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

김신재

여행중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습니다. 첫 장을 읽고 저는 세상에 있어 주기를 바랐던 바로 그 소설을 만났다고 생각했어요. 독자가 이야기 속의 ‘독자’로 등장하고, 이야기와 그 안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소설의 구조와 글쓰기의 물질성이 드러나는 소설. ‘독자’는 어느 시점엔가 이야기에 개입할지도 모릅니다. 결제에 문제가 생겨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서점을 나섰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혹시 책을 못 구할까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러다 마침 한국어판 번역본이 곧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다림 끝에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막상 실제로 읽게 된 소설은 도입부를 읽으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어요. 책을 읽는 동안 저는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책 한 권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겪어본 것만 같은 이야기 속으로 계속 얽혀들어갔어요. 혹시 비슷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번 호 웹진 《비유》가 이처럼 화면 너머에서 어떤 무궁무진한 경험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합니다. 72호의 ‘비평 교환’은 음악과 미술의 맥락에서 텍스트의 수행적 가능성을 교차해봅니다. 글쓰기와 읽기가 촉발하는 수행을 통해 텍스트가 무엇을 하는지 질문하고, 문학이 구성되는 과정과 그 안팎의 스펙트럼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되기를 바라면서요. 음악비평가 신예슬은 텍스트 스코어를 ‘읽는’ 동안 수행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의 읽기는 음악 경험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나아가 문학 읽기와 어떻게 다른지 질문합니다. 미술비평가 김정현은 일시성을 ‘매체적’ 조건으로 삼아 탄생한 퍼포먼스가 던지는 기록과 재현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퍼포먼스의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그럼에도 재연되는 퍼포먼스의 짧은 역사를 돌아보고, 작업을 통해 말과 글, 소리와 이미지가 어떻게 매개되는지 살펴봅니다. ‘해상도 높은 장면’에서 김뉘연의 글쓰기는 ‘펼침’을 수행합니다. 지침으로 시작한 글은 인물, 장면,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이때 읽기는 양윤화의 ‘펼침’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해 문장과 이미지가 연쇄하면서 불러오는 것들을 마음껏 따라가보시기를 권합니다.
  문장은 인물을, 장면을, 사건을 펼치고, 때로는 알 수 없는 낯선 데까지 가닿습니다. 김솔의 소설에서는 주택 “아래층의 천장과 위층의 방바닥 사이”에 묻힌 시체가, 서이제의 소설에서는 축구 경기장을 거처로 삼은 유령이 나타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검은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사이에서 그들의 행방이 궁금해질 때, 이신영의 동화에서 진이와 현이가 그러한 것처럼 길고양이의 안내를 믿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인간 너머 다양한 존재들 사이로 진입한 후에는 이내 그들을 길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도요. 강지수의 시는 “말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앵무새의 생경한 냄새를 불러오고, 박소란의 시에서는 굴러다니는 보풀 사이에서 작은 짐승의 소리가 들립니다. 연지민의 동시가 포착한 초록 블랙홀을 건너, 전성현의 동화를 읽으며 화성을 오래 지켜온 AI 로봇 블루재킷의 안녕을 함께 빌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지는 ‘판도: 기획을 기획하다’와 ‘문학하는 사람들’에서는 전통적인 제도나 산업 시스템 바깥에서 다른 지도를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본 이들의 생생한 경험을 만나보실 수 있어요. 단편선은 음악 프로듀서로서 음반 제작 과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면면을 짚고, 하미나는 전통적 교육이나 자격에 대한 승인 없이도 동료와 함께 글을 쓰며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인 글방이라는 공동체를 돌아봅니다. 강동호의 비평은 미학적 새로움에 기반한 예술의 정치가 불가능해진 신자유주의 시대에 문학적 새로움의 이론적 가능성을 ‘경제적 원리’의 관점으로 다시 탐구합니다.
  문학은 과거를 기록하고 재현하는 한편 가능한 세계를 펼쳐놓고 새롭게 배치하기도 하죠. 그리고 현재의 행위는 종종 그 경계를 넘습니다. 독자의 ‘협동’은 텍스트를 완결하기보다 계속해서 생성하는 데 기여해요. 그 과정이 때로는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내는 일이 되기도 할까요? 《비유》를 통해 함께 답해볼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다시 본 〈더 폴: 디렉터스 컷〉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망쳐버리려는 로이에게 알렉산드리아가 마침 이렇게 말하네요.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