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도 높은 장면
펼침


![화가는 사물의 드로잉에 주력하며, 흑연을 주재료로 그림의 명암을 좌우한다. 화가는 사물을 크게 그리기도 하고 작게 그리기도 한다. 화가는 사물을 느리게 그리기도 하고 빠르게 그리기도 한다. 크기와 속도와 무관히 화가가 추구하는 바는 사물의 인물화이다. 화가는 자신이 그리는 하나의 사물이 한 명의 인물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인물이 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듯이 알고 보면 다 다른 사물의 양상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심지어 같은 제작 공정을 거쳐 나온 공산품이라 할지라도 면밀히 살필수록 하나하나 분명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사물마다 다른 시선을 던지려 애쓴다. 그 결과 화가의 그림은 하나의 사물과 너무나 닮게 된 나머지 하나의 사물처럼 보이지 않게 되고,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펼쳐져간다. 주로 도화지에 사물을 그려오던 화가는 얼마 전부터 신문지에 사물을 그려보고 있다. 글자와 사진이 앞서 펼쳐져 있는 회색 신문지 각주 10. “양말에서 실이 나온다. / 그럴 수 있다. // 양말은 실이다. // 구멍은 실이 아니다. // 구멍을 들여다본다. / 구멍이 작다. // 구멍이 커진다. // 양말에서 실이 나온다는 말. // 실이 나오는 양말을 그러니까 실이 양말에서 나오면 // 응. // 누구는 구멍을 계속하려고 한다. // 구멍이 계속된다.” 김뉘연, 「앉는다」, 『문서 없는 제목』, 봄날의책, 2023, 89쪽; 한겨레, 2023년 8월 18일 기사, <[시인의 마을] 앉는다>. 위에서의 드로잉과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한 백지 상태의 도화지 위에서의 드로잉이 동일한 사물을 얼마나 어떻게 달라 보이게 하는지 실험해보는 중이다. 신문지에 사물을 그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가장 어려운 점은 신문지를 구하는 일일 수 있다. 만연한 모든 종류의 구독제를 거부하는 화가는 신문 역시 구독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어 번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구청에 가서 무료 배포용으로 비치된 신문지를 구해 온다. 신문지를 구하러 간 김에 구청의 구내식당에서 합리적인 비용으로 균형 있는 식사를 하고 구청과 집을 오가는 길에 운동 삼아 빠르게 걷는다. 겸사겸사 이루어지는 하루가 그다음 하루로 이어진다. 너는 삶이 글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어지고, 각주 11. 주로. 의문을 남긴다. 각주 12. 때로. 너는 너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각주 13. 너는 너를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너를 숨기는 데 실패한다.](/upload/literature/editor/0876332e-c071-44ba-9159-4c2d65037e2c.png)




김뉘연, 양윤화
시집 『모눈 지우개』 『문서 없는 제목』 『제3작품집』, 소설 『부분』 등을 썼다. (김뉘연)
A와 B가 동시에 있을 때 발생하는 오류와 사건에 관심을 두고 퍼포먼스, 사운드, 설치, 디자인 작업을 해왔다. 이를테면, 당신과 나는 동시에 이 문장을 읽고 있다. 나도 지금 읽으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양윤화)
글은 펼침을 수행하면서 펼침이라는 상태를 이루어간다. (김뉘연)
상상했다, 웹상에 글을 펼치는 방법에 대해. 누군가 글을 읽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이며 화면을 계속해서 아래로 밀어내는 장면이 떠올랐다. (양윤화)
2025/03/19
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