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나는 2018년에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덕분에 나를 소설가로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따금씩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곤 했다.
   “왜 하필 거기에서……”
   악의는 없었고 그저 안타깝다는 투였다.
   “자음과모음은 좀…… 그런 곳 아닌가요.”
   그때마다 나는 뭐가 좀 그렇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 반응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대개 뭐 그렇죠, 하면서 웃고 말았다. 그래, 웃었지. 나도 다 알았으니까. 한때 자음과모음이 편집부 직원을 물류팀으로 부당 전보 보냈다든가, 이를 공식화하자 소송을 제기했다든가, 사재기를 했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작가들이 청탁을 거부하고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었다는 걸 나도 다 알았으니까. 알면서도 ‘그런 곳’에 투고했으니까. ‘그런 곳’에서 나의 첫 소설집을 내야 했으니까.

   나는 매번 웃었다.

*

   그런데 정말로 웃긴 것이……

   웃기지도 않은 일로 웃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왜 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나한테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저 웃고 말았을 뿐인 내가 한심하고 비겁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향해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자음과모음이 뭐 어때서요, 이제 안 그런다잖아요, 얼마 전에 혁신호도 냈다고요, 같은 항변을 할 의향은 전무했으니…… 번번이 나는 이것이 전생의 업보인가 하며 자조적인 체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연좌제 같은 걸 당하는 기분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죄의 대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왜?

   지긋지긋했다.

   그렇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건 또 얼마나 웃기는 일이 될까.
   다들 얼마나 비아냥거릴까.

   무서웠다.

*

   그러므로 올해 1월, 내가 자음과모음에 문제 제기한 글1)은 뭐랄까……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나 용단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날 자정 무렵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트위터에 접속했을 때였다. 타임라인에서 ‘제10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공모’의 선인세 계약 조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중 “저런 건 또 처음 보는 듯”이라는 글을 보고 나는 별생각 없이 ‘우는 짤’을 댓글로 남겼다. 그러자 5분 후 내 글에 “아…… 저긴 원래 저런가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나는 왠지 할말이 없어져서 트위터를 종료했다. 불을 끈 뒤 자리에 누웠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절로 눈이 떠졌다. 나는 검푸른 빛으로 물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내가 왜 깨어났는지를 알았다. 불을 켰고 노트북 앞에 앉아 ‘원래 저런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에 글이 막힘없이 흘러나와서…… 솔직히 말해 좀 즐거웠다.

*

   글을 게시하고 이튿날 아침, 나는 거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한다고 천장이 무너지지는 않는구나.
   그런 생각에 조금 웃었던 것 같다.

*

   며칠 후 문제 제기한 내용이 받아들여지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2)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내게는 아직 자음과모음에서 내야 할 책 작업이 남아 있는데…… 괜찮겠지? 사람들이 나를 ‘투사’ 같은 인물로 생각하면 어쩌지. 같이 일하기에 까다롭거나 피곤할 것 같은 스타일로 오해하면 어쩌지. 나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정말 어쩌지.

   뭘 어째.

   책이야 못 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사로 여기든 말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실은 내가 까다롭고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박선우

소설을 쓰고 책을 만듭니다. 그 탓인지 건강이 나빠져서 보약을 먹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정신노동이자 육체노동입니다. 여러분도 건강하세요.

2020/03/31
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