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2017~2020)
가난한 내 얼굴을 보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인도는 떠나는 순간부터 그리워지는 나라였다. 그래서 계속 갈 수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라다크에 갔다. 나의 현재를 반성하고 오겠다고 페이스북에 썼더니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런 말 말라는 댓글이 달렸다. 열심히 사는 건 틀림없는데 이따금 자괴감에 빠진다고 했더니 누군가 술을 더 마시라고 조언했다. 고추장과 깻잎 대신 소주와 육포를 배낭에 담았다. 『인도방랑』을 다시 사고 현지인에게 줄 삼색 볼펜을 한 다스 챙겼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멨다.
신나게 여행을 준비해본 적이 없다. 가야 하니까 간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허세라고 하겠지.
“좋아서 가는 거잖아?”
“가야 해요.”
낯선 곳에 나를 떨어뜨려야, 여기서와는 다른 나를 만나야, 그곳에서의 내 눈빛과 표정, 걸음걸이를 기억해야 했다.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라다크는 내게 말을 걸지 않고 기이한 풍경만 보여주었다. 나는 단번에 수동적인 여행자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다정하게 말 붙이지 않은 채 눈에 보이는 것에 시선을 뺏겼다. 황갈색 돌산의 옆구리를 깎아 만든 꼬불꼬불한 길이라든지, 산 뒤에서 슬며시 나타나는 맑고 따가운 햇살, 비유가 사족이 되는 선명한 파란 하늘, 양 떼가 뀌어놓은 방귀 같고 집 밖을 떠도는 찬란한 솜뭉치 같은 구름은 전적으로 경이로웠다. 자연에 비추어본 나는 참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여행지에서도 여전했다. 무슨 이야기를 쓸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부끼리 동료끼리 친구끼리 왔다. 혼자가 좋은 사람은 추가 요금을 낸 뒤 밤의 고독을 즐겼다. 나는 함께 방을 쓸 룸메이트 없이는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행경비가 넉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룸메이트는 50대 후반의 독신 여성이었다.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어쨌든 관계는 중요하니까. 룸메이트는 가리는 음식이 많았고, 입이 짧았으며,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행 5일 차쯤 됐나. 편한 누군가와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 침대 위에 홀로 앉아 한국에서 가져간 팩소주를 깠다. 안주는 납작하게 포장된 고추참치와 물이었다. 바자르에서 돌아온 룸메이트는 내 모습을 보고 문 앞에서 잠시 주춤했다.
“술을 정말 좋아하나보네요.”
“네.”
“내가 술을 좀 했더라면 같이……”
“혼술도 꽤 즐거워요.”
홀짝홀짝.
라다크는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다. 파키스탄 북부와 티베트 국경까지 이어지는 산맥에는 해발 6천 미터 이상인 곳도 있다. 끔찍했던 고산증세. 고작 맥주 한 잔 마시고 취하거나, 룸메이트의 이름을 자꾸 까먹거나, 먹은 것도 없이 퉁퉁 붓거나,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눈알이 빠개질 것 같고, 손발이 저릿저릿, 안압 때문에 눈이 감겨 앞을 볼 수가 없었다. 하루는 앞 좌석에 앉은 이가 튼 이승환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천일 동안.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물어본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랬다. 다이아막스와 산소통에 의지한 채 도리 없이 나 자신과 싸웠다. 원래도 잘 웃지 않는 편이지만 근육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닷새간 오지를 떠돌다 라다크 수도 레에 발 디딘 어느 날. 나를 걱정하는 누군가가 대답 없는 안부를 묻지 않았을까? 본인의 일상을 조금씩 전해주며 나를 염려하고 있지 않을까? 와이파이가 연결되면 카톡이 주르르 쏟아지겠지? 멀리서도 멜랑꼴리한 관심을 갈구했다. 메시지 없음.
‘라다크는 배낭보다 캐리어’라는 안내 문구를 무시하고 배낭을 메고 갔었다. 나뿐이었다. 배낭을 등에 질 때마다 끙끙댔다. 무리에 껴들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 같았다. “히말라야 크림 사갈까?” 엄마에게 물었다. “꿀이나 사 오든지.” 귀국 전날 유기농 꿀을 두 병 샀고 시간에 쫓겨 배낭에 대충 넣었다. 집에 와보니 유리병이 모두 박살 나 배낭이 온통 꿀범벅이었다. 침낭도 옷도 책도 다 젖었다. 의도치 않게 ‘꿀 배낭’과 함께 돌아왔다. (하하하)
인도, 레 공항 ⓒ 이재은
필리핀은 처음이었다. 떠나고 돌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마음 가는대로 보내도 좋은 시간은 40일이었다. 해변과 스쿠버다이빙보다 트레킹이란 단어가 좋았다. 햇볕에 달궈진 모래밭보다 흙을 밟으며 땀 흘리는 게 나았다. 세부와 보라카이 같은 남쪽 휴양지가 아닌 북부의 한적한 마을이 나를 잡아끌었다. 자주 하늘을 보고, 무진장 걷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저렴하고 편안한 숙소에서 책 읽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언제나 쫓기듯 책을 읽었다. 읽고 있는 책에 만족하지 않고 읽어야 할 다른 책에 눈길을 주었다. 독서할 때도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성격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내 독서 습관에는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녹아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현명하고 사려 깊은 애독자와 경쟁하고 있었다. 보람 없는 경쟁은 고달프기만 했다.
『사랑의 역사』는 한국에서 끝까지 읽지 못하고 162페이지에서 멈췄다. 이야기의 세계보다 책을 읽고 있는 나와 내 주변에 더 신경 썼다. 쓰고 있는 소설과 쓰고 싶은 소설을 생각했다. 뇌가 아닌 눈으로 문장을 훑었다. 앞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현실은 늘 나를 괴롭혔다. 여행지에서 읽은 『사랑의 역사』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어쩌면 인생은 사랑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찾는 일로 채워지는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길에서 레모네이드를 팔 배짱과 지하철을 탈 차비 정도만 있으면 되겠지. 책 속의 인물들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진실과 말투를 심중에 새겼다.
“옛날에 넌 물고기였단다.” 그러면 아들이 물을 것이다. “물고기요?” “그래 맞아, 물고기.” “어떻게 알죠?” “나도 물고기였으니까.” “아빠도요?” “물론이지. 아주 오래전에.” “얼마나 오래전인데요?” “오래전에. 어쨌든 넌 물고기여서 수영하는 법을 알았지.” “내가요?” “물론이지. 넌 수영을 아주 잘했어. 챔피언이었고 물을 아주 좋아했어.” “왜요?” “왜라니 무슨 뜻이니?” “왜 내가 물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게 네 인생이었으니까!”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중에서
『숨그네』는 느리게 만나야 하는 책이었다. 책날개에 인쇄된 작가의 흑백사진과 문학 잡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받은 인상 탓이었다. 고요한 시간에 진지하게 따라가야 한다고, 제목과 소제목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아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행기와 대형버스, 지프니에 실려 수없이 이동했고, 어디서나 다시 펼쳐졌다. 피와 눈물을 담은 문장은 뜨거웠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덕분에 죽음을 등 뒤에 숨기고 삶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우울과 맥 빠진 짐승의 소리를 지울 수 있었다. 아마포 손수건과 경비원 카티, 빵 바꾸기 에피소드는 여전히 아리게 남아있다.
필리핀, 지프니 안에서의 독서 ⓒ 이재은
알람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 날은 수십 번 잠에서 깼다.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대개는 직장이었고, 지각은 용납되지 않았다. 아침에 눈 뜨지 않는 삶을 바랐다. 눈 떠서 시계를 먼저 찾지 않고 아무 때나 일어나서 잘 잤다고 말하고 싶었다. 날마다 다른 삶을 기대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랬다. 재미있는 일은 생기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아침은 점점 더 나의 적이 되었다.
살짝 실눈을 뜨면 푸르고 선명한 산이, 맑은 구름이 넘치는 하늘이 있었다. 창문을 연다. 살갗에 닿는 미풍이 부드럽다. 바람에 커튼이 날린다. 알람 소리도,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지붕 위에서 들리는 새소리, 오토바이 딸랑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의 아침 인사에 가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크게 쉰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둥글게 고개를 움직여본다. 관절을 하나하나 느끼면서 기지개를 켠다.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 하루를 다 산 기분이 들었다. 생애 처음, 나는 아침을 기다렸다.
“아,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새벽에 이 아침 공기를 마시려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아침 시간에 대한 예매권을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침 공기는 아무리 차가운 지하실에 넣어둔다 해도 정오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전에 벌써 병마개를 밀어젖히고 새벽의 여신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헨리 D. 소로우, 『월든』 중에서
필리핀, 바나우에의 아침 풍경 ⓒ 이재은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다면 일본에는 시코쿠 순례길이 있다.
시코쿠 순례 여행을 마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절룩거렸고, 씩씩댔고, 콸콸 눈물을 쏟았다. 힘들 때마다 한국에 있는 온순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내가 지고 온 배낭 무게에 눌려 시종 헉헉. 목적지가 있었지만 손닿는 거리는 아니었다. 당장은 먼 곳을 보지 않아야, 한두 발 앞선 걸음을 믿어야 끝까지 갈 수 있었다.
회복과 치유, 사색의 길로 불리는 시코쿠 순례는 12세기부터 이어져왔다. 가가와, 에히메, 고치, 도쿠시마 현을 잇는 1천2백 킬로미터의 장대한 길이다. 일본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고보대사 쿠카이(774~835)가 수행한 자리에 세워진 절은 모두 88개로 각 현에 맞춰 발심, 수행, 보리, 열반의 도량으로 불리며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시코쿠 순례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흰옷과 삿갓, 지팡이’를 갖춘다. 흰옷은 수의, 삿갓은 관 뚜껑, 지팡이는 묘비의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순례 중에 명을 다하면 죽은 자리에 매장했다. 수중에 돈이 있다면 묘비를 세웠지만 아니면 죽은 그대로 묘를 만들었다. 얼굴에 흙이 들어가지 않게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묘비를 대신해 지팡이를 꽂아주었다고 한다.
차나 자전거가 아닌 두 발로 걷는 도보 순례자를 위해 마을주민이 제공하는 숙박시설은 젠콘야도라고 불렀다. 기쿠야상이 베푸는 젠콘야도는 무료였지만 다음 날 주인집을 방문해 머묾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낫을 들고 꽃 사이에 삐죽 솟아있는 풀을 잘랐다. 공기는 맑고 햇살은 깨끗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열심히 낫을 베다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명색이 소설가가 왜 낯모를 일본인 정원을 가꾸고 있지? 순간 뾰로통해졌다. 아냐, 이거야말로 사건이고 이야기야. 시시각각 갈등이 없으면 글도, 유머도 없으니까. 찰나의 의기소침을 도리도리로 쓰윽 지웠다. 남자들은 폐지를 분리수거해 끈으로 묶은 뒤 구석에 쌓아놓고 마당에서 세차를 했다. 일을 마친 우리에게 기쿠야상은 음료수와 젤리를 건넸다.
어떤 여행자가 되고 싶었을까. 고생하는? 길게 하는? 싸게 하는?
가난한 마음 때문에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시코쿠 ⓒ 이재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고깃집에 갔다. 낙원 사장님은 우리가 시키지 않은 걸 자꾸 내왔다. 꼬치구이와 매실장아찌, 샐러드는 서비스였다. 한국인이 오면 반갑고, 그날은 장사도 잘된다고 했다. 그가 건넨 책에는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바늘방석 위에 앉아있는 일이었다, 탄력적인, 층계참, 밥벌이, 너그럽지는, 끙끙 앓기만, 공상에 잠겼다, 서글프고, 경이롭기까지, 수렵과 채취, 푸성귀만 먹고는, 굶기 놀이를 하자고, 겁이 났다, 설치고, 안절부절, 적막한, 무게중심, 적정한 거리, 태평하게, 지독한 가뭄, 숱하게 덧붙였다, 으스대는 모양새, 거리낌 없이, 무례함도 한몫했다, 정적을 깨트리고, 본연의 속도, 자선을 베풀었다, 제풀에 지쳐, 조마조마.
평소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귀찮을 때가 더 많았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산을 오르고 내릴 때는 요긴하게 쓰였으니까. 지팡이는 외부였다, 나의 내부가 아니라. 모든 길은 내 몸, 내 두 발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속을 내보이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일행이 있었지만 우리는 개별 여행자일 뿐이었다. 일행이 지팡이 같은 존재란 걸 받아들이자 심장이 얌전해졌다. 혼자 기대하고 상상하고 실망하는 일은 금물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요청하기로 했다.
흰옷은 배낭에, 삿갓은 무릎 위에 올려두면 되었다. 내가 타고 갈 저가 항공은 지팡이를 그냥 실어주지 않았다. 포장하거나 박스에 담아 수하물로 부쳐야 했다. 따로 마련된 패킹센터에 물어보니 랩 포장 가격이 지팡이 구입 가격과 비슷했다. 죽기 전에 또 시코쿠를 걷게 될까? 지팡이는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체크인 카운터로 돌아와 배낭만 싣겠다고 했다. 패킹센터 직원이 내 뒤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그가 항공사 직원을 따로 불렀다. 표정이 어두웠다. 항공사 직원은 일본인이 한 말을 한국어로 통역해주었다. “순례자의 지팡이에는 고보대사의 영혼이 깃들어 있대요. 신을 버리고 가는 건 말도 안 된대요. 진짜 놓고 갈 셈이냐고 묻네요.” 마음의 개입. “이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하는 거 처음 봐요.” 직원이 내게 덧붙였다.
나는 사이비 순례자, 속물 순례자였다. 돈 몇 푼 아끼자고 신을 버릴 생각을 하다니. 시코쿠를 돌 때의 간절함은 잊고 필요 유무와 경제적 손실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읽은 문장이 뒤늦게 생각났다. “고보대사는 일체 중생들을 위해 아직도 순례를 하고 있다. 순례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고보대사의 화신을 뵙게 된다.” 랩 포장을 한 뒤 지팡이를 가져가기로 했고, 일본인은 안심했다. 항공사 직원도 웃었다.
한국, 인천국제공항 ⓒ 이재은
내가 말없이 ‘어떤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은 소리 없이 반할지도 모른다. “부럽다.” “나도 여행 가고파.” 나는 그 사진을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말할 수 있지만 그 사진이 내 여행을 대변할 수는 없다. 여행의 한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모험과 도전, 자유를 품고 있지만 나는 여행을 환상이나 낭만과 연결 짓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떠날 뿐.
이재은
‘발리에서 한 달 살기’를 계획 중입니다. 돈을 모아야 합니다. 글을 쓸 거예요.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