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 나 오래 생각해보았어. 너를 말하지 않고 나를 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너를 오려내고 남은 부분을 나라고 부르는 일에 대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믿던 시절이 분명 있었지. 그런데 막상 가위질을 하다보니 남는 게 없는 거야. 너는 내가 가진 최초의 기억 속에서도 버젓이 등장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 기억에서조차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그건 내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오로지 무언가를 보고, 듣고, 또 느끼는 일만을 수행할 수 있던 시절의 일이야. 나는 작은 방 안에 홀로 누워 있었고, 흰 커튼 혹은 블라인드 틈새로 간신히 비어져 들어온 햇빛이 나의 배 위를 가로질렀어. 따뜻하다. 나는 따뜻하다고 생각했어. 안전하다.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어. 포근하다. 나는 포근하다고 생각했어.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마치 희부윰하고 촉촉한 기체가 나의 온몸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그와 동시에 햇볕보다 따뜻한, 그러나 햇빛만큼 밝지는 않은,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빛이 나의 온몸을 적나라하게 조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나는 그 알 수 없는 감각 속에 온몸을 내맡긴 채 몇 번인가 편안히 눈을 깜빡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눈의 깜빡임은 조금씩 느릿해졌지. 그러나 나는 결국 그곳에서 잠에 들지는 못했어. 그때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던 그 기체와 빛의 감각으로 나는 너를 기억한다. 그게 바로 보여짐이라는 감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어.
  내가 홀로 먹고 자고 걸을 수 있는 작은 사람이 되었을 때, 너는 이미 기체와 빛으로 존재하기를 그만둔 뒤였지. 그러는 대신 너는 그늘과 그림자로 존재하기를 택한 것 같았다. 너는 나의 눈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일방적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너를 절대로 돌아볼 수 없었어. 그래도 나는 네가 나의 뒷면에, 내 시선의 반대편에, 모든 종류의 사각지대에 늘 머무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나의 모든 기분과 움직임을 선물하려 들었지. 나는 오로지 네게 보여주기 위해 첫 뜀박질을 하였어. 나는 오로지 네게 보여주기 위해 첫 요리를 하였어. 나는 오로지 네게 보여주기 위해 첫 노래를 불렀고. 오로지 네게 보여주기 위해 매일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 그건 불 꺼진 방의 암흑 속에 나를 던지고, 전처럼 온몸으로 너를 맞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밤마다 나의 몸에 발생하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차곡차곡 모아두기 위해서였어. 깊은 잠이 들수록 수월하게 자라나는 머리칼과 매일 아침 새로이 부풀어오르는 이목구비와 나도 모르는 새에 놀랍도록 단단해져 있는 손톱. 그런 것들을 모아 네 앞에 자랑스레 펼쳐놓기 위해서 말이야. 나는 알았어. 네가 나의 어떤 변화들을 명백히 재미있어하고, 그보다 자주 지루해한다는 걸. 그렇게 내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웃거나 웃지 않는다는 걸. 나는 필사적으로 너의 웃음을 갈구하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너는 그게 마치 네게 주어진 일이라는 듯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걸. 그런 너와 나도, 나는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게 마치 내게 주어진 일이라는 듯 자라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어. 나는 명백한 아이가 되었고 너는 그런 내게 맞춰 한 컵의 물과도 같이 변질되었어. 그때부터 너는 내가 아닌 아무것에나 너의 몸을 담은 채로 찰랑거렸고, 찰랑거리는 채로 조금씩 내게서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너는 너의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지. 달아오른 촛농처럼 새빨갛게 나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시선. 그 시선은 너무나 자유롭게 내게서 멀어졌다가도 다시 멋대로 가까워졌어. 그런 일이 반복될 때면 나는 어쩐지 참을 수 없이 약이 올랐어. 나는 약이 오른 채로 생각했다. 보아. 너를 말하지 않고 나를 말하는 방법이 있을까. 너를 오려내고 남은 부분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너는 내게서 오려질 수 있을까. 결론은 언제나 하나의 꼭지를 향해 나아가. 내가 너의 시선을 먹고 자라났다는, 오로지 너의 시선을 갈급해하고, 열망하며 자라났다는 하나의 사실, 하나의 꼭지, 하나의 점. 이런 내게서 대체 어떻게 너를 오려내라는 거야? 나는 왜 점점 더 너에게서 유리되어 가는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야? 이상해. 우리는 왜, 더이상 접촉할 수 없게 된 거야?
  보아. 나는 오래전부터 같은 꿈을 꿔왔어. 네가 없는 꿈속의 세계를 오롯이, 홀로, 유랑하는 긴 꿈을.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손을 휘적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의 앞을 스쳐 지나는 모두를 일일이 돌려세운다. 머지않은 어느 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너를 붙잡게 되는 상상을 하면서. 그날이 오면 나는 너의 두 발목을 한 손에 조심스레 모아 쥐고, 네 몸을 거꾸로 뒤집어 아주 높이 치켜들겠지. 너는 거대한 생선처럼 내 손아귀에 붙들린 채, 지면을 향해 힘없이 늘어진 채, 흔들흔들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겠지. 그러곤 뒤집힌 주머니처럼, 너의 모든 비밀을 나의 발밑으로 와르르 쏟아내겠지. 나는 텅 비어 볼품없어진 너와, 네게서 떨어져나온 너의 비밀들을 내 몸 깊숙한 곳에 전부 쑤셔 박을 거다. 그러기 위해 나는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보려 해. 내가 너를 보아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어져온, 나의 오랜 추적기를 말이야. 보아, 너는 모르고 있지. 내게 우리의 기억이 아닌 나만의 기억이 있어왔다는 것을. 그러니 나는 이제 네 것이 아닌 나의 기억을 되짚어봐야 해. 이 기억을, 오로지 네게 선물하기 위해서.

그날 아침 나는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어. 오전 수업이 한창인 교실의 귀퉁이에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가는 교정의 풍경을 오래 내다보기 좋았거든. 나의 교실은 건물의 외벽을 문지르듯 자라난 거대한 아카시아나무에 밀착해 있었고, 나의 기억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돼. 지면을 향해 부드럽게 기울어진 채, 투명한 창에 반쯤 짓눌려 있던 아카시아 가지들의 녹색을 배경으로. 너는 알았겠지. 창 너머를 건너다보던 나의 시야 끝에 같은 반 아이의 새하얀 뺨이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는 것을. 그 뺨 위로 어른거리던 녹색의 빛 그림자를 내가 내내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였다고 생각해. 흰 뺨 위에서 느리게 깜빡이던 한쪽 눈. 그 안으로 흘러든 낯익은 시선. 이어, 최초의 눈맞춤. 두려울 만큼 낯설던 눈맞춤. 그것을 가능토록 만든 네 최초의 선택 말이야. 너는 그 아이의 눈을 빌려 나를 마주보았어. 너와 나의 마주봄 사이에서 그 아이의 존재는 눈 녹듯이 스르륵 삭제되었어.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 나는 네가 내게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우리 사이에서 투명하게 비워진 그 아이의 몸을 향해, 껍데기만이 남겨진 그 몸의 동그란 어깨를 향해, 곧장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깨를 나의 손아귀에 단단히 부여잡은 채 입을 떼었다.
  —너 거기 있지?
  뒤따른 적막. 교실은 정지된 것 같았고. 일순간 교실 안의 모두가 나의 자리를 돌아보았어. 내게 붙잡힌 그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지.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와 두 눈을 맞추었어. 나는 그제야 그애의 반대쪽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게 숨을 삼키며, 그 눈의 너머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보았다기보다 들었던 거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희미하게 새어나가는 소리. 가늘게 흐르는 피리 소리라든가, 비밀스레 비어져나온 웃음소리와 닮아 있는. 더 멀리까지 가보자면, 한 손에 잡힐 크기의 소동물이 조급히 거둔 마지막 숨과도 같은.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런 소리를. 이건 무엇의 소리이지? 헷갈려하던 내게 아이는 물었어. 속삭이듯이.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 한마디로 전부 알았어. 그 말속의 ‘나’는 네가 아니라는 걸. 그 목소리 안에 너는 없다는 걸. 새어나간 것은 너였다. 너와 나 사이에 끼어 있던 그 아이를 남겨둔 채로. 유리알처럼 투명하던 그 몸만을 남겨둔 채로. 하지만 남겨진 순간 그 몸은 더이상 투명할 수 없게 되었지.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아이의 가슴팍을 바라보았어. 얇은 하복 셔츠의 포켓 위에 반듯하게 달려 있던 명찰. 거기서 나는 그 이름을 보았어. 보아. 난 네게 멋대로 그 이름을 붙였어. 보아. 보아. 보아…… 가끔 그 이름을 되뇌며, 나 생각해보았다. 네게 이름을 부여한 쪽이 정말 내가 맞을까? 그러나 나는 더이상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아.

네 이름의 유래가 된 그 아이를 첫번째 보아라고 하자. 첫번째 보아는 네가 나를 똑바로 마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작은 구멍이었어. 창문이었어. 동시에 너를 흔적도 없이 감춰주는 짙은 안개였어. 장막이었어. 너는 첫번째 보아의 몸속에 갇혀버린 것 같기도, 숨어버린 것 같기도, 혹은 그런 식의 뉘앙스를 내게 은근히 풍기며, 그렇게 나의 눈을 속이며, 내가 없는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들을 몰래 배회하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것 같기도 했어. 덕분에 나는 젖은 개처럼 첫번째 보아의 곁을 떠돌았지. 무언가 따뜻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떨어져나오는 순간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며. 찰나의 기회를 엿보며. 너는 그런 내게 작은 고깃덩이를 던져주듯, 아주 가끔씩 기척을 드러내었어. 그애의 눈을 통해 나를 곁눈질하고, 나로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미묘한 종류의 표정을 지어 보이고, 내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스르르 떠나버렸어. 나는 네 장난에 꼼짝 없이 놀아났어. 나를 달갑지 않아 하던 첫번째 보아로부터,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겠노라 매일 떼를 썼으니까.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띠는 그애의 주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생각했지. 내 손이 그애가 아닌 너에게 가닿는 완벽한 타이밍, 그런 게 있다면, 나는 어디를 쥐어야 할까? 그애의 어디를 쥐어야 너를 내 손 안에 잡아둘 수 있을까? 붙잡힌 네게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게 붙잡힌 너는 무슨 말을 할까? 우리는 무얼 해야 하지? 우리는 무얼 하고 싶지? 그보다 먼저, 나는 대체 무엇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은 가능한 멀찍이 밀어두는 편이 좋아. 그래서 나는 그리 하였어. 대신 나는 네가 없는 사이 너의 의중을 파악하려 노력하였어.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애를 선택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첫번째 보아는 평범했어. 평범하게 친절했어. 평범하게 성실했고 평범하게 조용했고 평범하게 모두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 그애는 평범하게 사랑받았어. 그애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평범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지. 그림자처럼 집요하게 그애의 뒤를 밟던 나 말이야. 네가 평소처럼 나의 바깥에서, 내가 돌아볼 수 없는 먼 곳에서, 일방적으로 나를 관음했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나. 네 손으로 만들어낸 나. 평범하게 볕이 들던 자리에서, 질질 끌려 나와버린 나. 변질된 나. 영문 모를 나. 여전히 너무 어렸던 나. 평범한 여자아이의 곁에 그런 내가 얼쩡거린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었지. 나와 그애의 주변에선 늘 좋지 못한 긴장감이 감돌았어. 모두가 그애와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어. 그럴 때면 나는 기꺼이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졌다. 몹시 나쁜 일을 저지르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고작 열 몇 살을 먹은 초등학생일 뿐이었고, 팔과 다리는 한참을 웃자라 있었고, 상상력은 풍부하지 못했으며, 그만큼 멍청했지. 그런 내가 무얼 할 수 있었겠어? 예상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같은 이유로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첫번째 보아, 그애가 나를 앞질러 저질러버릴 일들을 말이야.
  방학식을 며칠 앞두고 있던 무렵, 나는 다가올 여름과 그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빈틈없이 차 있었어. 그즈음 나는 차츰 깨닫고 있었지. 네가 더이상 그애의 바깥에서 나를 지켜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오로지 그애를 통해서만 너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교내에서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이 앞다투어 교문을 뛰쳐나가고, 그애가 나를 경계하여, 멀고 먼 길을 돌아 집에 도착하고 나면, 나는 네가 없는 나의 집에 홀로 남겨졌어. 그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온 일이기도 했어. 보여짐에서 벗어나는 일. 연속되는 기록을 끊어내는 일. 기억되지 않는 암흑 속에 푹 파묻히는 일. 너로 인해 인식되어 온 나를, 모조리 망각해 버리는 일. 사라지는 일. 나는 사라진 채로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네가 없는 곳에서만 벌여놓을 수 있는 온갖 낯부끄러운 짓거리들의 끝나지 않는 목록이 내게는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중 몇 가지를 실천에 옮겨보기도 했지만, 결국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침대에 누워버리게 되었지. 그러곤 아주 오래오래 잠을 잤다. 그뿐이었어. 나는 네가 없는 집에서 오직 잠만을 잤어. 죽은 듯이. 그러다 눈을 뜨면 숨 막히는 고요가 발견되었어. 짓누르고 짓뭉개는 고요. 어째서 숨을 트이게 하는 자유 같은 게 아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너도 그애도 없이 고요 속에 덩그러니 남겨질 여름을 상상할 때마다 온몸이 콩알만 한 구슬의 형태로 쪼그라드는 고통을 느꼈어. 그러니까 그애의 자리로 대뜸 다가가, 방학 동안 어디서 무얼 할 거냐고 캐물었던 것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가 찾아낸 최선의 방법이었던 거야.
  그애는 나를 얼마간 악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어. 그애는 그애의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어. 그애는 그애의 친구들과 무어라 숙덕거리더니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 그러곤 나의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어. 한참을. 그애와 나는 교실의 뒷문을, 이층의 복도를, 공용 계단을, 학교의 정문을, 모조리 지나쳤고, 그런 우리의 등뒤에서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어. 그애가 걸음을 멈춘 곳은 시뻘건 녹이 슬어 있던 체육 창고의 문 앞이었어. 그애가 잠기지 않은 철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들어가, 라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어쩌면 그애가 나를 그곳에 가둬둔 채, 죽기 전까지 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럴 만한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었어. 그래도 나는 들어갔고, 그애도 나를 따라 들어왔어. 이후 나는 순식간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애에게 죽기 전까지 맞아줄 준비를 말이야. 하지만 놀랍게도 그애는 나를 패지 않았어. 그러는 대신 차분하게 말을 걸어왔지. 필요 이상 친절한 목소리로. 이렇게까지 상냥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끼어들 정도로. 나는 그렇게 그애의 선의를 의심하느라 그애가 내게 던진 몇 가지 질문들을 미처 답하지 못한 채로 흘려 넘겼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그애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묻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중의 절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도움이 필요하냐는 식의 싱거운 물음으로 끝맺어지는 이유 역시도, 나는 알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즈음엔 그애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어. 아무리 나라도, 내가 그 이상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무언가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애는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입을 열고 무언가, 그애의 곤두선 신경을 잠재워줄 만한, 그애의 불안을 누그러뜨려줄 만한, 그애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을 꺼내놓기를 말이야. 그러나 그때의 내 안엔 그렇게 편리하게 생겨 먹은 이야기 따위 없었어. 그렇다고 내 안이 빈 병처럼 텅 비어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 나는 그애에게 당장 무슨 말이라도 건네주어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었고, 동시에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수만 가지의 말들 중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해내느라 혼절 직전의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어. 결국 나는, 그애가 참다못해 뱉어낸 야, 라는 짧은 단어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내렸어. 나는 그애의 양쪽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말아쥔 채, 그애에게 추궁하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어. 보아, 보아야, 지금 네 안에 무엇이 있어? 네 안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있어? 너는 그것이 네 안에 흘러들고, 사라질 때,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어? 너는 나를 보고 있어? 너는 나를 볼 때 느껴지는 것이 있어? 네 눈이 네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네 몸이 네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네 마음이 네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내 마음이 네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는 있어? 너, 자라나고 있어? 너 잠을 자고 있어? 너 꿈을 꿀 때, 대체 어디를 걷고 있어? 꿈속에서 나를 볼 때가 있어? 넌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해? 넌 나를 볼 때 기분이 어때? 넌 내가 어때? 어떤 것 같아? 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어떤 것 같아? 너 나와 떨어져 지낼 수 있어? 망할 길고 긴 방학을 견딜 수 있어? 너…… 방학 동안 우리 집에 있으면 안 돼?
  ……적막.
  나는 기어코 일을 저질러 버리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애에게서 파드득 떨어졌어. 숨을 몰아쉬며 그애의 얼굴을 살폈어. 그애는 내 손을 쳐낸 뒤 내게 붙들려 있던 어깨를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주물렀어. 그애는 말이 없었어. 말 없는 그애의 앞에 선 내가 몇 차례 눈을 깜빡이고, 조심스럽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자 했을 때, 그애는 나의 가슴팍을 별안간, 엄청난 힘으로 밀쳐냈어. 그건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괴력이었어. 나는 금세 비틀거리며 첩첩이 쌓여 있던 고무 매트들의 더미 위로 쓰러졌고, 그애는 그런 나를 깔아뭉개듯 내 위로 올라타 내 뺨과, 내 목과, 내 머리통을 연신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애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두르며, 끊임없이 무어라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했어. 싫어, 저리가, 입 닥쳐, 따위의 말들이었으리라 짐작해.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 말들과, 그애가 내게 휘두르는 주먹을 온전히 받아냈다. 이 일이 결국, 벌어지고 있군. 생각하며. 그러나 얼마지 않아, 잠겨 있는 줄 알았던 창고의 문이 벌컥 열렸고, 각자의 휴대전화를 손에 쥔 열댓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창고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어. 그애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서 그애를 떼어냈어. 그러곤 그애의 곁에 둥글게 모여들어 그애의 등을 다독이고, 그애의 상태를 살피고, 조금 전 교실에서처럼, 그들만이 아는 무언가에 대해 숙덕거리기 시작했어. 나는 곧, 그들의 손에 들린 수 대의 휴대전화에, 그애와 내가 나눈 모든 대화와, 그애가 내게 저지른 모든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담겨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어. 나의 눈높이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나 있던, 그 체육 창고의 좁고 긴 창을, 나는 늦게서야 발견할 수 있었던 거야. 그애는 그애의 친구들과, 대체 무엇을 도모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생각했어. 저들이 촬영한 영상은, 나와 그애에게 무슨 일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했던 나는, 그럼에도 몇 가지 장면들을 상상해볼 수 있었고, 그러나 현실은 나의 모든 상상을 빗나갔지. 나의 학교와 나의 동네를 떠난 것은 내가 아니라 그애였어. 그애가 이사를 가고, 동시에 전학을 감으로써, 얼마간 소란스럽던 학교는 다시금 잠잠해졌어. 그애는 나를 피해 달아났고, 그것으로 끝이었어. 그애와 함께 너도 떠났지. 보아. 남겨진 나는 유령처럼 학교와 집을 소리 없이 오갔을 뿐이야.
  졸업은 금세 다가왔어.

중학교는 지겨웠다. 지겨운 학교. 지겨운 아이들. 지겨운 싸움. 지겨운 연애. 지겨운 우울. 돌고 도는 지겨운 소문들. 그 안에 속해 있어야만 했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너에게 무수히 실망하였어. 나는 그때야 깨달았지. 너는 선별하지 않아.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아무런 기준을 세워두지 않아. 너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손안에 취하려 들어. 너는 손안에 취한 것들을 버리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네가 고르고 또 버린 것들을 모아 마룻바닥 위에 펼쳐놓은 채로, 너의 계획을 파악하려 드는 일만큼이나 멍청한 짓은 없지. 나는 더이상 네가 남긴 것들로 너를 해석하려 들지 않아. 너에게서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지 않아. 너는 나만큼이나 아무런 대책이 없지. 그러니까 나도 딱 그 정도로만 네 움직임을 대해야 한다.
  중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다시 돌아온 너는 정말이지, 무수하다고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수의 사람들 사이를 마음껏 흘러 다녔어.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래서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말이야. 나는 내 주변의 어떤 아이들을, 어떤 어른들을, 나아가 어떤 행인들을 띄엄띄엄 건너다니는 너를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 할지,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소화해 내야 할지 늘 고민스러웠지. 보아. 네가 내게서 떠나 있던 동안, 내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을지 상상해본 적 있어? 없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봐. 어땠을까? 나는 슬펐을까? 외로웠을까? 두려웠을까? 반대로 아주 멀쩡했을 수도 있지만, 전부 아니야. 나는 화가 났다. 늘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란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이지. 그러나 내게는 나의 분노를 배설할 구멍이, 그러니까 너, 네가, 내게는 네가 없었으므로,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참아내는 기적을 매일같이 이뤄내야 했다. 그 분노의 이유를 나는 끝내 명확히 짚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잖아. 네 선택과 결정에도 명확한 이유란 없어왔으니까. 우리는 같아. 우리는 공평해. 그래야 하잖아.
  너를 담았다가, 네게 버려진 사람들. 그들에게서 나는 너를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배웠어. 나는 그들 중 몇몇에게, 성급히 나의 분노를 토해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었으니까. 다행히도 그 시도들은 대부분 미수에 그쳤지. 미수였음에도, 나는 그런 식의 태도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통감할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너의 기척이 느껴지는 모두를 일일이 관찰하는 일을 그만두었어. 나는 그들 중 누구도 두번째 보아, 라고 부르지 않았어. 그러는 대신 네가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르려는 기색을 보이는, 특정 인물들에게만 티 나지 않게 시선을 주었지. 그리고 고백하자면, 그 시선의 끝엔 언제나 약간씩의 흥미가 섞여 있었다. 네가 떠남과 동시에 눈 녹듯 사라져버리던, 아주 가벼운 흥미가. 하다못해 그런 부분까지 네게 휘둘려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의 황당함이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두번째 보아는 내가 그 황당함과 분함에 충분히 무뎌졌을 즈음 나타났다. 그애는 나보다 한 학년 선배였고, 점심시간마다 운동장 앞의 벤치에 덜 마른 빨래처럼 널려 있었어. 그애를 떠올릴 때면 힘없이 비척거리던 걸음걸이와 늘 반쯤 잠에 취해 있던 얼굴이 아직도, 손에 만져질 듯 선명하게 그려져. 그건 내가 그애를 특별히 여겨서라거나, 그애와 유달리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나누었기 때문은 아니지. 이유는 그보다 훨씬 단순하고도 명료한 영역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그애의 얼굴. 그애의 얼굴에 있다. 그애의 얼굴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았던 순간에 있다. 평소처럼 큰 감흥 없이 너를, 또 그애를 지나치려던 내가, 그애 앞에서 얼어붙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그애는, 섬찟할 만큼 나를 닮아 있었어. 놀랍게도 오로지 외적인 부분들이 말이야. 그애를 볼 때면 마치 세면대 위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 내가 들여다보는 만큼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 속의 얼굴. 내가 움찔거리는 만큼 움찔거리는 눈, 코, 입. 그러다 잠시 시선을 거두고, 찬물을 손에 받아 얼굴에 끼얹을 때면 감지되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인기척.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 지금 고개를 들어 올린다면, 목격하고야 말 것 같아. 나와 다른 표정을 짓고, 나와 다른 자세로 서서, 거울 너머의 나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는 또다른 나. 그런 꿈. 그런 악몽.
  그애는 나의 그런 악몽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어.

이쯤에서 인정해야겠지. 나는 너와 깊이 연관된 사람들을 쉽게 끊어내지 못해. 그들이 내게 하는 말과, 나의 대답에 보이는 반응과, 은근슬쩍 내비치는 나를 향한 바람들을 가벼이 여기지 못해. 나는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해. 그런 식으로 첫번째 보아가 떠나갔으므로. 동시에 네가 사라졌으므로. 내가 너를 잡아둘 수 없다면, 네가 택한 이들을 잡아둘 수밖에. 그렇게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앞에서 전전긍긍하였어.
  그건 물론 두번째 보아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지. 두번째 보아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우리는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으니까. 그애와 내가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를 자매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애는 바로 그 점을 재미있어했다. 그애는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많다는 이유로 나를 필요 이상 편히 대했다. 같은 이유로 내 몸에 쉽게 손을 댔지. 그애는 내 어깨며 목덜미에 함부로 팔을 두르고, 교내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안녕? 얘 좀 봐. 나 이런 애를 찾아냈다니까. 그런 말을 하며. 나는 그애가 그 일에 완전히 질려버릴 때까지, 참을성 있게 어울려주었다. 그애를 잘 알지도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애와 나의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수없이 멀어져갔다. 더이상 아는 체를 할 사람들조차 남지 않게 되고서야 그애는 그 짓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은근히 나를 시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지.
  그애는 내 앞에 두 가지 선택지를 멋대로 들이밀고선, 그 둘 사이에서 절절매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기를 좋아했어. 정답은 있거나 없었고, 오답은 언제나 있었지. 고민은 무의미했고 오로지 우연만이 나를 정답에 가닿게 해주었어. 그럼에도 나는 망설이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건 오로지 그애의 변덕스러운 기분 때문이었어. 그애는 내가 우연히 정답을 고를 때면 과하게 즐거워했고, 반대로 내가 오답을 고를 때면—미리 말하자면 나는 대부분 오답만을 골랐다—다른 의미로 더욱 즐거워하는 듯 보였어. 그애는 넌 역시 나와 닮았어, 와 역시 이런 부분까지 닮았을 리 없지, 의 두 가지 반응 사이를 줏대 없이 휘청휘청 넘어 다녔는데, 그 탓에 나는 그애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 이후에도 꾸준히 진땀을 흘렸어야 했다. 그애가 내게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도대체 어떤 장단에 발을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런 그애의 변덕이 성가셔질 때마다 나타난 건 너였지. 보아. 예의 그 기묘한 소리와 함께. 너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그애의 안에 스며들어선, 나를 비웃듯이 내려다보았고. 같은 순간 내게 속삭이는 듯했어. 견딜 수 없다면 그만둬, 그런 말들. 그렇게 네가 떠나고 나면 나는 무엇도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 오기로라도, 그애의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어. 그런 일이 몇 번인가 반복되고 나자 나는 놀랍게도 마치 한 권의 책처럼 그애를 활짝 펼쳐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애의 호와 불호를, 쾌와 불쾌를, 나아가 애와 증을, 전부 명확히 구분해낼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애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아주 사소한 요소들의 목록까지, 줄줄 읊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의 내가 파악해 낼 수 없던 것은 오직 하나, 그애의 기분뿐이었어. 그래서 나는 살짝 방향을 틀었지. 나는 잔뜩 들떠버린 그애의 기분을 망쳐놓지 않는 방법과, 잔뜩 망해버린 그애의 기분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었어. 나는 비로소, 그애의 곁에 없는 듯이 존재하는 법을 알아냈던 거야.
  나는 그애의 곁에서 나를 백지처럼 깨끗이 비워낼 수 있었어. 나는 그애의 완벽한 그림자가 될 수 있었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애가 이미 했던 말의 메아리이거나, 곧 하게 될 말의 이른 기척에 다름없었어. 나는 제로. 제로로 존재하였어. 언젠가 그애와 함께 교문 앞 복도의 커다란 거울을 지나친 적이 있었지. 그날 그애는 유독 기분이 좋았고, 부드러운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춤을 추듯 팔랑팔랑 운동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어. 나는 거울 속의 나와 그애를 지켜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또다른 내가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네. 그러다 나는 깨달았던 거야. 거울 속엔 팔랑팔랑 춤을 추듯 걸어가는 그애와, 그애와 다른 표정을 짓는, 그애와 다른 자세로 걷는, 또다른 그애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애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을 죽인 채, 그애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는 또다른 그애. 그런 꿈. 그런 악몽. 나는 그애의 그런 악몽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성공이군.
  그때의 나는 생각했어.
  그러나 현실은 또 한번 나의 짐작을 벗어난 곳으로 나아갔다. 그애는 그날을 기점으로 천천히,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애는 내게서 더이상 한 톨의 흥미도 새로이 발견해낼 수 없다는 듯 굴었어. 그런 속내를, 내게 숨기려는 아주 조금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어. 그런 그애에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자문했지—어째서?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어. 그럼에도 내가 내게서 멀어져가는 그애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던 것은, 내가 너와 깊이 연관된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보아. 하지만 단지 그 이유에서만은 아니야. 그때 나에겐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경험에서 비롯된 몹시 단단한 믿음. 기다린다면, 아주 긴 시간이라도 좋으니 기다린다면, 너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 언젠가. 어디서든. 그런, 확신에 가까운 믿음.
  그 믿음으로 나의 긴 기다림이 다시금 시작되었어. 하지만 정말로 그 믿음에 단 한 번의 흔들림조차 없었을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번에야말로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겠어. 왜냐하면…… 길고 긴 시간은 한 사람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하니까.

한 차례의 진학을 더 겪으며, 나는 학교라는 공간이 얼마나 편리한 곳인지, 또 내가 그 공간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인간인지 깨닫게 되었어. 밤낮으로 학교에 처박혀서 하라는 것들만을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내게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쉽고 간단했지. 나는 그 쉽고 간단한 일을 매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만으로 교내의 많은 이들에게서 호감을 살 수 있었다. 누구나 내게 선뜻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내어준 호의를 절대로 사양하지 않았어. 그건 정말이지 바보 같은 짓일 뿐이니까. 하기 쉬운 일들을 하고, 그 일들이 내게 가져다주는, 오직 좋은 것들만이 가득 들어 있는 꾸러미를 매일 선물처럼 안아 들면, 나는 심지어 너에 대한 생각까지도 상당 부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일상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나는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나의 안으로 받아들였어.
  이 학년이 되어 만나게 된 나의 담임은 좋은 사람이었어. 그녀는 반 아이들을 넘어 교내의 모든 학생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라’라는 말을 말버릇처럼 하고 다니곤 했지. 때문에 그녀는 역설적으로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라면 분명히, 어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꽤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그러니까 모든 아이들은 크고 작은 재앙들을 발치에 두고 있고, 그중 하나 이상은 반드시 밟아 터뜨릴 수밖에 없으리라는 가설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 그녀는 각자의 재앙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들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기만 한다면, 언제고 그들의 손을 잡아 자신이 있는 뭍으로 건져 올려줄 자신이 있다는 듯 굴었다. 그녀가 그토록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들이, 그녀 자신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들을 비밀스레 주고받고 있는지도 모르고서는 말이야. 그 이야기를 주워들은 이들 중 그녀가 서 있던 곳을 뭍이라고 생각했을 사람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을 테지. 이건 나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야.
  그런 그녀가 내게 이상하리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줄곧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어딘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학교생활에 있어 어렵거나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지는 않은지 넌지시 묻고는 했었으니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첫 학기가 슬슬 마무리되어 갈 무렵의 일이었어. 그녀는 여느 때처럼 방과후에 남아 교과서를 뒤적거리던 내게 다가와,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고, 그녀는 나를 빈 교무실의 한편에 앉혀둔 채 따뜻한 녹차 두 잔을 타왔지. 이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내게 묻기 시작했어.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질문들. 나는 그 질문들에 역시나 큰 의미가 없는 대답들을 하며, 왜 사람들은 내게 자꾸만 무언가를 묻고 싶어하는 것일까—마치 내게 바라는 대답이 있다는 듯이—따위의 생각을 했지. 그렇게 한참을 뜸을 들이던 선생님은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침내 물었던 거야.
  —혹시 부모님이 많이 바쁘시니?
  나는 처음으로 종이컵에서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초조하다는 듯 답지 않게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어. 나는 그녀가 갑자기 나의 부모에 대해 묻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녀는 그런 나의 표정을 금세 읽어내고는 덧붙였다.
  —별 건 아니고, 연락이 잘 안되셔서.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내게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부 알아챌 수 있었어. 그리고 내게는 그 무언가를 감춰야 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지. 나는 그녀가 내게 묻는 모든 말에 성실히 답해주었다—맞습니다. 그들은 매우 바쁘신 분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냐고? 그건 저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매우 바쁘시고 돈을 법니다. 벌어온 돈을 제게 줍니다. 그건 아주 많은 돈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그들은 아주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내게 준 돈이 떨어지는 순간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몹시 철두철미하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내게 준 돈이 떨어져갈 무렵 집에 옵니다. 아주 효율적으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말입니다. 그들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집 안을 청소합니다. 그들은 호텔 방처럼 깨끗하게 집을 청소할 줄 압니다. 그들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냉장고를 채워놓습니다. 그들은 호텔의 주방장들보다도 근사하게 요리를 할 줄 압니다. 그들은 내가 없는 사이 돈을 두고 갑니다. 저는 그 돈을 씁니다. 그건 아주 많은 돈이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더이상 저를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찾고자 하시는 것은, 최소한, 제게는 없습니다—라고.
  말을 마치자 선생님은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로 나의 입가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때 그녀는 마치 내가 무어라 말을 덧붙여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 어렵지 않으므로, 나는 그리 했어.
  —앞으로도 제 부모님과 연락이 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 말 뒤에 숨겨진 뜻이 있다면, 이런 거였어.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나를 불러 나와 대화하십시오. 그녀는 나의 속내를 전부 이해했다는 듯이,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녀가 나를 따로 불러내는 일은 없었어. 어쩌면 그녀는 그뒤로도 나의 비상 연락망을 연신 뒤적거리며,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해보려는 시도를 했던 걸지도 모르겠어. 물론 그 연락이 어딘가에 가닿는 일 따위, 절대 일어날 수 없었을 테지만.

그러나 어떤 일들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한창이던 초가을 무렵, 이름도 모르고 있던 한 아이가 급히 나를 찾았던 거야. 그애는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고 했지. 가능한 한 빠르게, 교무실로 나를 데려오라는 부탁을 하셨다고 말이야. 나는 생각했어. 드디어 그 순간이 왔군. 불가능을 향한 그녀의 모든 시도들이 드디어, 남김없이 좌절되었군. 나를 우회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늦게서야 깨닫고, 드디어 내게로 왔군.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그녀가 부르고 있군. 나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교무실로 달려갔다. 굳게 닫힌 교무실의 문 앞에서는, 내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하기까지 했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눈앞의 문을 밀어 열었을 때엔, 그녀가 왜인지 새파랗게 질려버린 얼굴로 유선 전화기의 수화기를 꼭 말아 쥐고 있었어.
  —받아봐. 어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곧바로 들려온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김이 새버렸지. 목소리의 주인은 나와 먼 친척 관계에 놓인 누군가인 듯했어. 그는 다짜고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물었어. 격앙된 그의 목소리는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남몰래 환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일이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한 뒤에 묻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보다 당신은 대체 누구냐고, 대체 나의 무엇이냐고, 별안간 신경질을 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실은 이미 그가 무슨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어. 지난여름의 무덥던 어느 밤, 불운하게 일어난 교통사고로 나의 훌륭하신 아버지가 돌아가신 참이었으니까. 그의 장례가 치러지던 사흘간 나는 식장 근처에도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어린애들한테는 귀신이 붙기 쉽다는 이유로 말이야. 내가 본 것은 그의 관이 시뻘건 화염 속으로 천천히 빨려들어가던 장면뿐이었지. 그런 일들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고요하고도 재빠르게, 나를 지나쳐간 참이었다.
  나는 말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게 정확히 무엇을 묻고 계신 건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어.
  —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냐는 말이야.
  —사고가 났다고 했습니다.
  나는 말했어.
  —무슨 사고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어.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지칠 줄 모르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였지. 나는 그의 꾸준함에 완전히 질려버렸고, 결국 쏘아붙이듯 물었어.
  —저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남자는, 얼마 뒤 내게 소리치듯 말했지.
  —왜 아무도 나를, 나만, 그곳에 부르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낸 나는, 긴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고, 정말 마지막으로 말했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나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후 잠시간 숨을 고르던 나는, 그제야 나의 어깨 위에 내내 누군가의 손이 올려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어. 그건 물론 선생님의 손이었지.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던 그녀와 두 눈을 마주하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통해, 그녀가 줄곧 찾아 헤매고 있던 것을 기어이 발견해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어. 예컨대 나의 문제. 나의 재앙.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건 너무도 큰 착각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착각을 구태여 정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때 내 앞에 서 있던 그녀의 기분이, 꽤 나쁘지 않은 듯 보였으니까.

나를 집으로 들이며 그녀가 내게 당부했던 것은 한 가지뿐이었어. 누구에게도 그녀와 나의 동거에 대해 알리지 말 것. 불필요한 소문들이 그녀와 나, 둘 모두에게 끈질기게 달라붙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가 소문 같은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어야 했다. 그때 나는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내려 그녀의 아랫배를 곁눈질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더이상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소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듯 보였지. 그녀의 배는 이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있었어. 전부터 그녀의 주위를 은은히 떠돌던 온갖 상스러운 내용의 소문들이, 그 무렵엔 활개를 치듯 아이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었지. 그리고 나는 그녀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그 소문들이 악의적이긴 해도 아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을지 모르겠다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곁에선 애인이라든가, 약혼자라든가, 남편이라든가, 하다못해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던 거야. 이러나저러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 듯했지만.
  나는 그녀의 배 속에서 빵 반죽처럼 부풀어오르고 있을 출처 모를 아이와, 그녀를 둘러싼 소문의 진위를 가려내는 일 따위엔 크게 관심이 없었어. 그럴 여력도 없었지. 그때 나는 그녀와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일에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게 유쾌한 충격을 전해주던 낯섦들을, 쉽게 흘려보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어. 예컨대 나는 누군가와 마주 보고 앉은 식탁에서, 도무지 넘어가지 않는 밥을 씹어 삼키는 일을 오랫동안 어려워했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녀의 식탁에 앉아, 그녀와의 식사 시간을 오래도록 기다렸지. 또한 나는 누군가와 함께 누운 침대 위에서, 내 것이 아닌 뒤척임을 견뎌가며 잠에 드는 일을 오랫동안 어려워했어. 그래도 나는 매일 밤 그녀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그녀가 내 곁에 눕게 될 순간을 오래오래 손꼽아 기다렸어. 그때껏 볼 수 없었던 그녀의 화장기 없는 맨얼굴과, 늦은 밤 학교를 나서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와 함께 걷는 귀갓길, 내 손으로 빨고 널던 두 명분의 빨랫감들,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는 날이 정말로 올까? 나는 그런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몇 차례 계절이 바뀐 뒤의 어느 주말 아침, 나는 느지막이 눈을 뜨며 중얼거렸어.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가진 나의 것이다. 주위는 고요했고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곤히 잠들어 있는 듯했지. 그녀는 진작 휴직계를 내고 매일 집 안에 머무르고 있었어. 그녀는 밤이 되면 허리 통증에 시달려 잠에 들지 못했어. 그녀는 종일 지친 얼굴로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혼자서는 오래 걷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그녀도 세상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어. 나는 그녀가 내뱉는 규칙적인 숨소리와 조용히 오르내리는 그녀의 둥근 배를 지켜보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어. 이것은 나의 것. 나만의 것.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평화가. 그리고 나는 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들이, 어딘가 수상한 종류의 주문처럼 들린다고 문득 생각했어. 얼마지 않아 선생님은 부스스 눈을 떴다. 이윽고 나를 발견한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벌어진 그녀의 입으로부터, 내가 그때껏 들어보지 못한, 전혀 낯선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흘러나온 것은 한 차례의 긴 신음과, 그뒤를 이은, 낮게 으르렁거리던 울음소리였다.

그날 저녁, 들것에 실려 응급차로 옮겨지던 동안에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 오지 마. 오지 말렴. 오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그녀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연신 그런 말을 했다. 나는 한 톨의 고민도 없이 그녀의 말을 모조리 무시했어. 다행히 그녀는 내가 그녀의 곁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 보였지. 이후로는 엄청난 소음들. 사이렌이 울리고, 누군가 소리치고, 경적이 울리고, 누군가가 다시 소리치는 소음들. 그 소음의 한가운데서 나는 오직 그녀의 얼굴과 짧게 경련하는 그녀의 부푼 배를 보고 있었는데.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어쩐지 조금씩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에도 섣불리 시선을 고정할 수 없겠다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내가 결코 발을 들여선 안 될 만한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러나 나와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실은 차는 더없이 쾌속하게 앞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당도하고 있어. 나는 생각했다. 무언가 발돋움하고 있어. 무언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주 멀리까지 떨어져 있던,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나 잘 아는 그것이, 이 소음의 한가운데로, 나를 실은 차의 안으로, 기도하듯 무릎을 꿇어앉은 나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어.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나는 나의 두 무릎 사이에 황급히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두 손으로 나의 뒤통수를 단단히 감싸며. 어떤 주문을 외듯이, 조용히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 같은 순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선 내 것 아닌 목소리가 낮게 울리며 들려왔다. 오지 마. 오지 말렴. 오지 말고…… 기다리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목소리.
  그래서 나는 귀를 틀어막았어. 나는 차라리 우리를 태운 차가 영영 멈추지 않기를 바랐어. 그러나 언제나와 같이 나의 바람은 좌절되었지. 차는 멈추었고, 문은 열렸고, 그녀에게로 모르는 사람들이 쏟아지듯 들이쳤어. 나는 여전히 나만의 어둠 속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서서히 깨달았다. 그것이 왔다. 너무 익숙한 그것이. 내가 아는 그것이 내게로, 기어이 돌아왔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흔들고, 무어라고 내게 소리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기도하듯, 또는 주문을 외듯, 사라져, 사라져, 사라지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는데, 끝내 마주한 그녀에게서 나는 다시 한번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보아. 네가 왜 여기에 있니.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너.
  그뒤론 잘 기억나지 않아. 너와 그녀에게서 풍기던, 비릿하고 달큰한 냄새가 종종 벼락처럼 떠오를 뿐. 정신을 차리자 나는 이미 사람들의 손에 물건처럼 옮겨진 뒤였다. 그래서 나는 물건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앉혀진 자리에 앉아 얌전히 숨을 죽였다. 그녀가 내가 모르는 절차들에 따라 병원의 곳곳을 오가던 내내. 그런 내 곁에 슬며시 다가와 앉은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여자가 나의 선생님을 낳았으리라는 것을. 그 여자는 왼쪽 무릎으로 나의 오른쪽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그러곤 내게 가진 적의를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양, 큰 소리로 혀를 차며 물었다.
  —네가 그애니?
  나는 하나의 물건처럼,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애입니다,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키며. 그러자 여자는 대놓고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집이 없니?
  그 질문에 나는 하나의 물건처럼 입을 다물었다. 물건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내게도, 그 질문은 쉬이 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물건이기를 포기하기까지 하고 한참을 고민하였는데, 그러던 내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여자는 스스로 말을 이었다.
  —어쩌다 애비는 보내선.
  나는 그 말이 내게 묻는 질문인지, 그 여자의 혼잣말인지 구분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물건이기를 포기한 나는 내 멋대로 판단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멋대로 그 여자의 말에 답을 해주었다.
  —늙으신 거겠지요.
  —뭐야?
  —늙어 가신 거겠지요.
  —뭐야?
  —때가 되셨던 거겠지요.
  그 여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며, 어떤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는데. 나는 그 꼴을 더 보고 있기가 싫어 액체처럼, 너무나 묽어 너무나 멀리까지 흘러버리는 액체처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복도의 코너를 돌며, 나는 보았던가? 반쯤 닫힌 병실 문 사이, 액체로 흐르는 나를 지켜보던 그녀의 두 눈. 시뻘건 두 눈. 혹은 너의, 그 눈.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디에도 가지 않은 것처럼, 처음부터 쭉,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나는 그녀의 식탁에서 홀로 밥을 먹었고 그녀의 욕실에서 홀로 몸을 씻었고 그녀의 침대 위에서 홀로 잠을 잤고 그 사이 그녀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점에 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월요일이 돌아오자 학생답게 학교에 갔다. 쉽고 간단한 일들을 쉽고 간단히 해치우려고.

아직 거기에 있겠지, 보아?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겠지? 나는 나의 선생님을 세번째 보아라고 부른 적 없다. 하지만 나는 에탄올 냄새가 은은히 감돌던 과학실에 들어선 적이 있지. 깨끗한 가운을 차려입은 나의 앞에 선물처럼 주어진, 반짝이던 철판 위의 그것. 내 쪽으로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무방비하게 누워 있던 그것. 그것이라면.
  이거라면 어떨까?
  생각하던 나를, 몇 명의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대여섯 명짜리 작은 조에 속하여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혹은 커다란 칠판 앞 교탁에 서서, 한 학급의 대표로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것이 오직 나만을 위한 일인용 양서류였던 건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 나는 레몬향 탈취제 향기가 짙던 흰 가운 속에 파묻힌 채, 그 가운의 넉넉한 주머니 속에 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얼어 죽기라도 한 듯 외상없이 말끔하던 황소개구리의 뒤집힌 사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 핏기 없이 창백한 배. 공중을 향해 3센티미터쯤 떠오른 팔과 다리. 앙다문 턱. 보이지 않는 눈. 반대로 뒤집는대도, 보이지 않을 눈. 닫힌 눈.
  이거라면 충분하다.
  나는 생각했다. 생각하며 철판 끝에 놓여 있던 메스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 내게 신호를 던져주기만을 기다리며, 주문처럼 되뇌었지. 이리 와, 라고. 그건 너에게 하는 말이었어. 보아. 너를 부르는 말이었어. 미운 아이처럼 말을 듣지 않는 너를, 살살 달래 꾀어보려는 속삭임이었어. 이리로 와. 나는 그 말을 전에 없이 또렷하게 발음했으므로, 내 곁의 누군가는 분명히 그 말을 들었을 테지. 그러나 그게 나와 대체 무슨 상관이지?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로지 너뿐이야, 보아. 그러니까 이리로 와. 이리로 와.
  —이리로 와.
  나의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너를 다루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걸까? 내가 세 번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누군가 의아하다는 듯 모두에게 물었어. 잠깐. 저 개구리, 방금 한 번 몸을 떨지 않았어?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던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던가? 나는 바로 그 말이, 내가 기다려온 그 신호라는 것을 알았고, 바로 그 순간에 네가, 나의 속삭임에 이끌렸음을 알았다. 그러나 뒤집힌 개구리의 눈은 질끈 감겨 있고 내게는 보이지 않지.
  나는 손안에서 둥글게 굴리고 있던 메스를 고쳐 쥐고, 그 개구리의 배에 있는 힘껏 꽂아 넣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개구리의 배에 박힌 칼날을 뽑아 들고, 다시 한번 같은 자리에 꽂아 넣으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과학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해주었다.
  —살살. 살살 다뤄야지. 그런 식이면 아무것도 온전히 빼어낼 수 없단다.
  —그렇군요.
  나는 그의 지시에 따라 칼질을 이어나갔다. 얇은 피부 막을 십자로 가르고, 갈라진 뱃가죽을 활짝 벌려 고정하고, 조그마한 내장들을 하나씩 잘라, 작은 핀셋으로 섬세하게 들어올렸다. 작은 심장. 작은 폐와 간. 작은 위.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위. 길고 긴 장.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어깨 너머로 낱낱이 흩어지고 있는 개구리를 바라보던 선생님께, 끓어오른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니.
  —여길 봐. 텅 비어 있잖아요.
  —아냐.
  —머리통을 열겠어요.
  —그곳은 더더욱 비어 있단다.
  —머리통을 열겠어요.
  —아냐.
  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돌려세우며, 다시 한번 아—니—야, 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전부란다. 네가 발견한 모든 것이 그 개구리의 안에 든 모든 것이란다.
  순간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고, 나는 피투성이의 메스를 매끈한 철판 위로 부주의하게 집어 던졌다. 누군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은 나의 실패를 모두에게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보름이 지나서야 돌아왔어.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는 그녀의 배 속에 있을 때와 크게 다름없는 인상을 하고 있었어. 그애는 여전히, 덜 부푼 빵 반죽처럼 보였던 거야. 빵 반죽 같은 아이는 자주 울었다. 선생님은 자주 웃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라면, 선생님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꼭 아무 데도 다녀오지 않은 것처럼 굴었어. 나는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 데도 다녀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그녀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어.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비명을 지르듯 울 줄만 알던 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말로 인식될 법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엔 선생님이 훌쩍 커버린 그애를 품에 안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지. 그녀는 물을 마시러 부엌을 오가던 나를, 유독 더 따뜻한 눈빛으로 돌아보며, 아이에게 말했어.
  —아가야. 언니, 해봐. 언니.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치며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때 그애는 꼭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애의 새까만 동공이 나의 온몸을 옭아매는 듯한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고, 입안에선 비릿한 악취가 자꾸만, 새로이, 발생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멀고 먼 길을 달렸다. 익숙하던 동네에 도착한 것은, 높이 떠 있던 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의 일이었지. 나는 고작 몇 달 만에 낯설어진 현관문을 열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무언가, 무언가 전부 잃어버린 기분으로, 무겁게 떨구어져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그때 나는 열린 문틈 사이로, 처음 보는 얼굴의 늙은 여자를 마주했던 거야. 나를 보고 주저앉는 처음 보는 얼굴의 늙은 여자. 덜덜 손을 떨며 고개를 떨구던 늙은 여자. 그 늙은 여자의 모든 몸짓으로부터, 한 권의 책처럼 명백하게 읽히던, 너무나 거대한 공포. 해일처럼 거대하고, 불가항력적인 공포. 그 공포는 늙은 여자가 다 늙기도 전에 그 여자를 죽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불쌍한 여자의 앞에서 충분히 기다려주었어. 그 여자가 어련히 알아서 도망을 칠 때까지 말이야. 허나 그 여자는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내게 말했어.
  —너 아주 멀쩡해 보이는구나.
  그 말은 나를 상당히 당황스럽게 만들었지. 그건 정말이지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말이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 여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는데, 예컨대 이런 것들이었다: 정말입니까. 내가 멀쩡해 보입니까. 멀쩡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떤 점이 나를 멀쩡하게 만듭니까. 멀쩡한 나를 보며 당신은 왜 벌벌 떨고 있습니까. 나는 멀쩡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면 사실 멀쩡하지 않은 것은 당신인 게 아닙니까. 나는 멀쩡하고 당신은 멀쩡하지 않아서 당신은 벌벌 떨고 있는 게 아닙니까. 실제로 내 눈엔 당신이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왜 멀쩡하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왜 나의 집에 주저앉아 있습니까. 당신 때문에 나의 집이 멀쩡해 보이지 않습니다. 멀쩡한 나에겐 멀쩡한 집이 필요합니다. 멀쩡하지 않은 집에선 멀쩡한 나 역시 멀쩡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멀쩡한 나는 왜 점점 더 말이 많아지고 있는 겁니까. 왜 자꾸 말을 멈출 수가 없게 되는 겁니까. 나는 계속해서 말을, 말을, 말을, 말을 하고 그러나 왜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하지는 않는 겁니까. 당신은 나의 말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멀쩡하지 않은 당신에게는 무리일까요. 아아. 지겨워. 왜 모두가 내게 말을 걸고 그렇게 내가 나의 말을 멈출 수 없도록 하고 그러나 내가 입을 열면 대답하지는 않고 내가 무섭다는 듯 바라보기만 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나의 생각을 멈춘 것은 나의 말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그 여자의 말이었지.
  —하지만 나도 멀쩡하단다.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들어 나의 입가를 급히 틀어막았어. 별안간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방금 뭐라고……
  —너만큼 나도 멀쩡하단다. 너도 나만큼 멀쩡하구나. 우리 둘 다 멀쩡하구나. 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구나.
  나는 더욱 세게 나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크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눌러 참느라 온몸이 몇 번이나 들썩거렸다. 가슴은 위태롭게 부푼 풍선처럼 펑 터져버릴 것만 같았고 여자는 그런 내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늙은 여자는 나를 마치 길가의 행인처럼 무심하게, 그러나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엄마!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왜 그런 당연한 말을 하는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게 당연하잖아! 왜냐하면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 여자의 등 뒤로 세워져 있던 커다란 거울이 번뜩였다. 그래서 나는 그 거울의 앞으로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야. 나와 봐. 나와서 말을 해봐. 내 말이 맞잖아!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나를 좀 봐.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너조차 나에겐 아무것도 남겨두지 못했잖아. 네가 거쳐간 그 모든 여자들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지금의 나에겐 남아 있지 않잖아!
  나는 두 손으로 거울을 쥐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그 거울의 안쪽에서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얼마간 나를 힐끔거리다 현관 앞에 나동그라져 있던 구두 한 켤레를 챙겨 나의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그래. 가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영영 떠날 것처럼 굴다가 다시 돌아오는 짓 따위 할 생각도 마라.
  이후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 아주 긴 잠을 잤다.

나는 그 여자가 떠난 뒤로도 한참을 그 집에 살았다. 돈이 떨어져갈 때쯤이면 집 안의 물건들을 팔아 해치웠다. 학교는 간간이 나갔다. 그곳에서 나는 잠을 자다 일어나 밥을 먹었고, 다시 잠을 자다 허리가 아파질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던 날엔 오로지 한 가지 사실만을 모두에게서 확인하려 들었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자 나를 모르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이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무수히 멀어져갔다. 그들은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나와 선생님의 관계에 대해, 그녀의 아이에 대해, 그 둘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전부, 괜찮다고 생각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엔 골목의 모퉁이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벽 뒤에 숨어 몸의 반쯤만 내놓고 나를 훔쳐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헛것을 보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때문에 그녀를 피해 반대쪽 골목으로 빠르게 몸을 틀었는데,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때 그녀의 표정 속엔 오로지 절망만이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큰 실패를 해버린 것만 같은, 상당히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솜털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를 돌아 걸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졸업 후에는 곧장 먼 외지의 공장 부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고 일어나며 하라는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더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다른 도시의, 비슷한 어딘가로 걸어 들어갔다. 잠을 자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라는 일을 문제없이 해내기만 한다면. 덕분에 나의 도망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도망들은, 너로부터의 도망이라고 일축해 말할 수도 있겠지.
  조금 더 머리가 크고 나서부터 나는 돈이 많고 날이 좋은 밤마다 가장 더러운 골목의 가장 시끄러운 술집을 찾아 들어가 진탕 술을 퍼마셨다. 네가 없는 곳에선, 뭐든 연거푸 서너 잔쯤 들이켜고 나면 아주 재미있는 기분이 될 수 있었지. 도시는 몹시 가벼운 진동에도 크게 흔들렸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걸음을 멈추지 않는 바보들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며 자주 이런 말을 했어.
  또다른 내가 춤을 추고 있네.
  또다른 내가 춤을 추고 있다.
  또다른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오로지 춤을 추고 있네.
  더러운 골목의 시끄러운 술집에서 사람들은 나의 말을 재미있다는 듯 들었다. 나의 말을 싸구려 음악처럼 훔쳐 들으며 오래도록 킬킬거렸다. 그러다 몇몇은 기꺼이 내 앞에서 춤을 춰 보이기도 했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비틀거리는 춤을. 그들이 바보 같은 춤을 추는 동안 술집 구석의 낡은 티브이에선 언제나 불운한 내용의 보도들이 싸구려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바보 춤을 추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나의 말과 건조한 음성의 보도를 싸구려 음악처럼 겹쳐 들으며 소리쳤다.
  —하하, 세상이 망해가고 있군!
  그 말에 나는 따라 웃었다. 그때 나는 싸구려 뻥튀기를 안주 삼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한 조각을 집어 그 사람의 가슴팍을 향해 던졌고 뒤이어 그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아저씨. 뭐가 망해간다는 거야. 세상은 망할 수가 없는데. 세상은 없는데. 내가 태어나던 순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동일하게 없는 곳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춤을 추면서 바보 말까지 해버리는 거야. 도대체 세상이라는 게 뭐야. 그런 게 있기나 하다는 거야. 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거냐.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내가 알아듣게 말해. 내가 알아듣게 말해라.
  —좀 알아듣게 말하란 말이야!
  얼마간의 소란이 이어졌고 나는 곧 더러운 짐짝처럼 술집의 밖으로 무참히 내던져졌다. 나는 가로등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참을 큰 소리로 웃었다. 깔깔, 깔깔, 하고 말이야.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손안에는 마지막까지 내게 붙들려 있던 남자의 잿빛 머리털 몇 올과 싸구려 코트의 금장 단추와 그의 지갑과 휴대폰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전리품처럼 나의 주머니 속에 깊숙이 쑤셔 박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떠나고 있어. 보아. 주머니 속에 나의 전리품을 가득 챙겨둔 채. 온 도시의 지하를 둥글게 돌고 도는 열차에 앉아 있어. 사람은 너무나 많고 앉을 자리는 단 한 칸도 없고 그래서 나는 그냥 더러운 바닥에 앉아 있지. 당당히 가부좌를 틀고서. 보아, 이제는 너도 알겠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에 대해서 말이야. 내가 지금 어떤 장면을 목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내가 올라탄 열차는 밤의 바다처럼 검고 무시무시한 강의 위를 지나고 있어. 내 눈앞으로 굳게 닫혀 있는 출입문에는 둥글게 모서리가 깎인 창이 두 개나 나 있고. 그러나 나는 검은 강을 보지 않고 있다. 보지 못하고 있다. 그 창을 막아선 여자가 나의 온 시선을 앗아가고 있다. 나는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버릴 것만 같아.
  열차가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열차가 암흑 밖으로 밀려나온다. 열차가 짙은 잿빛의 불빛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사람들이 움직인다. 여자는 핸드백을 고쳐 매고 출입문 앞에 바짝 다가선다. 여자의 앞으로 표정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수히 지나치고, 열차가, 서서히, 멈춰서네.
  녹음된 음성이 온 역사에 울려퍼진다. 굉음을 내며 열차의 문들이 일제히 벌어진다. 여자는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한산해진 역사의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여자가 어디로 가게 될지 알 것만 같을까.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이 새로이 나를 의식한다. 불쾌한 표정을 짓고, 그 표정을 지우고, 잿빛 벽을 향해 난 창을 멍하니 들여다본다. 녹음된 음성이 온 역사에 울려퍼지고, 열차의 문이, 서서히, 닫히는데. 나는 멀어져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간다. 여자의 어깨를 낚아채 그녀를 멈춰 세운다. 여자가 나를 본다.
  나는 이 얼굴을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러나 나는 여자에게 아는 체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야. 나는 여자에게 아는 체를 하는 대신 묻는다.
  —혹시 저를 아세요?
  여자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인다. 여자의 눈이 나의 온몸을 천천히 훑어내린다. 나는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주무른다. 여자가 나와 눈을 맞춘다. 여자가 웃는다. 비열한 웃음이다.
  아, 나는 이 웃음의 의미를 알아버린 것 같아.

너구나.
  말하자 너는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다.
  정말로 너구나.
  말하자 너는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다.
  그러자 나는 비로소 네가 보인다. 네 모든 것이 보인다. 너는 너무나도 너처럼 생겼구나. 온통 나를 비켜난 방식으로 생겨버렸구나. 이렇게 자라났구나.
  나는 네게 묻고 싶었던 것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너를 보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나는 네게 손을 뻗지도 않는다. 나는 두 손을 허벅지 옆으로 차분히 내린 채 네게 말한다.
  너에게 염치란 게 있다면.
  말하자 너는 나를 바라본다.
  딱 한 번만.
  말하자 너는 귀를 기울인다.
  딱 한 번만 나를 안아봐.
  너는 귀를 닫는다.
  나를 안아.
  눈을 감는다.
  한 번만.
  몸을 지운다.
  한 번만 안아줘.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차갑게 경멸하는 눈빛만이 오래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이윽고 사라진다.

나는 네가 사라진 곳에서 셋을 센다. 하나, 둘, 셋. 뒤를 돌자 새로운 열차가 빨려들어오고 있네.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나는 그 안에 올라탄다. 사람들이 많고 열차는 흔들리고 창이 난 문들은 일제히 닫힌다. 나는 빈자리를 찾아 그곳에 앉는다. 문득 뒤적여본 주머니는, 어느새 비어 있다. 이윽고 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많은 소리가 들려온다. 시끄럽고. 귀가 터질 것 같다.

너무 많은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다.

주이현

202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전혀 짧지 않은 소설을 내놓은 주제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스스로가 우습지만, 이토록 짧은 소설을 써본 적이 없다. 시작할 용기도 없는 소설을 완성할 자신이 없어 급히 보아의 이름을 빌려왔다. 나의 사랑 보아. 지긋지긋한 보아. 지긋지긋하게 사랑스러운 보아는 감사하게도 이 이상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동글동글 똬리를 뜬 채 악몽에 뒤척이는 나의 모습을 종종 내려다보기는 하겠지. 고소하겠다.
소설의 후반부를 쓰고 있던 그저께 아침엔 나의 조부께서 눈을 감으셨다. 그는 내가 그를 가장 처음 안 그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시인이셨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시를 한 편 읊고 떠나셨다.) 그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두렵게 함과 동시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한다. 이 지면을 빌려, 온 마음으로 그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2024/06/05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