두었다. 다들 눈치채지 못한 일이라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대신 최근 회사에 찾아온 영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서주임은 얼마 전 찾아온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은원이란 직원은 없잖아요.”
단기 파견직. 계약직. 프리랜서. 유동인구가 많아서일까. 그녀는 김은원을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고가 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비워진 자리. 현재 그 자리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주임. 그녀가 전임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영은 서주임의 이름을 생각하려 했다. 그리고 문득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팀장이 미영을 찾은 건 퇴근 직전이었다. 지시사항이 있다면 자리로 불러 전했을 것이다. 굳이 회의실로 부를 필요는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의 칠 할은 불안감이었다. 걸음마다 솟아나는 불안감을 내리누르며 회의실의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회의가 있다는 말을 박대리가 전했다. 언제 끝나냐고 물었지만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직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에도 미영은 회의실에서 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대리가 타준 믹스커피는 식은 지 오래.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은 시간, 팀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한 시간 만이었다. 손에는 얇은 종이가 한 장 들려있었다. 미영은 그의 얼굴색을 살핀다. 평소의 뚱한 표정이라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연신 턱을 문질러댔다.
“김계장이 사고가 난 것이 언제였지?”
지나가는 말로 팀장이 운을 뗀다. 최근 영종과의 일을 떠올린 미영이 알아서 처리했다고 답했다. “그래? 그런가?” 별 의미 없다는 듯 팀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다 못한 미영이 자신을 부른 용건에 관해 먼저 물었다. 답은 없었다. 대신 들고 온 종이를 미영 앞으로 내민다. 익숙한 형태의 사각 틀과 숫자의 나열. 전표. 전표와 장부의 사본을 든 미영은 두 서류를 대조했다. 같은 날 발행된 서류는 기록된 숫자가 다르다. 실 전표에는 장부에 기재한 액수보다 두 자릿수가 더 큰 금액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임의의 숫자를 공란에 기록한 듯 보였다. 미영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서류에 기재된 금액의 차이를 계산하며 속으로 되새긴다. 차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손에 땀이 차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천천히 다시 확인해 본다. 시선은 전표 오른쪽 위에 자리한 담당자를 확인한다. 미영의 이름과 팀장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 아래 기재된 서명. 머리를 갸웃해본다. 이렇게 큰 금액의 전표를 발행한 기억이 없었다.
“저는……”
“알아.”
미영의 말을 가로막으로 팀장이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얼굴을 쓸었다.
“위원장께서 장난을 좀 쳤다 하시는군.”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표정으로 미영은 팀장이 내뱉는 말들을 듣고 있었다. 이따금 추임새 같은 신음이나 탄성이 나왔다. 중간 말이 끊어지더니 팀장은 담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실내에서 금연이었지만, 굳이 지적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전표의 빈 곳에 글자를 써넣었다고 했다. 호기심에 설마 될까 싶어 장난을 좀 쳐봤다는 것이다. 윗선에선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사고가 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계약 건을 가져와 문제를 덮어왔다. 이번에도 비슷한 거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미영이 되물었으나 답이 없다. 긴 시간을 침묵한 팀장이 되물었다.
“김계장이 사고가 난 게 언제였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이어지는 팀장의 말에 미영은 침묵한다. 호흡을 조절한다. 앞선 질문이 단순한 안부를 물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진행 상황을 물은 것 역시 아니다.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다. 책임이 지워져도 아무 문제가 없는. 전표 위 미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건 옳지 않아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돈이 얼마인지 알아? 위원장은 그렇다 치자 그 책임은 누가 질 것 같아? 지금 내 자리보전도 힘들다고. 어르듯 팀장이 말했다. 잘 생각해봐. 이미 죽은 사람이야. 지금 일어난 일은 윗선 모두가 알고 있다고. 단지 그들은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고 있을 뿐이라 한다. 협박과 어르는 말이 반복된다. 설마 죽은 사람에게 회사가 책임을 전가하겠냐며, 조용히 그리고 적당히 살자는 말이 반복된다. 숨이 가빠와 미영은 가슴께를 움켜쥐며 쥐어짜듯이 말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더듬더듬 이어진 말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미영 자신도 알 수 없다. 횡설수설 이어진 말들은 그저 좀 더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끝이 났다. 미영은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섰다.
의뢰인이 얘기한 주소에 도착한 영종과 지환은 지하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얼굴을 덮는 더운 공기, 묵은 공기 냄새, 습한 지하 냄새, 하수도의 악취. 다양한 냄새를 타고 올라오는 특유의 시취에 토기가 올라왔다. 평소처럼 방독면을 썼어야 했다. “연고가 있어서 방심했네요.” 지환의 말에 영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은 자신을 아들이라 소개했다. 그가 찾는 것은 문서였다. 땅문서와 집문서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말했다. 보수도 나쁘지 않았다. 지환은 흔쾌히 일을 수락했다. 지금, 두 사람은 눈앞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 안방 문을 연 지환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무슨 일이냐 물으며 다가선 영종 역시 멈춰 선다. 방치된 방. 방은 고인이 살았던 시간과 그 이후를 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하소연 같은. “너무한데” 지환의 말에 영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은 대충 치운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집 안의 집기들을 들어내고 벽지를 뜯어냈다. 가구들을 들어낼 때마다 그리마들이 수십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빠르게 달아났다. 사람이 살았던 집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지환은 돈을 더 부를 걸 그랬다며 투덜거렸다. 가구를 들어내면서 서랍 내부의 짐들을 봉투에 담으면서 두 사람은 집문서와 땅문서를 찾았다. 가구의 서랍, 책꽂이, 책 사이사이를 훑는다.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포기. 지환은 항복의 표현으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일이나 빨리 끝내자며 남은 짐을 옮긴다. 이불을 들어 올렸을 때, 바닥에 누렇게 말라붙은 종이 하나가 발견됐다. 지환은 서류를 들어 올렸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찾은 것 같은데요?”
지환이 서류를 흔든다. 둥글게 휘어진 눈매.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서류에서 풍기는 악취에 영종은 고개를 돌렸다. 집 안 가구의 대부분을 옮긴 뒤 밖으로 나와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등 뒤였다. 그곳에는 그들이 짐을 날랐던 건물이 있을 뿐이었다. 지나가는 이웃이라 생각해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소리는 반복해서 들렸고 돌아보자 의뢰인이 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한동안 멍해 있었다. 의뢰인이 손을 내밀었다. 지환은 밖에 내놓은 가구 위에 말리고 있던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 가까이 다가선 의뢰인은 역한 냄새에 코를 막는다. 표정이 험악해진다. 지환이 넉살 좋게 고인의 이불 아래에서 발견했다는 말을 전했다. 엄지와 집게로 종이를 집어 최대한 몸에서 멀리 떨어뜨린 의뢰인은 나머지 잔금을 입금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의뢰인은 건물로 들어섰다. 방금 전까지 유품 수거를 하던 그 건물이었다. 일층, 이층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 뒤 주변은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타들어 가는 담배의 끝이 손끝에 닿아 뜨거웠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나머지 짐들을 정리했다.
마지막 짐을 나른 두 사람이 목욕탕으로 향한다. 샤워기에서 물을 맞으며 영종은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오랜 기간 뇌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은 필요가 없는 것, 쓸모없는 존재로 분류되어 지워진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너무 장기간 보존하면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차차 지워진다. 불쾌하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기억들을 지우면서 사람들은 새로이 살아갈 동력을 변명처럼 만들어낸다. 그럴 거였음 기억, 생각들을 수용성으로 만들면 좋았을 텐데, 의례처럼 하루를 마치며 씻어내는 순간 물과 함께 하루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백 만년 살 동력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찬물을 맞으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떤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본다. 숨이 멎고 난 뒤 마르고 썩어 가는 몸. 흐르는 체액. 젖어 드는 이불. 천천히 이불을 적시고 항상 깔고 누웠던 집문서에 스미기까지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것은 하나의 징표였다. 떠난 이가 자식에게 남긴 삶에 대한 농담 같은. 웃어보려 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구겨진 종이 같은 아들의 표정뿐. 영종은 수압을 올렸다. 허황한 생각들은 비누 거품과 함께 흐르는 물에 흘려보냈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 영종은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젊은 여자의 유품을 수거하는 일이 남았다. 예상대로 며칠이 지났지만 전화는 없었다. 짐을 옮기려면 직접 찾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영종이 몸을 일으키자 같이 가겠다고 지환이 따라나선다. 며칠간 그의 고생을 알기에 영종은 들어가 쉬라 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자동차 열쇠를 내민다. 괜찮다고 말한다. 별일 아니야. 불만이 가득 찬 표정. 늙은이와 다니더니 최근 지환은 걱정만 늘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하셨겠지만……”
기계적인 톤. 똑같은 인사말. 미영은 영종이 내민 명함을 받아든다. 전화는 여전히 로밍 메시지와 부재 메시지를 반복 중. 아직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했다. 김계장, 김은원. 문제 많은 이름을 중얼거리며 양미간을 손으로 누른다.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다. 퇴근 시간이었다. 남자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로 들어선 미영은 서주임이 건네는 비품실 열쇠를 받아든다. 문을 열고 불을 켜자 구석에서 뽀얀 먼지를 쌓고 있는 짐들이 보인다. 쌓여있는 상자는 열 개가 조금 안 된다. 다급하게 관둔 직원들의 짐이었다. 미영은 그중에 한 상자를 들었다. 슬리퍼, 필기구와 노트, 회의록, 자, 탁상달력, 파우치 대충 그 정도였다. 공간 박스의 반도 되지 않는 흔적. 초등학생도 아니고 소지품에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을 테지. 팀장의 말처럼 대충 줘버려도 좋지 않을까. 미영은 상자를 들어 본다. 짐이 많은 상자는 주인이 찾으러 올 것 같다. 짐이 너무 적으면 영종이 의심할 것 같다. 적당한 무게의 상자를 들어 응접실로 향한다. 상자를 받아 든 남자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가족들과 연락이 되었냐고 물어왔다. 미영은 답하지 않았다.
영종은 짐들은 하나씩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유품을 확인하는 동안 미영은 응접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흘긋 미영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본 영종이 고층 건물이 풍광이 좋다며 칭찬을 했다. 막 해가 지는 회색빛 하늘의 풍광 그 아래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사진에 나올 듯한 도회지의 풍경. 사고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하는 건널목을 가리키며 미영이 말했다.
“저곳에서 난 사고였답니다.”
사고 당일 이곳에서 현장을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애도의 말을 전한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오후여서일까? 그림자 때문일까? 남자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지쳐 보인다.
“갑작스러운 사고였어요. 운이 나빴죠.”
주변에 선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말이죠. 이것은 변명일까. 한 단어 한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의도를 미영 자신도 알 수 없다. 눈앞의 남자는 잠시 미영을 바라볼 뿐 말이 없다. 그는 천천히 짐을 확인한다. 필통 속 필기구. 탁상용 달력의 일정을 훑는다. 반년 가까운 일정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슬리퍼. 노트.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손에는 한 장의 사진이 들려있다. 거리를 배경으로 친구인 듯 보이는 두 여자가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이다. 누가 김은원일까. 남자는 다시금 사진을 본다. 사진 속 여자를 지나쳐 주변을 훑는다. 굽은 허리에 손을 얹고 길을 걷는 노파. 딸인 듯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손에는 마트로고가 새겨진 봉투가 들려있다. 익숙한 얼굴. 어디서 봤을까. 나무 아래 서서 담배를 피는 한 남자. 하회탈 같이 주름진 얼굴.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 배경에 찍힌 모두가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영종은 머리를 긁적였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톡. 톡. 톡.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팔목에 찬 손목시계를 손톱으로 두드리는 미영이 보였다. 일곱 시가 넘는 시간. 사무실을 비워야 한다는 말에 책상 위의 짐을 다급하게 공간 박스에 넣었다.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선다. 건물을 나설 때까지 미영은 유품관리사라는 직업에 관해 묻는다. 특이하면서도 멋진 직업인 것 같다는 인사치레도 잊지 않는다.
“덕분에 잠시 그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걸요.”
거짓말이었지만, 거짓말도 사회생활의 한 가지 덕목이라 생각했다. 영종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영종의 말을 들으며 미영은 팀장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어쩌면 내일, 미영은 김계장의 이름으로 발급된 위조 전표를 만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조 전표 문제로 회사를 관두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그저 일일 뿐. 미영은 코트의 옷깃을 더욱 단단히 여민다. 집으로 향하는 길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매년 이맘때쯤 들려오는 익숙한 멜로디. 봄을 알리는 노래들. 벌써 봄인가? 나뭇가지마다 파릇한 빛이 돈다. 주변을 한 번 둘러 본 뒤 미영은 지하도에 들어섰다. 미영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영종은 건널목에 멈춰 섰다. 사고 장소라던 그 건널목이다. 차들이 도로 위를 지나칠 때마다 으드득하고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모래 혹은 그보다 조금 큰 돌. 뼈가 부서지는 소리 같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영종 역시 걸음을 옮겼으나 곧 멈췄다. 발끝에 닿는 시린 기운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걸음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쉬는 숨결에 생겨난 옅은 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상과 영하를 오간다는 뉴스. 꽃샘추위란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깜빡이던 녹색등은 어느새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모두 건널목을 건넜다. 차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영종만이 홀로 멈춰선 채다.
오기
오기(傲氣)로 쓰는 오기(誤記)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