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11회 쓺
《쓺》에게 문학잡지는 ‘지우개 달린 연필’입니다.
분명한 사물이나 장소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문학잡지의 역할은 ‘쓰면서 지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잡지는 문학과 그것에 관한 것들을 꾸준하게 써나가는 데에 우선적으로 그 의의가 있으나, 그 의의는 그렇게 써나감으로써 곧 그 이전에 써온 것들을 뒤집고 지우고 ‘다시’ 쓰는 것에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잡지는 이전에 있었던 말과 글을 그대로 추수하는 게 아니라, 그 말과 글들을 배반하고 새롭게 하는 역할을 매호마다 고민해야 합니다. 잡지는 책이라는 물성이 지닌 특성, 즉 의미 있는 글들을 묶어 널리 읽히게 하고 보존하는 역할에도 충실해야 하는 동시에 발행되는 당시,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을 바탕으로 읽히는 책의 역할에도 무심할 수 없잖아요. 이런 이중적인 역할과 의의를 모두 고려했을 때 문학잡지는 결국 스스로를 지울 수 있으면서 그 힘으로 계속 써나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배반의 장미’ 같은 것도 떠오르네요.(웃음)
변하지 않는 문학성이란 무엇일까요?
형용모순과도 같은 설명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변하지 않는 문학성은 어쩌면 문학성에 대한 추구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동서고금에 통용되는 문학성이라는 게 있다면 문학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에 놓인 것과 같을 테니까요. 언제나 가장 적실한 언어를 찾고자 하는, 때문에 성공이 영원히 지연되는 모험이 문학이 아닐까요? 시인 김수영의 말을 빌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문학은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가 아닐까요? 변하지 않는 문학성이란 바로 그 영원한 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쓺》
창간년월: 2015년 9월
발행주기: 반연간
구성원: 김나영, 김대산, 김태환, 이인성, 조강석(이상 편집위원), 최하연(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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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실험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