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1회 관계, 우리 사이의 썸씽
OFF THE + 50매
글을 청탁받을 때 다뤄야 할 작품이 정해져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마침 관심이 있었던 작품을 다루게 되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애로사항이라 하면 언제나 매수는 한정돼 있고 할말은 많다는 것. 가령 50매는 결코 짧지 않고 아쉬운 대로 알차게 말할 수 있는 분량이다. 하나 강조점은 역시 ‘아쉬운 대로’. 작품의 좋은 점 말하자면 화수분처럼 쏟아져나올 테지만 매수 제한 때문에 남겨두었던 넘치는 말, 여기에서 해본다.
최근의 글
운 좋게도 그간 요청된 글감은 스스로에게도 유효한 것이 많았다. 최근 시 담론에서의 (불)가능성이라든지(나는 이에 대해 IMF 전후로 세대 감각이 달라졌을 수 있고 그것이 시의 ‘독해’ 문제와 연관될 수 있다고 적었다.), 젊은 작가의 최근 작품에 대한 평론이라든지(유독 ‘젊은’이 강조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젊은 작가의 작품 속 감수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려는가 하는 질문은 늘 흥미롭다.), 뭐든 상관없으니 소설 리뷰를 써달라든지(이런 지면은 정말로 소중하다. 덕분에 나는 여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펑펑 울며 읽었거나 좋다고 수차례 생각한 작품을 고르고 고른다.) 등등.
관계
그간의 글을 떠올려보니 나는 노동, 작품/사회의 구조, 상실 및 슬픔의 감수성과 위로의 태도 같은 것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관계’와 관련한 문제가 아닐까? 하나의 대상 자체보다도 그가 자신/타인/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내게는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소개한다. 매수 이상의 TMI, 관계에 대한 작품.
엄마
백수린의 다른 작품에 대해 글을 쓴 적은 있지만 『친애하고, 친애하는』(현대문학, 2019)은 아직이다. 원래 다룬 적 있는 책을 추천하려고 했지만 다루고 싶은 것을 추천해도 좋겠지 하고 금방 느슨해져본다. 이 소설은 엄마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했다. 엄마는 나의 약한 부분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렇다. 어렸을 때 나는 종종 엄마를 원망했고 조금 커서는 그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며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연민이 크다. 한때 세계의 전부였던 사람을 ‘정서적 의존의 대상’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보는 것은 그 관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자에게 상처를 남긴다. 자식과 관계 맺는 엄마가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 그녀를 이해해야하기 때문에. 어떤 관계 안에서 누군가를 개별적 존재로 보는 건 정말이지 어렵다. 소설 속 ‘나’는 유능한 학자인 엄마가 갑자기 ‘엄마’가 되어버려서 자기가 짐이 되지 않았을까 번민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일 수만은 없다. 그러면 자식인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신을 해석하려 한다. 자기를 의미화하는 이런 관계의 핵심에는 사랑이 있을 텐데, 이 사랑에 의구심이 든다면 존재는 흔들리고 만다. 엄마와의 관계를 재인식하는 것은 그런 위화감을 주기에 아주 적절하고, 치명적이다.
내 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파를 보다가 가끔씩, 나는 지구상의 이토록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충분히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_『친애하고, 친애하는』 부분
연인
내게는 연인이자 친구인 사람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연인과 친구는 구분되는 존재겠지만 여기에서는 가족 외에 심리적/정서적으로 의존할 수 있고 신뢰 관계에 놓여 있는 외부인을 묶어 ‘연인’이라고 말하겠다. 연인에 관한 책이라면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창비, 2018)이다. 이 책은 김금희론을 쓸 때 다룬 적이 있다. 그때 ‘이런 형태도 연애일까’ 하는 질문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긴가민가 싶은 관계. 그러나 각자의 내밀하고 여린 상처를 공유한 존재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어주는 것, 즉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이해하는 이 관계를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말할까. 살짝 고백하면 내가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경애가 E와 함께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가 몸을 구부려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그 집은 “170센티미터 정도 되던 E도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된다. 이 구절에서 나는 상세히 기술된 적도 없는 E를 아주 뜯어본 것만 같았다. 약 170센티미터의 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간다는 문장은 그의 육체성을 생생하게 불러일으켰다. 그가 눈앞에 있고 마치 만질 수도 있을 것 같이 느껴졌는데, 나는 이러한 만질 수 있음이 그 당시 경애가 가졌던 아주 소중한 사랑의 한 형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슬픔
최지인의 『나는 벽에 붙어 잤다』(민음사, 2017)는 각기 다른 두 글에서 다뤘다. 한번은 최지인 작품론, 한번은 노동시와 관련한 원고에서였다. 공교롭게도 나는 이 시집을 두 번 모두 ‘노동’과 관계된 것으로 썼다고 기억한다. 그런 키워드를 골라내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시가 너무 슬펐기 때문이었다. 슬픔과 노동이 무슨 관계이기에. 아마도 그건 시집의 많은 화자가 일을 하거나 출퇴근을 하다가 자기가 그 자체로 승인되지 못하는 느낌에,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듯한 느낌에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내가 아무도 아니어서 억울해”). 내가 이런 종류의 슬픔에 부쩍 약한 것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모든 삶의 관계 요소와 내가 단절되었다는 감각에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게는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친구가 있고 그녀에게 이 시집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일을 함에 있어 정작 일 아닌 것(가령 동료)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일과 후 생활의 문제를 포함하여. ‘그녀’ 대신 ‘나’라는 말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가 이 시집을 아직 사지 않았기를 바란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 책을 받았듯 그녀 또한 누군가로부터 이 시집을 받아 읽었을 때 더욱 솔직하게 슬퍼질 수 있을 테니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어떤 문장 앞에서 번번이 마음이 미어진다는 것인데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못했던 그 부분을 여기에 적는다.
…친구 집에 놀러 갔었는데, 그 집 카세트에서 만화영화 주제곡들이 흘러나오는 거야. (중략) 나는 카세트를 열어보았어. 카세트에는 ‘만화영화’라고 적힌 테이프가 들어 있었지. 나는 그걸 보고 집으로 뛰어갔어. (중략)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한 일은 카세트테이프에 ‘만화영화’라고 적은 거야. 그러곤 테이프를 재생했지. 신기하게도 카세트에선… _『나는 벽에 붙어 잤다』 부분
부러 인용에 작품의 페이지를 표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세 권의 책 중 어떤 것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이 문장들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어땠는지 내게 이야기를 건네준다면 기쁠 텐데.
선우은실
관계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는 나날이다. 뚜렷한 것은 몇 없고 불투명은 사방에 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 나의 믿는 구석이다. 최근에 아마도이자람밴드 신곡을 들었다. ‘바라는 것은 언제나 세상에 없는 것이다’(<하나비>)라는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2019/04/30
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