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질주
<토이 카메라> 현장에서, 내가 배운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처음 알게 된 것들도 있었다. 가령 촬영용 피를 만드는 방법 같은 것. 그들이 내 앞에서 직접 피를 만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올리고당과 검붉은 식용색소를 섞으면 색깔도 그렇거니와 적당히 끈끈한 느낌이 제법 혈액 같았다. 선배들은 내 앞에서 직접 그걸 만들어 보였다. 윤성 선배는 세숫대야에 올리고당과 식용색소를 풀어넣고 손으로 휘휘 젓다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먹어볼래? 달고 좋아.
더불어 그들이 슬레이트로 컷을 구분하는 까닭, 화면을 예쁘게 찍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스모그 머신을 ‘쪼다통’이라고 부른다는 것.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흐름이 끊기면 스크립트를 말아쥐고 고함을 쳤다. 우리가 너만큼 잘 쓰지는 못하겠지만…… 윤성 선배가 방바닥에 스크립트를 집어던지는 순간, 며칠 전 그가 겸연쩍어하며 보여주던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그들이 나를 그 예전의 나로 대했던 건 피를 만들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학사촌아파트 703호. 윤성 선배는 내게 청치마를 입고 그곳에 와달라고 했다.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여야 한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여학생에게 긴 청치마가 하나쯤은 있었지만, 내가 가진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룸메이트가 며칠째 기숙사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빨랫줄에 걸려 있는 그녀의 치마를 걷어 입고 갔다. 발목까지 오는 긴 청치마를 입은 여자에게 애초에 기대했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십 년이 훌쩍 넘게 흐른 지금도 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현장에서는 그 치마를 입을 일이 없었다.
대신 나는 윤성 선배의 동기라는 여자가 미리 준비해놓았다는 검은 슬립을 내내 입고 있었다. 스물네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처음에 윤성 선배는 내게 슬립 안에 착용한 브래지어를 빼달라고 했다. 딴에도 그런 말을 하기는 쑥스러웠던지 조심스럽게 말하기는 했다. 그는 곧 사색이 된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거뒀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함을 칠 때마다 나는 혹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인가, 생각해보아야 했다.
학사촌아파트 703호에 도착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천장이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이 되는 뒤집어진 세상. 평소 누군가의 자취방으로 쓰일 공간은 세간이 이리저리 뒤섞인 채 엉망이었다. 매트리스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전신거울에 금이 가 있었다. 선배들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더러 운동화를 신은 채 마룻바닥에 뛰어들곤 했다. 대체 자기 방을 촬영 워크숍 현장으로 내어준 호구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생각했다. 암막커튼을 쳐 컴컴한 방 어딘가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건사하지 못한 고양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쏘다녔다. 어둠 속에서 윤성 선배가 뱃살이 늘어져 보일 만큼 뚱뚱한 고양이의 뒷목을 잡고 들어올리며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이것 좀 어디 갖다버려라, 사운드 계속 들어오잖아.
커튼을 젖히거나 칠 때마다 달라지는 조도 때문에 순식간에 뒤바뀌던 명암. 선배들의 고함소리와 쫓겨난 고양이가 문 밖에서 간헐적으로 울부짖을 때마다 달음박질하던 발소리.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담배 연기. 민원이 들어왔는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 좀 줄이라고 외치던 경비 아저씨의 목소리. 이 새끼들, 담뱃값도 안 나올 짓거리들 하고 있네. 그런 것들과 더불어 내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감각은 용수철이 튀어나온 매트리스의 촉감이다. 얇은 슬립만 입고 누워 있으려니 괴로웠다. 허리께에 집요하게 파고들던 따끔거리는 철사의 감촉이야 그들의 시선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카메라 감독인 진혁 선배 뒤에서 한 여자가 낄낄대며 말했다. 와, 범석씨 계 탔네. 시나리오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진혁 선배 대신 윤성 선배가 직접 핸드헬드로 카메라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나와 낯선 남자 사이로. 그때 매트리스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카메라를 든 자와 나와 낯선 남자가.
트위터에서는 영화 <질주>에 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 주연배우 Y가 저지른 범죄에 관한 이야기였다. 비록 그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를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은 그에게 섹스 서비스를 제공하던 여성이었다.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던 초기부터 기사의 방점도 거기 찍혀 있었다. ‘이런 강간이 가능한가?’ 사건이 일어날 당시 룸에 동료 연예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Y가 행위를 강제했다는 내용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된 것은 그들의 명단이었다. 증권가 찌라시와 흡사한 형태로 돌던 명단은 급기야 그들이 참고인 조사를 받은 후 공식 문건처럼 여러 매체에 걸렸다. 날마다 그들의 이름이 회자되었다. 그중에는 Y의 전 여자친구라고 알려진 여배우도 있었다.
Y가 강간에 관한 무혐의 처분을 받기까지 일 년 동안 사건은 SNS를 통해 뜨겁게 거론되었다. 그가 주연으로 촬영한 영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지금 트위터에서는 영화의 개봉 여부에 대한 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투자사와의 갈등 때문에 촬영 완료 후 몇 년 동안이나 개봉을 하지 못한 영화 <질주>는 갈등을 해결하자마자 주연배우 Y 사건 때문에 다시 발이 묶였다. <질주>는 젊은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라고 했다. Y를 포함한 인기배우들을 대거 기용한 작품으로 화려한 입봉을 앞두고 있던 신인 감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Y가 무혐의 처분을 받은 직후였다.
나는 이 건과 관련한 트위터의 공론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일 년 전, 주연배우 Y의 사건이 처음 공개되던 당시의 기사와 그에 대한 반응부터. 트위터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공론의 결과 온도가 달랐지만, 사건과 관련하여 화제가 된 이야기들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중에는 이미 봤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다시금 정독했다. 며칠이 걸렸다. 내게도 급한 마감이 있었지만 홀린 듯 트위터만 들여다봤다. 일 년 동안의 여론을 복기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힘들게 완성한 작품을 개봉하지 못하고 있는 불운의 신인 감독, 윤성 선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까지. 공론의 흐름 막바지에 감독 이윤성이 등장하는 순간 나는 트위터를 종료했다. 내게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영화 <질주>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봤다. 감독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그 제목을 보고도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흔한 명사일 뿐이었다. Y를 포함한 유명한 주, 조연 배우들의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촬영부와 연출부에 걸린 이름 중 몇몇이 익숙했다. 조연출, 촬영부, 조명부, 그립, 키 그립, 스크립터까지.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들의 이름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내 영화’의 스태프 롤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날 학사촌아파트 703호 워크숍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십삼 년 전,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의 학기 과제였던 오 분짜리 단편영화 <토이 카메라>의 스태프들. 영화과 학생들이었다. 내게 검은 슬립을 빌려주었던 여자의 이름이 촬영부에 있었다. 그녀는 당시 촬영이 끝나고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2004, 토이 카메라> 폴더를 만들어서 현장 사진을 수십 장 업로드하기도 했다. 검은 볼캡을 쓰고 목에 흰 수건을 두르고 인상을 쓴 윤성 선배의 사진 밑에 ‘순수한 열정 그 자체, 이윤성 감독님’이라고 코멘트를 했다. 내 사진이 두 장 있었다. 속옷이 훤히 비치는 얇은 검은색 슬립을 입고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 금 간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빗고 있는 모습. <토이 카메라>는 흑백영화였다. 그녀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은 컬러였다. 사진 속 드러난 내 어깨에 윤성 선배가 직접 만든 검붉은 가짜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네 몸에 바를 거야. 자해하는 여자거든. 어깨를 찔렀다가 피가 흐르면 그걸 찍어먹기도 하고. 올리고당이라 괜찮아. 먹어볼래? 달고 좋아.
당시 나는 스무 살의 대학 신입생이었다.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때까지 내게 ‘질주’는 대학생활의 전부였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강남에 있는 집에서 경기 남부에 있는 대학 캠퍼스까지 고속버스를 타면 오십 분 정도 걸렸다. 통학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기숙사를 신청했다. 밤낮없이 캠퍼스에 머물고 싶어서였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기보다는 이미 ‘예술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술대 학생이 된다는 것은 내게 캠퍼스 가장 구석에 위치한 그 컴컴한 작업실로 걸어 들어가는 일과 다름없었다. 암실, 시사실, 소극장, 갤러리, 도서실이 있는 낡아빠진 건물로. 예술대는 수능 점수에 맞춰 배치표를 보고 전공을 선택하는 그런 학생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계열 학과들이자, 각 분야 전문가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한국 예술의 모집단이다. 예체능계열 상위 1퍼센트이자 몇백 대 일의 실기고사를 통과한 학생들이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예술대 오리엔테이션에서 각 학과 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이 들고 선 마이크와 부총장의 영상편지에서까지 흘러나오던 메시지였다.
‘질주’는 오십 년 전통의 예술대학 학보사였다. 수많은 경우에 ‘우리 예술대는 하나다’라고 부르짖던 것과는 다르게 질주는 학과를 차별해서 선발했다. 공식적으로 내건 조건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질주에 입회할 수 있는 학과는 네 개 뿐이었다. 문창과, 사진과, 영화과, 산업디자인과. 예외적으로 연극과 ‘연출’ 전공의 입회가 허락되기도 했다. 영화과에는 연기 전공이 없었다. 오십 년 전통 질주만의 언어들이 있었다. 가령 당시에는 NL도 PD도 변변찮았지만, 한때 사립대 운동권의 선봉장에 섰었다는 자부심이 곁들여진 수사들. 민족, 자주, 해방, 민족쓰임, 애국 같은 단어들. 또한 이런 농담도 대대로 전수되어 왔던 것이다. ‘우린 딴따라는 안 받잖아.’ 입회 후 처음 가진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우린 돈이 없어도 행복한 딴따라들이잖아, 라는 말과 우린 딴따라는 또 취급 안 하잖아, 라는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내게는 멋져 보였다.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질주의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이 새내기 시절 가장 존경하던 선배가 다름 아닌 문창과 형이었다고 했다. 살면서 그런 천재는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것이라고. 형이 쓴 시를 처음 보았을 때 기계나 다루는 자신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윤성 선배는 말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복학생이었던 형은 마지막 학기를 질주에 바치고 떠났다고 했다. 그런 천재, 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도 문창과였으니까.
형이 말했던 소설, 뭐였더라, 아, 『눈먼 자들의 도시』, 너도 읽어봤지?
그 소설이라면 익히 들어왔지만 읽지는 않았었고,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아, 그 소설. 우리 과 교수님이 쓰신 소설이요?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를 생각하면 여러 장면이 동시에 떠오른다. 좁은 모자챙 너머 그늘진 윤성 선배의 얼굴이나, 씨발 쪼다통보다도 못하네, 뇌까리던 진혁 선배의 땀에 젖은 등. 검은 슬립을 입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보려고 애쓰던 나. 그러나 아직도 가장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그 장면이다. 우리 과 교수님이 쓰신 소설이요? 그 말에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성 선배는 짧게 한숨 쉬며 말했다. 하, 그럴 리가. 나는 오랫동안 그 장면을 기억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마다 기습하는 장면이었다.
질주는 분기마다 학보를 냈다. 1분기인 3월 말에는 신입생에게 별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예술대 동향을 취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도, 특정한 주제를 정해 쓰는 기획기사도 쓸 수 없었다. 3월에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밥과 술을 얻어먹고 그들과 친해지는 것이 새내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게 문창과 형 이야기를 하며 말을 걸어왔고,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 달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다.
늦은 밤까지 잔디밭에 앉아 술을 마시다 각자 과제를 하러 돌아갈 때면, 윤성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외롭겠다. 글 쓰는 사람들은. 우리는 며칠 밤 새워도 늘 북적북적하지만 너희들은 혼자 해야 하잖아. 게다가 머리통 하나만 믿고. 밤새 영화는 찍어도 밤새 글은 못 쓸 것 같아. 존경한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았다.
조금 늦어졌네. 얼른 화장실 가서 옷 벗고 와.
‘귀를 의심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윤성 선배는 손을 닦으며 재촉했다. 뭐 해, 어서 안 갈아입고. 나는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는 그의 손등을 빤히 보며 망연자실 서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처음 보는 여자가 내게 검은 슬립을 건넸다. 그녀는 나를 빠르게 위아래로 훑으며, 저랑 체형이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네요, 말했다. 그걸 받아들고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청치마를 입고 오라면서요?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어달라고 말한 사람은 선배잖아요? 그 말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굴려보면서도 내뱉지 못했다. 학보사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구경한 시나리오에도 ‘청치마를 입은 그녀’라는 말이 분명 있었다.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겸연쩍어하며 <토이 카메라>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직접 그린 콘티도 함께였다. 그냥 졸라맨이야. 그림은 못 그려도 그림은 잘 만드니까 걱정 말고 와.
등장인물은 ‘그녀’와 ‘범석’ 둘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에야 기억해낸 바 <토이 카메라>에는 부제가 있었다. 범석의 모놀로그. 703호 현장에서의 순간들은 살아가는 내내 그야말로 불현 듯 머릿속에 들이닥쳤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윤성 선배의 멱살을 붙들고 말했다. 너는 그 영화로 상까지 받았으면서 아직도 나한테 미안한 게 없어? 그런 꿈을 몇 번이나 꿨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문득 윤성 선배가 보여주었던 시나리오 표지에 적혀 있던 부제가 기억나는 순간, 나는 용수철이 튀어나온 허름한 매트리스 위에 상의를 벗은 채 누워 있던 남자가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를 떠올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학교생활 자체도 잊혀져갈 무렵이었다. 사실상 나 혼자 등장하는 일인극에 가까웠으나 <토이 카메라>는 ‘범석’의 모놀로그였던 것이다. 나는 주인공 범석의 기억 속에서 움직이는 그녀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일 년 후에야 알았다. 703호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온몸에 가짜 피 칠갑을 하고 눈물을 쥐어짜내야 하는 유일한 피사체는 나뿐이었으니까.
범석씨 계 탔네, 그 말과 함께 나는 옆에 누운 남자를 돌아보았다. 윤성 선배는 내게 베드신이 있다고 일러주지 않았다. 아직 첫키스도 안 해봤을 텐데, 미안. 남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춰달라고 했다.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나에 대한 배려라는 양. 윤성 선배는 핸드헬드 워킹으로 그 장면을 클로즈업해 촬영했다. 그 장면이 반 년 후 예술대 축제에서 대문짝만하게 걸리게 될 줄이라고는 몰랐다.
촬영이 언제 끝나는 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촬영은 밤이 깊어 새벽이 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윤성 선배가 몇 번이나 방바닥에 스크립트를 집어던졌고, 진혁 선배는 한숨을 쉬며 내가 미안하다, 고 뇌까렸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너 고등학교 때 연극부였다며? 그럼 우리 촬영 도와줄 수 있어? 연극과 애가 갑자기 펑크를 내서 도저히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 내게 그 말을 하며 배우 역할을 맡아주기를 권했던 사람이 진혁 선배였다. 진혁 선배는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연극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진혁 선배에게 다른 사람과 나를 착각한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영화과의 워크샵 현장이 궁금했고 주연배우가 되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5분짜리 단편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 몰랐고, 시나리오에 없는 장면을 갑자기 찍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방학 때는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워크숍 비용을 벌고, 학기 중에는 벌어둔 돈을 털어 영화를 찍는다는 그들의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나는 내내 고작 그런 생각으로 여기까지 와서 그들의 워크숍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윤성 선배가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판단할 겨를이 내게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윤성 선배는 내게 농담을 걸지도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테이핑 해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그 자리에 설 때마다 내가 설 자리가 아닌 곳을 자처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윤성 선배가 스태프들에게 나를 ‘피사체’라고 칭할 때마다 그저 현장 용어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무 살인 내가 느꼈던 기분 그대로 표현하자면 ‘나는 피사체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예술대 학생으로서 그런 말은 무식한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새벽이 되자 룸메이트에게 문자가 왔다. 너 내 치마 입고 갔지? 그거 내일 입어야 하는데 언제 들어올 거야. 전화 좀 해. 눈치 보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범석이 말을 걸었다. 힘들죠? 어쩌다 문창과 분이 여기에 오셨어요? 그는 매트리스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물끄러미 보자 그는 내게도 권했다. 나는 거절하며 말했다. 저 선배들이랑 아는 사이라서요. 범석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봤다. 가만 보니 그는 꽤 나이 들어 보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전부 1, 2학년 또래들이었는데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서른이 훌쩍 넘은 늦깎이 신입생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촬영이 끝난 날 쓴 다이어리에 ‘그 여자가 내게 입을 맞추던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느꼈고 무리한 충동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상상을 해버렸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이라는 말은 진짜인가? 결국에는 참아냈기에 참을 수 없음, 의 상태는 성립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 따위의 글을 전체 공개 게시물로 적어둔 것과 함께.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자, 자본의 논리와 스캔들에 희생된 불운한 역작이다…… 그것은 전부 윤성 선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질주>를 둘러싼 현상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도 그런 것쯤은 구분할 줄 알았다. 주연배우 Y의 범죄는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고 그것과 윤성 선배의 인격은 관련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감독이 윤성 선배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몇날며칠을 밤새워 트위터를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토이 카메라> 이후 그와 멀어졌고, 질주에서도 탈퇴했다. 2학년이 된 이후에는 영화과 선배들을 마주칠 일도 없었다. 윤성 선배가 <토이 카메라>로 이름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밖에는 그의 근황을 들은 적 없었다. 톱스타를 주연배우로 영화를 찍고 있었을 줄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모자챙 밑으로 그늘진 윤성 선배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자기도 아는 소설을 내가 모른다고 면박 주던 때가 떠오를 때마다 내심 비웃곤 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힘주고 다니더니 지금은 뭘 하냐. 막상 그의 ‘불운’을 맞닥뜨리자 당혹스러웠다.
문창과 새내기가 주인공이래. 그해 가을 예술대 축제에서 우연히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무대가 설치된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무대 위 스크린에 내 얼굴이 영사되고 있었다. 눈물을 흘려내라고 소리치는 선배들이 화면 바깥에 있었고,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그 때만큼 울고 싶었던 순간이 다시없었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못하고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윤성 선배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화면에 담아냈다. 화면을 예쁘게 찍어야 한다고 종일 스모그 머신을 돌린 만큼 컷마다 그럴듯했다. 나는 속옷이 비치는 슬립을 입고 어깨에 칼을 꽂는 시늉을 하거나 들고 있던 어항을 바닥에 팽개쳤다.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장면들을 나는 더 자세히 기억했다. 어항에 금붕어 한 마리가 있었다. 윤성 선배가 그걸 집어던지라고 디렉팅할 때, 나는 이 물고기는 어쩌느냐고 되물었다. 그때 윤성 선배가 한숨을 쉬었고, 옆에 있던 남자가 그에게 담배를 물려주었다.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펄떡거리던 금붕어를 나는 오랫동안 기억했다. 어항에 금붕어가 없었다면 그 장면은 조금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었다.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는 어항을 통째로 집어던지는 여자의 광기 같은 것을 표현하는 재능이 분명 그에게는 있었다.
703호 현장에서의 촬영은 스물네 시간을 넘겨 다음날 오후에 끝났다. 나는 망설이다 윤성 선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 작품 완성되면 제게도 하나 주실 수 있으세요? 그때 윤성 선배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고,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도 완성된 작품 보고 싶어요.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질주와 함께 시작되었던 나의 대학생활은 거기서 멈췄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윤성 감독의 영화 <질주>에 관한 정보를 영화 데이터베이스 웹페이지에서 검색해보았다. 줄거리가 간단하게 등록되어 있었다. 사립대 최고의 예술학부, 2000년대 초반 캠퍼스에서 영화감독과 시인의 꿈을 갖고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캐스트 명단 가장 첫번째 올라 있는 주연배우 Y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윤성 감독을 연기하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그들이 슬레이트로 컷을 구분하는 까닭, 화면을 예쁘게 찍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스모그 머신을 ‘쪼다통’이라고 부른다는 것.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흐름이 끊기면 스크립트를 말아쥐고 고함을 쳤다. 우리가 너만큼 잘 쓰지는 못하겠지만…… 윤성 선배가 방바닥에 스크립트를 집어던지는 순간, 며칠 전 그가 겸연쩍어하며 보여주던 시나리오가 생각났다. 그들이 나를 그 예전의 나로 대했던 건 피를 만들던 때가 마지막이었다.
학사촌아파트 703호. 윤성 선배는 내게 청치마를 입고 그곳에 와달라고 했다.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여야 한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여학생에게 긴 청치마가 하나쯤은 있었지만, 내가 가진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룸메이트가 며칠째 기숙사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빨랫줄에 걸려 있는 그녀의 치마를 걷어 입고 갔다. 발목까지 오는 긴 청치마를 입은 여자에게 애초에 기대했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십 년이 훌쩍 넘게 흐른 지금도 나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현장에서는 그 치마를 입을 일이 없었다.
대신 나는 윤성 선배의 동기라는 여자가 미리 준비해놓았다는 검은 슬립을 내내 입고 있었다. 스물네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처음에 윤성 선배는 내게 슬립 안에 착용한 브래지어를 빼달라고 했다. 딴에도 그런 말을 하기는 쑥스러웠던지 조심스럽게 말하기는 했다. 그는 곧 사색이 된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거뒀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함을 칠 때마다 나는 혹시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인가, 생각해보아야 했다.
학사촌아파트 703호에 도착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천장이 바닥이 되고 바닥이 천장이 되는 뒤집어진 세상. 평소 누군가의 자취방으로 쓰일 공간은 세간이 이리저리 뒤섞인 채 엉망이었다. 매트리스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전신거울에 금이 가 있었다. 선배들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더러 운동화를 신은 채 마룻바닥에 뛰어들곤 했다. 대체 자기 방을 촬영 워크숍 현장으로 내어준 호구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생각했다. 암막커튼을 쳐 컴컴한 방 어딘가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건사하지 못한 고양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쏘다녔다. 어둠 속에서 윤성 선배가 뱃살이 늘어져 보일 만큼 뚱뚱한 고양이의 뒷목을 잡고 들어올리며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이것 좀 어디 갖다버려라, 사운드 계속 들어오잖아.
커튼을 젖히거나 칠 때마다 달라지는 조도 때문에 순식간에 뒤바뀌던 명암. 선배들의 고함소리와 쫓겨난 고양이가 문 밖에서 간헐적으로 울부짖을 때마다 달음박질하던 발소리. 방 안을 가득 메우던 담배 연기. 민원이 들어왔는지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 좀 줄이라고 외치던 경비 아저씨의 목소리. 이 새끼들, 담뱃값도 안 나올 짓거리들 하고 있네. 그런 것들과 더불어 내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감각은 용수철이 튀어나온 매트리스의 촉감이다. 얇은 슬립만 입고 누워 있으려니 괴로웠다. 허리께에 집요하게 파고들던 따끔거리는 철사의 감촉이야 그들의 시선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카메라 감독인 진혁 선배 뒤에서 한 여자가 낄낄대며 말했다. 와, 범석씨 계 탔네. 시나리오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진혁 선배 대신 윤성 선배가 직접 핸드헬드로 카메라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나와 낯선 남자 사이로. 그때 매트리스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카메라를 든 자와 나와 낯선 남자가.
트위터에서는 영화 <질주>에 관한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 주연배우 Y가 저지른 범죄에 관한 이야기였다. 비록 그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나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를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은 그에게 섹스 서비스를 제공하던 여성이었다. 사건이 언론에 공개되던 초기부터 기사의 방점도 거기 찍혀 있었다. ‘이런 강간이 가능한가?’ 사건이 일어날 당시 룸에 동료 연예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Y가 행위를 강제했다는 내용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된 것은 그들의 명단이었다. 증권가 찌라시와 흡사한 형태로 돌던 명단은 급기야 그들이 참고인 조사를 받은 후 공식 문건처럼 여러 매체에 걸렸다. 날마다 그들의 이름이 회자되었다. 그중에는 Y의 전 여자친구라고 알려진 여배우도 있었다.
Y가 강간에 관한 무혐의 처분을 받기까지 일 년 동안 사건은 SNS를 통해 뜨겁게 거론되었다. 그가 주연으로 촬영한 영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지금 트위터에서는 영화의 개봉 여부에 대한 토론이 진행 중이었다. 투자사와의 갈등 때문에 촬영 완료 후 몇 년 동안이나 개봉을 하지 못한 영화 <질주>는 갈등을 해결하자마자 주연배우 Y 사건 때문에 다시 발이 묶였다. <질주>는 젊은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라고 했다. Y를 포함한 인기배우들을 대거 기용한 작품으로 화려한 입봉을 앞두고 있던 신인 감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Y가 무혐의 처분을 받은 직후였다.
나는 이 건과 관련한 트위터의 공론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일 년 전, 주연배우 Y의 사건이 처음 공개되던 당시의 기사와 그에 대한 반응부터. 트위터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공론의 결과 온도가 달랐지만, 사건과 관련하여 화제가 된 이야기들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중에는 이미 봤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다시금 정독했다. 며칠이 걸렸다. 내게도 급한 마감이 있었지만 홀린 듯 트위터만 들여다봤다. 일 년 동안의 여론을 복기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힘들게 완성한 작품을 개봉하지 못하고 있는 불운의 신인 감독, 윤성 선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까지. 공론의 흐름 막바지에 감독 이윤성이 등장하는 순간 나는 트위터를 종료했다. 내게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영화 <질주>에 관한 정보를 검색해봤다. 감독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그 제목을 보고도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흔한 명사일 뿐이었다. Y를 포함한 유명한 주, 조연 배우들의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촬영부와 연출부에 걸린 이름 중 몇몇이 익숙했다. 조연출, 촬영부, 조명부, 그립, 키 그립, 스크립터까지.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들의 이름을 잊지 못했다. 그들은 ‘내 영화’의 스태프 롤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날 학사촌아파트 703호 워크숍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십삼 년 전,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의 학기 과제였던 오 분짜리 단편영화 <토이 카메라>의 스태프들. 영화과 학생들이었다. 내게 검은 슬립을 빌려주었던 여자의 이름이 촬영부에 있었다. 그녀는 당시 촬영이 끝나고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2004, 토이 카메라> 폴더를 만들어서 현장 사진을 수십 장 업로드하기도 했다. 검은 볼캡을 쓰고 목에 흰 수건을 두르고 인상을 쓴 윤성 선배의 사진 밑에 ‘순수한 열정 그 자체, 이윤성 감독님’이라고 코멘트를 했다. 내 사진이 두 장 있었다. 속옷이 훤히 비치는 얇은 검은색 슬립을 입고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 금 간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빗고 있는 모습. <토이 카메라>는 흑백영화였다. 그녀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은 컬러였다. 사진 속 드러난 내 어깨에 윤성 선배가 직접 만든 검붉은 가짜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네 몸에 바를 거야. 자해하는 여자거든. 어깨를 찔렀다가 피가 흐르면 그걸 찍어먹기도 하고. 올리고당이라 괜찮아. 먹어볼래? 달고 좋아.
당시 나는 스무 살의 대학 신입생이었다.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때까지 내게 ‘질주’는 대학생활의 전부였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강남에 있는 집에서 경기 남부에 있는 대학 캠퍼스까지 고속버스를 타면 오십 분 정도 걸렸다. 통학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기숙사를 신청했다. 밤낮없이 캠퍼스에 머물고 싶어서였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기보다는 이미 ‘예술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술대 학생이 된다는 것은 내게 캠퍼스 가장 구석에 위치한 그 컴컴한 작업실로 걸어 들어가는 일과 다름없었다. 암실, 시사실, 소극장, 갤러리, 도서실이 있는 낡아빠진 건물로. 예술대는 수능 점수에 맞춰 배치표를 보고 전공을 선택하는 그런 학생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계열 학과들이자, 각 분야 전문가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한국 예술의 모집단이다. 예체능계열 상위 1퍼센트이자 몇백 대 일의 실기고사를 통과한 학생들이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예술대 오리엔테이션에서 각 학과 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이 들고 선 마이크와 부총장의 영상편지에서까지 흘러나오던 메시지였다.
‘질주’는 오십 년 전통의 예술대학 학보사였다. 수많은 경우에 ‘우리 예술대는 하나다’라고 부르짖던 것과는 다르게 질주는 학과를 차별해서 선발했다. 공식적으로 내건 조건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알고 있었다. 질주에 입회할 수 있는 학과는 네 개 뿐이었다. 문창과, 사진과, 영화과, 산업디자인과. 예외적으로 연극과 ‘연출’ 전공의 입회가 허락되기도 했다. 영화과에는 연기 전공이 없었다. 오십 년 전통 질주만의 언어들이 있었다. 가령 당시에는 NL도 PD도 변변찮았지만, 한때 사립대 운동권의 선봉장에 섰었다는 자부심이 곁들여진 수사들. 민족, 자주, 해방, 민족쓰임, 애국 같은 단어들. 또한 이런 농담도 대대로 전수되어 왔던 것이다. ‘우린 딴따라는 안 받잖아.’ 입회 후 처음 가진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우린 돈이 없어도 행복한 딴따라들이잖아, 라는 말과 우린 딴따라는 또 취급 안 하잖아, 라는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내게는 멋져 보였다.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질주의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자신들이 새내기 시절 가장 존경하던 선배가 다름 아닌 문창과 형이었다고 했다. 살면서 그런 천재는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것이라고. 형이 쓴 시를 처음 보았을 때 기계나 다루는 자신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윤성 선배는 말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복학생이었던 형은 마지막 학기를 질주에 바치고 떠났다고 했다. 그런 천재, 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도 문창과였으니까.
형이 말했던 소설, 뭐였더라, 아, 『눈먼 자들의 도시』, 너도 읽어봤지?
그 소설이라면 익히 들어왔지만 읽지는 않았었고,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아, 그 소설. 우리 과 교수님이 쓰신 소설이요?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를 생각하면 여러 장면이 동시에 떠오른다. 좁은 모자챙 너머 그늘진 윤성 선배의 얼굴이나, 씨발 쪼다통보다도 못하네, 뇌까리던 진혁 선배의 땀에 젖은 등. 검은 슬립을 입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보려고 애쓰던 나. 그러나 아직도 가장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그 장면이다. 우리 과 교수님이 쓰신 소설이요? 그 말에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성 선배는 짧게 한숨 쉬며 말했다. 하, 그럴 리가. 나는 오랫동안 그 장면을 기억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마다 기습하는 장면이었다.
질주는 분기마다 학보를 냈다. 1분기인 3월 말에는 신입생에게 별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예술대 동향을 취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도, 특정한 주제를 정해 쓰는 기획기사도 쓸 수 없었다. 3월에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밥과 술을 얻어먹고 그들과 친해지는 것이 새내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게 문창과 형 이야기를 하며 말을 걸어왔고,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 달 내내 그들을 따라다녔다.
늦은 밤까지 잔디밭에 앉아 술을 마시다 각자 과제를 하러 돌아갈 때면, 윤성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외롭겠다. 글 쓰는 사람들은. 우리는 며칠 밤 새워도 늘 북적북적하지만 너희들은 혼자 해야 하잖아. 게다가 머리통 하나만 믿고. 밤새 영화는 찍어도 밤새 글은 못 쓸 것 같아. 존경한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았다.
조금 늦어졌네. 얼른 화장실 가서 옷 벗고 와.
‘귀를 의심한’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윤성 선배는 손을 닦으며 재촉했다. 뭐 해, 어서 안 갈아입고. 나는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는 그의 손등을 빤히 보며 망연자실 서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처음 보는 여자가 내게 검은 슬립을 건넸다. 그녀는 나를 빠르게 위아래로 훑으며, 저랑 체형이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네요, 말했다. 그걸 받아들고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청치마를 입고 오라면서요?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어달라고 말한 사람은 선배잖아요? 그 말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굴려보면서도 내뱉지 못했다. 학보사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구경한 시나리오에도 ‘청치마를 입은 그녀’라는 말이 분명 있었다. 윤성 선배와 진혁 선배는 겸연쩍어하며 <토이 카메라>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직접 그린 콘티도 함께였다. 그냥 졸라맨이야. 그림은 못 그려도 그림은 잘 만드니까 걱정 말고 와.
등장인물은 ‘그녀’와 ‘범석’ 둘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에야 기억해낸 바 <토이 카메라>에는 부제가 있었다. 범석의 모놀로그. 703호 현장에서의 순간들은 살아가는 내내 그야말로 불현 듯 머릿속에 들이닥쳤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윤성 선배의 멱살을 붙들고 말했다. 너는 그 영화로 상까지 받았으면서 아직도 나한테 미안한 게 없어? 그런 꿈을 몇 번이나 꿨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문득 윤성 선배가 보여주었던 시나리오 표지에 적혀 있던 부제가 기억나는 순간, 나는 용수철이 튀어나온 허름한 매트리스 위에 상의를 벗은 채 누워 있던 남자가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를 떠올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학교생활 자체도 잊혀져갈 무렵이었다. 사실상 나 혼자 등장하는 일인극에 가까웠으나 <토이 카메라>는 ‘범석’의 모놀로그였던 것이다. 나는 주인공 범석의 기억 속에서 움직이는 그녀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일 년 후에야 알았다. 703호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온몸에 가짜 피 칠갑을 하고 눈물을 쥐어짜내야 하는 유일한 피사체는 나뿐이었으니까.
범석씨 계 탔네, 그 말과 함께 나는 옆에 누운 남자를 돌아보았다. 윤성 선배는 내게 베드신이 있다고 일러주지 않았다. 아직 첫키스도 안 해봤을 텐데, 미안. 남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춰달라고 했다.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나에 대한 배려라는 양. 윤성 선배는 핸드헬드 워킹으로 그 장면을 클로즈업해 촬영했다. 그 장면이 반 년 후 예술대 축제에서 대문짝만하게 걸리게 될 줄이라고는 몰랐다.
촬영이 언제 끝나는 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촬영은 밤이 깊어 새벽이 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윤성 선배가 몇 번이나 방바닥에 스크립트를 집어던졌고, 진혁 선배는 한숨을 쉬며 내가 미안하다, 고 뇌까렸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너 고등학교 때 연극부였다며? 그럼 우리 촬영 도와줄 수 있어? 연극과 애가 갑자기 펑크를 내서 도저히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 내게 그 말을 하며 배우 역할을 맡아주기를 권했던 사람이 진혁 선배였다. 진혁 선배는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연극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진혁 선배에게 다른 사람과 나를 착각한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영화과의 워크샵 현장이 궁금했고 주연배우가 되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5분짜리 단편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 몰랐고, 시나리오에 없는 장면을 갑자기 찍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방학 때는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워크숍 비용을 벌고, 학기 중에는 벌어둔 돈을 털어 영화를 찍는다는 그들의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나는 내내 고작 그런 생각으로 여기까지 와서 그들의 워크숍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윤성 선배가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판단할 겨를이 내게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윤성 선배는 내게 농담을 걸지도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테이핑 해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그 자리에 설 때마다 내가 설 자리가 아닌 곳을 자처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윤성 선배가 스태프들에게 나를 ‘피사체’라고 칭할 때마다 그저 현장 용어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무 살인 내가 느꼈던 기분 그대로 표현하자면 ‘나는 피사체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예술대 학생으로서 그런 말은 무식한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새벽이 되자 룸메이트에게 문자가 왔다. 너 내 치마 입고 갔지? 그거 내일 입어야 하는데 언제 들어올 거야. 전화 좀 해. 눈치 보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범석이 말을 걸었다. 힘들죠? 어쩌다 문창과 분이 여기에 오셨어요? 그는 매트리스에 비스듬히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물끄러미 보자 그는 내게도 권했다. 나는 거절하며 말했다. 저 선배들이랑 아는 사이라서요. 범석은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봤다. 가만 보니 그는 꽤 나이 들어 보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전부 1, 2학년 또래들이었는데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서른이 훌쩍 넘은 늦깎이 신입생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촬영이 끝난 날 쓴 다이어리에 ‘그 여자가 내게 입을 맞추던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성욕을 느꼈고 무리한 충동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상상을 해버렸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이라는 말은 진짜인가? 결국에는 참아냈기에 참을 수 없음, 의 상태는 성립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 따위의 글을 전체 공개 게시물로 적어둔 것과 함께.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자, 자본의 논리와 스캔들에 희생된 불운한 역작이다…… 그것은 전부 윤성 선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질주>를 둘러싼 현상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도 그런 것쯤은 구분할 줄 알았다. 주연배우 Y의 범죄는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고 그것과 윤성 선배의 인격은 관련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감독이 윤성 선배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몇날며칠을 밤새워 트위터를 들여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토이 카메라> 이후 그와 멀어졌고, 질주에서도 탈퇴했다. 2학년이 된 이후에는 영화과 선배들을 마주칠 일도 없었다. 윤성 선배가 <토이 카메라>로 이름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밖에는 그의 근황을 들은 적 없었다. 톱스타를 주연배우로 영화를 찍고 있었을 줄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모자챙 밑으로 그늘진 윤성 선배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자기도 아는 소설을 내가 모른다고 면박 주던 때가 떠오를 때마다 내심 비웃곤 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힘주고 다니더니 지금은 뭘 하냐. 막상 그의 ‘불운’을 맞닥뜨리자 당혹스러웠다.
문창과 새내기가 주인공이래. 그해 가을 예술대 축제에서 우연히 복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무대가 설치된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무대 위 스크린에 내 얼굴이 영사되고 있었다. 눈물을 흘려내라고 소리치는 선배들이 화면 바깥에 있었고,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그 때만큼 울고 싶었던 순간이 다시없었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못하고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윤성 선배는 일그러진 내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화면에 담아냈다. 화면을 예쁘게 찍어야 한다고 종일 스모그 머신을 돌린 만큼 컷마다 그럴듯했다. 나는 속옷이 비치는 슬립을 입고 어깨에 칼을 꽂는 시늉을 하거나 들고 있던 어항을 바닥에 팽개쳤다.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장면들을 나는 더 자세히 기억했다. 어항에 금붕어 한 마리가 있었다. 윤성 선배가 그걸 집어던지라고 디렉팅할 때, 나는 이 물고기는 어쩌느냐고 되물었다. 그때 윤성 선배가 한숨을 쉬었고, 옆에 있던 남자가 그에게 담배를 물려주었다. 깨진 유리 조각 사이로 펄떡거리던 금붕어를 나는 오랫동안 기억했다. 어항에 금붕어가 없었다면 그 장면은 조금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었다.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는 어항을 통째로 집어던지는 여자의 광기 같은 것을 표현하는 재능이 분명 그에게는 있었다.
703호 현장에서의 촬영은 스물네 시간을 넘겨 다음날 오후에 끝났다. 나는 망설이다 윤성 선배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 작품 완성되면 제게도 하나 주실 수 있으세요? 그때 윤성 선배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고,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도 완성된 작품 보고 싶어요.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질주와 함께 시작되었던 나의 대학생활은 거기서 멈췄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윤성 감독의 영화 <질주>에 관한 정보를 영화 데이터베이스 웹페이지에서 검색해보았다. 줄거리가 간단하게 등록되어 있었다. 사립대 최고의 예술학부, 2000년대 초반 캠퍼스에서 영화감독과 시인의 꿈을 갖고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캐스트 명단 가장 첫번째 올라 있는 주연배우 Y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윤성 감독을 연기하는 사람이었다.
박민정
그는 왜 거기 있었어야 했나, 그는 무엇을 보았나, 그 말을 들은 이후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 그 방과 방을 이루는 것들과 틈입하는 분명한 소리에 대해, 날아다니는 새의 시점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