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16화 코로나 시대, 목격되지 않는 예술(인)에 대하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2020년 우리 모두가 목격한 하나의 사실이다. 일명 ‘코로나19’. 아니다. 우리는 정작 코로나19를 ‘본’ 적조차 없다. 우리는 지난 12개월 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코로나19에 대한 온갖 정보들을 ‘전달’받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그 실체를 목격하기 힘들 정도로 미시적인 존재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미 지구 전체의 일상을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켰다.
거리두기
코로나19 시대의 화두 중 하나는 ‘거리두기’다. 거리두기를 둘러싼 수많은 기준과 규칙, 해석과 불만, 상상과 사업이 속출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거리두기가 우리의 ‘목격’을 멀리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와 함께 많은 존재들이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부분이 사회적 소수자들이다. 대부분이 사회적 불편함들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 도시에서 감추어졌던 존재들이었지만, 코로나19는 이들과의 거리두기를 확실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강요한다. 차별과 혐오는 방역에 녹아든다. 사회적 무감각도 방역이 된다. 방역은 또 다른 ‘통치술’이다. 거리두기 앞에서 우리의 목격은 흐릿해진다.
거리두기로서의 예술
사실 거리두기를 가장 좋아했던 것은 예술이다. 적확하게는 근대화된 예술(가). 오랫동안 예술가들은 현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예술의 정체성이자 예술가의 존재 방식으로 강조해왔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현실에 대한 예술가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예술에 대한 현실의 거리두기’가 현실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공공기금에 의한 예술이 아닌 ‘현실의 예술’을 목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19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예술에 대한 현실의 거리두기는 충분하다 못해 지나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코로나19와 함께 도래한 재난사회에서 “예술이 목격되지 않는다”는 비명이 쏟아지고 있다.
당연하다. 거리두기는 예술에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예술의 특수성은 소멸된 지 오래다. 평범한 행정제도인 ‘정산’에서조차 예술에 대한 예외가 없는데, 재난 앞에서 예외가 있을 리 없다. ‘예술에 대한 현실의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이 사회는 재난 앞에서 예술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재난 속에서 가장 먼저 고통을 느끼고, 뜨겁게 감정을 교감하며, 깊은 성찰과 상상을 가져다줄 예술은 더이상 이곳에 없다. 대기업, 소상공인, 학생, 수험생, 유권자…… 재난사회는 다양한 이름으로 시민을 호출하지만 거기에 예술(인)은 없다.
예술과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현실은 자연스럽게 예술을 ‘쿨’하게 ‘패싱’한다. 예술은 자신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이제 예술은 자신이 잊히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무감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괴이한 긴급지원
코로나19와 함께 예술에도 긴급지원이라는 것이 진행되었다. 분명 긴급지원인데, 긴급한 곳에, 긴급하게 지원되지 않는 괴이한 긴급지원이 진행되고 있다. 연극을 만들 수 없는 데 연극관람을 지원하는 긴급지원. 연극시장과 소비를 부양해야 한다. 미술인들이 생계를 위협받는데 “전국 곳곳에서 공공미술을 하라”는 긴급지원. 미술인의 생계가 아무리 급해도 미술인을 지원할 수는 없다. ‘공공’을 위한 미술을 집행해야 지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의 관심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불과 수개월 내에, 전국 곳곳에서, 약 800억원어치의 공공미술을 집행(!)해야 한다. 코로나19에 따른 예술계 긴급지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괴이한 긴급지원의 또다른 취향이 있다. 바로 ‘온라인’이다. 온라인 플랫폼, 언택트 콘텐츠, 디지털화…… 이쯤되면 예술인을 위한 긴급지원인지 4차산업혁명을 위한 지원사업인지 많이 헷갈린다.
사람 없는 예술 지원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사람 없는 예술 지원’이다. “예술은 지원하지만 예술인을 지원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한국 예술행정의 불문율이다. 한국의 예술 지원은 예술인이 아니라 예술과 관련된 ‘사업’ ‘프로젝트’ ‘프로그램’들을 지원한다. 아무리 긴급해도 예술인의 생계와 목숨에는 지원할 수 없다. 코로나19가 몰아쳐와도 긴급지원을 받으려면 동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가서 공연을 하고,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온라인 콘텐츠로 전환해서 플랫폼에 올려야 한다. 아무리 ‘긴급’해도 그 과정을 다 경유해서 정산을 마무리해야 ‘지원’은 실행된다. 코로나 시대에 수많은 예술활동이 존재하지만 예술을 목격하기 힘든 이유다.
아무리 긴급해도, 예술인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어도 ‘공모-경쟁-선발-사업-평가-정산’을 거쳐야 예술은 성립된다. 긴급해서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긴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지원을 받는다. 이쯤되면 예술 스스로 예술을, 동료 예술인을 직접 찾아서 목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코로나19와 함께 본격화된 재난사회, 당신이 마지막 목격자가 되지 않으려면.
2020년 우리 모두가 목격한 하나의 사실이다. 일명 ‘코로나19’. 아니다. 우리는 정작 코로나19를 ‘본’ 적조차 없다. 우리는 지난 12개월 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코로나19에 대한 온갖 정보들을 ‘전달’받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그 실체를 목격하기 힘들 정도로 미시적인 존재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미 지구 전체의 일상을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켰다.
거리두기
코로나19 시대의 화두 중 하나는 ‘거리두기’다. 거리두기를 둘러싼 수많은 기준과 규칙, 해석과 불만, 상상과 사업이 속출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거리두기가 우리의 ‘목격’을 멀리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와 함께 많은 존재들이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부분이 사회적 소수자들이다. 대부분이 사회적 불편함들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현대 도시에서 감추어졌던 존재들이었지만, 코로나19는 이들과의 거리두기를 확실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강요한다. 차별과 혐오는 방역에 녹아든다. 사회적 무감각도 방역이 된다. 방역은 또 다른 ‘통치술’이다. 거리두기 앞에서 우리의 목격은 흐릿해진다.
거리두기로서의 예술
사실 거리두기를 가장 좋아했던 것은 예술이다. 적확하게는 근대화된 예술(가). 오랫동안 예술가들은 현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예술의 정체성이자 예술가의 존재 방식으로 강조해왔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현실에 대한 예술가의 거리두기’가 아니라 ‘예술에 대한 현실의 거리두기’가 현실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공공기금에 의한 예술이 아닌 ‘현실의 예술’을 목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19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예술에 대한 현실의 거리두기는 충분하다 못해 지나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코로나19와 함께 도래한 재난사회에서 “예술이 목격되지 않는다”는 비명이 쏟아지고 있다.
당연하다. 거리두기는 예술에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예술의 특수성은 소멸된 지 오래다. 평범한 행정제도인 ‘정산’에서조차 예술에 대한 예외가 없는데, 재난 앞에서 예외가 있을 리 없다. ‘예술에 대한 현실의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이 사회는 재난 앞에서 예술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재난 속에서 가장 먼저 고통을 느끼고, 뜨겁게 감정을 교감하며, 깊은 성찰과 상상을 가져다줄 예술은 더이상 이곳에 없다. 대기업, 소상공인, 학생, 수험생, 유권자…… 재난사회는 다양한 이름으로 시민을 호출하지만 거기에 예술(인)은 없다.
예술과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현실은 자연스럽게 예술을 ‘쿨’하게 ‘패싱’한다. 예술은 자신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이제 예술은 자신이 잊히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무감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괴이한 긴급지원
코로나19와 함께 예술에도 긴급지원이라는 것이 진행되었다. 분명 긴급지원인데, 긴급한 곳에, 긴급하게 지원되지 않는 괴이한 긴급지원이 진행되고 있다. 연극을 만들 수 없는 데 연극관람을 지원하는 긴급지원. 연극시장과 소비를 부양해야 한다. 미술인들이 생계를 위협받는데 “전국 곳곳에서 공공미술을 하라”는 긴급지원. 미술인의 생계가 아무리 급해도 미술인을 지원할 수는 없다. ‘공공’을 위한 미술을 집행해야 지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공의 관심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불과 수개월 내에, 전국 곳곳에서, 약 800억원어치의 공공미술을 집행(!)해야 한다. 코로나19에 따른 예술계 긴급지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괴이한 긴급지원의 또다른 취향이 있다. 바로 ‘온라인’이다. 온라인 플랫폼, 언택트 콘텐츠, 디지털화…… 이쯤되면 예술인을 위한 긴급지원인지 4차산업혁명을 위한 지원사업인지 많이 헷갈린다.
사람 없는 예술 지원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사람 없는 예술 지원’이다. “예술은 지원하지만 예술인을 지원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한국 예술행정의 불문율이다. 한국의 예술 지원은 예술인이 아니라 예술과 관련된 ‘사업’ ‘프로젝트’ ‘프로그램’들을 지원한다. 아무리 긴급해도 예술인의 생계와 목숨에는 지원할 수 없다. 코로나19가 몰아쳐와도 긴급지원을 받으려면 동네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가서 공연을 하고, 아무도 보지 않아도 온라인 콘텐츠로 전환해서 플랫폼에 올려야 한다. 아무리 ‘긴급’해도 그 과정을 다 경유해서 정산을 마무리해야 ‘지원’은 실행된다. 코로나 시대에 수많은 예술활동이 존재하지만 예술을 목격하기 힘든 이유다.
아무리 긴급해도, 예술인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어도 ‘공모-경쟁-선발-사업-평가-정산’을 거쳐야 예술은 성립된다. 긴급해서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긴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지원을 받는다. 이쯤되면 예술 스스로 예술을, 동료 예술인을 직접 찾아서 목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코로나19와 함께 본격화된 재난사회, 당신이 마지막 목격자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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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문화연구자, 문화운동가, 문화기획자가 불규칙적으로 융합된 삶을 살고자 한다.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 공유성북원탁회의 등에서 활동.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