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홈그라운드
라민 야말은 판정에 대한 불만이 컸는지, 경기가 끝난 후 주심에게 가서 불만을 호소했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이런 식이었겠지. 왜 경기가 과열되도록 두었냐, 그렇게 내버려두니 선수들이 다치지 않았냐. 아니면 골키퍼에게 레드카드를 준 일이나 상대 팀 반칙에 휘슬을 불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했겠지. 그는 심판과 몇 마디 더 나누고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어. 그리고 힘없이 주장 완장을 풀었지.
반면 마테오는 아무런 말이 없었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경기장을 빠져나왔지. 그 누구와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경질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가운데, 완패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특히나 최근 경기 스코어는 마테오를 궁지로 몰아넣었지. 마테오에게는 더이상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어 보였어. 어깨가 많이 무거워 보였지. 그래도 한때는 최고의 선수였는데. 역시나 좋은 감독이 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지. 그런데 뭐,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나는 남몰래 다가가 마테오의 어깨를 두드리곤 했어. 힘내, 마테오. 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날 밤도 어김없이 고요한 밤이 찾아왔어.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서 혼자 공을 차고 있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공을 움직이고 있었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바람에 공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거야. 나는 공을 데굴데굴 구르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게 할 수도 있었지. 나도 내가 이렇게 공을 잘 다루게 될 줄은 몰랐어. 살아 있을 때는 공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었거든. 피구든, 농구든 잘하는 게 없었어.
내 재능을 알아차린 건, 내가 캄프 누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지. 경기장 벤치 앞을 지나치다가, 공이 또르르 굴러가는 걸 보고 알게 되었어.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지. 혹시 지금 바람이 불었나?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건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내가 공 쪽으로 다가갈 때마다 공이 굴러가는 걸 보면서 확신하게 되었어. 그때부터 나는 줄곧 공을 다루며 놀게 되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에 머문 지도 일 년이 넘었구나.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경기를 보았어. 리그 경기가 열릴 때마다 선수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사실은 나도 한 번쯤 경기를 뛰어보고 싶었거든. 물론, 공 좀 다룰 줄 안다고 아무나 덤벼들 수 있는 일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지. 더군다나 내가 낄 자리도 없었고 말이야. 아시다시피 축구는 선발된 열한 명의 선수들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과 같은 처지였던 것도 아니야. 나는 그들처럼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릴 수조차 없었지.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어. 아니, 적어도 이 스페인 땅에서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이 이야기를 하자면 말이 길어질 텐데,
그래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래?
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낯선 타국에서 말이야. 난생처음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들떠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싸고 여권을 만들었단 말이지. 캐리어를 끌고 카탈루냐 광장을 지날 때까지도 몰랐어. 호텔 창문으로 람블라스 시가지를 내려다볼 때까지도 몰랐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술을 좀 사두려고 호텔을 나오지만 않았어도, 아니, 조금만 더 늦게 나왔어도 불의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그 시각에 그곳에 서 있던 게 문제였지.
그날 밤, 나는 호텔 앞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멀리서 슈퍼카 엔진소리가 들려왔지. 슈퍼카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로 건너려고 속도를 높이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나타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도로에 뛰어든 거야. 슈퍼카는 급히 핸들을 옆으로 돌렸어. 나는 미처 피할 틈도 없었지. 나는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어. 공중에 붕 떴다가 차가운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이내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어. 곧바로 응급차가 와 나를 싣고 갔어.
그때 내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어. 다리 한쪽은 힘없이 뒤틀려 있었고, 팔 한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스러져 있었지.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새고 있었어. 나는 나를 붙잡고 울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응급실에 도착해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 내 영혼이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걸 알게 된 거야. 내 몸은 한국으로 이송되었고,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몰라. 아마 장례가 치러졌겠지. 가족들은 시신이 된 나를 봤을 거야.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아. 죽기 전에는 몰랐어. 영혼은 물을 건널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나는 한동안 내가 죽은 곳 주변을 어슬렁거렸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거든. 사고 이후 도로는 말끔하게 정리되었고, 내가 묵었던 호텔방에는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어. 람블라스 거리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볐지. 나는 하루 종일 낯선 언어 속에 파묻혀 있었어. 다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 그들 사이에 섞여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사진 속에서 내 모습을 찾을 수 없었어. 같은 곳에 있지만,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느낌이었지.
내게 남은 건 지루한 나날을 무의미하게 견디는 일뿐이었어. 그건 아주 외로운 일이었지. 나는 반나절 동안 카탈루냐 광장을 빙빙 돌면서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그게 지겨워지면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어. 거리 곳곳에 있는 조각상을 감상하다가, 콜럼버스 동상을 발견하기도 했지. 그러다가 문득 죽어서야 여행이란 걸 해보게 되었네, 라며 자조하기도 했어.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여행을 계속해보기로 했지.
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향해 갔어. 가우디가 설계하고, 짓는 데만 백 년이 걸렸다는 그 성당은 지난 2026년에 완공되었어. 그러니까 완공된 지 꽤 된 거지. 성당이 완공되었을 당시, 나는 사회초년생이었고, 벌어먹고 사느라 바빴지. 좁아터진 월세방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느라,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못 갔다니까. 몇 년간 매일 아침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탔어.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지. 만원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으면서, 기름진 머리 냄새를 맡으면서. 퇴근이 조금이라도 늦어지기만 하면, 거나하게 한잔한 사람들의 술냄새와 구토 냄새까지 견뎌내면서. 마치 사람 속에 파묻혀 사는 기분이었어.
그래, 서울은 그런 곳이었어. 자칫 인파에 치여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야기하는 곳.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버텨야 하는 곳.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어. 아무리 못해도 중간은 가야 하니까. 다들 어떻게 사는지, 얼마나 벌고 얼마나 저금하는지, 또 그중에 얼마나 투자하고 얼마나 많은 자산을 불렸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비교하면서 머리를 굴렸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대출을 받아 서울에 작은 전세방 하나를 구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때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 어째서인지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어. 내게 남은 건 앞으로 갚아야 할 대출금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상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내 미래도 기대되지도 않았더라. 그러다가 하루는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부동산 관련 뉴스와 주식 관련 콘텐츠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온갖 비리와 의혹으로 둘러싸인 정치판 뉴스를 보다가, 문득 멀리 떠나고 싶어졌어. 모든 게 다 지겨워져서.
결국 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까지 오게 되었어.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압도되었지. 정말이지, 숨이 멎을 것 같았어. 물론, 이미 멎은 숨이 또 멎을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 정도로 대단했다는 거야. 나는 수많은 관광객과 함께 성당을 올려다보았어. 하늘 위로 솟은 거대한 네 개의 탑은 마치 빛을 쫓으며 자라나는 식물을 연상케 했지.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어. 그뿐만 아니라, 성당의 외벽을 따라 꾸며진 조각상들도 정말 아름다웠어. 그중에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조각상이 있었지. 거룩한 가족의 탄생이었어. 어째서인지 나는 오랫동안 그 조각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더라. 그렇게 나는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어. 그 사이 그 많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렸지. 아마 집이나 숙소로 돌아갔을 거야. 내게도 돌아갈 곳이 필요했어.
나는 며칠 동안 바르셀로나 곳곳을 누비며, 내가 지낼 만한 곳을 찾아 헤맸어. 사람이 살지 않는 빈방이 없나 둘러보았지. 그러나 내가 찾은 빈방은 모두 살 만한 곳이 못 되었어. 채광도 잘되지 않는 데다가, 가구 하나 없이 휑한 느낌이 싫었어. 뭔가 으스스한 느낌도 싫었지. 나도 이미 죽은 몸이긴 하지만, 그런 내가 이런 말은 하는 건 조금 웃기지만, 어쨌든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무서웠어.
그러다가 우연히 캄프 누에 이르게 되었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는데, 그 기분을 영영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바로 확신했지. 그래, 여기다. 탁 트인 필드에는 초록빛의 잔디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고, 심지어 좋은 냄새까지 났어. 살아 있을 때는 늘 좁아터진 방에서 지내서 그런지, 죽어서는 크고 넓은 곳에서 지내고 싶더군. 그렇게 나는 터를 잡게 된 거야.
그곳에서 지내며, 나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지. 무엇보다도 잔디가 얼마나 부드럽고 푹신푹신하던지, 나는 잔디 위에서 굴러다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곤 했어. 잔디 위에서 한번 잠들면 고양이처럼 잤다니까. 고양이는 열네 시간 이상씩 잠을 자곤 하잖아. 이건 모두 관계자들이 잔디를 정성껏 관리해준 덕분이었어.
또 좋았던 건, 축구를 볼 수 있었다는 거야. 일주일에 한두 번씩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나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축구 경기를 봤지. 이따금 골대 위에 누워서 보기도 하고, 전광판 위에 앉아서 보기도 했어. 드론 위에 올라타 경기장 곳곳을 누비며 경기를 보는 것도 하나의 묘미였거든. 원래 나는 축구 같은 건 잘 몰랐지만, 매주 경기를 보면서 서서히 그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했지.
유니폼에 적힌 이름을 보고 선수들 이름을 한 명씩 외웠어. 다만, 감독은 유니폼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알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 그는 늘 톰 브라운 재킷을 입고 다녔고,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를 내 멋대로 톰 브라운 씨라고 불렀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마테오더군. 그런데 톰 브라운과 마테오는 너무 다른 이름이잖아? 한동안 마테오가 톰 브라운이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톰 브라운이 마테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 어쨌든 마테오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었어. 통역사가 따로 있었거든. 이따금 서툰 스페인어로 선수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대화를 이어가기에는 역시나 역부족이었어. 뭐랄까, 조금 외로워 보였어. 말도 잘 통하지 않은 데다가, 리그 성적까지 부진했기에 더욱 더 그랬을 거야.
그런데 나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니?
그의 이름은 도윤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리’라고 불렀어.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곱슬머리에 아주 앳된 얼굴이었어. 무엇보다도 눈이 크고 맑았지. 체격은 작은 편이었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었어. 그가 앞으로 어떤 플레이를 보여줄까 기대가 되더라. 그는 아마도 메이슨 포터 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 같았어. 등번호는 20번이었지.
그는 잘 적응하는 듯 보였어.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고, 훈련에도 잘 참여했어. 스페인 음식도 입에 잘 맞는 모양이었는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지. 특히 뽈뽀와 크림피데우아를 즐겨먹었지. 훈련이 없는 날에는 팀원들과 함께 스페인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어. 그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지만, 영어로 조금 할 수 있었어. 다른 선수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 라민 야말은 주장답게 새로 온 동양인 선수를 잘 챙겨주었어.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에 데려가 함께 식사도 하고, 빠에야가 맛있는 다른 가게들도 소개해줬지. 스페인 욕도 알려줬어. 스페인에서 유행하는 춤도 알려줬어. 그리고 둘 중 한 명이라도 골을 넣으면 함께 골 세리머니를 하자고 약속을 했어.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는 듯했지. 이제 경기에 출전해 멋지게 골을 넣는 일만 남은 것 같았어.
그렇지만 무슨 일인지 마테오는 선발 명단에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았어. 그는 오랫동안 벤치에 머물렀지. 교체로 들어가는 일도 없었어. 유명 클럽에서 뛴다는 기대를 안고 스페인 땅을 밟았을 텐데, 본인도 실망이 얼마나 컸겠어. 언제부턴가 그는 침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어. 승패와 상관없이, 그는 매번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경기장을 나갔거든.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은 부담만 되었을 거야.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정말 안 좋았지. 아니, 같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괜히 더 마음이 쓰이더라고.
나는 마테오에게 따지고 싶었지. 어째서 그를 벤치에 앉혀놓는 거야? 다른 전술이 없는 거야? 이럴 거면 왜 영입한 거야? 그러나 내 목소리가 전해질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지. 죽어서 이승을 떠돌게 된다는 건, 참 쓸모없는 거구만. 누군가를 붙잡고 토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설득할 수도 없잖아. 그래, 나는 이승에서 한낱 관조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는 그저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의 집 앞까지 가 있더군.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그의 뒤를 밟은 거였어. 아니, 표현은 바로 해야지. 그의 벤츠 위에 붙어서 왔지. 얼마나 빠르게 달리던지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다고. 어쨌든 그렇게 도착한 그의 집은 산츠 몬주익 부근에 위치한 자그마한 단독주택이었어.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더군. 작은 야외 풀장과 정원, 오래된 나무 한 그루까지. 나는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리면서 창문을 통해 그의 동태를 살폈어. 많이 지친 모양인지, 의욕이 꺾인 모양인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파 위에 그대로 누워버리더군.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었어. 그사이 나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지. 그러니까 담을 넘어, 풀장을 지나, 창문이 코에 닿을 때까지. 나는 창문에 찰싹 붙어서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어.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방에서 위스키병을 들고 오더군. 그리고 술을 마시며 축구 중계방송을 보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레알 마드리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지난 경기를 보다가, 나중에는 바르셀로나 경기를 보더라고. 내가 아는 선수가 없는 걸 보니, 아주 오래전 경기 영상인 듯했어.
그나저나 불은 좀 켜고 보지. 어두운 집 안에는 모니터 빛만 밝게 빛나고 있었지. 어찌나 어두웠는지, 그의 모습은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의해 아주 희미한 형태만 보일 뿐이었어. 과장하자면,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고. 나랑 다를 게 없는 처지 같았지. 어둠 속에서 홀로 축구 경기를 보는 그 모습이 나를 슬프게 하더라. 나는 눈시울을 붉혔어. 누군가 볼까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갑자기 창문 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혹시 나를 본 건가? 설마 들킨 건가? 나는 놀라 완전히 얼어버렸지. 그런데 바로 커튼을 치더군.
경기가 끝난 후, 차를 타고 경기장을 빠져나올 때면 홈팬들이 그의 차를 둘러싸고 폭언을 했어. 아마 연봉 토해내라는 식의 이야기였을 거야. 그러다가 한번은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퇴장을 할 때였지. 관중석에 있던 훌리건 한 명이 그를 향해 페트병을 던진 거야. 심한 욕설을 들었어. 다행히 페트병은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고, 훌리건은 관리자들 손에 붙잡혀 경기장 밖으로 끌려나갔지. 그런 놈들은 두 번 다시 경기를 볼 수 없도록 해야 돼. 경기장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고. 어쨌든 이 사건으로 그는 꽤나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이후 그는 계속 예민해져 있었거든.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으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지. 그러다가 하루는 그가 차를 타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면서 차창 밖으로 욕을 뱉은 거야. 자신에게 폭언을 하는 홈팬에게. 그때 그가 뱉은 욕은 라민 야말이 가르쳐준 욕이었어. 아주 찰진 발음이었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스페인어가 많이 늘었더라고. 나는 감탄했어. 그러나 이걸 진심으로 기뻐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그리고 또 한 번은 누군가 그의 차에 마커로 낙서를 해둔 일이 있었어. ‘인비저블맨’이라고. 나는 그가 낙서를 한 사람을 찾아내 멱살을 잡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어. 그가 또 욕을 할까봐 긴장하고 있었지.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그저 허탈하게 웃더라. 그리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차 안에서 티슈를 꺼내 직접 낙서를 지웠어. 태연한 척했지만 아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거야.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었어. 그래서 매일 밤 경기장에 혼자 남아서 공을 차기로 했지. 아니, 정확하게는 공을 다루는 연습을 했어. 공을 멀리 보내는 연습은 물론이고, 공이 잔디를 스치며 낮게 굴러가도록 하는 연습도 했어. 날아가는 공을 살짝 건드려 방향을 바꾸는 연습도 했지. 정말이지, 공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렇게 연습을 한다고 그를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내게도 한번 좋은 기회가 오지 않겠어? 그런 마음으로 공을 다뤘지. 공을 가지고 놀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임했어. 내가 이 팀에 열두번째 선수라는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지. 그랬더니 안 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하더군. 공을 잘 다룬다고 자만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 말이야.
내 노력에 신이 대답이라도 해주듯,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왔어. 지로나와의 경기였지. 그는 선발 출전했고, 나는 그와 함께 필드로 나갔어. 필드에 나가 수많은 관중을 바라보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 이걸 프로 데뷔라고 할 수 있을까? 열두번째 선수도 선수는 선수인 거잖아.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해 뛰기로 다짐했어. 경기 휘슬이 울리자마자 나는 골대 앞으로 갔지. 그리고 전반전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상대팀 선수가 찬 공을 일부러 더 휘게 만들어 골대를 비껴가도록 만들었지. 이따금 골대를 맞고 튕겨나가게 만들기도 했어. 모두 성공적이었지. 연습한 보람이 있더군.
그사이 라민 야말은 혼자서 공을 끌고 상대 진영으로 올라가 골을 넣었어. 말 그대로, 역습에 성공한 거지. 원래 잘하는 선수니까 놀라울 건 없었어. 그는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축구를 못한 적이 없으니까. 내가 도와줄 필요가 뭐 있겠어? 내가 도와줄 사람은 따로 있었어. 나는 그를 생각하며, 이번에는 상대 팀 골대로 질주했어. 그리고 기도했지.
제발 한 번만,
골대를 향해 공을 차줘.
나는 공의 움직임을 주시했지. 선수들은 서로 패스를 주고받으면서 기회를 노렸어. 그는 언제 박스 안으로 뛰어들어갈지 타이밍을 보고 있었지. 누군가 공을 박스 안으로 올려주면, 그가 달려가 슛을 찰 테니까. 그리고 방향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내가 공을 살짝 건드릴 거야. 골키퍼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말이야. 반드시 그가 찬 공이 골대 그물망을 치도록 만들 거야. 내가 다시금 다짐하는 찰나, 그의 발밑에 공이 들어왔어. 순식간에 상대 팀 선수들이 달려들었지. 그는 그들을 피해 공을 끌고 몇 보 더 나아갔고, 공간을 점유했어. 그가 공을 찼고, 골대보다 살짝 높게 날아오는 공을 내가 살짝 건드렸지.
골이었어!
그의 리그 첫 골이었지!
관중석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왔어.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니까. 나는 그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고 싶었어. 그래서 그에게 달려갔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라, 놀란 표정이었지. 같은 팀 선수들이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지. 잘했다며 머리를 헝클고 가는 선수도 있었어. 그는 어안이 벙벙해서 세리머니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 뭐야, 이대로 보내긴 아쉽잖아. 세리머니를 하라고, 그동안 남몰래 연습했던 세리머니 있잖아. 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어. 물론, 들리진 않겠지만 말이야.
경기가 끝난 후, 나는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어. 넓은 필드를 바라보면서 지난 경기를 곱씹어보았지. 나 오늘 정말 대단했다. 도대체 얼마나 큰 활약을 한 거야. 나 자신을 장하게 여기면서, 나중에 중계방송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뻤던 건, 그를 도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어.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 같아 정말 기뻤지. 그런데 무슨 일이었을까. 모두가 떠난 줄 알았는데, 그가 경기장으로 다시 돌아온 거야.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경기장을 둘러봤어. 그러고는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라. 마치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더군. 그래서 나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어. 그랬더니 그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되돌아갔어. 그가 무슨 일로 경기장에 되돌아왔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어.
경기가 끝난 후, 그는 고양이를 입양했어. 아니, 사실은 고양이가 그를 간택했다고 보는 게 맞지. 어쨌든 그 고양이는 그와 함께 산츠 몬주익의 자그마한 단독주택에서 살게 된 거야. 그리고 차비라는 이름도 붙여졌지. 차비는 그가 좋아했던 축구선수 이름을 따온 거였어. 그런데 뭐랄까. 그의 집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니, 박탈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잘 생각해봐. 나를 죽게 만든 고양이가 내가 응원하는 선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나는 갈 곳이 없어서 바르셀로나를 떠돌다가, 겨우 찾아낸 경기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저놈의 고양이는 그럴싸한 집에서 예쁨을 받으며 매일같이 츄르를 받아먹고 산다고? 어째서 내가 아니라 저놈인 거야? 그를 도운 건 나인데, 어째서 정작 그에게 도움을 받는 건 고양이인 거야?
나는 며칠 동안 그의 집 앞을 서성거리며 차비를 주시했어. 그런데 놀라운 건, 차비도 나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는 거야. 내가 창문을 통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차비를 바라보면, 차비도 똑같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어. 뭘 봐, 이 자식아. 혹여나 내가 차비를 자극하기라도 하면, 차비는 곧장 몸을 둥글게 말고 꼬리를 치켜세우곤 했지. 그건 분노했다는 뜻이었어. 차비는 절대 참지 않는 고양이였지. 물론, 나도 참을 생각이 없었어.
나는 차비를 자극했지. 약오르게 하고 싶었어.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정작 약오르는 건 나였어. 차비가 나 때문에 잔뜩 흥분해 있으면, 그가 무슨 일이냐며 차비를 진정을 시켰거든. 털을 쓰다듬으면서, 턱살을 만지면서, 심지어 품 안에 안으면서까지. 그 모습을 보면 나는 약올라 견딜 수 없었어. 그리고 이내 우울해졌지. 그래, 차비에게는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있었던 거야. 차비는 내게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의 집에서 편안하게 뒹구는 차비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거야. 나 여기에 있어. 나도 여기에 있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전할 수 없더라도, 내 존재 정도는 알릴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존재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그때 풀장에 떠 있는 공이 내 눈에 들어왔어.
나는 일단 그의 앞에 공을 들고 나타나보기로 했지. 공중에 떠 있는 공을 보면 그도 눈치를 채지 않을까. 물론, 그가 겁을 먹고 도망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중요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나는 계획한 대로 풀장에 떠 있던 공, 그러니까 그가 집에 머물 때 이따금 가지고 놀던 공을 공중에 띄웠어. 그러고서는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지.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어. 그는 공이 공중에 떠 있는 걸 보고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지.
하, 깜짝이야. 이번에는 또 뭐야.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순간 나를 보고 하는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어. 당황한 나는 공을 바닥에 떨구고야 말았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어. 지금 저한테 한 말이에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캄프 누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봤다고 하더군.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실루엣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자기가 헛것을 봤나 생각했대. 심지어 혼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대. 그런데 그것이 어느 날은 골대 위에 붙어 있고, 또 어느 날에는 드론 위에 붙어 있길래, 역시나 살아 있는 존재는 아니겠거니 했다는 거야. 그냥 캄프 누에 사는 귀신 정도로 생각했던 거지. 뭐,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러다가 하루는 내가 자기 집 앞마당까지 따라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대. 경기장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집까지 따라와서 놀랐던 거지. 그런데 내가 별다른 해코지는 하지 않길래,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둔 거라고 했어. 그리고 내게 묻더군. 혹시 그날 골을 넣게 도와준 것도 나였냐고, 골을 넣을 때 무언가 희미한 형체가 보였는데, 경기 도중인 데다가 정신이 없어서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했다고.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그가 먼저 물어봐줘서 반가울 따름이었지. 그래서 기쁜 마음에 곧장 대답했어. 그리고 도움을 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도 말했어. 도와줬으니 제발 내 덕을 알아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어. 다만, 내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거지. 그만큼 내가 그를 아끼고 생각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거든. 그러나 정작 그 말은 들은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어.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겼지. 그리고 이내 내게 말했어. 다음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그러고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더군.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었어. 역시나 죽어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거야. 도움을 주는 일도, 사랑을 주거나 받는 일도, 누군가와 깊이 관계를 맺는 일도 할 수가 없었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내게 다시 육체가 생기지 않는 한, 지금 내가 하는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겠지.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게 사실이잖아.
나는 당분간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캄프 누에 있는 빈 창고에 들어가 숨었지. 그곳에서는 아주 좁은 데다가 어둡고 쾌쾌한 냄새까지 났어. 하지만 혼자 있기에 그만한 장소가 없었거든. 여기라면 아무도 모르게 울 수 있겠지. 초라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그곳에 처박혀 오래도록 나오지 않을 예정이었어.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창고 문이 열리는 거야. 문을 열 건 뜻밖의 인물이었지. 바로 마테오였어. 오랜만에 본 마테오의 얼굴은 말이 아니더라고. 안 본 사이에 수척해진 데다가, 흰머리까지 나있더라. 창고 안으로 들어온 마테오는 사정없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어. 심지어 벽에 머리로 쿵쿵 박기도 했지. 이마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어. 마테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어.
뒤늦게 달려온 스태프들은 마테오를 보고 깜짝 놀란 기색이었어. 그들은 급히 마테오의 상태를 살폈지만, 그는 그들에게 가라고 손짓했어. 그건 혼자 있고 싶다는 신호였지. 그는 아무도 없는 창고에서 남아 티슈로 피를 닦아냈어. 그러다가 결국 눈물을 보였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속된 성적 부진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짐작해보았지. 누군가는 감독답지 못한 모습, 그러니까 리더답지 못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어. 감독이나 리더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 보이더군.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잖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동시에 마구 미워하게 되고, 이따금 그 사랑은 그릇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하지. 이 멍청아, 왜 그것밖에 하지 못하니, 어째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라고 자기 자신에게 모진 말을 하면서. 나는 그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어.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마테오가 울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그 순간 문득 삶이 참 흥미롭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는 한때 최고의 축구선수였지만, 그의 삶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잖아. 그렇게 마테오의 삶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그는 낯선 나라에서 감독으로서 또다른 삶을 시작했고, 이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가는 중이었어.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다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갔어. 조명은 한밤에도 성당을 밝게 비추고 있었지. 성당은 여전히 웅장하고 아름다웠고, 나는 그런 성당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어. 그러자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군. 마치 몸이 있는 것처럼,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폐에 가득 차는 느낌까지 들었어.
이번에는 성당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볼 생각이었어. 나는 힘을 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지. 그리고 수직으로 쭉 올라갔어. 저 위에서는 뭐가 보일까 하고 기대를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중간 정도 올라왔을 때,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였어. 그건 바로 리였어. 그는 혼자서 조깅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방향을 틀어 그를 따라가고 있더라. 그리고 언젠가 그랬듯, 나는 또다시 그의 집에 이르게 되었어.
차비는 그사이 살이 좀 올라 있었어. 여전히 평온해 보였지. 무슨 일인지, 오랜만에 다시 보았을 때는 나를 경계하지 않더라. 등을 말고 꼬리를 치켜세우는 일도 없었지. 창문 밖에 서 있는 나를 그저 흘깃 바라보고는 말았어.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너도 언젠가 길거리를 떠도는 처지였을 텐데. 너도 갈 곳이 없어서 그랬겠지,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고 그랬겠지.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렇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니, 새 삶이 시작된 거 아니겠어?
차비와 마찬가지로, 그사이 그에게도 삶의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았어. 그는 클럽에서 진행하는 훈련 이외에도 운동을 더 하고 있었지. 이른 아침부터 조깅을 했고, 사정이 있어서 못 하게 되면 한밤중에라도 나가서 뛰었어. 훈련장에 남아 슛을 연습하거나 개인기를 마스터했어. 눈빛부터 태도까지,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지.
경기는 계속해서 흥미롭게 진행되었어. 이후 상대팀에게 한골 먹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선방을 보여줬고, 결국 경기는 승리로 마무리되었지. 경기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나왔어. 마테오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더군. 리그 우승은커녕, 이번 경기 한번 이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말이야. 어쨌든 지금껏 부진했던 성적에 비하면, 리그를 마무리하기 좋은 경기였어.
그날 밤, 나도 텅 빈 경기장 한가운데 서서 힘껏 공을 찼어.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이내 그물망을 흔들었지. 그리고 긴 정적이 흘렀어. 환호 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더군. 나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캄프 누를 떠나기로 결심했지.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었어. 하지만 나는 원래 여행 중이었잖아. 어디로든 가면 되겠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아니, 그렇지 않았어.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거기에서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그 사실이 슬프진 않아.
왜냐면 그게 나의 끝은 아니니까.
나는 여전히 여기서 살아가고 있잖아.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그가 축구공을 들고 걸어오는 게 아니겠어? 그러니까 차비가 맞았던 거야. 그는 나를 보더니 멋쩍게 웃더라.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냈어.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고, 차갑게 굴어서 미안했다고. 내가 멀리서 자기를 지켜봐주는 걸 느꼈대. 그러고는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공을 찼어. 나는 재빨리 공을 받았지. 나는 내 발밑에 있는 공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어. 그 순간 문득 깨달았지. 지금껏 누군가를 향해 공을 차본 적이 없다는 걸 말이야.
나는 용기를 내어 공을 찼어. 공은 그에게 정확히 날아갔고, 그는 다시 공을 받아 찼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우리는 몇 번을 더 계속했어. 마치 무언의 대화를 나누듯이. 공을 세게 차기도 하고, 살짝 차기도 하고, 멀리 차기도 하면서. 공을 차는 소리가 큰 경기장 전체를 가득 메웠지. 그 소리와 함께 내 숨소리도 들리기 시작했어.점점 숨이 차올랐던 거야. 마치 살아있는 듯 느낌이더군.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었어. 그래서 계속했지. 우리는 멈추지 않았어. 차비도 공을 따라 잔디 위를 신나게 뛰어다녔고, 이따금 앞발로 공을 차기도 했지. 우리는 마치 공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어. 공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리며,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포물선을 끝없이 그려갔지.
그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이었어.
서이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2018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 『0%를 향하여』 『낮은 해상도로부터』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와 에세이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공저) 등을 출간했다. 젊은 작가상, 오늘의 작가상,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했다.
해외축구경기를 생중계로 보려면 새벽에 일어나야만 한다. 한마디로, 스페인 축구를 보려면 스페인의 시간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에 일어나 있으면, 마치 혼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새벽마다 잠시 다른 세상에 머물며 큰 위안을 받았다. 그러니까 밝게 빛나는 모니터 속 푸른 잔디 위에서.
근 몇 년간, 나는 감독으로서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사비 에르난데스를 응원하게 되었다. 성적이 부진하거나 부상을 당해 뛰지 못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나 자신을 응원할 수 있는 힘까지 얻게 되었다. 또 나는 엘클라시코 경기 도중 경기장에 난입한 고양이가 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한 번쯤 공의 서사를 쓰고 싶었다. 여러 명의 선수들이 공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서사, 그러니까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무한하게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를.
2025/03/19
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