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나는 영등포에서 관악으로 가는 버스에 앉아 창밖 너머 서울의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때는 겨울이고 김 서린 창은 뿌옇고 나는 방금 전 어딘글방에서 들은 피드백을 곱씹는 중이다. 여러 감정이 펼쳐진다. 오해받은 느낌 혹은 꿰뚫어보인 느낌. 칭찬받고 싶은 열망 혹은 무시하고 싶은 열망. 명백하게 탁월한 글을 쓰는 다른 참여자를 질투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 누가 사랑받는지 확연히 느껴지던 분위기와 그 사랑의 보호막 바깥에 머무는 존재라는 것에서 오던 소외감. 그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한 지겨움. 내 글에 대해 이토록 함부로 말하는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저렇게 예민하고 날카로운…… 뭘 어디까지 읽었는지 감도 안 오는 저 여자는 누구지?
  나는 방금 전 글방에서 혹독한 피드백을 들은 참이다. 그 말들을 들으며 수치심을 느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무엇보다 상처받았다. 내 글이 거짓말이라고? 실제로 겪었다면 이렇게 쓸 수 없는 거라고? 나는 그곳이 가진 갖은 단점을 찾아내 나를 보호하려드는 참이다. 글을 다시 쓰지 않겠다고까지 생각한다. 그것은 어딘글방을 운영했던 어딘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했다. ‘웬만하면 우아한 독자로 남아. 글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그의 말은 잔인하게 들렸고 모두 옳게 들렸다. 모두 옳게 들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늘 들은 피드백을 반영하여 다음주에 새로운 글을 써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책상 앞에서 게으르고 불성실하다. 무엇보다 오늘 들은 피드백을 반영하려면 지금의 나 자신을 탈피해야 한다. 그건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들은 피드백을 소화할 수 있을 때쯤 다시 글방에 나타났다. 그렇게 드문드문, 잊을 만하면, 혹은 화가 가라앉으면 다시 갔다. 중요한 것은 자주 결석했다는 사실보다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여러 감정과 싸우면서도 더 깊은 곳에서는 기뻐하는 내가 있다. 그렇다. 나는 기뻐하고 있다. 누군가 나를 가르쳐준다는 것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만났다는 것에. 창작을 하고 먹고 살려는 사람들과 닿아 있다는 것에. 글을 쓰고 그걸 보여주고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받는 황홀을 누리는 것에. 한계에 부딪히고 박살난 뒤 다시 나를 만드는 일에. 누군가 나를 듣고 그것에 반응한다는 것에. 무엇보다 글쓰기를 만났다는 것에. 나는 깊이 기뻐하고 있다.

나는 어딘글방이 너무 건강해서 싫었다. 그곳에서는 비극적인 상황에 잠겨 있기보다는 다른 시선으로 전환해보는 쪽이, 비장해지기보다 유머러스해지는 쪽이 독자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면에서나 삶을 운영하는 면에서나 낫다는 걸 배웠다. 무거움 대신 가벼움이, 과거의 기억을 곱씹는 대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쪽이 낫다는 걸 배웠다. 그건 어느 모로 보나 진실이었다.
  문제는……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나는 우울 속에 머물고 싶었고 과거의 기억을 놓아버릴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쾌적한 삶을 위해 내 삶을 위협하는 위험하고 망가진 사람들을 멀리 두고 싶기는커녕 그들에게 강력하게 이끌렸다. 공허감에 어쩔 줄 몰라 자해에 가까운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 세상이 일부 찢어져 늘 의아한 상태로 사는 사람들, 경계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 어쨌든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했으니까. 그것을 ‘트라우마 본딩’이라 부를지라도……
  한동안 그런 공동체에 머물렀다. 수업보다는 뒤풀이에 관심이 있고 선생과 학생 사이에 선이 없고 매끄러운 말과 글로 윤리적 경계를 넘고 가족이 없어 사무쳐 있고 교묘한 성폭력과 가스라이팅이 반복되는 수렁 같은 공동체에. 그곳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곳이었다. 당연하지만 얼마 못 가 그 공동체는 분해됐고 선생이었던 사람은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 때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나는 나와 같은 작가 ‘지망생’ 또래 여자들 여럿이 그에 관해 증언하는 것을 온라인으로 지켜보았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더 있었을까? 글쓰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들이.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곳에서 겪은 일을 나는 글로 썼다. 그리고 그 글을 어딘글방에 들고 갔다. 어딘글방에서 피드백을 듣는 순간 받았던 그토록 쾌적하고 명료하고 올바른 기운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좋은 피드백을 듣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건 더이상 상관없었다. 내가 겪은 일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 그걸 보여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때 나를 위로하거나 내 편을 들어주는 대신 한 편의 글로 피드백을 돌려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오년 전, 내가 직접 운영하는 글방을 처음으로 열었다. 초식 동물이지만 엄청나게 포악한 하마처럼 무슨 피드백을 들어도 꿋꿋이 쓰자는 의미에서 하마글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운영해보니 글방은 정서적 에너지를 대단히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 덕에 나는 강제로 건강해졌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충분한 육체적 힘이 있어야만 사람들에게 날카롭지 않은 피드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을 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늘 절절맬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좋았다. 선택받는 입장이라 건방져지지 않는다는 게 좋았다.
  순전히 글을 쓰는 하미나를 지원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오는 하미나가 시작한 일이었지만 글방을 직접 운영한 일은 여러 면에서 나를 치유했다. 첫째로 규칙적인 수입원이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그랬고, 둘째로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대신 해준다는 점에서 그랬다. 글을 쓰세요. 자신을 믿으세요. 정말 잘하고 계세요. 타인 안의 잠재력을 미리 발견하고 먼저 믿어줄 때마다 나를 향한 믿음이 자라났다. 셋째로는 누군가 나의 말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랬다.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살면서 누군가가 나의 말을 그렇게 오래 주의깊게 들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글방을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 있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선생님에게는 더욱 경악하게 되었고 어떤 선생님에게는 더욱 존경심이 들었다. 나는 수업에서 얼마나 빠르게 권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지를 감지하고 그것에 매번 놀랐다. 말 몇 마디로 경쟁심을 유발하거나 인정욕구를 자극하는 일은 매우 손쉬웠고 무엇보다 그건 선생의 입장에 유리했다.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 몇 배는 어려웠다. 하지만 글방이란 마땅히 그런 공간이어야 한다.
  글쓰기 합평 수업이라는 것은 구조상 자기 글을 가지고 나타난 사람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인정받는 일에 신기할 정도로 목말라했다. 나는 운영진의 입장에서 이 구조가 선명히 보인다는 것에 놀랐고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선생이 그토록 많았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그들은 두렵지도 않았을까?
  한편 어딘을 생각하며 많은 순간을 버텨냈다. 이렇게 매번 마음 쓰는 일이었구나. 이렇게 흔들리며 하는 거였구나.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하는 일이었구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돌봄을 받는 줄도 모르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꼭 내 모습 같았다.
  내가 얼마나 자주 틀린 판단을 내리는지, 얼마나 많이 오해하는지를 확인할 때마다 내가 받았던 오해에도 대수로워졌다. 선생님들도 틀리는구나. 꽤 자주.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가 싫어지고 좋아지는구나. 인간이니까. 그것은 강력한 교훈이었다.

작년, 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 행사 사전 모임에서 한국의 글방 문화를 소개했다. 콘퍼런스의 주제가 ‘여성적 지식의 전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큰 주제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우니 한국에서 작가가 되고 살아남는 한 가지 방식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발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는 등단이라고 부르는 아주 독특한 문학계 데뷔 시스템이 있습니다. 전문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공식적인 진입점 역할을 하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비슷한 것을 찾기 어려운, 한국 문단에 특정한 일종의 등용문 같은 것입니다. ‘등단’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문학계에 입문하다’ 또는 ‘무대에 오르다’를 의미합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시작되어 백 년 이상 유지된 문화입니다. 등단을 하기 위해서는 주요 신문사가 주최하는 문학 공모전에서 수상하거나 권위 있는 문예지에 작품이 선정되거나 게재되어야 합니다.
  저는 등단을 통해 작가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습니다. 첫째로 오랫동안 제도권 대학 내에 있었기 때문에 창작 분야에서만큼은 무언가를 통과하여 자격을 갖추는 일을 피하고 싶었고, 둘째로 제가 최초로 만난 등단 작가들의 세계가 성폭력의 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위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공간이었고 가스라이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2016~2018년 한국 문학계에도 미투 운동이 한차례 크게 지나갔습니다(최영미 시인에 관한 기사를 크게 보여주었다).
  등단 외에 작가가 되는 다른 방법은, 저와 비슷한 사람들 그리고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가진 선생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한국 영등포구의 하자센터에서 저의 첫 글쓰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하자센터는 1999년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먹고 살자’라는 모토로 설립된 곳으로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청소년을 위한 대안 교육을 제공해온 청소년 시설입니다. 하자센터의 설립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조한혜정 선생님으로, 그는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자 하자센터의 첫 센터장이었습니다. 하자센터는 조한혜정 선생님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개념인 ‘작은 사회적 자궁, 마을’ 개념을 따라 대안적 사회 모델을 위한 실험적 공간을 실천적으로 구현한 곳 중 하나였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어딘이라고 부르는 시인이자 작가이며 교육자인 김현아 선생님과 예술가로 살아남고자 하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글방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우리는 글쓰기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에 대한 페미니즘적, 탈식민적 관점도 배웠습니다. 그곳은 창작자로서 현실적인 방식으로 삶을 구축하고 동료와 함께 성장하고 생존하는 방법을 치열하게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글방은 진정한 여성적 지식 전수의 공간이었고, 시스템이 아니라 공동체를 운영하는 사람의 돌봄에 의해 한땀 한땀 만들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약 십 년 후, 글방에서 함께 공부한 많은 친구가 저를 포함해 등단 제도를 거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책을 출판하고 한국 문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만의 글방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고 다음 세대의 작가를 양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등단 없는 데뷔가 가능했던 것은 소셜 미디어의 성장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주요 제도권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작품을 홍보하고 독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딘글방에서 글쓰기뿐만 아니라 언제나 현실적인 문제인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훈련하면서 창작자로 살아남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하고 실험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은 명확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일어났습니다.
  어딘글방과 하자센터가 어떤 맥락에 위치한 것인지, 제가 어떤 수혜를 받고 있었는지를 저는 아주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글방에서의 그 자잘하고도 신경질적인 경쟁과 협동이 우리를 얼마나 집단적으로 성장시켰는지 역시 아주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글방을 이야기하며 싫었던 걸 싫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기쁘다. 눈먼 사랑의 마음이나 조바심 내며 아첨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기쁘다. 어쨌든 나는 글 앞에 서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글쓰기 공동체를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글쓰기 공동체는 나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나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충분히 수용되지 못할 수도,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다. 소외감을 느끼고 배제되었다는 감각에 외로워하며 자진해서 스스로를 추방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빨리 추방당할수록 나에게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찾게 될 기회도 많아진다. 혹은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기분 좋은 경험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우리는 몇 차례 부정적인 경험을 겪어야 할 때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창작자로서의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다. 당신에게 벌어진 불운이 당신의 가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일이다. 창작이 주는 순수한 기쁨을 지키며 다시 자리에 앉아 쓰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관계없이 내게 다양한 감정을 가르쳐준 누군가가 내 곁에 존재해주었다는 것, 그 지리멸렬한 과정을 동참해준 상대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하미나

작가. 서울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저술, 번역, 퍼포먼스, 커뮤니티 빌딩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쓴 책으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아무튼, 잠수』 가 있다.

2025/03/19
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