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침」은 이곳을 가리키는 작품으로, 이 글이 펼쳐지는 시점까지 세 개의 장(章)을 이루었다. (다가올 시간이 다가온 시간으로 쓰인다.) 작품의 도입부는 작품의 구조와 구성을 안내하면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러내려 시도하고, 이러한 시도는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된다. 1장은 인물을, 2장은 장면을, 3장은 사건을 주요하게 다룬다. (인물은 장면 속에 있을 수 있고, 장면은 사건의 원인이거나 결과 또는 현장일 수 있으며, 사건은 인물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고, 인물과 장면과 사건은 서로 무관할 수 있다.) 각 장은 여러 단락으로 구성되며, 한 줄을 사이에 두고 다른 장과 구분된다. 구성상 각 장의 본문은 주석을 필요로 하고, 주석은 본문을 필요로 한다. (본문과 주석은 가능한 한 여러 방식을 경유해 연결되지만, 필요하다면 내용상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각주 1. “지금 내가 읽고 싶은 소설은 (…)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람, 이야기를 계속 축적하고자 하는 바람을 원동력으로 하는 소설이에요.” 이탈로 칼비노,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이현경 옮김, 민음사, 2014, 117쪽. 글은 단어와 단어 사이 공백과 글줄과 글줄 사이 공백을 포함하며, 한국어로 쓰이면서 문장부호와 숫자와 한자와 영어를 사용한다.
        문장은 문장을 불러올 수 있다. 각주 2. “‘한 가지 생각이 났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다.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썼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480쪽. (이는 쓰기와 말하기의 특성일 수 있다.) 문장은 문장을 건너뛸 수 있다. (이는 읽기와 듣기의 특성일 수 있다.) 문장은 이미지를 불러올 수 있다. (구멍 뚫린 손.) 문장은 이미지를 건너뛸 수 있다. (순박한 피.)

문장은 문장과 이미지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은 자신의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만 사용한다.
        글의 외부에서 생성된 이미지는 글의 내용에서 자유롭다. 각주 3. “표범은 자기의 무늬를 그대로 지니고 죽는다.” 기 드보르, 『파네지릭』, 이채영 옮김, 필로소픽, 2021, 30쪽. 이미지는 글의 내부를 어지러이 누비며, 글이 비선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너는 그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은 가만히 있다. 조각처럼. 각주 4. “대개 조각은 가만히 있다는 너무 평범한 사실을 요즘 자주 생각한다.” 정서영, 『오늘 본 것』, 스키라·바라캇 컨템포러리, 2023, 199쪽. 가만히 있던 그 사람은 어느새 조각의 상태를 벗어나 있다. 버려졌던 문장들. 각주 5. 이미지와 함께. 여기까지. 각주 6. “너는 네가 말들을 던져두고 떠나왔다고 여겨보지만, 말들은 그들끼리 무리 지은 안에서 너를 본다. 지면이 거울이 되어 너를 비추리라 생각해보지만, 말들은 너를 보여주는 대신 바라본다. 너는 말들에게 내쳐져 있다.” 김뉘연, 『부분』, 외밀, 2021, 34쪽. 너는 계속 글에 들어가 있으려 한다. 그러고 싶어 한다. 너는 네가 글의 바깥을 배회하는 시간을 그리지 않는다. 그런 것은 너의 시간이 아니다. 그렇게 이곳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글은 바로 지금 그 사람을 필요로 하며, 그 사람은 너를 벗어난다. 그것이 그 사람의 첫번째 움직임이다. 너를 벗어난 그 사람은 자신의 움직임을 확장하면서 이곳을 차지해간다. 그 사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인물이라고 불린다. 각주 7. 인물은 전개도나 도면에 펼쳐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인물은 자신을 대체로 화가 각주 8. 문학가 발저는 화가를 색채시인이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 로베르트 발저, 『연필로 쓴 작은 글씨』, 안미현 옮김, 문학동네, 2023, 75쪽. 라고 소개한다. 각주 9. “나는 대체로 조각가이다.” 정서영,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현실문화, 2012, 139쪽.

화가는 사물의 드로잉에 주력하며, 흑연을 주재료로 그림의 명암을 좌우한다. 화가는 사물을 크게 그리기도 하고 작게 그리기도 한다. 화가는 사물을 느리게 그리기도 하고 빠르게 그리기도 한다. 크기와 속도와 무관히 화가가 추구하는 바는 사물의 인물화이다. 화가는 자신이 그리는 하나의 사물이 한 명의 인물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인물이 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듯이 알고 보면 다 다른 사물의 양상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심지어 같은 제작 공정을 거쳐 나온 공산품이라 할지라도 면밀히 살필수록 하나하나 분명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사물마다 다른 시선을 던지려 애쓴다. 그 결과 화가의 그림은 하나의 사물과 너무나 닮게 된 나머지 하나의 사물처럼 보이지 않게 되고,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간다. 주로 도화지에 사물을 그려오던 화가는 얼마 전부터 신문지에 사물을 그려보고 있다. 글자와 사진이 앞서 펼쳐져 있는 회색 신문지 각주 10. “양말에서 실이 나온다. / 그럴 수 있다. // 양말은 실이다. // 구멍은 실이 아니다. // 구멍을 들여다본다. / 구멍이 작다. // 구멍이 커진다. // 양말에서 실이 나온다는 말. // 실이 나오는 양말을 그러니까 실이 양말에서 나오면 // 응. // 누구는 구멍을 계속하려고 한다. // 구멍이 계속된다.” 김뉘연, 「앉는다」, 『문서 없는 제목』, 봄날의책, 2023, 89쪽; 한겨레, 2023년 8월 18일 기사, <[시인의 마을] 앉는다>. 위에서의 드로잉과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한 백지 상태의 도화지 위에서의 드로잉이 동일한 사물을 얼마나 어떻게 달라 보이게 하는지 실험해보는 중이다. 신문지에 사물을 그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가장 어려운 점은 신문지를 구하는 일일 수 있다. 만연한 모든 종류의 구독제를 거부하는 화가는 신문 역시 구독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어 번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구청에 가서 무료 배포용으로 비치된 신문지를 구해 온다. 신문지를 구하러 간 김에 구청의 구내식당에서 합리적인 비용으로 균형 있는 식사를 하고 구청과 집을 오가는 길에 운동 삼아 빠르게 걷는다. 겸사겸사 이루어지는 하루가 그다음 하루로 이어진다. 너는 삶이 글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어지고, 각주 11. 주로. 의문을 남긴다. 각주 12. 때로. 너는 너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각주 13. 너는 너를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너를 숨기는 데 실패한다.

장면 하나. 각주 14. 이곳은 이렇게 장면이 된다. 
        내일을 그리는 사람의 바닥. 열린 문. 열린 방. 열린 옷장. 열린 가방. 열려 있는 상태는 펼쳐져 있는 상태로 이어진다. 지퍼가 세 개 달린, 반으로 접힐 수 있는 검정 가방. 각주 15. ‘Working Space 1’, 팩토리 에디션(f2)×레귤라(regular). 단추가 두 쌍 반 달린 검정 지갑의 회색 열쇠고리에 달린 은빛 열쇠 하나. 각주 16.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25 3층, 유령작업실. 문고판보다 작은 흰 수첩. 각주 17. 다음의 문구가 적혀 있는. “무엇도 설명하지 않지만 뜻이 있고 형태는 없으나 무엇인가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정서영, 『공기를 두드려서』,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1, 23쪽) 네 가지 색이 담긴 펜. 각주 18. 파이롯트(PILOT) 쥬스업(Juice up) 젤잉크펜. 2023년 12월 11일부터 2024년 1월 31일까지 도쿄 ggg(긴자 그래픽 갤러리)에서 열린 디자이너 오하라 다이지로(大原大次郎)의 전시 ‘HAND BOOK’에서 그가 드로잉으로 참여한 파이롯트 쥬스업 광고 영상이 상영되었다. 연두색 반창고. 각주 19. ‘케어리브’(ケアリーヴ), 니치반(ニチバン). 푸르거나 붉은 손목 밴드. 각주 20. “하지만 나는, 사실은 그가 눈물을 훔쳐내는 행위를 숨기기 위해 땀을 닦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프란츠 카프카, 『꿈』, 배수아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4, 110쪽) ‘땀 닦는 연기를 위한 손목 밴드’, 카우프만(KAUFMAN).충분히 긴 상아색 양말. 각주 21. “의도는 의도이고 과정은 과정이며, 결과는 결과다.”(최성민·최슬기, 「뒤늦게 밝히자면」, 『누가 화이트 큐브를 두려워하랴』, 작업실유령, 2022, 90쪽) ‘의도, 과정, 결과의 양말’, 카우프만(KAUFMAN). 검정 패딩(모자가 달린). 각주 22. 혜인서(HYEIN SEO). 펼쳐진 책의 형상을 띤 향꽂이. 각주 23. 紫煙. 국화꽃 형상을 띤 향. 각주 24. 9월. 조약돌의 형상을 띤 양초. 각주 25. 향 없는. 마음의 형상을 띤 소책자. 각주 26. 카를 나브로(Karl Nawrot), 『마음의 산책 II Mind Walk II』, 갤러리 팩토리, 2014. 충분히 긴 양말보다 약간 옅은 상아색 봉투. 각주 27. “문서 / 없는”. 김뉘연·전용완, 「봉투」, 2024. 약간 젖혀진 커튼. 각주 28. 키티버니포니(Kitty Bunny Pony). 약간 열린 창문. 각주 29. 이건창호(EAGON Windows and Doors)의 창문 바깥으로 보일 법한 장면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창문 너머 몇 개의 건물이 겹쳐 보이는지, 건물이 얼마나 보기 좋거나 보기 좋지 않은지, 벽돌로 지어졌는지,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려 있는지, 담벼락에 담쟁이덩굴이 드리워져 있는지, 장독대가 있는지, 장독이 있는지, 하늘의 색은 어떠하고 구름의 모양은 어떠한지, 아마도 방충망에 부딪혀 창틀에 떨어졌을 날벌레가 몇 마리나 되는지, 이러한 장면은 이곳에서 아직 보이지 않았다고 적어둔다. 그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분명히 들리고 있으며(너는 새가 한 마리 이상임을 확신한다), 새소리는 창문이 닫혀 있는 장면에서도 분명히 들린다.

  하나의 장면은 연속적일 수 있습니다. 바라보기에 따라 그러합니다. 하나의 장면을 흐름으로 바라봅니다. 지퍼가 세 개 달린, 반으로 접힐 수 있는 검정 가방 옆에 단추가 두 쌍 반 달린 검정 지갑이 있었고, 검정 지갑에는 회색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으며, 회색 열쇠고리에는 은빛 열쇠 하나가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의 장면은 불규칙할 수 있습니다. 바라보기에 따라 그러합니다. 하나의 장면을 무작위로 바라봅니다. 문고판보다 작은 흰 수첩은 펼쳐진 책의 형상을 띤 향꽂이 옆에 자리할 수 있고, 충분히 긴 양말보다 약간 옅은 상아색 봉투는 충분히 긴 상아색 양말과 나란히 놓일 수 있으며, 네 가지 색이 담긴 펜은 푸르거나 붉은 손목 밴드와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임의적인 배치는 개연성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장면은 하나이면서 아주 많은 정보를 안깁니다. 하나의 장면은 그러함이 가능한 장소이고 공간입니다. 하나와 여럿은 서로를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것도 버려지지 않으며, 버려짐을 버립니다.
        펼쳐진 봉투의 다른 이름은 전개도이며, 전개도의 다른 이름은 펼친그림입니다.

맑고 추운 날, 묘원에 다녀왔다. 각주 30.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길 46. 먼 곳에 와서 여러 이유로 생이 중단되어버린 이들을 오래 기려온 공원이었다. 여러 일이 지나가고 난 이곳은 평균적으로 평평한 상태를 이루고 있어 보였다. (한 발 물러서는 너.) 주어진 경로를 벗어나 가고 싶은 대로 걸었다. 여러 크기와 형태를 갖춘 묘비를 보면서 다가올 묘비를 그려보았다. 우리에게 묘비가 주어질까. (우리가 된 너.) 안내용 책자에서 다섯 줄을 넘기지 않도록 요약된 이들의 시간을 그려보았다. 우리의 시간이 요약될 필요가 있을까. ‘촬요’란 요점을 골라 간추린 문서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한 사람이 「시편」의 부분을 한국어로 번역해 펴낸 최초의 구약성경의 이름 각주 31. 알렉산더 A.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시편촬요』, 1898. 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묘원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내친김에 근처의 성지로 향했다. 각주 32.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그곳은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의 근처이기도 했다. 물가에서. 물기슭에서. 물녘에서. 수반에서. 수변에서. 수빈에서. 수심에서. 수애에서. 수제에서. 애안에서. 애제에서. 저안에서. 저애에서. 정분에서. 정안에서. 정저에서. 강변을 걷다가 무심코 올려다보게 된 절벽의 가공할 이미지에 사로잡혔던 우리는 이제 절벽의 위에 보란 듯이 올라서서 이곳을 평지 삼아 걷게 된다. 어두웠고, 나무와 조형물이 많아 보였고, 어두웠다.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두우면서 나무와 조형물이 많아 보이기도 했던 것일까, 나무와 조형물이 많아 보여서 어둡게 여겨졌던 것일까. 나무와 조형물이 많기는 많았던 것일까. 맑은 날이었다고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날이 흐렸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당히 어두운 상태에 만족해버린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찍고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서로의 시간을 함께 썼다. 모든 것이 보이는 만큼의 어두움 가운데 우리만큼은 보이지 않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실제로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날 우리의 모습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거나, 누군가 우리를 무심코 보게 되었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그곳에 펼쳐졌다. 이미지로. 너는 이를테면 글로 설명할 수 없거나 말이 되지 않는 이미지를, 이곳에 이질적으로 펼쳐져가는 이미지의 낯선 모습을 수차례 그려보면서도, 글자가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미처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앞선 문장을 주석의 자리에 두지 않으며 그렇다고 괄호로 묶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미지가 되어버린 글자를 뒤늦게 그려본다. 너는 네가 그것을 읽어낼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네가 그것을 읽을 필요는 없다. 글자가 너를 안내한다.
        한참 걷다가, 묘원과 성지에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쯤 연락이 닿은 친구는 오늘은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아무래도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했던가. 문서의 시간이 계속되었다면 이러한 시답잖은 주고받음도 일일이 남겨져 언젠가 그럴듯한 서한집으로 묶일 테지. 어떤 종류의 우정을 이렇게나마 기록해둔다.
        집에 돌아왔다. 
        책을 펼친다. 펼쳐진 지면을 본다. 도판이 펼쳐져 있다. 산이든, 나무이든, 동굴이든, 돌이든, 뼈이든, 눈에 보이는 모든 입체가 평면화되어 있다. 글이 펼쳐져 있다.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든, 다른 곳에서 벌어진 일이든, 현실이든, 현실이 아니든, 눈으로 읽히는 모든 사건이 평면화되어 있다. 
        너는 안도한다.



김뉘연, 양윤화

시집 『모눈 지우개』 『문서 없는 제목』 『제3작품집』, 소설 『부분』 등을 썼다. (김뉘연)

A와 B가 동시에 있을 때 발생하는 오류와 사건에 관심을 두고 퍼포먼스, 사운드, 설치, 디자인 작업을 해왔다. 이를테면, 당신과 나는 동시에 이 문장을 읽고 있다. 나도 지금 읽으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양윤화)

글은 펼침을 수행하면서 펼침이라는 상태를 이루어간다. (김뉘연)

상상했다, 웹상에 글을 펼치는 방법에 대해. 누군가 글을 읽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며 화면을 계속해서 아래로 밀어내는 장면이 떠올랐다. (양윤화)

2025/03/19
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