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에 동그라미 세 개.
   만화가를 꿈꾸던 친구가 내 교과서에 그린 그림이었다.
   애벌레야?
   친구는 고개를 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야.
   나는 아마도 이렇게 인사했던 것 같다.
   귀를 얼굴만 하게 그려줘서 고마워.
   그때부터 나는 남들보다 큰 귀를 나만의 방법으로 훈련시키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나는 귀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게 가능하다. 처음에는 이어폰에 의지했지만 지금은 상대방의 목소리보다 훨씬 큰 소리로 원하는 음악을 마음속으로 재생할 수 있다. 때로는 완벽한 음소거 상태를 구현하기도 한다.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앞에 두고 실컷 떠들지만 내 안에는 고요가 찾아든다.
   뮤트(mute), 나는 이 상태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

   마주선 구팀장의 인중을 쳐다본다. 입은 살짝 벌린 채 고개는 일정한 리듬으로 끄덕거린다. 일종의 최면처럼 곧 뮤트 상태로 진입할 것이다.
   ……유림씨? ……저번에 ……거기서 ……알지?
   구팀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비집고 들어왔다. 주말의 피로 때문인지 마음대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소리가 들렸다.
   졸리구나?
   그는 사람들이 모두 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유림씨, 요즘 핫한 레스토랑이 어디야?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검색하자, 구팀장은 헛기침을 하며 기다렸다.
   여기 어떠세요? 전망 좋고 분위기 있는 루프탑 레스토랑이래요.
   오, 괜찮네 거기. 그런데 유림씨……
   구팀장이 뜸을 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난주 토요일, 유명한 라운지 바에서 우연히 구팀장을 만났다. 그날도 나는 같이 온 친구의 뻐끔거리는 입 모양을 바라보며 뮤트 상태를 즐기고 있었다. 친구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나는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안겨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커다란 유리창 아래에서 구팀장이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구팀장은 잠깐 멈칫하더니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먼저 자리를 피해줘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그는 카운터에서 내 테이블까지 계산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로 유부남인 구팀장은 더이상 숨길 게 없다는 듯이 나만 보면 애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다. 회사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나로서는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인턴 기간 동안 구팀장의 말 한마디에 정직원으로 전환되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기에 그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안 했지?
   나는 입을 지퍼처럼 잠그는 시늉을 했다. 그는 그제야 미소를 보였고 먼저 사무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뮤트 상태를 비집고 들어온 건 구팀장이 두번째였다.

   했어요, 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의실에는 서현과 나밖에 없었지만 얇은 슬레이트 벽 너머로 원장님이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오해할까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숙제했다고요, 숙제.
   서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서현이 배가 아프다거나 어지럽다는 핑계로 학교는 빠져도 학원은 오는 심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평소보다 일찍 온 서현을 이용했다. 대여섯 명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일한 고등학생인 서현이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아이들은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저 누나, 무서운 누나야.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물론 지금은 내가 인턴이 되면서 낮에 하던 수업은 정리하고, 서현이 당분간 다른 학원을 구할 때까지만 주말마다 학원에서 과외수업을 해주기로 했다. 인턴 월급을 받기 전까지 당장 용돈이 필요한 나에게는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문제는 서현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부터 내가 갖고 있던 능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서현은 남자친구와 잔 이야기를 틈만 나면 해댔다. 매일 집 앞에 건물을 새로 짓는 공사장 소음을 듣는 기분이었다.
   서현의 말에 의하면 둘은 친구네 집에서 잤다. 다른 친구도 함께 그 집에 있었다고 했다. 친구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서현과 남자친구는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잤던 것이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숨죽여 물었다.
   우리는 소리 안 내요.
   물론 서현이 처음부터 남자친구와 있었던 일들을 내게 털어놨던 건 아니다. 나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남자친구랑 데이트할 때 선생님은 뭐하고 노세요? 라는 질문에서 서현의 의도를 알아차렸어야 했다.
   밥 먹고…… 카페 가고……
   다른 거는요?
   영화도 보고……
   또 다른 건 안 해요?
   산책도 하고…… 야! 나한테 왜 그래. 그만 물어봐.
   에이, 쌤! 저 다 알아요.
   무엇을 안다는 것인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서현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수록 그 아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가 싫어서 매번 말을 돌릴 뿐이었다.

   과학 선생님이 말했다.
   비닐은 흙속에 묻어도 썩지 않는다.
   나는 책에다 받아 적었다.
   비밀은 흙속에 묻어도 썩지 않는다.
   한동안 벙어리처럼 지낸 적이 있었다. 누군가 물으면 기본적인 대답만 하고 먼저 나서서 말을 하지 않는 식이었다. 이상하게도 커다란 귀는 모든 소리를 정확히 잡아낼 거라 생각했지만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 말소리들을 자꾸 다른 단어로 인식했다. 종잡을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으면 웃음이나 야유가 돌아왔다. 차라리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게 듣고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편이 편했다. 더군다나 내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도 거북하고 답답했다. 지난날의 습관처럼 비밀을 흙 대신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버리곤 했다.

   다른 사람한테 말 안했지?
   구팀장은 검지를 입술에 갖다대며 쉬쉬했다. 그의 입술은 온갖 이야기들을 저장해놓은 것처럼 두툼했다. 말할 때만큼은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그의 애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절대로 한 번에 자랑하지 않았다. 한 조각 한 조각 퍼즐 조각을 준 다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하며 맞춰보도록 유도했다. 그런 여자의 비위를 맞추며 몰래 사귀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친구도 그거 마시던데?
   구팀장은 내가 들고 있는 애플망고 스무디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셔보라는 의미에서 방금 받은 새 음료를 내밀었지만 그는 손사래 치며 ‘따, 아’가 좋다고 했다. 같은 시간 동안 더 많은 말을 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종종 줄임말을 썼다.
   저기 말이야, 애인이 주말에 못 놀러갔다고 단단히 삐졌어. 와이프랑 아이랑 같이 동물원으로 소풍갔었거든. 그게 다 자기랑 만나려고 그러는 건데도 내 마음을 몰라주네. 이해가 되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래. 어떤 상황인지 그려지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점원이 외쳤다.
   유림씨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 것 같아?
   구팀장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며 머뭇거렸다. 그동안 맛있는 음식점이나 여행지를 물어볼 때면 검색해서 알려주곤 했지만 이번 질문은 달랐다. 그의 애인이 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내 또래의 여자들이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 지에 대해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도 들었다. 구팀장에게는 업무보다도 애인과의 관계 개선이 더 시급한 문제처럼 보였다.
   원하는 대로 해주면 돼요. 저도 그렇거든요.
   구팀장이 내 팔을 팔꿈치로 치면서 역시 유림씨, 라며 껄껄 웃었다. 더이상 대화가 길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나는 주문한 음료를 건네며 비상계단 쪽으로 돌아섰다.
   팀장님, 저는 운동 삼아 계단으로 가겠습니다.
    구팀장은 다이어트가 일상인 애인을 떠올리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가라는 손짓을 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내게 들어온 이야기들을 다시 몸 밖으로 뱉어내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날숨과 함께 빠져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이야기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라고 간절히 빌고 싶었다. 난간 손잡이를 따라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귓구멍에서 귓바퀴를 따라 나오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꼭대기층에 가까워질수록 가냘픈 소리가 귀에서 윙윙거렸다. 어떤 소음이라도 반죽처럼 가늘고 길게 늘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뮤트. 특별한 능력이 되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와라. 내 앞에서 아무리 지루하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꺼내놓더라도 모두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옛적에 당신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생 동안 비밀을 지켜왔기에 지금 대나무 숲 안에 서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은 죽을 만큼 온 힘을 다해 외치기로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은 내가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바람의 소리와 함께 당신은 비밀을 실어보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는 당신의 비밀을 들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궁리해야만 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하는 내 태도가 당신으로 하여금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나를 통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그곳으로 누군가의 귀에 비밀이 흘러들어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저 한 곳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비밀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때마다 죄책감이 줄어드는 기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도 처음에는 당신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공감하고 있지 못한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예의상 잎사귀를 팔랑이는 게 스스로도 역겨웠다. 어떤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중요한 점은 비밀의 주인은 내가 될 수도, 당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비밀이 당신의 과거가, 현재가,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조심하시라. 당신의 비밀 또한 가까운 사람의 비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내가 당신의 비밀을 흘려보냈다고 해서 억울해 한다면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다른 곳에 비밀을 외쳤어야만 했다. 나는 깊이 간직하고 있던 나의 비밀이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지는 게 두려워 당신의 비밀을 잠깐, 지켜줬을 뿐이다. 당신의 비밀을 지켜야 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나를 왜 벙어리로 만들게 하는가. 비밀을 지키려면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덕분에 곧고 올바른 이미지를 얻게 되긴 했지만.
   게다가 당신에게 비밀을 듣다보면 저절로 눈치가 발달한다. 동원 가능한 상상력을 모두 발휘해 작은 단서로도 새로운 비밀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당신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비밀을 털어놓지 않더라도 나는 내 안을 지나가는 그들의 비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챌 뿐더러, 그것을 모른 척 눈감아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야 말았다. 나를 괴물 숲으로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외쳤던 사람들이다. 내 탓이라고 한다면 비밀은 돌고 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 또한 당신에게 비밀이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궁금한가. 그래봤자 당신은 나의 비밀을 절대 모를 것이다. 추측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외친 비밀만을 바람에 실어보낼 수밖에 없는 일개 숲에 불과하다.
   참고로 나를 아무리 베어봤자 소용이 없다.

   회사 빌딩 옥상은 하나의 커다란 대나무 숲이었다. 곡선 모양의 산책로를 따라 양옆으로 대나무가 빽빽이 심겨 있었고 곳곳에 마련된 벤치나 평상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전망대 부근은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기도 하고 바닥 곳곳이 투명한 재질로 되어 있어 아찔하기도 했다.
   대나무 숲 사이로 팀원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놀래줄 심산으로 몸을 숨기며 뒤쫓아갔다. 그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팀장님 말이야, 유림씨랑 왜 이렇게 친해?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는 거 아닐까요?
   팀장님이 어린 친구들을 오죽 좋아해야 말이지.
   그럼 유림씨는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겠네요?
   괜히 점수 짜게 줬다간 구팀장님한테 한소리 듣겠는걸.
   오해를 받는 건 딱 질색이지만 구팀장이 나를 친근하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은 채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테기 사다주시면 안돼요?
   잉태기?
   쌤, 어른인데 그것도 몰라요? 임신했는지 테스트하는 거요.
   나도 사본 적 없는데 별걸 다 부탁한다, 너는.
   화낸 거예요? 귀여움.
   서현아, 제발 그만 좀 해!
   때릴 수도 없었다. 손에 쥔 볼펜을 더 꽉 쥐었다. 땀이 나고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너는 온통 그 얘기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지. 그저 내뱉기만 하면 다야?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 마구 떠올라서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서현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 팔을 세게 때리면서 웃듯이 말했다.
   선생님이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절 쳐다보시잖아요.
   나는 아픈 팔을 문지르며 그만 떠들고 문제나 풀라며 책을 가리켰다. 서현의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는 한참동안 생각한 뒤에야 그 말뜻을 이해했다. 한마디로 나를 하나의 커다란 귀로 본다는 뜻이었다. 축 늘어뜨린 귀가 걸어다니는 모습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내가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쳐다본 적이 있었나. 진도 나가느라 바빠서 고개 숙이고 어, 어 해준 게 다였던 것 같은데. 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아니야, 그건 오해야. 나는 네 얘기를 들을 때 건성으로 들어주는 척 시늉만 했을 뿐이라고. 다른 누군가와 나를 착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더 잘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나는 약사와 단둘이 마주하기 싫은 마음에 서현을 데리고 약국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당당하게 임신테스트기를 달라고 말했다. 몇 개 드릴까요? 라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서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현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접었고 다시 네 개를 펼쳐보였다. 약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에 뒀다가 들키면 어쩌죠? 쌤이 맡아주세요.
   그러니까 예방이 중요하다니까.
   귀찮아요, 쌤.
   서현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바짝 올라가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비상 버튼처럼 반짝였고 제발 눌러달라고 속삭였다.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면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내 비밀들을 더듬거리며 모두 흡수해버릴 것 같았다. 나는 하마터면 그 버튼을 누를 뻔 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다면 어쩐지 아쉬울 것만 같았다.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쳐다본다는 게 이런 거구나, 고개를 갑자기 들어서 쳐다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문제는 귀가 아니라 눈이구나, 하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서현을 보내고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의자 반대편에는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짐을 가득 실은 쇼핑카트가 함께 놓여 있어서 남편이라도 기다리는 줄 알았다. 여자는 계속 중얼거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카트에 시선을 둔 채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세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척 화가 난 사람의 억양이었다. 종종 웃기도 했다. 여자의 모습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타야할 버스 서너 대를 그냥 보내야만 했다.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는 처음이었다. 안주를 앞에 두고 서로 술잔을, 여러 말들을 주고받았다. 한 사람의 말에 모두가 귀 기울이기도 하고 침묵이 흐르면 어느 누구라도 입을 열어 재밌는 이야기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주길 바랐다. 분위기를 이끌어가던 동기가 나에게도 한마디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할말이 없기도 했고, 내 이야기를 펼치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변하는 건 순간이었다. 나는 서현의 비밀을 남에게 들은 이야기 마냥 풀어놓았다. 사람들은 세상이 요즘 같지 않다며 혀를 찼다.
   유림씨 경험담 아니에요?
   에이, 거짓말 같은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열 번이 가능하려나. 젊어서 그런가.
   임신테스트기는 무슨 네 개나 샀대.
   학교 가서 친구들한테 비싸게 팔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다가 나중에 덜컥 임신해서 병원 같이 가달라고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야기는 길어지고 밤은 짧아졌다. 남은 사람들 중 몇몇은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연인임을 드러냈고 몇몇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중 구팀장도 보였다. 그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잠들어 있었다. 옆으로 누워 있어 오른쪽 목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마치 하나의 귀처럼 보였다. 팀장의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거렸다. 사랑하는 마눌님.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귀에 대고 외쳤다.
   팀장니이임, 주임님이랑 같이 나가시죠오오!

   가게 앞에는 구팀장의 아내가 차를 세우고 있었다. 구팀장은 몸을 가누지 못했고 나는 직장 선배와 함께 구팀장을 부축했다.    사모님, 저희가 대리 불러서 모셔다드려도 되는데 이렇게 직접 오시고…… 저 기억나시죠? 이쪽은 팀장님이 제일 아끼는 김유림씨입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나는 구팀장의 불륜 사실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에 시달렸다. 저렇게 괜찮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구팀장이 괜히 괘씸하게 느껴졌다.
   내가 머뭇거리며 서 있자, 그녀는 차에 타며 씁쓸하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는걸요.
   순간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했나 싶어 손으로 입을 막을 뻔했다. 구팀장의 비밀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끙끙거리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게 억울했다. 나중에 구팀장에게 귀띔을 해주는 게 좋을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비밀은 비밀을 낳는다. 그녀가 구팀장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나 혼자만의 비밀이 되었다. 비밀을 빌미로 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삼개월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점심시간마다 건물 옥상의 대나무 숲을 산책할 수 있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남자친구로부터 청혼도 받았다. 선배들이 구팀장과의 관계를 오해한 덕분에 다른 동기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굳이 내 입으로 해명하지 않은 게 비밀이라면 비밀이었다.
   서현의 과외수업도 두 달 전에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마지막 수업 날, 서현은 예상과 다르게 조용했다.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니?
   서현은 웃기만 했다. 이제 자신도 더이상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겼다는 인상을 주는 웃음이었다. 나는 혼자 상상해본다. 서현의 남자친구는 친구를 불러들인다. 서현은 그들과 번갈아가면서 잘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 서현이 나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밀이 없다. 아무에게도 내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보다 커다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저절로 말하게 될 것이고 나도 비로소 비밀이 생길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안의 소리들로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였던 것 같다.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나는 내 안의 소리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학원 원장님에게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속여서 수업료를 올려 받기도 하고, 유부남 애인에게 이별 소식을 들은 날에는 제일 친했던 친구의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으며, 실직자 신세가 된 아버지의 직업을 자영업자로 적어서 내기도 하고, 선배에게 받은 합격 자기소개서를 거의 그대로 제출해서 운 좋게 취업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과연 내 안의 소리들이 자처한 일들일까? 세상의 소리들로부터 자유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행동들이 결국은 내 안의 소리 중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괴로운 것 같다. 나는 이 모든 비밀들을 있는 그대로 안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뮤트, 내 안에 다시 고요가 깃든다.

박지음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아주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소설을 쓰겠습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