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비톨트 곰브로비치, 최성은 옮김, 민음사, 2015)



   작년에 이르러 나는 곰브로비치를 내 마음의 일등으로 임명하고 말았다. 『코스모스』는 인물의 편집증적 망상에 의해 입자 단위의 풍요로운 세부들로 쪼개진 세계가 가능한 모든 무관한 것들, 사소한 사물들은 물론 미끄덩한 구강적 소리들, 절단된 신체 편린들, 우연히 발견된 자의적인 징표들과 끊임없이 결합하게 되는 야단법석의 카오스를 다룬다. 곰브로비치에게 세계의 법칙이나 질서는 근본적으로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것, 배후의 진실을 은닉한 채로 떠돌며 흩어지고 증식하는 환유적 기호들에 불과하다. 인물은 어떤 섬망이나 발작의 순간처럼 해상도가 높아진 이미지와 기호들을 가로지르며 배치하고 수집하며 그로 말미암아 어떤 총체적 진실을 복원하기 위한 유치하고 맹목적인 탐정 놀이를 수행한다. 그 결과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어떤 합리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물 자신조차 이러한 난폭한 운동성에 포함된 작은 일부로서, 끝없이 나열되며 복수화되는 닮은꼴들의 유희적 작용 안으로 휩쓸리거나 그 작용들의 지속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진실이 위조되거나 해체되는 상황과 더불어 인물은 그 희극적 무의미를 유통시키는 교량이자 동인으로서 세계를 재구성한다. 물론 문학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의미나 무의미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를 진동시키는 구체적인 방식들일 것이다.
   곰브로비치의 글쓰기는 최상의 가속 장치, 아메바 상태로 퇴행한 기호들이 글쓰기의 궤적에 의해 명랑하고 파괴적이며 수다스러운 변신의 과정을 끈질기게 반죽하는 어둡고 점액질적인 에너지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무질서하며 과잉 디테일화된 기호들에 접속하고 그것들 사이에 비뚤어진 선분을 긋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 곰브로비치의 글쓰기는 정상성과 비정상성, 성숙과 미성숙, 전체와 세부, 가치와 무가치 같은 기존의 상징적이고 봉건적인 체계들을 완전히 평탄화하며, 이때 글쓰기는 해산된 세계 속을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현란하고 절박하며 일회적인 도형적 낙서들을 무한히 생산하는 환상적인 통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는 영도의 글쓰기나 무(無)를 향한 종교적 추구가 아니며 그보다 더 직접적인 형태로 광소와 그로테스크한 농담, 어수선한 표면의 변이로 가득한 매혹적인 키메라의 움직임을 산출한다. 들썩임, 흐름과 리듬, 그러나 어떤 선행하는 동일성이나 초월적 원리도 가지지 않은, 그렇기에 다른 가짜 동일성들과 함께 세부 차원의 가변적인 결합과 충돌의 가능성을 덧붙일 수 있는 뒤집힌 세계의 물구나무 놀이. 키메라의 피부에 새겨진 봉합 지점들은 분열하는 가운데 일종의 착란적인 지형들로, 관능적인 무늬들로, 깊이 없는 돌연변이 음화들로 스스로를 찢고 복제하고 갈아입으며 현기증에 가까운 분자적 다이내믹을 구현한다.


   『자동 피아노』(천희란, 창비, 2019)



   작년 말엽에 천희란 소설가를 만나 『자동 피아노』 사인본을 받았다. 그날과 다음 날 새벽에 전부 읽었다. 모든 물리 법칙이 어그러진 진공의 공간, 어슴푸레한 거울 속에서 울리는 피아노의 선율은 소설의 문법이나 조건들보다 먼저 지금 당면한 피아노를 누르고 있는 어떤 비인칭적인 그림자, 글을 쓰는 작가의 동거인이긴 하지만 작가 자신은 아닌 어떤 희박한 그림자들의 상태를 세심하게 조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그, 두려움이나 긴장, 혼란과 분열, 죽음과의 막막한 대면을 반복하는 이 움직이는 주법들, 손가락의 망설임, 쓰기의 불안, 그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환상의 얼개들. 내 생각에 이 소설에는 어떤 인물도 출현하지 않는다. 죽음과의 참혹하고 절망적인 관계와 그 헝클어진 역설을 독실하게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강하게 표명하고 있는 존재 미만의 윤곽들이 등장할 뿐이다. 평소라면 거품처럼 휘발되거나 인식 바깥, 소설 바깥으로 밀려났을 이 미미하고 추상적인 윤곽들은 『자동 피아노』의 글쓰기 속에서 민감한 형태로 감지되고, 어떤 실재로서 부상해 서걱거리는, 고통스러운 수사적 흔적을 남긴다.
   그러므로 나는 『자동 피아노』 아래를 관류하는 글쓰기의 진폭을, 세차게 두들기는 건반과 그 가운데 정지한 채로 깜빡이는 커서, 한숨과 고독과 침묵의 질식할 것만 같은 휴지부를 느낀다. 백색의 부재 속에서 그곳을 유영한 손짓들이 글쓰기라면 『자동 피아노』는 그 손, 쓰는 자와 쓰여지는 그림자, 건반을 두드리고 헤엄을 치는 자의 손이 수행하는 일의 위태로움을 다양한 반주를 오가며 전개한다. 글쓰기의 중심에는 쓰기의 공백인 죽음이 자리하며 글쓰기는 죽음 주위를 무모하게 회전한다. 어떤 안전장치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그저 인간의 압도적인 불가능성인 죽음을 응시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 그 궤적의 격통을 그대로 옮겨 적는 일에 몰두하려는 원초적이고 소진되지 않는 집념들. 『자동 피아노』의 글쓰기는 글쓰기 고유의 성실성을 통해 문학이 되며, 글쓰기적 의지가 오직 쓰기 자신에 의지해 죽음을 지연시키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그 내용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고, 어떤 글쓰기는 팽배한 죽음에 관해 언급할 때조차 끊임없이 살아남는 강인한 힘이라는 사실을.


   『저항의 멜랑콜리』(크리스너호르카이 라슬로, 구소영 옮김, 알마, 2019)



   작년에 새로 읽었던 소설 중에 가장 전율적이었던 것은 이 책이었던 듯하다. 문학에 전율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건 매우 뻘쭘하지만 가끔 이렇게 뉴런이 불타고 정신이 공황에 빠질 때마다 나는 문학이 엄청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저항의 멜랑콜리』는 추위와 얼음에 점령된 한 마을을 향해 한 서커스단이 커다란 고래를 몰고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마치 바통을 터치하듯 다양한 인물들을 교체하면서 전진하는 이 소설의 유장하고 금욕적이며 복잡한 문체는 내용 차원에서 전개되는 우습고 부조리한 정황들과 더불어 소설의 공간인 마을 전체로 음산한 광기를 운반하는 통로이자 신경망처럼 기능한다. 소설의 전 영역으로 전염되고 증식하는 이 사악하고 냉담한, 일관된 광기는 이후 결말 부분에서 이 모든 궤멸적 범람이 물질적 미립자들로 용해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망설이지 않는다. 문장 전부는 충만하고 황홀한 관념과 디테일의 관능적인 리듬으로 조직된다. 마치 내 머리를 갈아엎을 것처럼 침입하는 폐색 짙은 환상, 형이상학적 몽상, 끔찍한 욕망과 잔혹한 이미지의 잔해들은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함구할 수밖에 없이 이 노골적인 스펙터클을 따라가게 만든다.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으면 내려서 집에 가지 않고 이 저주받은 소설 때문에 심야 카페로 들어가고야 만다. 고래를 관람하기 위해 싸늘한 마을에 도열한 군중들의 얼어붙은 부동성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소설은 단 하루 동안 정지한 시간을 활성화하며 마을에 거주하는 모든 인물이 광기의 유통에 의해 열화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불안과 막연한 기다림으로, 예외적인 징후들을 노출하며 어슴푸레한 장막 속에 잠겨 있던 마을은 어느 순간 임계를 돌파해 종말의 중심을 향해 아연하게 진입한다. 종말에 관한 서술할 수 있는 모든 차원들, 아득한 경이로움과 세속적 난장판이 혼재된 풍경들을 체험하고 나면 이 소설이 내 앞에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은 에스테르와 벨루스커라는 두 인물의 견고한 내적 우주가 파열하는 순간을 마을의 종말에 중첩시킨다. 에스테르의 우주, 암실 속에서 비밀스럽고 내밀하고 수학적이며 조화로운 은유적 질서와 그를 받드는 벨루스커의 박애와 선량함, 고독과 경애를 통해 운영되는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는 격변하고 부서지는 가운데 허무의 가공할 소요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내 생각에 항상 최상의 소설은 허무를 회피하거나 일축하지 않고 제 역량을 전부 동원해 거기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정법』(오한기, 은행나무, 2019)



   이 소설을 작년 가을에 읽었는데 벌써 해가 뒤바뀌었다. 그동안 이 소설의 몇몇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 펼쳤다. 오한기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탁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잔혹하게 규율화된 소설 속 많은 공간은 『가정법』의 글쓰기 속에서 그 구조적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하는 방식으로 내파되어 일그러지며 그 자리에 새롭게 끼얹어진 천진하고 유아적인 무질서를 극대화하기 좋은 무대 장치로 변모한다. 『가정법』이 건네는 ‘럭키’는 현실보다 잽싸게 현실의 황폐한 수영장에서 낙원에 이르는 통로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실존의 한계를 추월하는 이 변신의 과잉 속에서 단일한 현실은 작고 가엾고 어리석으며 우스꽝스러운 수많은 우화 블록으로 대체되거나 쪼개진다. 이 귀엽고 징그러운 우화 블록들은 기발하고 미친 것 같은, 불안정한 충동과 환상의 개별 원칙들을 통해 운영된다. 현실을 관리하고 설계하는 권력들, 어쩌면 그 최저 단계의 그물망이나 모종판을 향해 『가정법』의 소용돌이들이 파종된다. 소용돌이 속에서 발아하는 것은 권력의 민낯을 폭로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자해하고 탈출하는 방식으로 다른 존재가 되려는 잠재적 신체들의 모습이다.
   『가정법』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철저한 무능감 속에 고립되어 있지만 또한 아주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낙천적으로 활약한다. 변신과 분열,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너덜거리는 신체 잔여들이 산출하는 서사적 농담, 속출하는 구역질과 괴상한 착란의 축제를 불사하면서 인물들은 말하고, 슬퍼하고, 애착하며, 증오하고, 사유하며 끝내는 질적으로 변화하는 일을 기꺼이 추구한다. 환상은 현실과 따로 독립되어 음울하게 고착되지 않고 현실과 대화하는 가운데 현실을 수정하고 유희하는 반작용의 순간들로 나아간다. 서로를 죽고 죽이며 원하고 함께 있기를 욕망하는 기이한 우정과 항의의 퍼포먼스가 결행되었다가 다시 쪼그라져 하수구 속으로 흘러간다. 자유롭고 무법적으로, 그러나 전혀 결연하거나 진지하고 느끼하지는 않게 자아와 신체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가정법』은 가장 왜소한 단위로 퇴화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는 가정법(들)의 세계, 그 미지의 다질성을 엿보도록 만든다. 간신히 나에 관해 말하는 일에 도달하기까지 이만큼의 소동이 필요한 것 같다. 이만큼의 파괴와 이만큼의 사랑이.


양선형

무작위 레일 계속 잇고 싶다.

2020/02/25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