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7.30 교육개혁을 주도하면서 ‘졸업 정원제’와 ‘과외 금지 조치’를 실행에 옮긴다. 졸업정원제는 입학 시 졸업정원보다 대학은 30%, 전문대학은 15%를 더 선발하되, 재학 기간 중 정원 외의 학생을 탈락시키는 제도로서, 사실상 대학 교육이 엘리트 교육 단계에서 대중 교육 단계로 이동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중반에 걸쳐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55년 이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이 시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의 문을 두드렸고, 1974년에 실시된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고등학교 졸업자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교육 소비자의 수요뿐만 아니라 대졸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 역시 대폭 증가했다. 1973년부터 추진한 중화학 공업 육성책이 경제 규모의 확대와 산업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대학정원억제 정책을 펼치면서 대졸자의 공급 부족 현상을 부추겼다.
   실제로 1970년에 고교졸업자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은 25.7%였던 반면, 1978년에는 17.7%로 감소했다. 1970년에 고교 졸업자 총 144,790명 중 37,190명이 4년제 대학에 진학한 반면, 1978년에는 고교 졸업자가 400,421명으로 1970년에 비해 약 3배 가까이 증가했으나, 대학 입학자는 70,710명으로 2배에 못 미치게 증가했다. 경제 규모의 확대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대졸 인력의 사회적 배출은 결과적으로 대학 졸업장의 가치를 높이고 학력 간 임금 격차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는 다시 되먹임 되어 대학 입시 경쟁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를테면 1972년 대졸자 임금은 국졸의 3.3배, 중졸의 2.7배, 고졸의 1.8배였으나, 1976년에는 국졸의 4배, 중졸의 3.5배, 고졸의 2.3배로 확대되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는 대졸자의 실업률은 빠르게 감소한 반면, 고졸자의 실업률은 오히려 증가했다.
   정부의 대학정원억제 정책이 변화한 것은 1979년이었다. 이해 대학입학 정원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입학정원이 전년에 비해 약 39% 대폭 증가했는데, 그 증가 수치는 4년제 대학, 전문대, 교육대학을 포함해 총 49,450명이었다. 이런 변화의 정점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81년에 시행된 졸업정원제였다. 이 제도의 시행에 따라 약 7만여 명의 입학정원이 확대되었고, 1980년 61만 1천여 명에 불과하던 대학생 수는 1985년에는 136만 6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바야흐로 대학교육의 대중화 단계에 본격 진입한 것이었다.1)
   한편, 졸업정원제가 가져온 변화 중 하나는 교육 수준의 하향화였다. 졸업정원제를 통해 매년 대학생 수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수용할 시설 확충과 교수 확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교육의 질이 낮아지고 있다는 진단이 속속 제기되었다. 당시 경향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97개 대학의 전임교수(전임강사 포함)는 모두 15,666명으로 전체 대학생 550,934명과 비교할 때, 교수 1인당 35명의 학생을 맡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문교부 기준은 학생 18명당 최소 1명 이상의 교수로, 기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2)흥미로운 대목은 1987년에 막을 내린 졸업정원제가 학력 간 임금 격차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대졸자의 임금 프리미엄은 고졸자 대비 200%대를 유지했으나, 졸업정원제를 통해 대학에 입학했던 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임금 프리미엄은 고졸자 대비 150%대로 안정화되었다.3)
   한편, 7.30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된 과외 금지 조치는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의 생계 여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지방의 가난한 수재들은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해 가정교사를 해서 생활비를 마련하곤 했다. 하지만 과외 금지 조치 이후, 대학생들,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 조달에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실제로 1983년 초 문교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대학생 가운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려는 학생이 15만 명에 이르렀다. 이중 사정이 절박한 학생은 7만 명 선이고, 1982년에 부업을 획득한 사례는 1만 5천여 명에 머물렀다. 부업을 필요로 하는 대학생의 1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4)
   이들이 과외 교사의 대체재로 선택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업무는 주로 번역, 통역, 각종 사무와 업무 보조, 야간 경비, 숙직, 상품 배달, 조사업무, 외판 등이었다. 직종은 40여 종으로 다양화되긴 했지만, 보수 수준은 일당 5천 원 선으로 과외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당시 서울 대학가의 2인 1실 하숙비가 월 10만 원 선이었고 용돈까지 합치면 대학생의 생활비가 월평균 15-17만 원 선이었으니,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지방 출신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5)
   대학교육의 대중화 단계 진입을 상징하는 졸업 정원제 실시는 이전까지 팽배해 있던 ‘대졸자=엘리트’라는 공식의 유효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공시했고, 중상류층의 과열 입시 경쟁을 막기 위해 도입된 과외 전면금지 조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의 학습권과 생존권을 실질적으로 위협했다. 여기에 2차 오일쇼크 이후 지속된 80년대 초반의 경제 불황은 이들의 미래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그들은 1970년대의 대학생들과는 다른 조건에 놓여 있었다. 결국 이들 일부는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방향성을 불어넣는 사건이 바로 ‘80년 5월 광주’였다.

   2.
   확실히 일부 청년들이 당시 금기나 다름없던 정치적 급진주의로 급선회한 데에는 신군부의 정치적 폭압,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체제, 빈부 격차 등 한국 사회의 제3세계적 상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청년 급진주의자들은 지하서클을 통해 리영희와 박현채의 저술들을 탐독하면서 다양한 분파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으며, ‘독점강화 종속심화’의 테제를 통해 남한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리고 이 테제는 혁명의 가능성을 고양시켜주는 효과와 함께, 대학생 집단의 사회적 상향 이동이 불가능함을 예언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자의 효과가 파국론의 형식을 빌려 특정한 정치적 사건들을 임박한 혁명의 신호로 과잉 독해하거나 급속히 성장하던 노동자 계급의 특정 그룹을 혁명의 전위대로 내세우는 것으로 연결되었던 반면, 후자의 효과는 4.19세대를 비롯해 기성세대 대졸 중산층을 '속물적 기회주의'로 비판하거나 중산층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물론 여기에서 양자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관계였다. 그들에게 '존재 이전'이란, 자신이 편입될 수도 있는 대졸 중산층의 안락한 삶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정 계층에 대한 부정과 그 계층의 몰락 선언,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 차원에서나마 자신의 퇴로를 차단하고 투쟁의 배수진을 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학생 출신의 급진주의 운동가들이 현장에서 당면한 질문 중 하나는 ‘너는 되돌아갈 곳이 있잖니?’라는 것이었으니까.
   잠시 1984년에 발표된 이문열의 『영웅시대』로 시선을 옮겨보자. 천석지기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1915년생 이동영은 동경 유학 시절에 자신이 속한 양반 지주 계급의 몰락을 예감하며 자기 앞에 두 가지 존재 이전의 선택지가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이제 곧 자기 계급을 무덤에 파묻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변신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러시아 혁명이 가르쳐주었듯이 부르주아 계급의 강력한 적수인 프롤레타리아로 존재의 이전을 꾀하는 것이다. 근 미래의 주인공과 원 미래의 주인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이동영이 식민지 지식인답게 세기 초의 러시아를 본보기로 삼아 역사의 한 단계를 비약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어차피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할 바에야 "적으로 어렵게 변신하여 또 새로운 적에게 타도 당하"느니, 차라리 "적의 적이 되어 존재를 긍정 받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영에게 노동자 계급이란 일본 본토에는 존재했지만 해방 후 한반도에서는 목격한 바 없는,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상상력을 동원해 창작해내야만 하는 허구의 존재였다. 하지만 1980년대의 청년 급진주의자들의 사정은 달랐다. 실제로 그들은 ‘80년 5월 광주' 이후, 정치적 조직화의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노동자 계급을 발견해내려고 시도했고 실제로 나름 성공을 거뒀다. 물론 이때의 노동자 계급이란 이촌향도의 흐름을 타고 도시 빈민으로 편입한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었고, 수도권의 경공업 공업단지에서 일하는 농촌 출신 여성 노동자도 아니었다. 이문열이 자전소설 『변경』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이 두 유형의 노동자들은 "언뜻 보면 변화 많고 역동적인 삶을 산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선택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그저 내몰리고 팽개쳐진 삶"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나치게 '70년대적'이었던 것이다.
   '독점강화, 종속심화'의 테제로 완벽하게 작도된 역사 발전의 최전선에서 사회 변혁의 주력 계급으로 혁명적 역량을 발휘할 새로운 주체, 그 주체는 확실히 1970년대의 노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노동자들이어야만 했다. 확실히 청년 급진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한 것은 1985년 4월에 9일간의 파업 투쟁을 통해 16%대의 임금 인상안을 관철시킨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노동자들이었다. 구해근은 1985년의 대우자동차 파업이 "재벌기업에서 일어난, 그리고 남성 중시 중공업 부문에서 일어난 최초의 조직적인 파업"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 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남성 노동자들이 주요 행위자로서 등장할 것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노동운동이 더 이상 경공업 부문에 국한되지 않고 주로 대기업이 경영하던 중화학공업 부문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들어간 경인공업 지역의 노동운동에서 그들이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 역시 보여주었다."6)

   실제로 당시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노사 간 합의 타결 직후 행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영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위장 침투한 대학생 근로자들은 4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젊은 근로자 1백여 명에게 철저한 의식교육을 실시해 열렬한 동조자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7) 구해근이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 청년 급진주의자들이 대우자동차 파업 현장에서 발견했던 것은 투쟁을 통해 가시화된 새로운 주체 형태로서의 노동 계급이었다. 그들은 당시 20대 중후반을 통과하던 베이비붐 세대의 고졸 남성 숙련 노동자였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공장 근무 경력으로 인해 '기업의식'이라는 허구성에 잠식되어 있을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파업 투쟁의 경험을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으로 확장할 수 있는 인지적 잠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공고를 졸업한 신세대 노동자들은 ‘전위’로 불리던 청년 급진주의자들의 지도에 따라 ‘선진 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청년 급진주의자 그룹과 신세대 노동자 집단은 1980년대의 청년 세대이자 베이비붐 세대로서 또래 집단일 뿐만 아니라, 박정희 체제의 교육 시스템을 통해 '국민'으로 양성된 첫 세대였다는 점이다. 학력과 출신 계층은 달라도, 그리고 각각 다른 형태의 시험 절차를 거쳤지만, 양자 모두는 자신이 국민 중에서 선발된 '엘리트‘라는 의식만큼은 공유하고 있었다. 대우자동차 파업을 주도하며 김우중 회장과 마라톤협상을 벌였던 1957년생 대학생 출신 용접공 홍영표(현재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에 입소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당시 친구와 함께 탔던 울산행 기차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울산 현대중공업 직업훈련소 연수생 20명 정도를 뽑는데 400여 명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룬 그 모습. 당연히 우린 미역국이었고 이런 시도는 계속 이어져 마침내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가 82년 초였다. (…) 부평 달동네의 방 한 칸에 8명이 모여 칼잠을 자면서 용접공이 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시험 때면 공구를 깨끗이 닦아 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던 동료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7월 직업훈련원에 입소해 6개월간의 교육기간을 마친 후 83년 3월 대우자동차 차체부에 용접공으로 정식 입사했다." 8)

   1980년대 초반, 대학이 정부의 시책에 따라 대중 교육의 단계로 진입하던 시점에, 1970년대 초반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일환으로 체계화된 공업고등학교와 직업훈련소는 대학 미진학자를 위한 숙련 노동자의 양산기지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시험을 통해 꽤나 높은 경쟁률을 통과해야만 했기에, 입소 경쟁률이 높은 곳일수록 그곳의 예비 노동자는 나름의 엘리트 의식을 간직하고선 진로와 취업과 관련된 미래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70년대 이래 지속된 군사 정권의 숙련 노동자 양성 정책이 저임금의 한계선에 부딪치는 시점이다. 이 정책의 직접적인 수혜 대상이었던 베이비붐 세대의 앞세대 노동자들이 30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임금인상과 관련된 남성 숙련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왜 하필이면 1985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파업은 전태일 사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일어났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러니까 실제로 바로 이 시점에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자들은 결혼 후 가정을 꾸린 후 본격적으로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생애주기의 특정 시점, 그러니까 당시로써는 '내 집 마련'까지는 아직 감히 엄두를 낼 형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세 보증금과 함께 아이들의 '기저귓값'을 걱정해야만 하는 시점을 통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언론은 이 또래 노동자들의 생활고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도 했다. "갑자기 결혼하게 돼 1백만 원 빚을 졌다. 이자가 3할이나 되기 때문에 월급 받아서는 원금 상환도 못 하고 이자 막기에 급급하다.", "부모가 큰 병이 들었는데 빚으로 수술비를 마련했다.", "20년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들다", "기숙사가 없어 자취를 하는 바람에 아침밥을 제대로 못 먹는다." 등등.
   주지하다시피, 이 시점은 공교롭게도 ‘3저 호황’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그 낙수 효과가 사회 전 영역으로 확산되기에는 이른 시점, 고도성장을 통해 축적되기 시작한 물질적 부가 아직 상층부에 머물러 있던 시점이었다. 젊은 숙련 노동자들은 1인 생계 가구의 가장으로서 최저생계비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노조 민주화와 임금 인상 투쟁에서 나설 수 있었다면, 또래의 청년 급진주의자들은 임박한 파국의 전망을 앞세워 기층 민중 속으로 하강하면서 '노학 동맹'의 형식으로 사회 변혁을 꿈꿀 수 있었다. 군부 정권의 점진적인 쇠락과 맞물리며 불황과 호황이 교차하던 이 공백의 시기는 양자가 세대 내부의 정치적 동맹을 시도하는데 최적의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 급진주의자들의) 존재 이전 욕망과 (신세대 노동자들의) 사회적 상승 욕구가 무리 없이 하나의 정치적 대오로 정렬되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였다고 말이다.

   3.
   짧지만 약간은 무거운 이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느 83학번 출신 진보 경제학자의 글을 인용해보자. 그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과 87년 민주화 항쟁을 거쳐 도달한 1988년의 ‘어떤’ 풍경을 다분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끔은 근처 골목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을 곁들여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아동도서를 기획한다는 남자. 실은 그가 이미 몇 년 전에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라는 사실, 그리고 불과 몇 년 뒤면 그의 이름이 붙는 고유명사로 불릴 유명한 문학 논쟁의 주역이 될 거라는 사실을 나는 ‘작업실’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아동도서, 아니 소설가는 말했다. “박현채 선생이 늘 남한 자본주의는 곧 망한다, 망한다 하며 파국론적 전망을 말했단 말이야. 근데, 이제 그건 아닌 것 같아.”9)

   확실히 한 시대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 다른 시대는 “이제 그건 아닌 것 같”은, 그런 시대였다.

    (끝)


박해천

다만 ‘양치기 아저씨’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2018/12/25
13호

1
졸업정원제 시행 첫해의 혼돈상은 서울대 입시 결과에서 잘 드러났다. "1981학년도 입시를 시행한 결과, 사상 초유의 미달 사태가 발생하고 원서 접수 시 극심한 눈치작전이 벌어지는 등 새 입시 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이는 졸업 정원제로 모집 정원이 확대되고, 선시험-후지원 제도로 눈치작전이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총 모집 정원 6,530명에 11,848명이 지원하여 평균 1.8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는데, 이는 1979학년도 2.58 대 1, 1980학년도 2.8 대 1보다 훨씬 낮았다. 최종 합격자는 5,292명으로 1,238명이 미달되어 6개 대학만이 정원을 채웠고, 9개 대학은 졸업 정원에도 미달되었으며, 졸업 정원 5,020명을 겨우 272명 상회하는 형편이었다. 모집 정원 미달 사태로 예비고사 저득점자가 상당수 합격하였고, 200점 이하 합격자도 100여 명에 달하였다.", 『서울대학교 60년사』
2
“심각한 교수 부족현상”, 《경향신문》, 1983년 1월 28일.
3
위의 내용은 김두환, "한국고등교육 팽창의 한계: 대학교육성과의 양극화", 《사회사상과 문화》, 18권 3호(2015), 김종엽, "한국 사회의 교육 불평등", 《경제와 사회》, 59호(2003년, 9월)을 참조.
4
“아르바이트 구하기 힘들다”, 《조선일보》, 1983년 3월 17일.
5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시 서울대학교 생활연구소장 이관용 교수는 신문 지면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하기도 했다. "이 기회에 지방의 가난한 수재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대학 생활에 있어서 경제적 여건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대학에 입학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을 마치겠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지만 장학금은 등록금 정도를 겨우 해결해줄 뿐 숙식 문제나 책값, 생활비는 역시 무거운 부담으로 남습니다. 지방의 학생들이 가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를 해서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대학 학과 선택, 입학 후 경쟁도 고려”, 《동아일보》, 1983년 1월 7일.
6
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비평사, 2002, 168쪽.
7
김우중 회장과 본사 최낙동 경제부장 심야 인터뷰, 《경향신문》, 1985년 4월 25일.
8
홍영표, ‘용접공 이야기: 청춘, 그 어느 날’, 홍영표 국회의원 홈페이지(www. dreamyp.or.kr 2016년 12월 10일 마지막 검색)
9
류동민, 『기억의 몽타주』, 한겨레출판, 2013, 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