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여름호에 발표할 소설을 쓰기 위해 2, 3월 두 달간 펼쳐본 것들을 모아보았다. 실제로 소설을 쓰기 위해 읽은 것도 있고 그냥 읽거나 보았는데 소설과 느슨한 연결을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들도 있다.


   하라 료의 『지금부터의 내일』(문승준 옮김, 비채, 2021)




   2월에는 하라 료의 『지금부터의 내일』을 읽었다. 읽고 뭔가 쓰고 싶어져 리뷰를 썼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하라 료가 이 소설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내는 ‘받아들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수동적이지 않은 능동적인 방식의 받아들임, 책임감 같은 말로도 바꿔 말할 수 있을 어떤 것에 대해서 말이다. 올해의 목표가 따로 있지는 않았고 막연하게 의뢰를 받지 않은 글을 두어 편 써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한 편을 썼다. 하라 료 리뷰는 《릿터》에 투고를 했는데 통과가 되어 《릿터》 6월호에 실릴 예정이다. 고료를 받으면 하라 료에게 받은 것 같겠지. 기분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고료는 민음사가 주는 것이지만.


   조르주 심농의 『갈레 씨, 홀로 죽다』(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1)




   하라 료 이야기를 친구와 하다가 친구가 심농을 빌려주었다. 너무나 유명한 시리즈인데 왠지 손이 안 가서 이번에 처음 읽었다. 나는 여태 심농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심농에게 어떤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생 프랑스 밖을 거의 떠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것과 오래 해로한 부인이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는데 둘 다 완전 틀렸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소설 속 갈레씨는 제목처럼 홀로 죽는다. 매그레 반장은 분투 끝에 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힌다. 진실이 밝혀진다고 죽은 갈레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나 진흙 속에 버려진 존재를 두 손으로 건져 수건으로 닦아주는 것 같았다. 그가 누군가를 구한 것은 아니나 짓밟힌 고결함 같은 것이 다소 구해진 기분이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동양 이야기』 (오정숙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작년 이맘때 이 책에 실린 「왕포는 어떻게 구원되었나」라는 단편을 처음 읽게 되었다. 원래 유르스나르를 알던 것은 아니었고 아는 분의 소개와 추천으로 읽게 된 것인데 읽고 무척 재미있고 정말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다른 소설은 안 읽은 것인지 이걸 쓰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데 아무튼 이번에 소설을 쓰면서 유르스나르의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었다. 소설에 나오는 왕포와 링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다. 저를 도와주세요 저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주세요. 늘 그렇듯 결과적으로는 별로 비슷하지 않은 소설이 된 것 같지만 이 소설의 어떤 지점을 꼭 따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해서 다음에도 또 해볼 것이다.


   아즈마 히데오의 『실종일기2―알코올 병동』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2015)




   이전부터 여러 번 본 만화인데 이번에는 등장인물 이름을 짓는 데 도움을 얻으려 다시 펼쳤다. 어떤 구체적인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닌데 소설을 쓰다 이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어째서 늘 ‘이번에는 이 책을 펼쳐라!’ 같은 확신을 스스로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대체로 그런 확신은 도움이 되는데 이번에 이름을 짓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읽다 몇 년 전 어떤 평론가 분과 『실종일기』의 대단함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분은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쓰거나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지루할 것이라고 했다. 이 만화가 가지는 무서운 냉정함을 포함한 대단함은 만화에서만 구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고 나도 무척 동감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것을 소설로 쓴다고 생각했을 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지루할 것 같은 이유가 무엇일까.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써도 소설의 목소리는 만화의 보여줌 혹은 그림이 갖는 경쾌함보다는 무거워지는 것일까. 같은 이유로 영화에서 실제 배우가 나오면 어떻게 연기를 해도 만화가 갖는 드라이함과는 멀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지금은 없어진 한양문고에서 샀다. 『실종일기』를 읽고 2권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틈날 때마다 들러서 오늘은 나온 건가 확인하다가 몇 번 만에야 샀다. 그때는 만화 표지를 보며 내용을 상상해보고 또 그런 식으로 새 작가를 알아가는 것이 좋았는데 한양문고가 사라진 이후로 그런 식으로 만화를 산 적이 없다.


   자크 리베트의 영화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프랑스, 1974)




   여름호에 실릴 소설을 어떻게 쓰지 궁리하는 와중에 최근에 발표한 소설 제목이 자크 리베트 영화 제목이랑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발표작은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인데 꽤 예전에 발표한 「부산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라는 소설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자크 리베트 영화 제목은 <알게 될 거야>로 뭔가 리베트의 영화 제목이 미래의 가능성을 좀더 품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리베트 회고전에서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를 보았다. 영화에서 셀린느와 줄리는 낡은 저택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에 대한 환상이라고 해야 할지 사건의 전개라고 해야 할지를 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환상을 보게 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영화 안에서는 사탕을 먹으면 보이는 걸로 되어 있는데 이게 꿈처럼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인지 만화에서 생각을 표현하는 말풍선처럼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위에서는 보이는 것으로 치는 것인지 아니면 스크린이 내려오고 영화처럼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환상을 구현하는 방식이 치밀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식도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졸아서 어쩌면 환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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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이 예정대로 진행이 될까? 오늘은 4월 4일이고 여름호 계간지 마감은 4월 19일이고 이 플레이리스트는 5월 《비유》에 업로드가 될 것이고 여름호 계간지는 5월말, 6월초에 출간될 것이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진행되어도 늘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잘……? 그렇다면 즐겁게? 알 수 없지만 만나게 될 거야 그 모든 것들과. 원래 여름호에 발표할 소설 제목으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는데 이걸 쓰다보니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를 발표하면서 고민하다 쓰지 않았던 다른 제목으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예정대로라면 6월초에 확인해볼 수 있을 텐데 소설 제목은 내가 지어서 보내는 거면서도 매번 잡지가 나오면 아니 이게 이 제목……? 이러면서 놀란다. 마치 편집부에서 다른 제목을 갖다붙인 것처럼 말이다. 대체 왜?




박솔뫼

월요일. 산책하고 낮잠 자고 싶은 날인데 모든 요일이 그렇다.

2021/04/27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