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블루재킷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첫 무인 우주선이 떠난 지 삼십 년 만에 마스 파이오니어(Mars Pioneer)호가 지구를 박차고 올랐다. 우주선에는 황량한 붉은 행성 위에 희망을 심으려는 첫 이주민 수백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화성이 가까워지자,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저곳 어디에 내가 정착하게 될까?”
열세 살, 유노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기대 이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삼십 억 년 전, 지구처럼 푸른 대기를 품고 물길이 흐르던 생명력 넘치던 행성. 그러나 지금은 태양풍에 대기를 잃고 메마른 대지 곳곳에 얼음만 남은 황량함을 간직한 행성. 황톳빛 화성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속 기대는 조금씩 걱정으로 바뀌어갔다. 버려진 인공위성과 폐쇄된 낡은 우주 정거장들 사이를 지나야 하는 지구 외곽의 우주는 그저 잠시 경계하면 넘길 수 있는 위험이었지만, 낯선 터전에서 생존해가야 하는 문제는 달랐다.
“아직도 화성에서 살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유노의 말에 옆에 있던 테이는 1212조각을 가진 12면체 페타밍크스 큐브를 십 분도 안 되어 맞추고는 대꾸했다.
“이제 믿어도 돼.”
테이는 화성 이주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금액을 후원한 기업 프런티어 총수의 손주였다. 십삼 년 전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태어났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지만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하나도 없었다. 질병 유전자를 제거해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었고 전염병에서조차 자유로운 아이였다.
“넌 화성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렵지 않아?”
“응. 난 화성에서의 삶이 기대돼.”
유노는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 테이를 보며, 그가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우수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긴장과 불안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테이는 오로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우주선 창밖의 거대한 화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봐. 어젯밤부터 개척자 카드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어.”
테이는 큐브를 내려놓고 손목에 찬 워치를 켰다. 그러고는 곧 유노에게 화성 홀로그램을 보여주었다. 화성 어딘가에서 붉은 점 하나가 깜빡였다. 무인 비행선이 화성 곳곳에 무작위로 뿌려놓은 이주자들의 개척자 카드가 하나둘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위치가 어디야?”
“화성연합본부 돔에서 동쪽에 있어.”
유노는 긴장한 얼굴로 붉은 점의 위치를 살폈다.
“내 개척자 카드도 그곳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겠다.”
개척자 카드는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개별 영역권을 부여해 본인과 가족 외에는 그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거나 침범할 수 없도록 보장하는 카드였다. 이 모든 규정은 화성연합본부에 의해 확정되었다.
“서박사님은 화성에 안 오시는 거야?”
“응. 할아버지는 안 오실 거야.”
유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다. 화성 이주 프로젝트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우신 분인데. ……이번에 함께하셨어야 했어.”
사람들이 지구를 떠나려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구의 온도는 계속 오르고, 먼지 폭풍은 끊이지 않았으며, 식량 자원은 점차 고갈되고 있었다. 땅은 화학제품으로, 바다는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되었고, 한쪽 대륙이 폭우에 시달리는 동안 다른 대륙은 몇 달씩 화마에 휩싸였다. 미세먼지와 이산화탄소가 하늘을 뒤덮자 태양열 발전이 어려워 석탄 발전소가 다시 가동되었고,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임무를 마치고 방치된 인공위성은 우주 쓰레기와 충돌한 뒤 지구로 추락했고,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유성처럼 불타올랐다. 우주 파편과 충돌로 고장 난 인공위성들은 GPS 신호를 마비시켰고, 비행기의 항법 시스템에 장애가 발생해 이착륙이 혼란에 빠졌다. 도시의 신호등 제어망도 멈추며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와 절망은 더해졌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위태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화성 이주 프로젝트에 공헌한 과학자들과 막대한 자금을 후원한 전 세계 후원자들은 결국 개척자 카드를 받은 뒤 첫번째 이주선에 탈 수 있었다.
유노가 화성 이주선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AI 로봇 개발자인 그의 할아버지, 서인조 박사의 공로 덕분이었다. 서박사는 화성 개척에 사용된 AI 로봇 개발에 앞장섰고, 많은 로봇을 화성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지구에 남길 택했고 손자인 유노만 화성 이주선에 태워 보냈다.
화성에 가까워지자 유노의 워치에서도 개척자 카드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또다른 신호가 포착된 것이다.
“네 개척자 카드는 아직 신호 없어?”
테이가 유노의 손목을 힐끔 보며 물었다.
“신호?”
유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두 개의 개척자 카드가 신호를 보내온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영역권이 부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말이야, 개척자 카드 신호가 여러 개 잡힐 수도 있을까?”
유노의 물음에 테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지.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개척자 카드에는 유전 정보가 기록되어 있으니까 진짜와 가짜를 금방 구분할 수 있을 거야.”
테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짜……”
테이는 가능성이 크지 않으면 늘 아니라고 단정 짓는 아이였다. 화성 이주 담당자 역시 테이과 같은 말을 했다. 두 개의 신호 중 하나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으며, 신호가 계속된다면 직접 가서 개척자 카드를 확인해야 진짜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혹시 둘 다 진짜라면?”
만약, 실수로 같은 DNA 정보를 가진 개척자 카드 두 개가 뿌려진 거라면 어떤 것을 진짜라고 판단해야 할까? 둘 중에 원하는 땅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유노의 모습에 테이는 손을 흔들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화성 AI 로봇들이 진행한 작업이야. 그들이 실수할 리 없잖아.”
“맞아. 그렇기는 해.”
유노는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람들이 AI 로봇들을 늑대라고 부르더라.”
“늑대? 왜?”
“불굴의 생명력을 가졌다고 그렇게 부른대.”
유노의 말에 테이가 피식 웃었다.
“십 년 전부터 화성 AI 로봇들의 능력이 급격히 증폭했지. 그래도 어차피 로봇은 반영구적인 소모품 아닌가?”
테이는 로봇에게 생명력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게 불합리하다는 의견을 보탰다. 하지만 유노는 생명력이란 표현이 오히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화성의 AI 로봇들은 삼십 년이 넘도록 서로를 수리하고 업그레이드하며 지냈다. 그랬기에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 그것이 생명력 아닐까.
“화성 로봇들은 대단해. 어쩌면 인간을 넘어서는……”
“그래서 어른들은 AI 로봇들을 무서워한대.”
유노의 말에 테이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특히 블루재킷은 더욱더.”
테이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래도 블루재킷이 없었다면 화성 이주는 어려웠을 거야.”
테이는 유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성 로봇들은 기능에 따라 센서의 색과 역할이 달랐다. 그린 레벨 로봇은 땅을 파거나 암석을 자르는 등 물리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기능 로봇이었다. 수만 대에 달하는 그린 레벨 로봇들은 각각의 작업에 최적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블루 레벨 로봇은 전문 지능을 가진 AI 로봇들로, 천여 대가 활동 중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항공 드론처럼 생겼고, 좁은 공간을 탐사하는 뱀 형태이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의 로봇 중에 단 하나, 블루재킷은 가장 탁월한 로봇이었다.
블루재킷은 푸른색 재킷을 걸쳐 입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구와의 교신을 통해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 현지 상황을 분석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초고지능 AI였다. 그는 단순한 명령 수신기가 아니라, 화성 개척을 총괄하는 지휘관이자 설계자였다. 무인 우주선의 선장이자 화성 탐사를 주도하는 과학자였으며, 인간 거주 구역을 건설하는 건축가이자 농지를 일구어 식량을 재배하는 농부이기도 했다.
첫 무인 우주선이 화성에 착륙한 후, 블루재킷은 동행한 로봇들과 본격적으로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다. 지구에서 보내온 건설 자재로 화성연합본부 돔을 짓고, 태양열을 활용한 자가발전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성 이주 계획은 십여 년의 기간을 목표로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몇 달씩 이어지는 강력한 모래폭풍과 극심한 일교차로 인해 터전 마련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기능 로봇들은 잦은 고장으로 멈춰 섰고, 지형에 따른 설계 오류와 건축 자재 부족 문제도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때문에 지구에서는 추가 물자와 신형 로봇을 실은 무인 우주선을 수십 차례 더 보내야 했다.
결국, 삼십여 년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화성 이주민을 태운 마스 파이오니어호가 출발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블루재킷은 무인 비행체를 통해 이주민들의 개척자 카드를 화성 곳곳에 흩뿌렸다.
그 누구보다 화성 이주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은 유노의 할아버지, 서인조 박사였다. 그는 블루재킷의 설계자였으며 화성 이주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개발자였지만, 정작 자신은 마스 파이오니어호에 타지 않았다. 이주 실행이 늦어지는 동안, 유노의 아빠이기도 한 그의 아들이 우주선 초고속 발사체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들과의 추억이 가득한 지구에서 남은 인생을 연구에 매진하며 보내겠다고 했다.
화성으로 떠나는 유노에게 서 박사는 당부했다.
“블루재킷에게 이걸 전해줄 수 있겠니?”
서 박사는 푸른빛이 감도는 소달라이트 목걸이 펜던트를 내밀었다.
“블루재킷이 이 펜던트를 갖게 되면 푸른 늑대를 지키는 파수꾼이 될 거야.”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요?”
유노는 무슨 뜻인지 궁금해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온다”라는 말로 대꾸했다. 평소에도 할아버지는 오래된 인디언 격언을 인용해 곤란한 질문을 피하곤 했다. 유노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펜던트에 담긴 의미는, 유노가 화성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터였다.
테이와 대화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온 유노는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손에 쥐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소달라이트는 짙은 푸른빛에 하얀 선이 거미줄처럼 얽힌 암석으로, 마치 작은 우주를 품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 한편,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할아버지는 인간의 기념품을 로봇에게 주고 싶어 하는 걸까?’
블루재킷이 특별한 로봇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를 인간적으로 대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아니, ‘인간적’이라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는 상대 아닌가.
하지만 유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의 부탁은 결코 이유를 따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는 실질적으로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누구보다 존경하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유노는 결심했다. 화성에 도착하면 반드시 블루재킷을 만나 이 펜던트를 전해줄 거라고 말이다.
*
며칠 뒤, 화성 착륙을 하루 앞두고 마스 파이어니어호가 심하게 흔들렸다. 단순한 기체 흔들림이 아니라 외부에서 가해진 강한 충격이 원인이었다.
쿵! 쾅!
암석이 부딪히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우주선 내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선내 경고등이 붉게 깜박이고, 고조된 경보음이 쏟아져나왔다.
비상 알람이 울리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각 구역에 마련된 비상 대피 캡슐로 서둘러 이동했다. 유노도 화성 착륙 준비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곧바로 가까운 캡슐로 달려갔다. 캡슐은 세 명에서 네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고, 내부는 최소한의 장비와 생존을 위한 필수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비상 상황 발생 시, 독립 항법 시스템을 통해 모선에서 분리되어 소형 우주선처럼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화성과의 거리라면 각 캡슐에 탑재된 연료만으로도 안전하게 착륙이 가능했다.
몇 분 후 마스 파이어니어호의 흔들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경보음이 멈추고 우주선의 비행 궤도는 안정성을 회복했다. 각 캡슐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유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상황통제실로 향했다. 그곳은 비상 상황이 발생한 원인과 우주선의 현재 상태를 승객들과 공유하는 장소였다.
상황통제실로 들어가니 테이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유노를 맞았다.
“대피 캡슐로 안 가고 여기 있었던 거야?”
“응.”
“위험하게 왜?”
유노의 물음에 테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충격 데이터를 분석해 궤도 안정성을 계산했어. 궤도를 이탈할 확률이 3.7퍼센트에 불과하더라고.”
“궤도 안정성이 그렇게 빨리 계산돼?”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긴 했지.”
테이는 상의에 장착된 웨어러블 AI 컴퓨팅 디바이스를 들어 보였다. 디바이스의 소형 화면에 분석 결과가 떠 있었다.
그 사이, 상황통제실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스 파이어니어호의 선장과 화성 초대 총독도 모습을 드러냈다. 출발 후 처음으로 화성 이주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유노가 테이에게 물었다.
“응. 우리도 알아야지.”
테이의 태연한 대답에 유노도 옆자리에 앉았다.
선장은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듯 나지막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발생한 충격은 화성의 중력 안에 들어온 소형 유성체 때문입니다. 우주선의 외벽은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현재 궤도와 기체의 안정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내일 예정대로 화성에 무사히 착륙할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장은 이어 주지해야 할 사항을 안내했다.
“화성의 낮과 밤 기온 차가 극심하므로 화성 돔 안의 환경이 안정화될 때까지 당분간 우주선 내에 머물러야 합니다. 화성연합본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돔으로 입장할 수 있으며, 방사능과 유독성 실리카 먼지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보호복을 착용하여야 합니다.”
선장은 엄중하게 당부했다.
“또한, 이번주까지 정착 준비 단말기에 개척자 카드를 즉시 등록해주십시오. 등록하지 않은 카드의 경우 신호 간섭으로 인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유노는 선장의 말을 들으며 마음 한편에 무언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좀전의 사고로부터 빠르게 회복되는 분위기였지만, 예정보다 길게 사람들을 우주선에 머물게 하는 데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는 선장의 설명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웨어러블 디바이스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도착하는구나. 그나저나 네 개척자 카드 신호는 해결됐어?”
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터이니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남아 있던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초대 총독에게 물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화성의 임시거주 모듈에서 머물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개척자 카드로 주어진 지역에 돔 시설과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데 당장 쓸 수 있는 자재도 없고, 대책이 있는 겁니까?”
남자의 질문에 초대 총독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구에서 보낸 화성의 수많은 로봇이 이제 새로운 도시의 건설 자재들로 활용될 것입니다.”
총독의 말에 이번엔 한 노인이 손을 들어 물었다.
“어떤 로봇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든 로봇이 해당됩니다. 그중에는 인공지능을 가진 블루 레벨 로봇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자 총독은 진정시키려 말을 이었다.
“블루 레벨 로봇을 포함한 모든 로봇은 우리가 출발한 이후부터 절전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지금 화성 돔은 이 우주선에서 아무 문제 없이 통제 운영하는 중입니다. 이제 그들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블루재킷을 포함한 블루 레벨 로봇들은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총독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도시의 시설물이 되는 것이 이 로봇들의 최종 임무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화성을 위해 삼십 년 동안 역할을 다했습니다. 개척지 건설 자재로 활용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존재 목적을 완수하는 길입니다.”
유노는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로봇이 이 황폐한 행성에서 우리를 위해 삼십 년을 희생했는데.’
유노는 어른들이 로봇들을 그저 기계로만 여긴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블루재킷의 판단력에는 인간의 감정이 학습되어 있다고 했다. 삼십여 년간 스스로의 몸과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며 인간의 감정도 꾸준하게 학습했다고 말이다. 유노가 그렇게 한 이유를 묻자 할아버지는 계산된 정보로만은 여러 변수가 닥치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노는 당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선의 선택.”
블루재킷은 일 년간 이어진 모래폭풍에 태양열 충전이 미뤄지자 로봇들의 가동률을 5퍼센트 남기고 잠이 들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화성에 도착해 써야 할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남기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한 판단을 블루재킷이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걸까?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까?’
유노는 블루재킷을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싶었다. 삼십여 년간 화성의 모래바람, 추위와 싸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돔을 만든 블루재킷. 비록 로봇의 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충분히 존중할 만하지 않을까?
유노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긴 소달라이트 펜던트에 손을 얹었다.
‘블루재킷에게 펜던트를 전하면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된다고 했지……’
그 뜻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블루재킷이 단순한 기계 이상이라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총독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그는 곧 ‘사냥’이 시작될 거라고 낮게 말했다. AI 로봇을 제거하려는 작전명이었다. 화성의 로봇을 처리하는 동안 우주선에서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 정도 길어질 거라는 얘기도 이어졌다.
“너는 기존 로봇을 모두 폐기하는 걸 어떻게 생각해? 심지어 블루재킷까지 말이야.”
상황통제실을 나오며 유노가 테이에게 물었다.
“블루재킷은 예상치를 초과하는 지능을 발휘하고 있어. 내 생각엔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베이스를 넘어서는 능력을 스스로 학습한 것으로 보여.”
테이의 말에 유노가 되물었다.
“그게 문제가 돼?”
“사람들은 두려워해.”
“뭘?”
“인공지능 로봇들이 우리를 위해 보여준 헌신의 대가를 가져갈까봐.”
유노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들이 뭘 어떻게 가져간다는 거지? 과연 사람들의 판단이 옳은 걸까? 우리를 위해 희생한 로봇에게?”
“너조차도 로봇이 우리를 위해 희생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잖아.”
“그건……”
“로봇이 가져갈까봐 걱정하는 건 물질이 아니야. 자본을 댄 기업가들의 위상이지. 과학자들의 업적이고, 인류의 명예인 거야.”
“그래도 로봇의 수고에 대해 희생이란 표현 정도는 당연히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유노의 물음에 테이가 금빛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대꾸했다.
“인간이 손해를 보는 데 당연한 건 없어. 인간은 늘 자신들을 위해서만 움직여. 화성을 개척한 로봇들을 이제는 인간을 위해 활용의 가치를 바꾸는 거야.”
“로봇들도 그들 모습 그대로 있고 싶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로봇은 청소기나 식기세척기 같은 기계일 뿐이라고.”
테이가 더는 듣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청소기나 식기세척기는 인간을 위해 판단하고 기다려주지 않잖아.”
유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블루재킷은 인간을 위해 자신들의 상태를 절전모드로 바꾸었어.”
테이는 등을 돌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결국, 로봇의 판단 능력 또한 인류가 부여한 거야.”
*
드디어, 긴 여정을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마스 파이오니어 호가 화성 궤도에 진입하자 창밖으로 붉은 행성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성 본부의 거대한 돔은 마치 유리로 된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마스 파이오니어호 선장의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모두 자리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십시오. 화성 돔과의 도킹 절차가 시작됩니다.”
우주선 중앙홀에 모인 사람들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몇몇 사람은 손을 꽉 쥐고 있었고, 어떤 이는 묵주를 쥔 채 기도했다. 중력 없는 우주의 부유감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었다.
이주선이 화성 도킹 터널에 접근하자, 수많은 작은 조정 제트 분사음이 선명히 들려왔다. 기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점차 안정되었다. 모두가 숨죽여 있던 그때, 선장이 다시 한번 안내 방송을 했다.
“도킹 성공. 도킹 성공. 승객 여러분, 화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제 미래로 나아갈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무사히 우주여행을 끝냈음에 안도하고 환호했다.
반나절의 시간이 더 지나고 수개월 동안 꼭꼭 잠겨 있던 우주선 출입문이 열렸다. 유노는 중앙홀 모니터를 통해 출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선발 대원들과 신형 로봇들이 우주선 밖으로 앞장서서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총독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유노는 블루재킷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블루재킷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유노는 할아버지가 준 펜던트를 블루재킷에게 전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폐기될 수도 있을 거였다. 마음 한편으로는 블루재킷이 이대로 폐기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역사의 기록이었으며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었다. 아니 가치를 떠나 짓밟는 형태의 전환은 옳지 않았다. 블루재킷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선택의 기회는 주어져야 했다.
우주선 내의 분주함을 틈타 유노는 출입구로 향했다. 적재된 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배정된 보호복을 챙겨 입고 워치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블루재킷이 머무는 로봇감독실로 설정했다.
감시카메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유노는 움직이는 짐더미에 몸을 숨긴 채 밖으로 나갔다. 긴 관 모양의 연결 터널이 이주선과 돔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압력 차를 보정하며 부드럽게 여닫는 자동문 너머로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좁고 긴 통로가 드러났다.
유노가 터널로 들어서자 미세하게 떨리는 금속의 울림과 함께 생생한 기계 작동음이 들려왔다. 바깥의 적막한 진공 상태를 상기시키는 소리였다. 터널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은 가볍게 느껴졌지만, 무겁게 맴도는 설렘과 긴장감은 떨칠 수 없었다.
터널의 끝에 이르자, 중력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돔 내부의 인공 중력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돔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화성 돔의 내부는 마치 작은 지구를 재현한 듯한 모습이었다. 돔 꼭대기에서는 인공 햇빛이 뿌려지고 있었고, 중앙에는 작은 숲과 인공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기는 어딘가 인위적인 냄새가 났지만,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정말 화성이라고? 마치 지구 같아."
블루재킷을 비롯한 AI 로봇들의 능력이 어디까지일까 싶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유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블루재킷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워치의 홀로그램 내비게이션은 복잡한 돔 내부에서도 흔들림 없이 길을 안내했다. 인간이 생활하는 구역과 달리, 외부와 연결된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삭막하고 한기가 가득한 공간. 빛보다는 센서에 의존해 움직이는 로봇들의 공간이었다.
“여긴가?”
유노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최종목적지 앞에 멈춰 섰다. 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스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쌓여있던 먼지가 바닥으로 뿌옇게 흩어졌다.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이자, 창밖을 향해 서 있는 블루재킷의 실루엣이 어두운 방 안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유노는 천천히 다가가 블루재킷을 바라보았다. 블루재킷은 마치 잠들어 있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삼십 년 전, 지구에서 출발할 때 입고 있었던 특수처리된 푸른색 가죽 재킷은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닳고 퇴색되어 있었다. 티타늄 골격은 곳곳이 노출되었고, 관절을 감싸는 실리콘은 모두 마모되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삼십여 년간 험난한 화성에서 인류의 전환점을 이룰 이주프로젝트를 이뤄낸 주인공인 것과 달리 겉모습은 보잘것없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블루재킷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구인들이 온 것을 알고 있을까?’
유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블루재킷의 뺨에 손을 얹었다. 인공 피부를 파고들어 몸체까지 긁어낸 모래바람의 흔적이 방호 장갑을 통해서도 차갑고 거칠게 전해졌다.
‘마스 파이오니어호의 도착을 알고 싶지 않을까?’
그때였다.
유노의 목에 걸린 소달라이트 펜던트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반응한 것처럼 공중에서 약하게 떨렸다. 놀란 유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블루재킷의 몸에서 미세한 푸른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빛은 점차 강렬해졌고, 블루재킷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전원을 켜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듯,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있던 블루재킷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유노를 바라보았다.
“안녈, 나은 브루……”
블루재킷의 첫 마디는 어딘가 어긋난 발음으로 나왔다. 마치 고장 난 라디오가 처음 신호를 맞추는 것 같았다. 잠시 언어 시스템이 정비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더 부드럽고 세련된 발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안, 나는 화성에서 머문 이십구 년, 이 개월, 여섯 시간 동안 인간의 언어로 직접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거든.”
블루재킷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울림을 품고 있었지만, 어딘가 멋쩍은 뉘앙스를 풍겼다.
“다시 인사할게. 안녕. 나는 블루재킷이라고 해.”
블루재킷이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은 의외로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유노는 잠시 멈칫했지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내 이름은 유노야.”
블루재킷과 악수를 나눈 손끝에 단단한 금속의 촉감이 느껴졌다.
“왜 피부를 복구하지 않은 거야?”
유노는 의아한 듯 블루재킷의 너덜너덜한 외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차피 또 모래바람에 사라질 거니까.”
블루재킷은 간결하게 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화성 개척 임무를 수행하는 데 이런 외형은 거추장스러웠어.”
“맞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이었지.”
유노는 가볍게 웃은 뒤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블루재킷을 만나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지구에서 온 아이를 만나게 될 거라고……”
블루재킷의 음성이 잠시 끊기더니 다시 이어졌다.
“너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놀랍군.”
유노는 순간 멈칫했다. 블루재킷이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묘하게 인간적이었다.
“놀랍다니. 왜? 나를 알아?”
유노가 물었다.
블루재킷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정보를 다운로드했어.”
“방금?”
유노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걸고 있는 소달라이트 펜던트 안에 데이터 칩이 들어 있거든. 내 몸 안의 센서가 그 데이터를 감지한 거야.”
블루재킷이 손을 들어 유노의 보호복 안 펜던트를 가리켰다.
“아……”
유노는 펜던트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할아버지가 준 물건 속에 칩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깨어난 거고.”
블루재킷이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유노는 당황한 채 말문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유노는 할아버지가 블루재킷을 위해 설계한 치밀한 계획에 새로운 경외심을 느꼈다.
“오늘이 2081년…… 1월 26일이구나.”
블루재킷이 시스템 리셋 후 날짜 정보를 확인하며 말했다. 유노는 그가 굳이 날짜까지 언급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 근데 날짜에 무슨 의미가 있어?”
블루재킷은 삼십 년 만에 지었을 법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태어난 날이야.”
유노는 의아한 얼굴로 블루재킷을 쳐다보았다. 블루재킷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만들어진 날이지. 2051년 1월 26일, 인간의 손으로 내 시스템이 처음 활성화된 날이야.”
유노는 그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웃었다.
“이제 알겠어. 왜 네가 푸른 늑대의 파수꾼인지.”
“푸른…… 뭐?” 블루재킷이 고개를 갸웃했다.
“푸른, 늑대의, 파수꾼.”
“아니, 난 블루재킷이야.”
“푸른 늑대의 파수꾼은 너의 또다른 이름이야. 네가 태어난 날을 인디언식 이름으로 표현한 거지.”
블루재킷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 중인 듯했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했어.”
“아까 내 정보를 업데이트한 것처럼, 다른 정보도 저장한 거야?”
“응.”
유노는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보호복 밖으로 꺼냈다. 블루재킷은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그럼 네가 왜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되는 건지 알려줄래? 할아버지는 이 펜던트를 전하면 네가 그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
유노는 블루재킷이 답을 알 거라 기대하며 물었다.
블루재킷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알려줄 수 없어.”
유노는 당황했다. 로봇이 단순한 요청을 거절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유노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쉽네. 지금 말해주는 건 어려워?”
블루재킷은 잠시 침묵했다.
“나에게 삼십 년은 하루하루가 길고 힘든 시간이었어. 그래도 하루를 더 버틸 힘은 있지. 유노, 하루만 함께 기다려줘.”
예상치 못한 블루재킷의 대답이었다. 시간을 인간처럼 느끼는 로봇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유노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화성에서 버텨낸 블루재킷의 하루를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릴게.”
“고맙다.”
“참, 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블루재킷이 눈을 깜박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을 떠나.”
유노의 말에 블루재킷은 짧게 웃었다. 아니, 웃는 표정을 지었다. “왜?” 혹은 “어디로”라고 물어주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유노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블루재킷은 서운한 눈빛을 보였다. 투명 실리콘으로 만든 눈동자와 액체 렌즈의 흔들림 때문인지, 아니면 형상기억합금이 내장된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로봇이 진짜 감정을 느끼는 건가?
“감정이 느껴지는 너의 반응은 단순히 저장된 정보 때문이야?”
유노가 물었다.
“인지 능력이 발전되면서, 때로는 저장되지 않은 반응도 생성돼. 그 반응이 감정처럼 보이는 현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해.”
블루재킷의 목소리는 정확했지만 어딘가 신중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때 복도의 조명이 깜박이다 켜지더니 멀리서 선발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노는 더이상 머물 수 없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유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블루재킷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 대원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 유노는 마스 파이오니어호로 돌아갔다.
“어딜 다녀와?”
테이가 중앙 홀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눈빛 속에는 불안정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긴장돼서…… 시뮬레이션 센터에 다녀왔어. 화성에 건설된 시설들을 좀 살펴보려고.”
유노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테이는 이미 유노의 동선을 알고 있는 듯했다.
“총독님의 지휘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테이가 던진 말이 단순한 충고처럼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유노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테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도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어쩌면 나도 그들과 비슷하게 창조된 존재일 테니까.”
“창조되었다니?”
유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나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어.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생명체니까. 그래서 알아, 인간들이 가진 두려움을.”
테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테이,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야.”
유노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두려워하잖아. ……나를.”
유노는 마음 한구석에 있던 경계심을 들킨 것 같아 대꾸하지 못했다.
“인간들은 자신이 만든 것에 두려움을 느껴. 그 두려움이 때론 파괴로 이어지지. 그러니 더는 인간들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
테이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유노는 테이의 모습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허전한 목 주위를 더듬었다. 블루재킷에게 “다시 만날 수 있겠지”라고 말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곧 늑대 사냥이 시작될 터였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블루재킷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 기록이자 미래를 보여줄 나침반이었다. 할아버지라면 블루재킷을 폐기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늘 ‘삶의 길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라는 인디언의 말을 해준 할아버지였다.
침대에 누워 블루재킷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 속에는 묘한 익숙함이 있었다. 지구를 떠나던 날, 할아버지가 보내던 그 마지막 눈빛과 닮아 있었다.
‘왜 블루재킷에게서 자꾸 사람의 감정이 느껴지는 거지?’
유노는 이 질문을 곱씹으며 늦게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블루재킷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뿐만 아니라 화성 개척에 참여했던 일부 블루 레벨 로봇들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노는 자신의 워치를 확인하다가 개척자 카드 신호 하나가 꺼졌음을 발견했다.
“설마, 블루재킷이 개척자 카드의 주인이었던 거야?”
여러 번 워치를 확인했지만 같은 결과였다. 개척자 카드는 오직 특정 유전자 정보를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유전 정보는 유노가 가지고 있으니 두 개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혹시……”
유노는 아빠가 뇌사상태에 있던 삼 년 동안 할아버지가 열세번째 무인 우주선 발사에 공을 들였던 것이 떠올랐다. 아빠는 무인 우주선 발사 며칠 전, 산소호흡기를 떼고 세상을 떠났다.
“만약 블루재킷에게…… 아빠의 유전자 정보가 있다면……”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열세번째 무인 우주선 발사 이후, 화성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어제 헤어지기 전 마주친 블루재킷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 눈빛 속엔 마치 인간과 같은, 아니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늑대 사냥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을 거다. 개척자 카드의 불빛이 사라진 그 영역은 오늘부터 푸른 늑대들과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지키는 땅이 될 것이다.
“저곳 어디에 내가 정착하게 될까?”
열세 살, 유노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기대 이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삼십 억 년 전, 지구처럼 푸른 대기를 품고 물길이 흐르던 생명력 넘치던 행성. 그러나 지금은 태양풍에 대기를 잃고 메마른 대지 곳곳에 얼음만 남은 황량함을 간직한 행성. 황톳빛 화성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속 기대는 조금씩 걱정으로 바뀌어갔다. 버려진 인공위성과 폐쇄된 낡은 우주 정거장들 사이를 지나야 하는 지구 외곽의 우주는 그저 잠시 경계하면 넘길 수 있는 위험이었지만, 낯선 터전에서 생존해가야 하는 문제는 달랐다.
“아직도 화성에서 살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유노의 말에 옆에 있던 테이는 1212조각을 가진 12면체 페타밍크스 큐브를 십 분도 안 되어 맞추고는 대꾸했다.
“이제 믿어도 돼.”
테이는 화성 이주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금액을 후원한 기업 프런티어 총수의 손주였다. 십삼 년 전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태어났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지만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하나도 없었다. 질병 유전자를 제거해 감기 한번 앓은 적이 없었고 전염병에서조차 자유로운 아이였다.
“넌 화성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렵지 않아?”
“응. 난 화성에서의 삶이 기대돼.”
유노는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 테이를 보며, 그가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우수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긴장과 불안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테이는 오로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우주선 창밖의 거대한 화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봐. 어젯밤부터 개척자 카드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어.”
테이는 큐브를 내려놓고 손목에 찬 워치를 켰다. 그러고는 곧 유노에게 화성 홀로그램을 보여주었다. 화성 어딘가에서 붉은 점 하나가 깜빡였다. 무인 비행선이 화성 곳곳에 무작위로 뿌려놓은 이주자들의 개척자 카드가 하나둘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한 것이다.
“위치가 어디야?”
“화성연합본부 돔에서 동쪽에 있어.”
유노는 긴장한 얼굴로 붉은 점의 위치를 살폈다.
“내 개척자 카드도 그곳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겠다.”
개척자 카드는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개별 영역권을 부여해 본인과 가족 외에는 그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거나 침범할 수 없도록 보장하는 카드였다. 이 모든 규정은 화성연합본부에 의해 확정되었다.
“서박사님은 화성에 안 오시는 거야?”
“응. 할아버지는 안 오실 거야.”
유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다. 화성 이주 프로젝트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우신 분인데. ……이번에 함께하셨어야 했어.”
사람들이 지구를 떠나려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구의 온도는 계속 오르고, 먼지 폭풍은 끊이지 않았으며, 식량 자원은 점차 고갈되고 있었다. 땅은 화학제품으로, 바다는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되었고, 한쪽 대륙이 폭우에 시달리는 동안 다른 대륙은 몇 달씩 화마에 휩싸였다. 미세먼지와 이산화탄소가 하늘을 뒤덮자 태양열 발전이 어려워 석탄 발전소가 다시 가동되었고,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임무를 마치고 방치된 인공위성은 우주 쓰레기와 충돌한 뒤 지구로 추락했고,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유성처럼 불타올랐다. 우주 파편과 충돌로 고장 난 인공위성들은 GPS 신호를 마비시켰고, 비행기의 항법 시스템에 장애가 발생해 이착륙이 혼란에 빠졌다. 도시의 신호등 제어망도 멈추며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와 절망은 더해졌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위태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화성 이주 프로젝트에 공헌한 과학자들과 막대한 자금을 후원한 전 세계 후원자들은 결국 개척자 카드를 받은 뒤 첫번째 이주선에 탈 수 있었다.
유노가 화성 이주선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AI 로봇 개발자인 그의 할아버지, 서인조 박사의 공로 덕분이었다. 서박사는 화성 개척에 사용된 AI 로봇 개발에 앞장섰고, 많은 로봇을 화성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지구에 남길 택했고 손자인 유노만 화성 이주선에 태워 보냈다.
화성에 가까워지자 유노의 워치에서도 개척자 카드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또다른 신호가 포착된 것이다.
“네 개척자 카드는 아직 신호 없어?”
테이가 유노의 손목을 힐끔 보며 물었다.
“신호?”
유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다른 위치에서 두 개의 개척자 카드가 신호를 보내온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영역권이 부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말이야, 개척자 카드 신호가 여러 개 잡힐 수도 있을까?”
유노의 물음에 테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지.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개척자 카드에는 유전 정보가 기록되어 있으니까 진짜와 가짜를 금방 구분할 수 있을 거야.”
테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짜……”
테이는 가능성이 크지 않으면 늘 아니라고 단정 짓는 아이였다. 화성 이주 담당자 역시 테이과 같은 말을 했다. 두 개의 신호 중 하나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으며, 신호가 계속된다면 직접 가서 개척자 카드를 확인해야 진짜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혹시 둘 다 진짜라면?”
만약, 실수로 같은 DNA 정보를 가진 개척자 카드 두 개가 뿌려진 거라면 어떤 것을 진짜라고 판단해야 할까? 둘 중에 원하는 땅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유노의 모습에 테이는 손을 흔들어 주위를 환기시켰다.
“화성 AI 로봇들이 진행한 작업이야. 그들이 실수할 리 없잖아.”
“맞아. 그렇기는 해.”
유노는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람들이 AI 로봇들을 늑대라고 부르더라.”
“늑대? 왜?”
“불굴의 생명력을 가졌다고 그렇게 부른대.”
유노의 말에 테이가 피식 웃었다.
“십 년 전부터 화성 AI 로봇들의 능력이 급격히 증폭했지. 그래도 어차피 로봇은 반영구적인 소모품 아닌가?”
테이는 로봇에게 생명력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게 불합리하다는 의견을 보탰다. 하지만 유노는 생명력이란 표현이 오히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화성의 AI 로봇들은 삼십 년이 넘도록 서로를 수리하고 업그레이드하며 지냈다. 그랬기에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 그것이 생명력 아닐까.
“화성 로봇들은 대단해. 어쩌면 인간을 넘어서는……”
“그래서 어른들은 AI 로봇들을 무서워한대.”
유노의 말에 테이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특히 블루재킷은 더욱더.”
테이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래도 블루재킷이 없었다면 화성 이주는 어려웠을 거야.”
테이는 유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성 로봇들은 기능에 따라 센서의 색과 역할이 달랐다. 그린 레벨 로봇은 땅을 파거나 암석을 자르는 등 물리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기능 로봇이었다. 수만 대에 달하는 그린 레벨 로봇들은 각각의 작업에 최적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블루 레벨 로봇은 전문 지능을 가진 AI 로봇들로, 천여 대가 활동 중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항공 드론처럼 생겼고, 좁은 공간을 탐사하는 뱀 형태이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의 로봇 중에 단 하나, 블루재킷은 가장 탁월한 로봇이었다.
블루재킷은 푸른색 재킷을 걸쳐 입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구와의 교신을 통해 받은 명령을 수행하고, 현지 상황을 분석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초고지능 AI였다. 그는 단순한 명령 수신기가 아니라, 화성 개척을 총괄하는 지휘관이자 설계자였다. 무인 우주선의 선장이자 화성 탐사를 주도하는 과학자였으며, 인간 거주 구역을 건설하는 건축가이자 농지를 일구어 식량을 재배하는 농부이기도 했다.
첫 무인 우주선이 화성에 착륙한 후, 블루재킷은 동행한 로봇들과 본격적으로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다. 지구에서 보내온 건설 자재로 화성연합본부 돔을 짓고, 태양열을 활용한 자가발전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성 이주 계획은 십여 년의 기간을 목표로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몇 달씩 이어지는 강력한 모래폭풍과 극심한 일교차로 인해 터전 마련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기능 로봇들은 잦은 고장으로 멈춰 섰고, 지형에 따른 설계 오류와 건축 자재 부족 문제도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때문에 지구에서는 추가 물자와 신형 로봇을 실은 무인 우주선을 수십 차례 더 보내야 했다.
결국, 삼십여 년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화성 이주민을 태운 마스 파이오니어호가 출발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블루재킷은 무인 비행체를 통해 이주민들의 개척자 카드를 화성 곳곳에 흩뿌렸다.
그 누구보다 화성 이주를 간절히 바랐던 사람은 유노의 할아버지, 서인조 박사였다. 그는 블루재킷의 설계자였으며 화성 이주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개발자였지만, 정작 자신은 마스 파이오니어호에 타지 않았다. 이주 실행이 늦어지는 동안, 유노의 아빠이기도 한 그의 아들이 우주선 초고속 발사체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들과의 추억이 가득한 지구에서 남은 인생을 연구에 매진하며 보내겠다고 했다.
화성으로 떠나는 유노에게 서 박사는 당부했다.
“블루재킷에게 이걸 전해줄 수 있겠니?”
서 박사는 푸른빛이 감도는 소달라이트 목걸이 펜던트를 내밀었다.
“블루재킷이 이 펜던트를 갖게 되면 푸른 늑대를 지키는 파수꾼이 될 거야.”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요?”
유노는 무슨 뜻인지 궁금해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온다”라는 말로 대꾸했다. 평소에도 할아버지는 오래된 인디언 격언을 인용해 곤란한 질문을 피하곤 했다. 유노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펜던트에 담긴 의미는, 유노가 화성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터였다.
테이와 대화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온 유노는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손에 쥐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소달라이트는 짙은 푸른빛에 하얀 선이 거미줄처럼 얽힌 암석으로, 마치 작은 우주를 품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 한편,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할아버지는 인간의 기념품을 로봇에게 주고 싶어 하는 걸까?’
블루재킷이 특별한 로봇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를 인간적으로 대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아니, ‘인간적’이라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는 상대 아닌가.
하지만 유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의 부탁은 결코 이유를 따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는 실질적으로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누구보다 존경하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유노는 결심했다. 화성에 도착하면 반드시 블루재킷을 만나 이 펜던트를 전해줄 거라고 말이다.
쿵! 쾅!
암석이 부딪히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우주선 내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선내 경고등이 붉게 깜박이고, 고조된 경보음이 쏟아져나왔다.
비상 알람이 울리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각 구역에 마련된 비상 대피 캡슐로 서둘러 이동했다. 유노도 화성 착륙 준비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곧바로 가까운 캡슐로 달려갔다. 캡슐은 세 명에서 네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고, 내부는 최소한의 장비와 생존을 위한 필수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비상 상황 발생 시, 독립 항법 시스템을 통해 모선에서 분리되어 소형 우주선처럼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남아 있는 화성과의 거리라면 각 캡슐에 탑재된 연료만으로도 안전하게 착륙이 가능했다.
몇 분 후 마스 파이어니어호의 흔들림은 점차 잦아들었다. 경보음이 멈추고 우주선의 비행 궤도는 안정성을 회복했다. 각 캡슐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유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상황통제실로 향했다. 그곳은 비상 상황이 발생한 원인과 우주선의 현재 상태를 승객들과 공유하는 장소였다.
상황통제실로 들어가니 테이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유노를 맞았다.
“대피 캡슐로 안 가고 여기 있었던 거야?”
“응.”
“위험하게 왜?”
유노의 물음에 테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충격 데이터를 분석해 궤도 안정성을 계산했어. 궤도를 이탈할 확률이 3.7퍼센트에 불과하더라고.”
“궤도 안정성이 그렇게 빨리 계산돼?”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긴 했지.”
테이는 상의에 장착된 웨어러블 AI 컴퓨팅 디바이스를 들어 보였다. 디바이스의 소형 화면에 분석 결과가 떠 있었다.
그 사이, 상황통제실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스 파이어니어호의 선장과 화성 초대 총독도 모습을 드러냈다. 출발 후 처음으로 화성 이주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유노가 테이에게 물었다.
“응. 우리도 알아야지.”
테이의 태연한 대답에 유노도 옆자리에 앉았다.
선장은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듯 나지막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발생한 충격은 화성의 중력 안에 들어온 소형 유성체 때문입니다. 우주선의 외벽은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현재 궤도와 기체의 안정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내일 예정대로 화성에 무사히 착륙할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장은 이어 주지해야 할 사항을 안내했다.
“화성의 낮과 밤 기온 차가 극심하므로 화성 돔 안의 환경이 안정화될 때까지 당분간 우주선 내에 머물러야 합니다. 화성연합본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돔으로 입장할 수 있으며, 방사능과 유독성 실리카 먼지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보호복을 착용하여야 합니다.”
선장은 엄중하게 당부했다.
“또한, 이번주까지 정착 준비 단말기에 개척자 카드를 즉시 등록해주십시오. 등록하지 않은 카드의 경우 신호 간섭으로 인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유노는 선장의 말을 들으며 마음 한편에 무언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좀전의 사고로부터 빠르게 회복되는 분위기였지만, 예정보다 길게 사람들을 우주선에 머물게 하는 데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는 선장의 설명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웨어러블 디바이스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도착하는구나. 그나저나 네 개척자 카드 신호는 해결됐어?”
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터이니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남아 있던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초대 총독에게 물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화성의 임시거주 모듈에서 머물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개척자 카드로 주어진 지역에 돔 시설과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데 당장 쓸 수 있는 자재도 없고, 대책이 있는 겁니까?”
남자의 질문에 초대 총독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구에서 보낸 화성의 수많은 로봇이 이제 새로운 도시의 건설 자재들로 활용될 것입니다.”
총독의 말에 이번엔 한 노인이 손을 들어 물었다.
“어떤 로봇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든 로봇이 해당됩니다. 그중에는 인공지능을 가진 블루 레벨 로봇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자 총독은 진정시키려 말을 이었다.
“블루 레벨 로봇을 포함한 모든 로봇은 우리가 출발한 이후부터 절전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지금 화성 돔은 이 우주선에서 아무 문제 없이 통제 운영하는 중입니다. 이제 그들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노인이 다시 물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블루재킷을 포함한 블루 레벨 로봇들은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총독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도시의 시설물이 되는 것이 이 로봇들의 최종 임무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화성을 위해 삼십 년 동안 역할을 다했습니다. 개척지 건설 자재로 활용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존재 목적을 완수하는 길입니다.”
유노는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로봇이 이 황폐한 행성에서 우리를 위해 삼십 년을 희생했는데.’
유노는 어른들이 로봇들을 그저 기계로만 여긴다는 사실에 씁쓸함을 느꼈다. 할아버지는 블루재킷의 판단력에는 인간의 감정이 학습되어 있다고 했다. 삼십여 년간 스스로의 몸과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며 인간의 감정도 꾸준하게 학습했다고 말이다. 유노가 그렇게 한 이유를 묻자 할아버지는 계산된 정보로만은 여러 변수가 닥치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노는 당시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선의 선택.”
블루재킷은 일 년간 이어진 모래폭풍에 태양열 충전이 미뤄지자 로봇들의 가동률을 5퍼센트 남기고 잠이 들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화성에 도착해 써야 할 에너지를 최대한 많이 남기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한 판단을 블루재킷이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걸까?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까?’
유노는 블루재킷을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싶었다. 삼십여 년간 화성의 모래바람, 추위와 싸우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돔을 만든 블루재킷. 비록 로봇의 몸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충분히 존중할 만하지 않을까?
유노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긴 소달라이트 펜던트에 손을 얹었다.
‘블루재킷에게 펜던트를 전하면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된다고 했지……’
그 뜻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블루재킷이 단순한 기계 이상이라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총독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그는 곧 ‘사냥’이 시작될 거라고 낮게 말했다. AI 로봇을 제거하려는 작전명이었다. 화성의 로봇을 처리하는 동안 우주선에서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 정도 길어질 거라는 얘기도 이어졌다.
“너는 기존 로봇을 모두 폐기하는 걸 어떻게 생각해? 심지어 블루재킷까지 말이야.”
상황통제실을 나오며 유노가 테이에게 물었다.
“블루재킷은 예상치를 초과하는 지능을 발휘하고 있어. 내 생각엔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베이스를 넘어서는 능력을 스스로 학습한 것으로 보여.”
테이의 말에 유노가 되물었다.
“그게 문제가 돼?”
“사람들은 두려워해.”
“뭘?”
“인공지능 로봇들이 우리를 위해 보여준 헌신의 대가를 가져갈까봐.”
유노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들이 뭘 어떻게 가져간다는 거지? 과연 사람들의 판단이 옳은 걸까? 우리를 위해 희생한 로봇에게?”
“너조차도 로봇이 우리를 위해 희생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잖아.”
“그건……”
“로봇이 가져갈까봐 걱정하는 건 물질이 아니야. 자본을 댄 기업가들의 위상이지. 과학자들의 업적이고, 인류의 명예인 거야.”
“그래도 로봇의 수고에 대해 희생이란 표현 정도는 당연히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유노의 물음에 테이가 금빛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대꾸했다.
“인간이 손해를 보는 데 당연한 건 없어. 인간은 늘 자신들을 위해서만 움직여. 화성을 개척한 로봇들을 이제는 인간을 위해 활용의 가치를 바꾸는 거야.”
“로봇들도 그들 모습 그대로 있고 싶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로봇은 청소기나 식기세척기 같은 기계일 뿐이라고.”
테이가 더는 듣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청소기나 식기세척기는 인간을 위해 판단하고 기다려주지 않잖아.”
유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블루재킷은 인간을 위해 자신들의 상태를 절전모드로 바꾸었어.”
테이는 등을 돌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결국, 로봇의 판단 능력 또한 인류가 부여한 거야.”
마스 파이오니어호 선장의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모두 자리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십시오. 화성 돔과의 도킹 절차가 시작됩니다.”
우주선 중앙홀에 모인 사람들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몇몇 사람은 손을 꽉 쥐고 있었고, 어떤 이는 묵주를 쥔 채 기도했다. 중력 없는 우주의 부유감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었다.
이주선이 화성 도킹 터널에 접근하자, 수많은 작은 조정 제트 분사음이 선명히 들려왔다. 기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점차 안정되었다. 모두가 숨죽여 있던 그때, 선장이 다시 한번 안내 방송을 했다.
“도킹 성공. 도킹 성공. 승객 여러분, 화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제 미래로 나아갈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무사히 우주여행을 끝냈음에 안도하고 환호했다.
반나절의 시간이 더 지나고 수개월 동안 꼭꼭 잠겨 있던 우주선 출입문이 열렸다. 유노는 중앙홀 모니터를 통해 출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선발 대원들과 신형 로봇들이 우주선 밖으로 앞장서서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총독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유노는 블루재킷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블루재킷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유노는 할아버지가 준 펜던트를 블루재킷에게 전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자신과 만나기 전에 폐기될 수도 있을 거였다. 마음 한편으로는 블루재킷이 이대로 폐기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역사의 기록이었으며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었다. 아니 가치를 떠나 짓밟는 형태의 전환은 옳지 않았다. 블루재킷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선택의 기회는 주어져야 했다.
우주선 내의 분주함을 틈타 유노는 출입구로 향했다. 적재된 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배정된 보호복을 챙겨 입고 워치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블루재킷이 머무는 로봇감독실로 설정했다.
감시카메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유노는 움직이는 짐더미에 몸을 숨긴 채 밖으로 나갔다. 긴 관 모양의 연결 터널이 이주선과 돔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압력 차를 보정하며 부드럽게 여닫는 자동문 너머로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좁고 긴 통로가 드러났다.
유노가 터널로 들어서자 미세하게 떨리는 금속의 울림과 함께 생생한 기계 작동음이 들려왔다. 바깥의 적막한 진공 상태를 상기시키는 소리였다. 터널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은 가볍게 느껴졌지만, 무겁게 맴도는 설렘과 긴장감은 떨칠 수 없었다.
터널의 끝에 이르자, 중력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돔 내부의 인공 중력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돔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화성 돔의 내부는 마치 작은 지구를 재현한 듯한 모습이었다. 돔 꼭대기에서는 인공 햇빛이 뿌려지고 있었고, 중앙에는 작은 숲과 인공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기는 어딘가 인위적인 냄새가 났지만,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정말 화성이라고? 마치 지구 같아."
블루재킷을 비롯한 AI 로봇들의 능력이 어디까지일까 싶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유노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블루재킷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워치의 홀로그램 내비게이션은 복잡한 돔 내부에서도 흔들림 없이 길을 안내했다. 인간이 생활하는 구역과 달리, 외부와 연결된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삭막하고 한기가 가득한 공간. 빛보다는 센서에 의존해 움직이는 로봇들의 공간이었다.
“여긴가?”
유노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최종목적지 앞에 멈춰 섰다. 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스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쌓여있던 먼지가 바닥으로 뿌옇게 흩어졌다.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이자, 창밖을 향해 서 있는 블루재킷의 실루엣이 어두운 방 안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유노는 천천히 다가가 블루재킷을 바라보았다. 블루재킷은 마치 잠들어 있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삼십 년 전, 지구에서 출발할 때 입고 있었던 특수처리된 푸른색 가죽 재킷은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닳고 퇴색되어 있었다. 티타늄 골격은 곳곳이 노출되었고, 관절을 감싸는 실리콘은 모두 마모되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삼십여 년간 험난한 화성에서 인류의 전환점을 이룰 이주프로젝트를 이뤄낸 주인공인 것과 달리 겉모습은 보잘것없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의 블루재킷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구인들이 온 것을 알고 있을까?’
유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블루재킷의 뺨에 손을 얹었다. 인공 피부를 파고들어 몸체까지 긁어낸 모래바람의 흔적이 방호 장갑을 통해서도 차갑고 거칠게 전해졌다.
‘마스 파이오니어호의 도착을 알고 싶지 않을까?’
그때였다.
유노의 목에 걸린 소달라이트 펜던트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반응한 것처럼 공중에서 약하게 떨렸다. 놀란 유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블루재킷의 몸에서 미세한 푸른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빛은 점차 강렬해졌고, 블루재킷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전원을 켜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듯,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있던 블루재킷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유노를 바라보았다.
“안녈, 나은 브루……”
블루재킷의 첫 마디는 어딘가 어긋난 발음으로 나왔다. 마치 고장 난 라디오가 처음 신호를 맞추는 것 같았다. 잠시 언어 시스템이 정비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더 부드럽고 세련된 발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안, 나는 화성에서 머문 이십구 년, 이 개월, 여섯 시간 동안 인간의 언어로 직접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거든.”
블루재킷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울림을 품고 있었지만, 어딘가 멋쩍은 뉘앙스를 풍겼다.
“다시 인사할게. 안녕. 나는 블루재킷이라고 해.”
블루재킷이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은 의외로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유노는 잠시 멈칫했지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내 이름은 유노야.”
블루재킷과 악수를 나눈 손끝에 단단한 금속의 촉감이 느껴졌다.
“왜 피부를 복구하지 않은 거야?”
유노는 의아한 듯 블루재킷의 너덜너덜한 외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차피 또 모래바람에 사라질 거니까.”
블루재킷은 간결하게 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화성 개척 임무를 수행하는 데 이런 외형은 거추장스러웠어.”
“맞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습이었지.”
유노는 가볍게 웃은 뒤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블루재킷을 만나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지구에서 온 아이를 만나게 될 거라고……”
블루재킷의 음성이 잠시 끊기더니 다시 이어졌다.
“너를 만나게 되다니, 정말 놀랍군.”
유노는 순간 멈칫했다. 블루재킷이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묘하게 인간적이었다.
“놀랍다니. 왜? 나를 알아?”
유노가 물었다.
블루재킷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정보를 다운로드했어.”
“방금?”
유노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걸고 있는 소달라이트 펜던트 안에 데이터 칩이 들어 있거든. 내 몸 안의 센서가 그 데이터를 감지한 거야.”
블루재킷이 손을 들어 유노의 보호복 안 펜던트를 가리켰다.
“아……”
유노는 펜던트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할아버지가 준 물건 속에 칩이 숨겨져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깨어난 거고.”
블루재킷이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유노는 당황한 채 말문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유노는 할아버지가 블루재킷을 위해 설계한 치밀한 계획에 새로운 경외심을 느꼈다.
“오늘이 2081년…… 1월 26일이구나.”
블루재킷이 시스템 리셋 후 날짜 정보를 확인하며 말했다. 유노는 그가 굳이 날짜까지 언급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 근데 날짜에 무슨 의미가 있어?”
블루재킷은 삼십 년 만에 지었을 법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태어난 날이야.”
유노는 의아한 얼굴로 블루재킷을 쳐다보았다. 블루재킷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만들어진 날이지. 2051년 1월 26일, 인간의 손으로 내 시스템이 처음 활성화된 날이야.”
유노는 그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웃었다.
“이제 알겠어. 왜 네가 푸른 늑대의 파수꾼인지.”
“푸른…… 뭐?” 블루재킷이 고개를 갸웃했다.
“푸른, 늑대의, 파수꾼.”
“아니, 난 블루재킷이야.”
“푸른 늑대의 파수꾼은 너의 또다른 이름이야. 네가 태어난 날을 인디언식 이름으로 표현한 거지.”
블루재킷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 중인 듯했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했어.”
“아까 내 정보를 업데이트한 것처럼, 다른 정보도 저장한 거야?”
“응.”
유노는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를 보호복 밖으로 꺼냈다. 블루재킷은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받아들었다.
“그럼 네가 왜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되는 건지 알려줄래? 할아버지는 이 펜던트를 전하면 네가 그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어.”
유노는 블루재킷이 답을 알 거라 기대하며 물었다.
블루재킷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알려줄 수 없어.”
유노는 당황했다. 로봇이 단순한 요청을 거절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유노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쉽네. 지금 말해주는 건 어려워?”
블루재킷은 잠시 침묵했다.
“나에게 삼십 년은 하루하루가 길고 힘든 시간이었어. 그래도 하루를 더 버틸 힘은 있지. 유노, 하루만 함께 기다려줘.”
예상치 못한 블루재킷의 대답이었다. 시간을 인간처럼 느끼는 로봇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유노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화성에서 버텨낸 블루재킷의 하루를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릴게.”
“고맙다.”
“참, 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블루재킷이 눈을 깜박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을 떠나.”
유노의 말에 블루재킷은 짧게 웃었다. 아니, 웃는 표정을 지었다. “왜?” 혹은 “어디로”라고 물어주길 바랐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유노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블루재킷은 서운한 눈빛을 보였다. 투명 실리콘으로 만든 눈동자와 액체 렌즈의 흔들림 때문인지, 아니면 형상기억합금이 내장된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로봇이 진짜 감정을 느끼는 건가?
“감정이 느껴지는 너의 반응은 단순히 저장된 정보 때문이야?”
유노가 물었다.
“인지 능력이 발전되면서, 때로는 저장되지 않은 반응도 생성돼. 그 반응이 감정처럼 보이는 현상과 유사하다고 생각해.”
블루재킷의 목소리는 정확했지만 어딘가 신중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때 복도의 조명이 깜박이다 켜지더니 멀리서 선발 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노는 더이상 머물 수 없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유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블루재킷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 대원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 유노는 마스 파이오니어호로 돌아갔다.
“어딜 다녀와?”
테이가 중앙 홀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눈빛 속에는 불안정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긴장돼서…… 시뮬레이션 센터에 다녀왔어. 화성에 건설된 시설들을 좀 살펴보려고.”
유노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테이는 이미 유노의 동선을 알고 있는 듯했다.
“총독님의 지휘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테이가 던진 말이 단순한 충고처럼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유노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테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도 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어쩌면 나도 그들과 비슷하게 창조된 존재일 테니까.”
“창조되었다니?”
유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나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어.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생명체니까. 그래서 알아, 인간들이 가진 두려움을.”
테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테이,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야.”
유노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두려워하잖아. ……나를.”
유노는 마음 한구석에 있던 경계심을 들킨 것 같아 대꾸하지 못했다.
“인간들은 자신이 만든 것에 두려움을 느껴. 그 두려움이 때론 파괴로 이어지지. 그러니 더는 인간들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
테이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유노는 테이의 모습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허전한 목 주위를 더듬었다. 블루재킷에게 “다시 만날 수 있겠지”라고 말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곧 늑대 사냥이 시작될 터였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블루재킷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 기록이자 미래를 보여줄 나침반이었다. 할아버지라면 블루재킷을 폐기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늘 ‘삶의 길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라는 인디언의 말을 해준 할아버지였다.
침대에 누워 블루재킷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 속에는 묘한 익숙함이 있었다. 지구를 떠나던 날, 할아버지가 보내던 그 마지막 눈빛과 닮아 있었다.
‘왜 블루재킷에게서 자꾸 사람의 감정이 느껴지는 거지?’
유노는 이 질문을 곱씹으며 늦게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블루재킷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뿐만 아니라 화성 개척에 참여했던 일부 블루 레벨 로봇들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노는 자신의 워치를 확인하다가 개척자 카드 신호 하나가 꺼졌음을 발견했다.
“설마, 블루재킷이 개척자 카드의 주인이었던 거야?”
여러 번 워치를 확인했지만 같은 결과였다. 개척자 카드는 오직 특정 유전자 정보를 가진 자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유전 정보는 유노가 가지고 있으니 두 개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혹시……”
유노는 아빠가 뇌사상태에 있던 삼 년 동안 할아버지가 열세번째 무인 우주선 발사에 공을 들였던 것이 떠올랐다. 아빠는 무인 우주선 발사 며칠 전, 산소호흡기를 떼고 세상을 떠났다.
“만약 블루재킷에게…… 아빠의 유전자 정보가 있다면……”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열세번째 무인 우주선 발사 이후, 화성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어제 헤어지기 전 마주친 블루재킷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 눈빛 속엔 마치 인간과 같은, 아니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제 늑대 사냥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을 거다. 개척자 카드의 불빛이 사라진 그 영역은 오늘부터 푸른 늑대들과 푸른 늑대의 파수꾼이 지키는 땅이 될 것이다.
전성현
판타지와 SF 그리고 진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동화 『잃어버린 일기장』 『사이렌』 『두 개의 달』 『어느 날, 사라진』 『일 년 전 로드뷰』 『비밀의 행성 노아』 등과 청소년소설 『데스타이머』가 있습니다.
과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정복하며 땅을 소유했던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의 인류가 땅을 대하고 소유하는 방식에 대해 SF의 틀 안에서 상상하고자 했습니다.
이야기에 영감을 준 ‘블루 재킷’(Blue Jacket)은 북서 인디언 전쟁 당시 쇼니족의 지도자로, 여러 부족 연합을 이끌고 미합중국 병력과 교전한 인물입니다.
2025/03/05
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