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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적어도 ‘곁의 곁’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인터뷰이는 유어센텐스 멤버 다영의 친구인 오재형님이다. 평소 오재형님을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영상과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자기 정체성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니 자유분방하고 유니크한 사람일 거라는 기대에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짙은 솔직함과 매력이 묻어 있는 흥미로운 문장들을 많이 채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번 인터뷰는 김다영과 윤형근이 묻고 오재형이 답을 했다.
*
윤형근(이하 ‘윤’) :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오재형(이하 ‘오쟁’)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엄기호, 나무연필, 2018)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최근에 김일란1) 감독님이 페이스북에 공유한 책인데, 김일란 감독님이 추천하는 책이라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읽게 됐어요. 이 책을 쓴 엄기호라는 분이 되게 유명한 것도 있었고요. 이 책은 억울한 일을 당해 엄청난 고통을 자기 안에 갖게 된 사람이 어떻게 자기 고통에 스스로 함몰되는지, 그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언어를 어떻게 잃어가는지,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에 관해 적고 있어요.
북한산이 보이는 그의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필름 사진을 인화하고 나서야, 그 멋진 풍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았다.
윤 : 사람들과의 언어를 잃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오쟁 :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한다고 하면, 생각이나 감정 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잖아요. 대화라는 것도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고통을 받는 사람은 주는 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내 고통을 말하는 데 바쁜 거죠. 고통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응답할만한 걸 기대하지 않고 그냥 막 쏟아내는 거예요.
김다영(이하 ‘김’) : 자기 안에 무언가가 너무 많아서 내보내려고 하는 건가요?
오쟁 : 네, 그래서 고통의 당사자 곁에 있으면 응답을 요하지 않는 말들을 계속 들어야 하니까 힘들어지는 거지요. 저자는 그런 과정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과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서로의 언어를 잃어가고 허수아비처럼, 유령처럼 존재하게 되는지에 대해 말해요. 그리고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또다른 곁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곁의 곁이요. 그 사람들에게도 뭔가 해소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니까요.
윤 : 결국 고통 받는 사람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있어야 한다는 거네요?
오쟁 : 만약에 내 친구 다영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고통 받고 있으면 나는 당연히 곁이 될 거예요. 그런 저에게는 제 뜻을 이해하고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요. 고통을 나누고 일상생활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요. 최근에 <어른이 되면>2)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비슷한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감독 동생이 발달 장애인이라 보호자가 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보호를 전적으로 부모, 특히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혼자 맡아왔어요. 어머니 혼자 자기 삶이 없어진 채로 지내고, 가족 역시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해체가 돼요. 근데 이 다큐를 보다보면, 감독 친구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감독이 무슨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자기 친구들에게 동생을 맡겨요. 그러면서 ‘만약에 우리 엄마한테 24명의 친구들이 있고 그 친구들이 하루에 한 시간씩만 내 동생을 봐줬더라면 우리 가족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내레이션이 나와요. 그게 딱 이 내용이에요. ‘고통의 곁에는 곁이 필요하다’는 내용.
윤 : 물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게 있어서 서로 나눠야 하는 것도 맞지만, 저마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삶의 고통이 있는 상태에서 단순히 곁에도 곁이 필요하다는 말로만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오쟁 : 고통에는 위계가 없는 거 같아요. ‘나는 자식을 잃었으니 되게 큰 고통이고 너는 여자친구랑 헤어졌으니까 그 정도는 고통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저는 적어도 제 스스로를 집어삼킬만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곁의 곁이 될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는 생각해요. 이 책을 읽고 나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더 내려놓게 됐어요. 제가 20대 후반에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요. 강정마을 해군기지 시위를 할 때 그림 그려서 내려가고 같이 투쟁하고, 세월호 때도 그림 그려서 1인 시위하면서, ‘아 이게 진짜 예술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대추리나 강정마을, 밀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예술가 중에 아예 자기 삶 자체를 그곳으로 이주해서 주민이 되는 방식으로 연대하는 걸 보고 되게 많이 동경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 이벤트에 참여하는 사람이더라고요. 난 너무 이기적이게도, ‘빨리 집에 가서 혼자 삼겹살을 먹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모습에 스스로한테 실망도 많이 했고요. 근데 이 책을 보고 약간의 위안이 됐던 건, ‘내가 고통의 곁은 될 수 없지만 곁의 곁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 거예요. 사회문제에 이벤트 식으로 참여해도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고, 이런 사람들도 사회에 필요한 존재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하면서부터 마음의 부담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최근 화가로서 마지막 전시를 마치고 은퇴를 한 그이지만, 작업실 곳곳에서 그가 그린 그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은퇴한 화가의 마지막 보루(堡壘)같이 느껴졌던 작업실 공간.
윤 : 곁의 곁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고통의 크기가 많이 줄어들 거 같은데요. 그럼 과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바로 옆에는 누가 설 것인가,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궁금함이 드네요.
오쟁 : 고통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고 그와 모르는 사이더라도 먼저 나서서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도 있긴 하죠. 하지만 보통은 자기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친구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우린 곁이 될 거예요. 곁에 있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에 따라 곁이라는 자리를 부여받는 거 같아요. 가까운 사람이 고통에 빠져 있는데, 곁에 없을 수가 없잖아요.
김 : 얘기를 듣다보니, 엄마 생각이 났어요. 예전에 엄마가 아빠랑 싸우고 나면 제게 전화를 해서 “아빠가 술을 먹고 어쩌고저쩌고,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듣기가 싫은 거예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스피커폰 켜서 “어…… 어……” 하고 대답 소리만 계속 냈어요. ‘나는 그 고통을 계속해서 외면했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쟁 :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고통을 받아주는 게 쉽지 않은 거 같아요. 저도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생활을 1, 2년 한 적이 있었어요. 반신불수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고 화장실도 혼자 못 다녀오실 정도로 아프셨어요. 다행히 회복을 잘 하셔서 두 발로 걸어다니시게 됐는데, 그 이후로 엄마의 삶도 바뀌고 저도 엄마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근데 만약 이렇게 지나가는 병이 아니라, 계속해서 고통 받다가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병이었다면, 계속 엄마 곁에서 화장실을 모셔다 드리고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솔직히 모르겠어요.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만약에 그게 잠깐 지나가는 고통이라면, 이 고통이 나한테 뭔가 의미가 있다거나 내 삶을 전환해줄 어떤 계기로서 작용할 거라고 생각을 한다고 해요. 근데 이 고통이 계속해서 이어질 경우, 혹은 고통의 끝이 죽음 밖에 안 보이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고통은 의미를 발견하기 힘든 것이 되어버리고, 결국 사람은 무의미한 고통 속에 잠식되고 만다고 하더라고요. 고통이 자신을 집어삼키게 되는 거죠.
김 : 고통을 겪는 당사자도 자신의 고통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 곁을 지키는 사람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견디게 되는 거 같아요.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겠군요.
오쟁 : 그렇죠. 가벼운 예를 든다면, 시간을 두고 종종 만나는 친구의 힘든 이야기는 다 들어줄 수 있어요. 근데 만약 애인이 하는 힘든 이야기를 매일매일 들어야 한다면, 그거는 사실 괴롭잖아요.
김 : 반대 입장에서, 그러니까 어떤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입장에서 얘기해보자면, 저는 제 힘든 상황이나 감정을 상대에게 얘기를 안 하면 해소가 안 되더라고요. 나의 힘듦을 내 안에서 없애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던 손이, 다큐를 찍으려 카메라를 들게 되고,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지금은 피아노 건반을 치고 있다. 앞으로 오재형의 ‘손’은 무엇을 하게 될까.
오쟁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표현을 하라는 건데, 구체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해요. 자기 고통을 글로 써보면 거리 두기가 되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라는 말이 적혀 있어요. 사실 제가 공황장애3)가 왔을 때, 글을 쓰게 된 것4)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어요.
윤 : 고통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또는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글을 쓰는 게 가능할까요? 실상은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오쟁 : 사실 글을 쓴다는 거 자체가 평소에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좀 어렵게 느껴질 것 같아요. 근데 저한테는 글을 쓰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어요. 저는 예전부터 글을 계속 써온 사람이니까. 제 고통을 글로 표현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희열도 느꼈어요. ‘너무 잘 쓴 거 같아’ ‘이거 엄청난 소재다’라고 생각하면서 작업했어요.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김 : 저는 그래도 남한테 토로하는 게 제일 편한 거 같아요.
윤 : 근데 남의 고통이나 울분을 계속해서 듣다보면, 듣는 사람 안에도 안 좋은 감정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는 거 같아요. 누군가는 그냥 듣고 흘려버리라고 말하지만, 흘려보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거 같거든요. 그러다보면, 듣는 사람도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가게 되는 거 같아요.
김 : 그런 그의 곁에 또다른 곁이 필요하겠네요.
윤 : 저 같은 경우에는 제 힘듦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기 어려워해요. 내가 전달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를 떠나서 듣는 사람한테 그 상처나 고통이 남는다는 걸 아니까, 얘기하기조차 망설여져요.
오쟁 : 제 가까운 사람 중에 우울증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어요. 증상 중에 하나가 자살충동인데, 그 친구가 가끔씩 그런 뉘앙스를 풍겼어요. 근데 그 친구 말로는 ‘그냥 하는 말이다, 정말로 실행하지는 않을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제가 화를 냈어요. 너무 괴롭더라고요. 그 친구가 ‘나는 우울증이고 그럴 수 있다’고 했고, 저는 할말이 없어져서 그냥 눈물이 났어요. 엉엉 울어버렸어요.(웃음)
윤 : 왜 눈물이 났을까요?
오쟁 : 친구가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듣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던 거죠. 상대의 고통을 어떻게 듣고 흘려버릴 수만 있겠어요. 감정이 제 안에 쌓였다가 눈물로 터져나온 거 같아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하는 이야기는 고통을 곁에 있는 사람한테 전달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대화를 나눌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여러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책에서는 ‘재밌는 대화’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고통 받는 사람이 ‘나도 이런 대화를 할 기회가 있구나’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거죠. 자기 고통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라는 건,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라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고통을 겪어내는 자기만의 건강한 방법을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인터뷰를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손을 많이 사용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순간은 어떤 말을 할 때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어른이 되면> 영화 얘기를 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김 : 곁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 자기 삶에 집중할 때, 되레 손가락질을 받기도 해요.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한다고요.
오쟁 : 책에서도 고통의 곁에 있던 사람이 자기가 감당이 안 되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개인에게 ‘절대적 책임’을 부여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 부모에게는 아이에 대한 ‘절대적 보호’란 역할이 주어지고, 보호자는 눈을 한시도 아이에게서 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거든요. <어른이 되면>에서 부모님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감독이 이 영화에서만큼이라도 부모님을 해방시켜드리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어요.
고통의 곁에 있으면서 힘들 때, 쉴 수 있는 혹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인 거지요. 근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게,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장애인 시설이 따로 없이 같이 살아가는 사회. 이 얘기를 들으면서, 괜히 또 ‘나는 뭐하고 있나?’ ‘나는 뭔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하는 죄책감이 들어요. 20대 후반에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김 : 콤플렉스 같이?
오쟁 : 나는 너무 경치 좋은 데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 : 우리 어릴 적에 주입식으로 위인전 읽으면서 ‘나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고 특별한 일을 해야 하고 사회에 굉장히 도움이 되어야 하고 돈도 잘 벌어야 한다’는 것이 무의식중에 쌓여서 그런 거 같아요.
오쟁 : 주변에도 보면 그런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잖아요. 송윤혁5) 감독 같은 경우에도 저랑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빈곤퇴치운동도 하시고…… ‘와, 저 사람 정말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대단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뭘까 생각해요.
윤 : 오히려 ‘대단하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거 아닌가요?
오쟁 : 그 사람을 너무 치켜세우면서 특별한 일을 하는 위인의 존재로 상정을 하는 것이, 나랑은 거리가 먼 다른 존재로 만드는 거라는 인식에 공감해요. 근데 어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고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고 생각하게 돼요.
윤 : 그럴수록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고통의 곁, 곁의 곁이 될 수 있는 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찾아내는 태도가 중요할 거 같네요.
윤 : 책에서 특별히 좋았던 부분이 있다면?
오쟁 :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읽어볼게요. “고통을 겪으며 자기에게 함몰된 이가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 응답으로서의 말이다. 응답을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딜레마이다. 그래서 그 말이 파국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내뱉게 된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 넌 내 마음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곁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그들은 고통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자기로부터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하고 있는 말을 들어야 한다. 또한, 그 말에 응답하더라도 그에 대한 상대의 응답을 들을 수 없다. 그들이 빈번히 경험하는 것은 어떤 말에 응답한 자기의 말과 그에 대한 상대의 응답이 전혀 연결되지 않고 뚝뚝 끊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을 하는 의미가 없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말을 듣고 해야 하는 자리, 즉 곁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통의 곁에 있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고통이다. 그래서 넌 내 고통을 모른다하고 파국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6)
윤 : 이 부분을 밑줄 그은 이유가 궁금해요.
오쟁 : 저는 필자가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지점을 집어내는 게 흥미로웠어요. 보통은 그 고통을 받는 당사자한테만 집중을 하잖아요. 물론, 우리 사회가 보통 고통 받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건, 자신의 고통을 자극적이고 감성적으로 전시하기를 바라는 부분에 집중을 하지만요.
그런데 그런 요구나 질문들 말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제게 새롭게 다가왔던 거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곁에 있던 사람으로서의 저, 곁에 없는 사람으로서의 저, 그리고 이런 저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한번 더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윤 : 오늘 대화가 제게도 그런 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윤형근(이하 ‘윤’) :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오재형(이하 ‘오쟁’)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엄기호, 나무연필, 2018)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최근에 김일란1) 감독님이 페이스북에 공유한 책인데, 김일란 감독님이 추천하는 책이라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읽게 됐어요. 이 책을 쓴 엄기호라는 분이 되게 유명한 것도 있었고요. 이 책은 억울한 일을 당해 엄청난 고통을 자기 안에 갖게 된 사람이 어떻게 자기 고통에 스스로 함몰되는지, 그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언어를 어떻게 잃어가는지,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에 관해 적고 있어요.
북한산이 보이는 그의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필름 사진을 인화하고 나서야, 그 멋진 풍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았다.
윤 : 사람들과의 언어를 잃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오쟁 :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한다고 하면, 생각이나 감정 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잖아요. 대화라는 것도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데, 고통을 받는 사람은 주는 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내 고통을 말하는 데 바쁜 거죠. 고통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응답할만한 걸 기대하지 않고 그냥 막 쏟아내는 거예요.
김다영(이하 ‘김’) : 자기 안에 무언가가 너무 많아서 내보내려고 하는 건가요?
오쟁 : 네, 그래서 고통의 당사자 곁에 있으면 응답을 요하지 않는 말들을 계속 들어야 하니까 힘들어지는 거지요. 저자는 그런 과정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과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서로의 언어를 잃어가고 허수아비처럼, 유령처럼 존재하게 되는지에 대해 말해요. 그리고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또다른 곁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곁의 곁이요. 그 사람들에게도 뭔가 해소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니까요.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게 됐어요
윤 : 결국 고통 받는 사람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있어야 한다는 거네요?
오쟁 : 만약에 내 친구 다영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 고통 받고 있으면 나는 당연히 곁이 될 거예요. 그런 저에게는 제 뜻을 이해하고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요. 고통을 나누고 일상생활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요. 최근에 <어른이 되면>2)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비슷한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감독 동생이 발달 장애인이라 보호자가 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 보호를 전적으로 부모, 특히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혼자 맡아왔어요. 어머니 혼자 자기 삶이 없어진 채로 지내고, 가족 역시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해체가 돼요. 근데 이 다큐를 보다보면, 감독 친구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감독이 무슨 일이 있을 경우에는 자기 친구들에게 동생을 맡겨요. 그러면서 ‘만약에 우리 엄마한테 24명의 친구들이 있고 그 친구들이 하루에 한 시간씩만 내 동생을 봐줬더라면 우리 가족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내레이션이 나와요. 그게 딱 이 내용이에요. ‘고통의 곁에는 곁이 필요하다’는 내용.
윤 : 물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게 있어서 서로 나눠야 하는 것도 맞지만, 저마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삶의 고통이 있는 상태에서 단순히 곁에도 곁이 필요하다는 말로만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오쟁 : 고통에는 위계가 없는 거 같아요. ‘나는 자식을 잃었으니 되게 큰 고통이고 너는 여자친구랑 헤어졌으니까 그 정도는 고통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저는 적어도 제 스스로를 집어삼킬만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고 곁의 곁이 될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는 생각해요. 이 책을 읽고 나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더 내려놓게 됐어요. 제가 20대 후반에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요. 강정마을 해군기지 시위를 할 때 그림 그려서 내려가고 같이 투쟁하고, 세월호 때도 그림 그려서 1인 시위하면서, ‘아 이게 진짜 예술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대추리나 강정마을, 밀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예술가 중에 아예 자기 삶 자체를 그곳으로 이주해서 주민이 되는 방식으로 연대하는 걸 보고 되게 많이 동경을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 이벤트에 참여하는 사람이더라고요. 난 너무 이기적이게도, ‘빨리 집에 가서 혼자 삼겹살을 먹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모습에 스스로한테 실망도 많이 했고요. 근데 이 책을 보고 약간의 위안이 됐던 건, ‘내가 고통의 곁은 될 수 없지만 곁의 곁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 거예요. 사회문제에 이벤트 식으로 참여해도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고, 이런 사람들도 사회에 필요한 존재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하면서부터 마음의 부담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최근 화가로서 마지막 전시를 마치고 은퇴를 한 그이지만, 작업실 곳곳에서 그가 그린 그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은퇴한 화가의 마지막 보루(堡壘)같이 느껴졌던 작업실 공간.
곁에 있는 건 선택이 아니라, 역할로 부여받는 거 같아요
윤 : 곁의 곁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고통의 크기가 많이 줄어들 거 같은데요. 그럼 과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바로 옆에는 누가 설 것인가,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궁금함이 드네요.
오쟁 : 고통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고 그와 모르는 사이더라도 먼저 나서서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도 있긴 하죠. 하지만 보통은 자기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친구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우린 곁이 될 거예요. 곁에 있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에 따라 곁이라는 자리를 부여받는 거 같아요. 가까운 사람이 고통에 빠져 있는데, 곁에 없을 수가 없잖아요.
김 : 얘기를 듣다보니, 엄마 생각이 났어요. 예전에 엄마가 아빠랑 싸우고 나면 제게 전화를 해서 “아빠가 술을 먹고 어쩌고저쩌고,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듣기가 싫은 거예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스피커폰 켜서 “어…… 어……” 하고 대답 소리만 계속 냈어요. ‘나는 그 고통을 계속해서 외면했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쟁 :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고통을 받아주는 게 쉽지 않은 거 같아요. 저도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생활을 1, 2년 한 적이 있었어요. 반신불수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고 화장실도 혼자 못 다녀오실 정도로 아프셨어요. 다행히 회복을 잘 하셔서 두 발로 걸어다니시게 됐는데, 그 이후로 엄마의 삶도 바뀌고 저도 엄마한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근데 만약 이렇게 지나가는 병이 아니라, 계속해서 고통 받다가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병이었다면, 계속 엄마 곁에서 화장실을 모셔다 드리고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솔직히 모르겠어요.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만약에 그게 잠깐 지나가는 고통이라면, 이 고통이 나한테 뭔가 의미가 있다거나 내 삶을 전환해줄 어떤 계기로서 작용할 거라고 생각을 한다고 해요. 근데 이 고통이 계속해서 이어질 경우, 혹은 고통의 끝이 죽음 밖에 안 보이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고통은 의미를 발견하기 힘든 것이 되어버리고, 결국 사람은 무의미한 고통 속에 잠식되고 만다고 하더라고요. 고통이 자신을 집어삼키게 되는 거죠.
김 : 고통을 겪는 당사자도 자신의 고통 때문에 힘들겠지만, 그 곁을 지키는 사람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견디게 되는 거 같아요.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겠군요.
오쟁 : 그렇죠. 가벼운 예를 든다면, 시간을 두고 종종 만나는 친구의 힘든 이야기는 다 들어줄 수 있어요. 근데 만약 애인이 하는 힘든 이야기를 매일매일 들어야 한다면, 그거는 사실 괴롭잖아요.
김 : 반대 입장에서, 그러니까 어떤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입장에서 얘기해보자면, 저는 제 힘든 상황이나 감정을 상대에게 얘기를 안 하면 해소가 안 되더라고요. 나의 힘듦을 내 안에서 없애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던 손이, 다큐를 찍으려 카메라를 들게 되고,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지금은 피아노 건반을 치고 있다. 앞으로 오재형의 ‘손’은 무엇을 하게 될까.
고통을 겪어내기 위한 방법
오쟁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표현을 하라는 건데, 구체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해요. 자기 고통을 글로 써보면 거리 두기가 되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라는 말이 적혀 있어요. 사실 제가 공황장애3)가 왔을 때, 글을 쓰게 된 것4)도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어요.
윤 : 고통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또는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글을 쓰는 게 가능할까요? 실상은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오쟁 : 사실 글을 쓴다는 거 자체가 평소에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좀 어렵게 느껴질 것 같아요. 근데 저한테는 글을 쓰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어요. 저는 예전부터 글을 계속 써온 사람이니까. 제 고통을 글로 표현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희열도 느꼈어요. ‘너무 잘 쓴 거 같아’ ‘이거 엄청난 소재다’라고 생각하면서 작업했어요.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김 : 저는 그래도 남한테 토로하는 게 제일 편한 거 같아요.
윤 : 근데 남의 고통이나 울분을 계속해서 듣다보면, 듣는 사람 안에도 안 좋은 감정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는 거 같아요. 누군가는 그냥 듣고 흘려버리라고 말하지만, 흘려보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거 같거든요. 그러다보면, 듣는 사람도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가게 되는 거 같아요.
김 : 그런 그의 곁에 또다른 곁이 필요하겠네요.
윤 : 저 같은 경우에는 제 힘듦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기 어려워해요. 내가 전달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를 떠나서 듣는 사람한테 그 상처나 고통이 남는다는 걸 아니까, 얘기하기조차 망설여져요.
오쟁 : 제 가까운 사람 중에 우울증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어요. 증상 중에 하나가 자살충동인데, 그 친구가 가끔씩 그런 뉘앙스를 풍겼어요. 근데 그 친구 말로는 ‘그냥 하는 말이다, 정말로 실행하지는 않을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제가 화를 냈어요. 너무 괴롭더라고요. 그 친구가 ‘나는 우울증이고 그럴 수 있다’고 했고, 저는 할말이 없어져서 그냥 눈물이 났어요. 엉엉 울어버렸어요.(웃음)
윤 : 왜 눈물이 났을까요?
오쟁 : 친구가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듣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던 거죠. 상대의 고통을 어떻게 듣고 흘려버릴 수만 있겠어요. 감정이 제 안에 쌓였다가 눈물로 터져나온 거 같아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하는 이야기는 고통을 곁에 있는 사람한테 전달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대화를 나눌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여러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책에서는 ‘재밌는 대화’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고통 받는 사람이 ‘나도 이런 대화를 할 기회가 있구나’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거죠. 자기 고통을 글이나 말로 표현하라는 건,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라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고통을 겪어내는 자기만의 건강한 방법을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인터뷰를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손을 많이 사용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순간은 어떤 말을 할 때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어른이 되면> 영화 얘기를 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나는 뭘 하고 있나
김 : 곁이라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 자기 삶에 집중할 때, 되레 손가락질을 받기도 해요. 고통 받는 사람을 외면한다고요.
오쟁 : 책에서도 고통의 곁에 있던 사람이 자기가 감당이 안 되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개인에게 ‘절대적 책임’을 부여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발달장애 부모에게는 아이에 대한 ‘절대적 보호’란 역할이 주어지고, 보호자는 눈을 한시도 아이에게서 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거든요. <어른이 되면>에서 부모님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감독이 이 영화에서만큼이라도 부모님을 해방시켜드리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어요.
고통의 곁에 있으면서 힘들 때, 쉴 수 있는 혹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인 거지요. 근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게,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실제로 구현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장애인 시설이 따로 없이 같이 살아가는 사회. 이 얘기를 들으면서, 괜히 또 ‘나는 뭐하고 있나?’ ‘나는 뭔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하는 죄책감이 들어요. 20대 후반에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김 : 콤플렉스 같이?
오쟁 : 나는 너무 경치 좋은 데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 : 우리 어릴 적에 주입식으로 위인전 읽으면서 ‘나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고 특별한 일을 해야 하고 사회에 굉장히 도움이 되어야 하고 돈도 잘 벌어야 한다’는 것이 무의식중에 쌓여서 그런 거 같아요.
오쟁 : 주변에도 보면 그런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잖아요. 송윤혁5) 감독 같은 경우에도 저랑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빈곤퇴치운동도 하시고…… ‘와, 저 사람 정말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대단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뭘까 생각해요.
윤 : 오히려 ‘대단하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거 아닌가요?
오쟁 : 그 사람을 너무 치켜세우면서 특별한 일을 하는 위인의 존재로 상정을 하는 것이, 나랑은 거리가 먼 다른 존재로 만드는 거라는 인식에 공감해요. 근데 어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고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고 생각하게 돼요.
윤 : 그럴수록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과 동시에, 고통의 곁, 곁의 곁이 될 수 있는 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찾아내는 태도가 중요할 거 같네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윤 : 책에서 특별히 좋았던 부분이 있다면?
오쟁 :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읽어볼게요. “고통을 겪으며 자기에게 함몰된 이가 잃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 응답으로서의 말이다. 응답을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고통을 겪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딜레마이다. 그래서 그 말이 파국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내뱉게 된다. 넌 내 고통을 모른다. 넌 내 마음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곁에 있는 사람은 어떤가. 그들은 고통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자기로부터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하고 있는 말을 들어야 한다. 또한, 그 말에 응답하더라도 그에 대한 상대의 응답을 들을 수 없다. 그들이 빈번히 경험하는 것은 어떤 말에 응답한 자기의 말과 그에 대한 상대의 응답이 전혀 연결되지 않고 뚝뚝 끊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을 하는 의미가 없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말을 듣고 해야 하는 자리, 즉 곁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통의 곁에 있는 이의 가장 큰 절망이자 고통이다. 그래서 넌 내 고통을 모른다하고 파국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6)
윤 : 이 부분을 밑줄 그은 이유가 궁금해요.
오쟁 : 저는 필자가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지점을 집어내는 게 흥미로웠어요. 보통은 그 고통을 받는 당사자한테만 집중을 하잖아요. 물론, 우리 사회가 보통 고통 받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건, 자신의 고통을 자극적이고 감성적으로 전시하기를 바라는 부분에 집중을 하지만요.
그런데 그런 요구나 질문들 말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제게 새롭게 다가왔던 거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곁에 있던 사람으로서의 저, 곁에 없는 사람으로서의 저, 그리고 이런 저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한번 더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윤 : 오늘 대화가 제게도 그런 시간이었어요. 감사합니다.
B&M friend
윤형근, 김다영, 황정한. 전혀 다른 세 삶을 살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잠시 비슷한 삶을 살았다. 각자 먹고 사는 문제로 다시 세 갈래의 삶을 살고 있으나, 이 프로젝트를 빌미로 또다른 삶의 접점 하나가 발견되기를 기대한다.
2019/05/28
18호
- 1
- 영화감독이자 활동가. 2009년 1월 20일에 발생한 용산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을 다룬 <두 개의 문>(2012)을 홍지유와 함께 연출하였다.
- 2
-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2018)은 중증발달장애인 동생과 시설 밖 사회에서 살아가는 첫 6개월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3
- 심한 불안 발작과 이에 동반되는 다양한 신체 증상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불안장애의 하나.
- 4
- 오재형은 공황장애 분투기를 담은 『넌 생생한 거짓말이야』(이상북스, 2019)를 펴냈다.
- 5
- 다큐멘터리 감독. 대표작 <사람이 산다>(2015).
- 6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