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요즘 연희문학창작촌에 거주하고 있다. 나라에서 작가에게 양질의 공간과 환경을 제공하여 글을 쓸 수 있도록,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이 좋은 곳에서 우두커니 앉아있고, 누워있고, 서 있고, 서성이며, 고민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이면지에 낙서를 하고 잠을 잔다. 하지만 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못한다). 게을러서 안 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노력은 하는데 도통 되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때 써야 하는데, 생각한다. 독서를 할 땐 나도 써야 하는데, 생각한다. 낙서를 할 때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써야 해, 라고 생각하고 잠을 잘 때도 자고 나면 꼭 써야지, 하고 생각한다. 쓰기가 아닌 쓰기에 대해 고민만 하는 상태가 어쩐지 미안하고 민망하다. 생활의 조건들에 둘러싸여 있을 땐 그것들만 사라진다면 나는 진짜 진짜 쓰기를 향해 달려갈 테야, 라고 다짐했는데 막상 그것들이 다 사라진 오직 쓰기만을 위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니 어쩐지 머쓱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독서실 책상에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계속 시동만 걸고 있고 마인드 컨트롤만 하고 약간의 배고픔을 생존이 달린 엄청난 배고픔으로 인지하며 컵라면에 물을 붓고 휴게실을 들락날락하는, 소득 없는 열정으로 시간만 축내는 열등생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정신은 우등생 못지않게 진지하고 심각하니 마냥 한심하다고만 할 순 없다. 하지만 쓸 수 있는 것도 있다. 이 상태. 쓰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상태. 쓰기가 어렵고 쓰기가 무섭고 어째서인지 쓰기가 고장난 것 같은 이 상태.

   1.

   영화 <패터슨> 다시 봤다. 좋았다. 처음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의 감동이었고, 다른 느낌으로 슬펐으며, 다른 느낌으로 낙담했다. 패터슨은 너무 아름다운 시인이다. 모두가 꿈꾸는 최상의 시인이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순수한 시심으로 쓰는 시. 누가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쓴 시. 시로 어떤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고 누군가를 보여주고 싶어하지도 않고 시를 묶어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조차 갖지 않는 그야말로 참시인이다. 속세를 떠난 시인이랄까. 원죄가 없는 시인랄까.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맑아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투명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벅차기도 하고 멋지기도 했는데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 한편으론 그런 게, 그런 삶이, 그런 상태가, 가능할까 싶은 뒤틀린 마음도 생겼다. 그렇게 완벽하게 시를 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멋있지만 나는 저렇게 될 수도 없고, 감동했으나 결과적으론 되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체념과 낙담이 먹구름처럼 마음을 어둡게 했다. 마치 성직자들을 바라볼 때의 마음 같다. 숭고하다. 대단하다. 그래서 존경스럽지만 내겐 없고 불가한 것이다. 내겐 집이 있고 속세가 있다. 돈이 필요하고 일정하게 힘과 용기를 주는 피드백이나 격려도 필요하다. 틈틈이 김수영의 산문도 읽었다. 김수영에 대해 몰랐던 점을 많이 알았다. 약간 놀라기도 했고 어떤 점에서는 실망하기도 했으나 마지막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좋음’을 느꼈다. 조금 더 내 입장에 서서 편을 들어주는 글 같았다.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글이었다. 솔직히 패터슨이 김수영보다 백배는 멋지고 아름답다. 그러나 패터슨의 모습에서 내가 따라 하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김수영이 쓴 글을 읽는 동안 묘하게 동질감을 느꼈다. 읽어가는 내내 씁쓸하고 때때로 우습고 조금은 울적했지만 마지막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이 있었다. 가령 「이 거룩한 속물들」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귄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깟짓 것, 그저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 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자식 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런 것만도 아닐걸…….


   매문은 죽음, 가난과 함께 김수영을 평생 근심케 한 세 가지 큰 문제 중 하나였다. 글을 쓰는 행위의 가장 큰 이유가 그저 돈을 벌고 명성을 쌓기 위함이라는 인식. 작가는 글을 쓴다. 그 대가로 정당한 돈을 받고 명성도 얻는다. 이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쓰는 자들은 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들을 나열해서 말이 되게 만들고 요구한 매수를 채워서 발표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글을 써서 어느 정도의 명성만 얻게 되면 아무 글이나 써도 돈을 받고 작가로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것은 작가에게 있어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을. 김수영은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작가로서의 자아를 잃고 그저 생활인으로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직업인의 정체성만 얻는 과정이라며 경계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목소리와 주장이 작가들과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도전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기이하게도 세월이 흘러 흘러 내게는 영향을 주고 도전이 됐다. 그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그가 날을 세우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가감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신뢰가 생겼고 때문에 그의 말은 믿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다른 이를 비판하는 것과 자신과 타인에게 같은 기준으로 둘 모두를 함께 비판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옳은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둘 중 후자의 목소리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은 안다.

   김수영의 산문 속에서 화자는 끊임없이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그게 내 마음을 건든다. 아무 말이나 내뱉고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꾸짖는 문장이 불편하면서 안쓰럽다. 보기에 따라 감정에 휘둘려 뜨거운 문장을 마구 휘갈겨 쓰는 것처럼 보인다. 휘갈겨 쓴다고? 아니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그의 진지함과 문학적 태도를 함부로 폄하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례하다. 그는 글에 대해 엄격하고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목표를 정해놓고 있다.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이상적인 기준을 정하고 작가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때문에 그는 매일이 괴롭고 아무리 애써도 성에 차지 않는 불행한 작가가 된다. 게으르다 느끼고 무책임하다 느끼며 함부로 막 쓴다는 자책으로 몸과 마음을 학대한다. 「글씨의 나열이오」란 글에서 그의 자책은 지나칠 정도여서 읽기가 괴로울 지경이다.


   며칠 전에「깨꽃」이라는 몇 해 전의 작품을 어디다 주려고 청서를 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오해가 내 오해로 변했소. 무슨 말이냐고? 이 글 중의 어디에서 시를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소. ‘의미’로서의 시가 없소. ‘의미’로서의 시가 안 되오. 그것은 그냥 글씨의 나열이오. 미안하오. 그 글씨의 나열에 대해서 5000원이나 받아서 미안하오.


   쓴 글이 글도 아닌 그저 글씨의 나열이라는 고통스러운 인식. 애써 쓴 시에서 전혀 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슬픈 고백. 그냥 아무 의미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글씨의 나열을 돈을 받고 쓰고 시로 발표하고 있다고 자책하는 작가의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걸까? 그것을 모른다고? 안다. 너무나 잘 알기에 미안하지만 웃음이 나올 정도다. 자책과 자학이라면 나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데 김수영의 글을 보고 있으면 나 정도면 괜찮구나 싶은 기이한 안심과 위로를 얻는다. 내 글이 고장 나 있다는 불안. 그동안 나은 것을 쓴 적이 없고 더 나은 것을 쓸 자신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복잡한 마음. 훌륭한 작가라면 이런 나약한 마음을 이겨내고 자신감 있게 쭉쭉 써나가야 하는 것 아닐까?

   2.

   하지만 나는 안다. 이제는 가까스로 알게 됐다. 비정상적인 불안과 자책 속에 시달리는 상태가 작가에겐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작가 줄리언 반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안에 책이 단 한 권뿐이면 어쩌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도 나와 비슷할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다음 소설은 쓰기가 더 어렵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고도의 불안 상태가 소설가의 정상적인 상태라는 건 확신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메모장에 비슷한 마음을 담은 문장을 남겼다.
   “소설이 형편이 없어서 절망적임. 이런 걸 어떻게 잔뜩 설레기까지 하면서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음.”
   작가는 오른손엔 나르시시즘의 거울을 왼손엔 부끄러움의 거울을 들고 번갈아 쳐다보는 존재다. 어떤 날은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새였다가 어떤 날엔 자괴감과 부끄러움으로 땅속까지 파고드는 두더지 같은 존재다. 밤에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마음으로 설레기까지 하며 글을 쓰다가도 한낮의 태양 속에서는 자기가 쓴 못난 글이 독자들에게 읽힐까봐 전전긍긍하며 땀 흘리는 존재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봤다. 좋은 것도 있고 그저 그랬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책들의 작가들은 어쨌든 썼다. 쓸 수 없는 마음과 쓸수록 어두워지는 마음에 대해서도 썼다. 쓸 수 없는 모든 이유를 이용해 썼고 심지어 쓸 수 없다는 말조차 글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읽었고 감동했고 아직도 읽을 것이 너무나 많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예전에는 작가는 빛나는 작품 한권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말 멋진 일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아니다. 계속 쓰는 작가가 멋지다. 좋은 글을 쓰고 싶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모든 작가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그게 힘들고 어렵다. 스스로 제어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곤경에 빠진다. 그동안 어떻게 썼는지 ‘그 글’은 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지 ‘저 글’은 왜 안 좋다고 하는지 작가 스스로 정확히 진단할 길이 없다. 때문에 두렵고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세상에 나온 모든 책들의 저자들은 결과적으론 썼다. 지금의 나는 쓰기를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감각’으로 쓰는 모든 작가를 존경한다. 쓰기를 멈추게 하는 마음을 이겨내고, 포기하려는 마음도 이겨내고, 지금 이 순간은 시시하다는 무력감도 이겨내고, 지금 이 감각은 낡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나약한 마음조차 이겨냈다는 증거이므로.

   『마지막 강의』에서 롤랑 바르트는 쓰기 불능에 빠진 작가들이 열등감과 자신 없음을 이겨내는 여러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플로베르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독자는 필요 없어. 아니, 출간도 하지 않을 거야.’라는 솔직하지 않은 자기방어적인 최면을 마음에 장착하고 글을 썼다. 그는 25살에 “나는 아무것도 출간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 삶의 화려한 시절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하나의 주장이자 서약이다.”라고 말했고 32살에는 “출간은 상당히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했으며 41살엔 “출간해야만 한다는 습관적 사고 때문이다. 나로서는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고 슬프지만 한편으로 귀여운 아우성이다. 루소도 비슷하다. “내가 만드는 것을 엿보는 것. 이 원고들을 걱정하는 것. 그것들을 가로채는 것. 그것들을 없애는 것. 그것들을 위조하는 것. 이 모두가 이제부터 나와는 무관하다. 나는 그것들을 가리지도 보여 주지도 않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내 글은 독자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나를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대로 쓸 테다,라는 식으로 글을 썼다. “어떤 책이이든지 이해된다는 것은 저자의 만족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일까?” 작가들의 저런 말들은 높은 자존감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약하고 두려운 마음의 증거다. 허세를 떠는 것 허영심으로 가득 찬 것도 사실은 약하고 작아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썼다는 것.

   3.

   작가는 본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문장을 본다. 아직 읽을 수는 없는 문장을, 배열되지 않아 혼돈 속에 뒤섞인 단어들을 본다. 문장이 지시하고 설명하려는 모종의 대상과 이미지 및 생각은 작가의 곁에 있다. 분명히 실존한다. 그러나 같은 모습으로 그려낼 수 없다. 같은 질감과 색감으로 옮기지 못한다. 옆에 있는데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홀로그램처럼 텅 빈 채 그러나 온전하게 서 있다. 그러나 쓰려 한다. 써야 한다. 일반화와 요약의 유혹에 빠진다. 정확하게 쓰지 못하더라도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비슷하다는 것은 거의 같다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정확하게 쓰는 것은 불가능한 꿈일지 몰라. 그러나 그럴 수 없다. 펜을 던지고 드러눕는다. 능력 없음을 비난하고 게으름을 탓하고 스스로 조롱하고 조소하며 낄낄거리기도 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잘 쓴 것이다. 그냥 함부로 쓰려고 했던 것보다 더 나은 쓰기다. 쓰지 않음으로 진짜 쓰기를 지켜낸 것이다. 그렇게 위로하기로 하자.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다. 잘 쓰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마음을 글쓰기를 위한 재료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마음을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 사용하는 것보다 윤리적이고 정당하다. 작가는 비윤리적인 것을 써내는 것이 차라리 윤리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 않음으로서의 정의는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땅에 묻어두고 손해를 예방하는 것은 이미 어떤 것도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가치가 없다. 어떤 창작의 에너지도 발생하지 않는다. 나쁜 에너지도 좋은 에너지도 욕하고 논쟁할 수 있는 담론으로서의 가치조차 발생하지 못하는 안전하고 편안한 작가들아. 쓰지 않고 쓰는 자로 살 수는 없다.

   아무 소득 없이 새벽을 보내고 아침 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 까맣던 창이 푸르게 물드는 장면까지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침대에 눕는다. 불을 꺼도 어두워지지 않는 짙푸른 방. 결과적으로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꼭 보내겠다고 약속한 글도 보내지 못했고 오늘은 반드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지 다짐했던 소설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지웠던 문장이 많다. 썼다면 분명 망했거나 상했을 문장들을 썼다가 지웠다. 지운 문장도 문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 못한 말도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허공에 그린 그림을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속으로 따라 부른 노래를 노래라고 할 수 있나? 자야지. 이제 그만 자야지.

   쓰기에 대한 쓰기를 했더니 이상하게 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더는 창작의 공간에 머무는 것을 미안해하지 않고 민망해하지도 않고 쓰면서 잠도 잘 자고 건강해졌으면. 중얼거리며, 중얼중얼 이 글을 쓴다.


정용준

소설을 썼고 앞으로도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방법을 고민하는 순간 방법을 잃어버리는 모든 일처럼 읽기와 쓰기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잃어버릴까 봐 땅속에 보물을 파묻는 똑똑이는 되지 말자, 라고 중얼거리는 요즘입니다.

2019/03/26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