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그날 오후까지는 그랬다.
   수업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혜린이가 새삼스레 나를 올려다봤다.
   “넌 대체 뭘 먹고 그렇게 크냐?”
   밥상머리에서 아빠에게 밥 먹듯이 듣는 얘기를 혜린이에게 들을 줄이야. 같이 다니면 누가 봐도 내가 언니 같은데, 혜린이는 항상 “내가 언니야.”라고 힘주어 말한다. “야, 친구끼리 언니, 동생이 어딨냐.”라며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면 “내가 너보다 8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난 4학년 때부터 생리를 시작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언니지. 그래, 안 그래?” 하고 따지고 든다.
   혜린이 말이 맞다. 나는 키만 삐죽하게 컸지 아직 생리도 하지 않고 가슴도 납작하다. 혜린이는 나보다 생각도 많고 훨씬 어른스럽다. 어떤 문제든 나서서 해결하려고 애쓴다. 마치 좋아하는 수학 문제를 풀듯이.
   나는 문제 풀이라면 젬병이다. 운동장을 열 바퀴 돌라고 하면 뛸 수 있지만 반성문을 쓰라고 하면 울고 싶어진다. 하지만 혜린이는 한번 문 문제는 포기하는 법이 없다.
   “도저히 못 참겠어. 박수호를 혼내 줄 방법을 찾아야지.”
   박수호가 여자애들 다이어리를 몰래 가져가서 약을 올리거나 치마 입고 온 아이만 골라서 다리를 걸거나 몰래 다가가 브래지어 끈을 당기기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선생님에게 일러 봤자 “수호가 혜린이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가 보네” 따위의 소리를 듣게 된다. 혜린이가 “관심이 있으면 말로 해야지 왜 괴롭혀요?”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 “넌 왜 매사 그렇게 까칠하니?”라는 꾸지람을 들을 뿐이다.
   학년이 바뀌자 박수호는 한층 기세가 등등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혜린이가 다다다 쏘아붙이면 깨갱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겨울방학 동안 키가 훌쩍 큰 녀석은 작정한 듯이 혜린이를 괴롭혔다. 오늘은 혜린이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땅꼬마, 땅으로 꺼져라”며 놀려대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혜린이는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을 괴롭히면 자기 일처럼 나서지만 나는 어지간해서는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린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성큼 다가가 수호 팔을 잡았다.
   “야씨, 김다온! 이 덩치 큰 거인! 이거 안 놔? 너 반칙이야!”
   자고 일어나면 쑥쑥 자라는 게 반칙이라면 그렇다, 내 인생은 반칙이다. 5학년 때는 남자애들 중에 나보다 큰 애들이 몇몇 있었다. 그런데 6학년이 되자 반에서 내가 제일 크다. 도대체 니네는 키 안 크고 뭐 하니. 따지고 싶다.
   입을 꽉 다문 내 대신 혜린이가 발끈했다.
   “반칙은 박수호 니가 했잖아.”
   박수호는 혜린이를 노려보더니 내 가슴을 확 떠밀고 지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다른 여자애들처럼 징징대고 싶지 않았다.
   뭐든 괜찮은 척하면 괜찮은 법이다.
   혜린이마저 내가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을 거다.
   “다온이 너 저녁마다 운동장 뛴다고 했지? 오늘부터 나도 뛸래.”
   “정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내가 수학에 몸서리치는 것만큼이나 혜린이는 체육을 싫어한다. 그런 신혜린이 운동장을 뛰겠다고 할 줄이야.
   혜린이는 열심히 운동장을 뛰면 힘도 세지고 키도 커질 거라며 좋아라했다. 역시 신혜린은 답을 찾아내고야 만다니까.
   우리는 밤 9시 30분에 아파트 옆 정자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소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뛰지만 상관없었다. 혜린이와 같이 뛰는 게 훨씬 더 좋으니까.
   
   밤 9시, 나는 제일 좋아하는 운동복, 검은색 후드 집업과 검은색 체육복 바지를 입고 검정색 운동화를 신었다.
   “다 늦게 어딜 가?”
   거실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항상 내게 소리치듯 말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된다.
   “혜린이랑 운동 간다잖아요.”
   엄마가 다가와 내 어깨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며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이 시간에 무슨 운동이야? 여자애가 겁도 없이.”
   아빠가 눈을 부라렸지만 엄마는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너무 늦진 마, 우리 공주님. 누가 잡아갈라.”
   우리 집에서 키 큰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건 엄마뿐이다. 엄마는 “우리 딸은 물만 줘도 쑥쑥 자라네, 콩나물처럼.” 하면서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고 난 콩나물을 먹지 않는다. 우유도 마시지 않는다. 매일 밤 자기 전 제발 그만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잠이 든다. 한번은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콩나무처럼 쉬지 않고 자라서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꿈을 꿨다. 저기 구름 아래서 혜린이가 “다온아, 어딨어?” 하고 찾는 소리에 “혜린아, 여기야. 나 여기 있어.” 발을 동동 구르다 꿈에서 깼다.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하기도 좀 그렇다. 6학년이 애도 아니고.
   정자에 앉아 혜린이를 기다리는데 부르르 몸이 떨렸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날이 쌀쌀했다. 약속한 시각이 지나도 혜린이는 보이지 않았다. 혜린이네 아파트 쪽으로 슬금슬금 걸어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다온아, 너 어디야?”
   혜린이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 덩달아 나도 목소리를 낮췄다.
   “넌 어딘데?”
   “나 오늘 못 나갈 것 같은데 혹시 너 벌써 나왔어?”
   나는 혜린이네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나도 아직 집이야.”
   하필 등 뒤로 오토바이가 요란스럽게 지나갔다.
   “미안해. 내일 얘기해줄게. 끊어.”
   혜린이가 후다닥 전화를 끊자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내 마음이 깜깜해졌다.
   ‘그냥 집에 갈까?’
   이대로 집에 가면 기분만 더 꿀꿀할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 달리기 위해서 나는 씩씩하게 걸었다.
   
   구민 체육관 앞 운동장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운동장 한 곁에 있는 농구 코트에는 농구를 하는 중고등학생들이 요란스레 뛰어다니는, 내가 아는 운동장이 아니었다. 운동장은 고요했다. 시간도 늦은데다 비가 올 것처럼 날이 흐려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집에 갈까?’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는 오기 같은 게 올라왔다. 나는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운동화 끈을 졸라맸다. 손목, 발목을 돌리고 가볍게 몸을 푼 다음,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 운동장에는 푹신푹신한 트랙이 깔려 있어서 맨바닥이나 학교 운동장을 뛰는 것보다 훨씬 좋다. 점점 속도를 높여서 달렸다. 숨이 찰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씩 속력을 높여 달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한 아저씨가 비칠비칠 뛰고 있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초짜처럼 보였다. 터덕터덕 땅이 꺼져라 달리는 폼이 한심했다. 나는 가볍게 아저씨를 앞질렀다. 그것도 잠시. 쿵쿵쿵 무겁게 달리는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아저씨는 힘겹게 나를 앞질렀다.
   더 빨리 달릴까 하다가 그냥 내 속도대로 달리기로 했다. 무리하면 얼마 달리지 못해 지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꾸역꾸역 나를 앞지른 아저씨는 얼마 못 가서 숨을 컥컥대며 멈춰 섰다. 나는 아저씨 옆을 스쳐 달리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운동장이 깜깜해졌다. 엄마에게 구민 체육관 운동장은 10시에 가로등 불이 꺼진다는 말을 들었던 생각이 났다. 트랙에서 벗어나 운동장 바깥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야야, 너. 거기 잠깐 서 봐.”
   휙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아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얼른 그곳을 떠나야 했다. 집을 향해 힘껏 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씨, 되게 잘 뛰네. 너 몇 살이냐?”
   혜린이였으면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하고 당차게 물었을 텐데 나는 비쭉이 서 있기만 했다. 아저씨가 쓱 얼굴을 드밀었다.
   “근데 너 남자냐 여자냐?”
   대답할 새도 없이 아저씨가 내 쪽으로 팔을 쭉 내밀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저씨가 내 가슴을 꽉 쥐었다.
   숨이 턱 막힌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야씨, 기지배가 겁도 없이. 어?”
   아저씨는 바닥에 가래침을 뱉더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가슴을 가렸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엄마가 사준 브래지어를 하고 나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아저씨가 나를 잡으려고 팔을 뻗는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쥐고 달렸다.
   아저씨는 절대 나를 잡을 수 없다. 내가 더 빠르니까.
   퉤퉤, 심술궂은 거인이 뱉은 것 같은 빗방울이 뺨을 툭툭 치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빗줄기가 순식간에 거세졌다. 나는 달리면서 후드 모자를 벗어 던졌다. 비가 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울어서 엉망인 얼굴을 감출 수 있으니까.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밖에 비 오지? 엄마가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엄마 목소리에 눈물이 더 쏟아졌다.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근데 난 인어도 공주가 아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목소리도 뺏기도 다리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도대체 왜?’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아무렇지 않아질까. 꿈에서도 계속 달리면 아무렇지 않아질까.
   나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부디 그러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역시나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길 바랐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조심조심 가슴을 더듬었다. 수호가 가슴팍을 세게 밀었을 때는 아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엔 달랐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달리는 내내 눈물이 났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혜린이라면 이 문제의 답을 알 것 같았지만 말하기가 꺼려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돼.’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집을 나섰다.
   평소처럼 혜린이네 아파트 쪽으로 가려는데 웬일로 혜린이가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혜린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어젠 미안. 많이 기다렸어?”
   역시 혜린이는 내가 기다린 걸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풀렸다.
   학교에 도착하자 혜린이는 곧바로 건물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우리만의 벤치’가 있다. 어둡고 그늘진 곳이라 거기에 벤치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평소엔 혜린이가 그곳으로 이끌면 또 무슨 비밀 얘기를 하려나 기대되기도 하고, 내가 혜린이의 특별한 친구인 것 같아 으쓱하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 벤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는데 너한테만 말할게.”
   혜린이는 진짜 친구라면 비밀이 없어야 된다고 늘 강조했다. 어제까진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어젯밤 이후 내 마음은 달라졌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슬금슬금 혜린이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혜린이가 “너 서영이 알지?”라고 입을 여는 순간, 마음이 얇은 은박지처럼 확 구겨졌다.
   ‘뭐야? 서영이 때문에 나하고 한 약속을 깬 거야?’
   서영이와 혜린이는 유치원 때부터 알아주는 단짝이었다. 엄마들끼리도 친하고 생긴 것도 닮아서 쌍둥이라 불릴 정도였다. 3학년 때 서영이가 전학 간 뒤로도 둘은 여전히 ‘비밀 채팅방’에서 비밀을 나누는 사이다. 그걸 두고 내가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어쩌다 서영이 이야기가 나오면 내 마음은 잘못 그은 선처럼 삐뚤어졌다. 게다가 어제는……
   “어젯밤에 서영이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어. 서영이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안 좋은 일?’
   서운함을 잠시 밀어두고 혜린이를 봤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혜린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서영이가 대학생 오빠한테 영어 과외를 받았는데 그 오빠가, 아니 그 나쁜 놈이…… 자기 맘대로 서영이를, 서영이 몸을……”
   그 나쁜 놈이 어떻게 했냐고 물을 새도 없이 혜린이가 벌떡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서영이 이 기지배는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서영이 엄마가 넌 알고 있었냐고 하는데, 나 진짜 너무 배신감이 드는 거 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다른 때였으면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쳤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서영이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자기에게 벌어진 일이 부끄럽고, 당황스럽고, 놀라웠을 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거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혜린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누가 함부로 내 몸을 만지면 단호하게 하지 말라고 해야지. 안 그래? 아무리 상대방이 어른이고 선생님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걸 그냥 참고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하면 문제가 더……”
   그때 수업 예비종이 울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수업 시작하겠다. 어서 들어가자.”
   내가 부산하게 움직이자 혜린이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봤다.
   “야, 김다온.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는 처음으로 혜린이를 혼자 두고 교실로 들어왔다. 혜린이가 쉬는 시간에 다가오면 “아, 맞다. 학급문고에서 책 빌리려고 했는데” 하면서 자리를 피했고, 급식 시간에는 밥을 마시다시피 하고 “아, 왜 배가 이렇게 아프냐.” 하면서 화장실로 도망을 쳤다. 의아하게 나를 보던 혜린이는 입을 꾹 다물고 책상에 휙 엎드렸다. 오후 내내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더니 수업이 끝나자마자 휑하니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도 쫓아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초조했다.
   ‘혜린이를 잡는다고 쳐. 그다음엔 뭐라고 하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해야 하나?’
   하필 눈치 없는 박수호가 다가와 지분거렸다.
   “야, 거인. 너 땅꼬마랑 싸웠냐? 땅꼬마 혼자 씩씩대면서 가던데?”
   순간 몸 안에 열기가 꽉 들어찼다.
   박수호가 혜린이를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혜린이가 야밤에 운동장을 뛰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밤늦게 혼자 운동장을 뛰지만 않았어도.
   나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 좀 괴롭히지 마.”
   박수호가 내 책상을 툭 발로 찼다.
   “니가 뭔 상관인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다음,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박수호를 찍어 누르듯 내려다봤다.
   “상관있지 왜 없어.”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뭐랄까, 불이 붙지 않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상태였다.
   박수호가 심지에 불을 붙였다.
   “키 좀 크면 다냐? 여자 주제에.”
   퍼버벙 펑! 폭탄이 터졌다.
   나는 박수호의 멱살을 잡고 순식간에 벽까지 밀어붙였다. 교실에 남아 있던 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여자 주제에? 여자가 뭐. 말해 봐.”
   “이거 놔. 여자라고 봐 주니까……”
   “니가 봐 주긴 뭘 봐 줘. 봐 주지 마. 안 봐 주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
   박수호가 주먹으로 내 어깨와 등허리를 두들겼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멱살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박수호의 얼굴이 점점 더 시뻘게졌다. 나는 박수호를 교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박수호는 잠시 컥컥대더니 주먹을 쥐고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박수호의
   주먹을 잡아서 팔을 확 꺾어버렸다.
   “아악, 내 팔! 놔! 이 괴물아!”
   “다신 혜린이한테 안 그런다고 말해! 말하라고!”
   박수호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내 정강이를 힘껏 찼다. 내가 비틀거리는 사이 “너 가만 안 둬!” 소리치고는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와, 역시 김다온.”
   “게임이 안 되네.”
   누가 봐도 내가 이긴 싸움이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힘으로 눌렀다는 건 언제고 나보다 힘센 사람에게 힘으로 눌릴 수 있단 얘기니까.
   불행히도 그 일은 금방 일어났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어야 했다. 한바탕 뛰고 나면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 이불 속 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우리 다온이가 그런 애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일부러 내 방 앞에서 통화를 하는 듯 엄마 목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박수호 이 자식, 6학년이나 돼서 엄마한테 이르다니.’
   눈앞에 있으면 한 대 더 쥐어박고 싶은 마음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10초 안에 잠이 들 수 있길 바라면서.
   역시나 하늘은 내 편이 아니었다.
   방문이 확 열리더니 아빠가 소리쳤다.
   “김다온, 너 니네 반 남자애를 쥐어 팼냐?”
   내가 대답이 없자 아빠가 이불을 확 들췄다.
   “어떻게 된 게 다 큰 여자애가 쌈박질을 하고 다녀! 네 오빠도 안 하는 짓을 왜 기지배가 하고 난리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박수호 때문에 나는 혜린이도 잃고 운동장도 잃었다.
   말할 수 없는 것도 잃었다.
   그런데 왜 나만 혼나야 하지?
   엄마가 아빠를 밀치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다온아, 진짜 니가 수호 목을 조르고 가만 안 둔다고 협박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빠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남의 집 아들을 멱살 잡고 흔들고 겁이나 주고, 니가 깡패야?”
   엄마는 애 말도 좀 들어보자고 했지만 아빠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고 했다.
   “내일 가서 사과해. 어디 함부로 남의 몸에 손을 대!”
   “왜 나한테만 그래?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는 순간, 함부로 흔든 사이다병을 연 것처럼 멋대로 울음이 쏟아졌다. 한번도 소리내어 운 적이 없는 내가 꺽꺽 울기 시작하자 아빠는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엄마가 성큼 다가와 나를 품에 꼭 안아줬다.
   “왜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왜 나한테만……”
   키도 덩치도 나보다 훨씬 작은 엄마가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말을 해야 알지, 말을 해야. 엄마한테 말해 줄래?”
   나는 울먹이면서 수호가 먼저 시비를 걸고 약을 올렸다고 했다. 수호가 혜린이도 괴롭히고 다른 여자애들도 괴롭혔다고도 말했다. 말을 하는 내내 계속 눈물이 났지만 나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다정하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딸.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는 수호 엄마와 다시 이야기하겠다며 했다. 잘잘못을 가릴 때까지 수호에게 먼저 사과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아빠는 슬그머니 방을 나가 텔레비전을 켰다. 오랜만에 엄마 품에 안겨 있으니 아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지금 잠깐 나올래?’
   나는 엄마에게서 몸을 빼고 양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엄마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봤다.
   엄마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있다. 이제, 말할 준비가 되었다.

   혜린이는 우리 집 담벼락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더 자그마해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이 쭉 나왔다. 미안해서였다. 내가 다가서자 혜린이는 어색하게 나를 보더니 말없이 앞서 걸었다. 나도 가만히 따라 걸었다.
   우리는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제법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우리 사이를 휘 스쳐 지나갔다. 하루 사이에 봄이 성큼 다가온 걸까.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 혜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서영이 만나고 왔어. 서영이가 그러더라. 일부러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닌데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혜린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혹시 우는 건가 해서 보니까 애써 눈물을 참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데 나는 미안하면서도 속이 상하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혹시라도 나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꼭 말하라고. 만약 엄마한테 털어놓기 어려우면 누구한테라도 꼭 털어놓으라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혜린이는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다온아 있잖아, 살다보면 우리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도 나쁜 일들이 생긴대. 그런 억울한 일들을 혼자 가슴에 품고 있으면 상처가 더 깊어지기 마련이래. 그래서 나는 아무리 부끄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었어. 근데 그게 내 욕심이었나 봐.”
   혜린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말을 안 하니까 알 수가 있나.
   하지만 뭐든 다 아는 것 같은 신혜린도 모르는 게 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건 헛된 욕심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용기를 내야 했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사실 어젯밤에 나 혼자 운동장에 갔는데……”
   아저씨가 다가왔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내 목소리가 떨렸다. 혜린이가 내 손을 잡았다. 아저씨가 내 몸을 함부로 만졌다는 이야기를 할 때 혜린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혜린이의 손을 꽉 마주잡았다. 그 힘이 위로가 됐다.
   내가 후 한숨을 내쉬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우리는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혜린이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아?”
   혜린이에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했다.
   “아니, 안 괜찮아.”
   그렇게 말하자 속이 후련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만세!
   솔직하게 털어놓고 인정하니까 오히려 내가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혜린이가 큰 결심을 하듯이 말했다.
   “우리 당분간 저기 운동장에 가지 말자.”
   “왜?”
   “니가…… 가기 싫을 것 같아서.”
   나도 잠시 혜린이처럼 생각하는 얼굴을 해봤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했다.
   “오늘은 안 갔어. 근데 내일은 갈 거야.”
   “근데 만약에 또……”
   “그 아저씨가 있으면 어떡하냐고?”
   혜린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달이 구름 밖으로 나와 환하게 우리를 비추었다.
   나는 달빛 아래 우뚝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내가 왜 도망쳐야 해? 난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혜린이가 발딱 일어나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오, 김다온. 많이 컸는데?”
   “키는 원래 내가 너보다 컸거든?”

   우리는 내일 밤 8시에 정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운동장을 달리기로 했다.
   혜린이는 달리기에 서투니까 같이 달리려면 한껏 속도를 늦춰서 달려야 할 거다.
   그래도 그렇게 달리다 보면 원래 속도대로 달리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우리는 너무 빨리 괜찮지 않기로 했다.

이록

무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문예창작을 공부했습니다.
어려서는 애늙은이로, 나이 들어서는 어른아이로 살아서 어른,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걸 압니다.
녹색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기록하며 살고 있습니다.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