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사탕이 녹을 때까지
낡은 3량 열차는 나무 외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느리게 달렸다.
사람이 얼마 타지 않은 조용한 열차 안엔 이레의 기침 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오빠, 알고 있어? 가게에 밀가루 포대를 뜯은 것도 생쥐들이야.”
지은이가 말했다.
“할아버지께 알려드렸어?”
지무가 말했다.
“새끼를 낳았더라고. 조금 더 자라면 말하려고 했어.”
지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 너머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은이는 인형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땅콩아, 난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너처럼 듣기만 하는 친구 말고 말도 많이 하는 친구.”
조금 잦아들었던 이레의 기침이 거세지자 사람들이 몸을 돌려 이레를 보았다.
지은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는 인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땅콩아, 혼자 있는 저 아이에게 말을 걸어볼까?”
지은이는 인형의 귀에 입을 대고 말한 뒤 인형의 입을 자신의 귀에 댔다.
“내가 말하면 귀찮아 할 것 같다고? 오빠처럼?”
그때 열차 스피커가 켜졌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국내 최고의 느린 속도를 자랑하는 우리 열차는 출발역에서부터 종착역까지 중간에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열차는 처음으로,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잠시 멈추고 싶어졌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봄날, 아무도 내린 적 없는 역에 잠시 내려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마지막 열차 운전을 하는 제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잠시 창밖의 봄 풍경을 봐주세요. 그다음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으니까요.”
승객들은 마지못해 창밖을 보았다.
“안내원이 곧 승객 여러분께 사탕을 나눠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속에서 한 개의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만 봄소풍을 즐기려 합니다. 찬성하시는 분만 사탕을 집으시면 됩니다. 안내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우에체! 죄송합니다. 제가 꽃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안내 방송이 끝나자 승객들이 술렁거렸다.
“꽃 알레르기가 있다면서 봄소풍은 무슨 소리야?”
승객들은 고속 열차를 탈 걸 그랬다느니, 알지도 못하는 역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느니 저마다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땅콩아, 너도 내리고 싶지?”
지은이는 인형의 귀에 속삭인 뒤 지무를 보았다.
“오빠, 땅콩이가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꼭 내리고 싶대.”
지은이가 땅콩이를 지무의 무릎에 놓으며 말했다.
“인형 가방에 넣어. 시끄러워.”
“오빠도 땅콩이 목소리가 들려?”
지은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지무를 보았다.
“네가 시끄러워. 그 인형만 꺼내면 네가 쉬지 않고 떠들잖아.”
“심심해서 그래.”
그때 2번 칸으로 안내원이 들어왔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서 봄소풍을 즐기고 싶은 분은 이 사탕 바구니에 손을 넣어 사탕을 가져가시면 됩니다. 제가 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을 때 원하지 않는 분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자, 이제 눈을 감아주세요.”
모두 눈을 감았다. 지은이는 바구니가 다가오자 사탕을 집었고 지무도 조금 망설이다가 사탕을 집었다.
“2번 칸의 승객들께서도 1번 칸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탕을 집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내원이 3번 칸으로 간 뒤 사람들은 자신의 사탕을 보았다.
지은이의 사탕은 에메랄드처럼 맑은 하늘색이었고 지무의 사탕은 사파이어처럼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2번 칸에 탄 사람들은 석류알 같은 루비, 깊은 보랏빛의 캐츠아이, 가을 하늘 같은 토파즈, 검고 매끄러운 오닉스, 얼음 조각 같은 크리스털 빛깔의 사탕에 마음을 빼앗겨 창밖 풍경이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빠, 바다야.”
“우리가 탄 열차는 바닷가를 지나지 않는데……”
지무가 중얼거리자 승객들은 창으로 고개를 돌렸고 모두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안내 방송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승객 여러분! 심지어 사탕이라면 쳐다보기만 해도 역겨우셨다는 3번 칸의 신사분까지 사탕을 받으셨네요! 열차가 멈추면 껍질을 벗기고 사탕을 입 안에 넣어주세요. 안내 방송을 마칩니…… 에에에취! 잊을 수 없는 소풍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잊지 마세요. 사탕이 녹을 때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요.”
사탕을 입에 넣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잊고 있던 어떤 기억들, 이를테면 그리운 이의 웃는 모습과 목소리, 간절히 기다렸던 그 무엇, 가장 행복했던 숨겨진 기억을 떠올렸다. 은빛 사탕을 입에 넣자 이레의 기침도 멎었다. 이레는 몇 번 숨을 가다듬은 뒤 뒷자리에서 일어나 지은이에게 갔다.
“안녕? 나는 이레야.”
“나는 지은이야. 넌 혼자 어딜 가는 길이니?”
“무작정 먼 길을 가고 있었어. 나는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거든.”
“지무 오빠와 난 아주 오랜만에 엄마 아빠를 만나고 할아버지가 기다리시는 집으로 가고 있어. 그리고 얘는 땅콩이.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만들어주셨어.”
“머리카락이 안개꽃 다발 같아.”
이레가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구멍가게에 쥐가 들어왔는데……”
“열차 안에서 사탕을 다 녹여버릴 생각이야?”
늘 무표정이던 지무가 지은이의 말을 끊고 말했다. 셋은 들뜬 기분이 되어서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해변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파라솔 아래 모여 악기 연주를 하고 있었다.
“우린 오래전부터 여러분을 기다렸어요. 이 사탕을 함께 먹으려고요.”
해변의 아이들이 사탕을 입속에 넣은 뒤 악기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지은이는 악기 수레에서 트라이앵글을 꺼내 와 울려댔다.
어느새 지무는 해변의 아이들 중 노란 고깔모자를 쓴 아이와 모래성 쌓기를 하며 놀았다. 아이들은 물결이 해변으로 들어오자 물과 함께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사탕 작아졌어?”
지은이가 이레에게 혀를 내밀어 사탕을 보여주었다.
“그대로야. 이 사탕은 어쩐지 천천히 녹는 것 같아. 달콤한 맛이 나는가 하면 쓴맛이 나기도 하고.”
이레가 혀로 사탕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이레와 지은이는 신발을 벗고 해변을 뛰어다니며 땀을 흘렸고 뜨거운 모래 안으로 발을 넣고 웃어댔다.
“저 섬에 생일 파티가 준비돼 있어요.”
한 아이가 가리킨 곳은 해변에서 돌다리로 이어진 작은 섬이었다.
사람들이 돌다리를 건너자 빠른 속도로 노을이 졌다. 작은 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촛불이 켜 있고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럽게 잎을 떨구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생일 축하를 해요. 난 내가 태어난 날을 모르지만요.”
곱슬머리 아이가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며 말했다.
“나도 내 생일을 몰라요. 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혼자 사는 아주머니 집 앞에 버려졌거든. 그 아주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조용한 마을에서 아주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지. 물론 조금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곱슬머리 청년이 말했다.
사람들은 손을 잡고 자신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밤바다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노래가 끝나자 해변의 아이들이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담았다.
곱슬머리 청년이 케이크 조각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이 사탕이 다 녹기 전에 열차에 타야겠지.”
“열차를 다시 타고 싶어요?”
곱슬머리 아이가 물었다.
“난 이곳에서 더 놀고 싶어졌어.”
곱슬머리 청년이 아이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식사조절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오르던 혈당 수치, 매월 내야 하는 월세, 새로 옮겨야 할 직장 걱정까지도.
“세상에, 내가 정말 먹고 싶었던 바로 그런 맛의 케이크야!”
“초콜릿케이크가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나는 매일 이걸 먹었을 텐데. 이런 건 애들이나 좋아하는 건 줄 알았거든.”
모두 한마디씩 케이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눈 뒤 사람들은 해변의 아이들이 나눠주는 선물상자를 받았다.
상자에는 각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지은이의 상자 안에는 색연필 세트가, 지무의 상자 안에는 놀이공원 티켓이, 이레의 상자 안에는 축구공이 들어 있었다.
꽃 장식 모자가 받은 아주머니와 여자아이가 두 손을 잡고 폴짝거리며 춤을 추자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어머나, 우린 같은 선물을 받았네. 난 이런 모자를 쓰고 멋진 춤을 추는 것이 내 어릴 적 소원이었어.”
“아주머니에게 그 모자는 정말 잘 어울려요!”
“네게도 그래.”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춤을 추자 촛불들이 바람결에 일렁였다.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는 사이 초록 눈동자의 아이와 초록 눈동자의 할아버지는 돌다리를 건너 해변으로 갔다. 두 사람의 선물상자 안엔 돌다리가 이어지는 해변에 서 있으라는 쪽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말없이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 유리병 두 개가 떠내려왔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촛불을 들어 병 속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두 사람은 같은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다. 아이와 할아버지의 편지는 똑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존에게!”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네 이름도 존이니?”
“네, 지금은 그냥 정환이라고 불리지만요.”
둘은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엄마는 잘 지내고 있단다. 네가 보내준 유리병 속에 든 편지도 잘 받아보았어. 엄마가 탄 배는 지구를 30바퀴째 돌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있단다. 나는 네 곁에 있지 않지만 늘 너를 생각하고 사랑한단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편지를 계속 읽어내려갔다.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자 아이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달빛이 아이와 할아버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다시 해변으로 돌아왔을 때 유리 배 세 척이 해변에 떠 있었다.
“이제 배를 타고 밤바다를 여행해요!”
해변의 아이들이 외치자 아이들과 어른들은 유리 배 위로 땔감을 나르고 모닥불을 지폈다.
“오빠, 땅콩이 어디 있는지 알아?”
“네가 열차에 두고 내렸잖아.”
“같이 배를 타면 좋을 텐데.”
지무와 노란 고깔모자를 쓴 아이도 사람들과 함께 첫번째 유리 배 위에 올랐다. 한 아이가 반도네온 연주를 시작했다. 어두운 밤바다로 모닥불을 피운 배가 떠갔다.
유리 배를 탄 사람들은 반도네온 연주를 들으며 미풍을 타고 떠가는 배 위에 편히 누웠다. 어두워지는 하늘엔 별들이 새로 태어나고 사라졌다.
곱슬머리 아이와 청년, 초록 눈동자의 아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다음 배에 오르자 한 아이가 젬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바다로 모닥불을 피운 배가 떠갔다.
지은이도 이레와 함께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된 세번째 배에 올랐다.
세 척의 배가 바다 위로 떠가기 시작하자 함박눈이 내렸다.
유리 배 위에 탄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사람의 또다른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렇게 모닥불이 타오르는 유리 배를 타고 평생 바다 위를 떠가고 싶어요.”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이가 말했다.
“나는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 이 순간이 가장 평온해. 내게도 이런 평온한 순간이 오게 될 줄 몰랐지. 고단한 인생이었어. 이제 바다 위를 떠다니며 쉬고 싶어.”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말했다.
모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땅콩이가 열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사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
지은이가 말했다.
“내 공이 생겼으니까 육지로 돌아가서 공놀이를 하며 놀 거예요.”
이레가 말했다.
“나도 사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하겠지. 곧 이 배에서 내려야 할 테고.”
초록 눈동자의 할아버지가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탕이 입속에서 작아지지 않으면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이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갑자기 모두 말을 멈췄다. 물결이 유리 배에 부딪치는 소리,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오물거려 마지막으로 사탕의 맛을 느꼈다.
“그럼 저 아이들을 바닷가에 데려다주고 우리는 바닷가를 더 여행해요.”
초록 눈동자의 아이가 말했다.
“저는 이렇게 할 거예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이가 배의 몸체를 잡고 허리를 바다 쪽으로 굽히고 사탕을 바다로 뱉었다.
“괜찮니?”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모두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고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 아이는 경쾌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해변에 배를 댄 사람들은 지은이와 이레가 내리기 전에 힘껏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해변에는 첫번째 배에서 돌아온 지무 혼자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오빠, 노란 고깔모자를 쓴 아이는?”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 했어. 네가 탔던 배도 이제 떠났구나.”
지은이와 이레를 해변에 내려주고 다시 바다 가운데로 온 배는 점점 먼 곳으로 떠갔다.
마침내 육지가 보이지 않자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바다 위로 사탕을 뱉었다.
“잘 가라. 루비처럼 붉고 아름다운 사탕아.”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이가 바다로 사탕을 뱉었다.
“안녕, 바다처럼 맑고 푸른 사탕아.”
초록 눈동자의 할아버지가 사탕을 뱉자 초록 눈동자의 아이도 사탕을 뱉었다.
유리 배 위의 어른과 아이는 달콤한 흔적을 잠시 떠올리다가 곧 눈을 감고 서서히 잠들었다. 모닥불의 불꽃도 사그라졌고 마침내 바이올린 소리도 멈췄다.
해변에 남은 세 아이는 해변을 따라 걷다가 작은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 창밖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웃으며 반겼다.
“반가워, 얘들아. 우린 이 집에 단둘이 살아.”
여자아이가 말했다.
“심심하겠구나.”
지은이가 말했다.
“우리는 매일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놀아. 심심하지 않아.”
남자아이가 마루 위에서 옆으로 구르기를 한 뒤 양팔을 옆으로 펴며 말했다.
“혼자 옷장 속에 숨어 있을 땐 조금 무서울 때도 있지만 놀이니까 괜찮아. 언젠가는 얘가 날 찾아낼 테고 그러면 내가 술래를 하면 되니까.”
여자아이가 소파 위로 뛰어오르며 말했다.
“언젠가 누군가 우리를 찾으러 이곳에 올 거야. 우리는 그때까지 재미있게 숨바꼭질 놀이를 할 거야. 같이 할래?”
여자아이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술래 할래.”
지은이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일라! 숨었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지은이는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몸을 들썩거렸다.
지은이는 작은 서랍을 열어보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사탕 뚜껑을 열어보고 심지어 딸기잼 뚜껑까지 열어보았다. 아이들은 소곤거리며 한동안 숨바꼭질을 했다.
“여기서 계속 놀고 싶어.”
지무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우린 사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하잖아.”
지은이가 말했다.
“우리 집에서 계속 놀지 않을래?”
남자아이가 말했다.
“쥐가 구멍가게에 새끼를 낳았는데 할아버지가 모르고 계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가게는 난장판이 되고 말거야. 그리고 난 열차에 땅콩이를 두고 내렸어. 땅콩이는 너무 낡아서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지은이가 말했다.
“난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많아, 새로운 길을 달리고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이 공을 차며 뛰어다닐 거야.”
공을 쓰다듬으며 이레가 말했다.
“우리 마을에는 아이가 한 명도 없어. 너희들 우리 마을에 같이 갈래? 새끼 쥐도 보여줄게. 그리고 지은이랑 만들어놓은 아지트가 있거든. 그곳에서 이렇게 숨바꼭질도 하자.”
지무의 말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해변에 도착하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모닥불은 불씨만 남아 있었다.
“오빠! 보석 사탕들이야. 세번째 배에 탄 사람들은 이곳에 내려서 사탕을 뱉었나봐.”
지은이의 발아래엔 모래가 엉겨붙은 사탕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걸까?”
지무가 말했다.
“미리 열차에 탄 사람도 있을지 몰라.”
이레가 말했다.
그때 역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잠시 후 열차가 곧 출발하오니 탑승을 망설이고 계신 분께서는 서둘러 탑승을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순간, 그동안 크기가 변하지 않던 사탕이 지은이와 지무와 이레의 입속에서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그 사탕은 더이상 신비로운 맛이 아닌 흔한 포도맛 사탕과 메론맛 사탕으로 변했다.
아이들이 열차를 향해 달렸다.
2번 칸으로 올라탄 지은이와 지무가 자리에 앉는 순간, 창밖이 환하게 밝아왔다.
“오빠, 우리가 열차에서 내릴 때 내리 쬐던 정오의 태양이야.”
그때 안내원이 2번 칸으로 들어왔다.
“즐거운 봄소풍이 끝났네요. 우리 직원들은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천백스물일곱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 맛을 보며 차장님의 마지막 운행 파티를 했어요. 우리가 어릴 때 먹고 싶었던 환상적인 맛의 아이스크림이었어요. 모두 승객님들 덕분이죠. 이제 곧 열차가 출발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타지 않았는데 열차가 출발해도 되나요?”
지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안내원은 아주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두 가고 싶은 곳으로 갔으니까요. 영원히 사탕이 녹지 않는 곳으로 떠났답니다. 더 좋은 여행을 하고 있을 거예요.”
안내원이 다음 칸으로 가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만요, 제 새로운 친구들의 표를 여기서 직접 살 수는 없을까요? 급히 타느라 표를 사지 못했어요.”
“무슨 말씀이시죠?”
“이 아이들 말이에요.”
모두 열차 안을 둘러보았지만 오두막집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제 친구들을 못 보셨나요? 우리와 비슷한 키의, 그러고 보니 우리와 아주 많이 닮은……”
“아무도요.”
안내원이 바닥에 나뒹구는 사탕 봉지 몇 개를 줍더니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그때 한 손에는 공을 한 손에는 가방을 든 이레가 아이들에게로 왔다.
“너희가 열차에 올라탄 뒤 아이들이 이 가방을 조심스럽게 올려주었어. 선물이래. 그리고 자신들은 오두막집에 남겠다고 말했어. 언젠가 다시 놀러 오라고도 말했고.”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창가로 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아이들은 조금도 외롭지 않은 것 같아.”
지무가 중얼거렸다.
“오빠, 다음에 우리 다시 여기 오자. 그리고 쟤네들도 만나고……”
이레는 가방을 들고 지은이와 지무의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을 벗어난 열차는 어느새 양쪽으로 숲이 우거진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입속에 남아 있던 사탕은 향기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레야, 네 얼굴은 혈색이 좋아 보여.”
인형을 이레 가까이 대 보이며 지은이가 말했다.
“나는 이제 건강해졌어. 그리고 이제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
“설마 그곳은 지은이네 집이니?”
지은이가 인형을 이레 앞에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맞아. 그네도 미끄럼틀도 없고 텔레비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그 동네. 땅콩이 네가 살고 있는 그 집이야.”
세 아이들은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며 기뻐했다.
“이제 이 가방을 열어보자, 열차가 출발 한 뒤 열어보라고 했어.”
이레가 가방을 열자 작은 강아지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
“난 이 강아지와 종일 뛰어놀 거야.”
이레가 강아지를 안고 쓰다듬었다.
열차가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지은이와 지무와 이레와 강아지들은 잠이 들었다.
지은이가 눈을 떴을 땐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며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꿈인 줄 알았어. 사탕처럼 달콤한.”
잠이 든 이레를 보며 지은이가 말했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안고 열차에서 내리자 역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시 돌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신나는 매일매일 보내기를!”
세 아이는 떠나는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열차가 사라져 마침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람이 얼마 타지 않은 조용한 열차 안엔 이레의 기침 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오빠, 알고 있어? 가게에 밀가루 포대를 뜯은 것도 생쥐들이야.”
지은이가 말했다.
“할아버지께 알려드렸어?”
지무가 말했다.
“새끼를 낳았더라고. 조금 더 자라면 말하려고 했어.”
지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 너머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은이는 인형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땅콩아, 난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너처럼 듣기만 하는 친구 말고 말도 많이 하는 친구.”
조금 잦아들었던 이레의 기침이 거세지자 사람들이 몸을 돌려 이레를 보았다.
지은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 숨어 있는 인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땅콩아, 혼자 있는 저 아이에게 말을 걸어볼까?”
지은이는 인형의 귀에 입을 대고 말한 뒤 인형의 입을 자신의 귀에 댔다.
“내가 말하면 귀찮아 할 것 같다고? 오빠처럼?”
그때 열차 스피커가 켜졌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국내 최고의 느린 속도를 자랑하는 우리 열차는 출발역에서부터 종착역까지 중간에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열차는 처음으로,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잠시 멈추고 싶어졌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봄날, 아무도 내린 적 없는 역에 잠시 내려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 마지막 열차 운전을 하는 제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잠시 창밖의 봄 풍경을 봐주세요. 그다음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으니까요.”
승객들은 마지못해 창밖을 보았다.
“안내원이 곧 승객 여러분께 사탕을 나눠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속에서 한 개의 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만 봄소풍을 즐기려 합니다. 찬성하시는 분만 사탕을 집으시면 됩니다. 안내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우에체! 죄송합니다. 제가 꽃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안내 방송이 끝나자 승객들이 술렁거렸다.
“꽃 알레르기가 있다면서 봄소풍은 무슨 소리야?”
승객들은 고속 열차를 탈 걸 그랬다느니, 알지도 못하는 역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느니 저마다 한마디씩 투덜거렸다.
“땅콩아, 너도 내리고 싶지?”
지은이는 인형의 귀에 속삭인 뒤 지무를 보았다.
“오빠, 땅콩이가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꼭 내리고 싶대.”
지은이가 땅콩이를 지무의 무릎에 놓으며 말했다.
“인형 가방에 넣어. 시끄러워.”
“오빠도 땅콩이 목소리가 들려?”
지은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지무를 보았다.
“네가 시끄러워. 그 인형만 꺼내면 네가 쉬지 않고 떠들잖아.”
“심심해서 그래.”
그때 2번 칸으로 안내원이 들어왔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서 봄소풍을 즐기고 싶은 분은 이 사탕 바구니에 손을 넣어 사탕을 가져가시면 됩니다. 제가 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을 때 원하지 않는 분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자, 이제 눈을 감아주세요.”
모두 눈을 감았다. 지은이는 바구니가 다가오자 사탕을 집었고 지무도 조금 망설이다가 사탕을 집었다.
“2번 칸의 승객들께서도 1번 칸과 마찬가지로 모두 사탕을 집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내원이 3번 칸으로 간 뒤 사람들은 자신의 사탕을 보았다.
지은이의 사탕은 에메랄드처럼 맑은 하늘색이었고 지무의 사탕은 사파이어처럼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2번 칸에 탄 사람들은 석류알 같은 루비, 깊은 보랏빛의 캐츠아이, 가을 하늘 같은 토파즈, 검고 매끄러운 오닉스, 얼음 조각 같은 크리스털 빛깔의 사탕에 마음을 빼앗겨 창밖 풍경이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빠, 바다야.”
“우리가 탄 열차는 바닷가를 지나지 않는데……”
지무가 중얼거리자 승객들은 창으로 고개를 돌렸고 모두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안내 방송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승객 여러분! 심지어 사탕이라면 쳐다보기만 해도 역겨우셨다는 3번 칸의 신사분까지 사탕을 받으셨네요! 열차가 멈추면 껍질을 벗기고 사탕을 입 안에 넣어주세요. 안내 방송을 마칩니…… 에에에취! 잊을 수 없는 소풍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잊지 마세요. 사탕이 녹을 때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요.”
사탕을 입에 넣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잊고 있던 어떤 기억들, 이를테면 그리운 이의 웃는 모습과 목소리, 간절히 기다렸던 그 무엇, 가장 행복했던 숨겨진 기억을 떠올렸다. 은빛 사탕을 입에 넣자 이레의 기침도 멎었다. 이레는 몇 번 숨을 가다듬은 뒤 뒷자리에서 일어나 지은이에게 갔다.
“안녕? 나는 이레야.”
“나는 지은이야. 넌 혼자 어딜 가는 길이니?”
“무작정 먼 길을 가고 있었어. 나는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거든.”
“지무 오빠와 난 아주 오랜만에 엄마 아빠를 만나고 할아버지가 기다리시는 집으로 가고 있어. 그리고 얘는 땅콩이.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만들어주셨어.”
“머리카락이 안개꽃 다발 같아.”
이레가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구멍가게에 쥐가 들어왔는데……”
“열차 안에서 사탕을 다 녹여버릴 생각이야?”
늘 무표정이던 지무가 지은이의 말을 끊고 말했다. 셋은 들뜬 기분이 되어서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해변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파라솔 아래 모여 악기 연주를 하고 있었다.
“우린 오래전부터 여러분을 기다렸어요. 이 사탕을 함께 먹으려고요.”
해변의 아이들이 사탕을 입속에 넣은 뒤 악기 연주를 시작하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지은이는 악기 수레에서 트라이앵글을 꺼내 와 울려댔다.
어느새 지무는 해변의 아이들 중 노란 고깔모자를 쓴 아이와 모래성 쌓기를 하며 놀았다. 아이들은 물결이 해변으로 들어오자 물과 함께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내 사탕 작아졌어?”
지은이가 이레에게 혀를 내밀어 사탕을 보여주었다.
“그대로야. 이 사탕은 어쩐지 천천히 녹는 것 같아. 달콤한 맛이 나는가 하면 쓴맛이 나기도 하고.”
이레가 혀로 사탕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이레와 지은이는 신발을 벗고 해변을 뛰어다니며 땀을 흘렸고 뜨거운 모래 안으로 발을 넣고 웃어댔다.
“저 섬에 생일 파티가 준비돼 있어요.”
한 아이가 가리킨 곳은 해변에서 돌다리로 이어진 작은 섬이었다.
사람들이 돌다리를 건너자 빠른 속도로 노을이 졌다. 작은 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촛불이 켜 있고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럽게 잎을 떨구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생일 축하를 해요. 난 내가 태어난 날을 모르지만요.”
곱슬머리 아이가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며 말했다.
“나도 내 생일을 몰라요. 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혼자 사는 아주머니 집 앞에 버려졌거든. 그 아주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조용한 마을에서 아주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지. 물론 조금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곱슬머리 청년이 말했다.
사람들은 손을 잡고 자신을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밤바다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노래가 끝나자 해변의 아이들이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담았다.
곱슬머리 청년이 케이크 조각을 들고 잠시 망설였다.
“이 사탕이 다 녹기 전에 열차에 타야겠지.”
“열차를 다시 타고 싶어요?”
곱슬머리 아이가 물었다.
“난 이곳에서 더 놀고 싶어졌어.”
곱슬머리 청년이 아이의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식사조절을 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오르던 혈당 수치, 매월 내야 하는 월세, 새로 옮겨야 할 직장 걱정까지도.
“세상에, 내가 정말 먹고 싶었던 바로 그런 맛의 케이크야!”
“초콜릿케이크가 이렇게 맛있는 줄 알았으면 나는 매일 이걸 먹었을 텐데. 이런 건 애들이나 좋아하는 건 줄 알았거든.”
모두 한마디씩 케이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눈 뒤 사람들은 해변의 아이들이 나눠주는 선물상자를 받았다.
상자에는 각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지은이의 상자 안에는 색연필 세트가, 지무의 상자 안에는 놀이공원 티켓이, 이레의 상자 안에는 축구공이 들어 있었다.
꽃 장식 모자가 받은 아주머니와 여자아이가 두 손을 잡고 폴짝거리며 춤을 추자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어머나, 우린 같은 선물을 받았네. 난 이런 모자를 쓰고 멋진 춤을 추는 것이 내 어릴 적 소원이었어.”
“아주머니에게 그 모자는 정말 잘 어울려요!”
“네게도 그래.”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춤을 추자 촛불들이 바람결에 일렁였다.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는 사이 초록 눈동자의 아이와 초록 눈동자의 할아버지는 돌다리를 건너 해변으로 갔다. 두 사람의 선물상자 안엔 돌다리가 이어지는 해변에 서 있으라는 쪽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말없이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 유리병 두 개가 떠내려왔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촛불을 들어 병 속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두 사람은 같은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다. 아이와 할아버지의 편지는 똑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존에게!”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네 이름도 존이니?”
“네, 지금은 그냥 정환이라고 불리지만요.”
둘은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엄마는 잘 지내고 있단다. 네가 보내준 유리병 속에 든 편지도 잘 받아보았어. 엄마가 탄 배는 지구를 30바퀴째 돌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있단다. 나는 네 곁에 있지 않지만 늘 너를 생각하고 사랑한단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편지를 계속 읽어내려갔다.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자 아이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달빛이 아이와 할아버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다시 해변으로 돌아왔을 때 유리 배 세 척이 해변에 떠 있었다.
“이제 배를 타고 밤바다를 여행해요!”
해변의 아이들이 외치자 아이들과 어른들은 유리 배 위로 땔감을 나르고 모닥불을 지폈다.
“오빠, 땅콩이 어디 있는지 알아?”
“네가 열차에 두고 내렸잖아.”
“같이 배를 타면 좋을 텐데.”
지무와 노란 고깔모자를 쓴 아이도 사람들과 함께 첫번째 유리 배 위에 올랐다. 한 아이가 반도네온 연주를 시작했다. 어두운 밤바다로 모닥불을 피운 배가 떠갔다.
유리 배를 탄 사람들은 반도네온 연주를 들으며 미풍을 타고 떠가는 배 위에 편히 누웠다. 어두워지는 하늘엔 별들이 새로 태어나고 사라졌다.
곱슬머리 아이와 청년, 초록 눈동자의 아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다음 배에 오르자 한 아이가 젬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바다로 모닥불을 피운 배가 떠갔다.
지은이도 이레와 함께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된 세번째 배에 올랐다.
세 척의 배가 바다 위로 떠가기 시작하자 함박눈이 내렸다.
유리 배 위에 탄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른 사람의 또다른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렇게 모닥불이 타오르는 유리 배를 타고 평생 바다 위를 떠가고 싶어요.”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이가 말했다.
“나는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 이 순간이 가장 평온해. 내게도 이런 평온한 순간이 오게 될 줄 몰랐지. 고단한 인생이었어. 이제 바다 위를 떠다니며 쉬고 싶어.”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말했다.
모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땅콩이가 열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사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해요.”
지은이가 말했다.
“내 공이 생겼으니까 육지로 돌아가서 공놀이를 하며 놀 거예요.”
이레가 말했다.
“나도 사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하겠지. 곧 이 배에서 내려야 할 테고.”
초록 눈동자의 할아버지가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탕이 입속에서 작아지지 않으면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이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갑자기 모두 말을 멈췄다. 물결이 유리 배에 부딪치는 소리,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오물거려 마지막으로 사탕의 맛을 느꼈다.
“그럼 저 아이들을 바닷가에 데려다주고 우리는 바닷가를 더 여행해요.”
초록 눈동자의 아이가 말했다.
“저는 이렇게 할 거예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아이가 배의 몸체를 잡고 허리를 바다 쪽으로 굽히고 사탕을 바다로 뱉었다.
“괜찮니?”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모두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고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 아이는 경쾌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해변에 배를 댄 사람들은 지은이와 이레가 내리기 전에 힘껏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해변에는 첫번째 배에서 돌아온 지무 혼자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오빠, 노란 고깔모자를 쓴 아이는?”
“언젠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 했어. 네가 탔던 배도 이제 떠났구나.”
지은이와 이레를 해변에 내려주고 다시 바다 가운데로 온 배는 점점 먼 곳으로 떠갔다.
마침내 육지가 보이지 않자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바다 위로 사탕을 뱉었다.
“잘 가라. 루비처럼 붉고 아름다운 사탕아.”
꽃 장식 모자를 쓴 아이가 바다로 사탕을 뱉었다.
“안녕, 바다처럼 맑고 푸른 사탕아.”
초록 눈동자의 할아버지가 사탕을 뱉자 초록 눈동자의 아이도 사탕을 뱉었다.
유리 배 위의 어른과 아이는 달콤한 흔적을 잠시 떠올리다가 곧 눈을 감고 서서히 잠들었다. 모닥불의 불꽃도 사그라졌고 마침내 바이올린 소리도 멈췄다.
해변에 남은 세 아이는 해변을 따라 걷다가 작은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 창밖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웃으며 반겼다.
“반가워, 얘들아. 우린 이 집에 단둘이 살아.”
여자아이가 말했다.
“심심하겠구나.”
지은이가 말했다.
“우리는 매일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놀아. 심심하지 않아.”
남자아이가 마루 위에서 옆으로 구르기를 한 뒤 양팔을 옆으로 펴며 말했다.
“혼자 옷장 속에 숨어 있을 땐 조금 무서울 때도 있지만 놀이니까 괜찮아. 언젠가는 얘가 날 찾아낼 테고 그러면 내가 술래를 하면 되니까.”
여자아이가 소파 위로 뛰어오르며 말했다.
“언젠가 누군가 우리를 찾으러 이곳에 올 거야. 우리는 그때까지 재미있게 숨바꼭질 놀이를 할 거야. 같이 할래?”
여자아이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술래 할래.”
지은이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일라! 숨었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지은이는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몸을 들썩거렸다.
지은이는 작은 서랍을 열어보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사탕 뚜껑을 열어보고 심지어 딸기잼 뚜껑까지 열어보았다. 아이들은 소곤거리며 한동안 숨바꼭질을 했다.
“여기서 계속 놀고 싶어.”
지무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우린 사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하잖아.”
지은이가 말했다.
“우리 집에서 계속 놀지 않을래?”
남자아이가 말했다.
“쥐가 구멍가게에 새끼를 낳았는데 할아버지가 모르고 계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가게는 난장판이 되고 말거야. 그리고 난 열차에 땅콩이를 두고 내렸어. 땅콩이는 너무 낡아서 내가 없으면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지은이가 말했다.
“난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많아, 새로운 길을 달리고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이 공을 차며 뛰어다닐 거야.”
공을 쓰다듬으며 이레가 말했다.
“우리 마을에는 아이가 한 명도 없어. 너희들 우리 마을에 같이 갈래? 새끼 쥐도 보여줄게. 그리고 지은이랑 만들어놓은 아지트가 있거든. 그곳에서 이렇게 숨바꼭질도 하자.”
지무의 말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해변에 도착하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모닥불은 불씨만 남아 있었다.
“오빠! 보석 사탕들이야. 세번째 배에 탄 사람들은 이곳에 내려서 사탕을 뱉었나봐.”
지은이의 발아래엔 모래가 엉겨붙은 사탕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걸까?”
지무가 말했다.
“미리 열차에 탄 사람도 있을지 몰라.”
이레가 말했다.
그때 역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잠시 후 열차가 곧 출발하오니 탑승을 망설이고 계신 분께서는 서둘러 탑승을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순간, 그동안 크기가 변하지 않던 사탕이 지은이와 지무와 이레의 입속에서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그 사탕은 더이상 신비로운 맛이 아닌 흔한 포도맛 사탕과 메론맛 사탕으로 변했다.
아이들이 열차를 향해 달렸다.
2번 칸으로 올라탄 지은이와 지무가 자리에 앉는 순간, 창밖이 환하게 밝아왔다.
“오빠, 우리가 열차에서 내릴 때 내리 쬐던 정오의 태양이야.”
그때 안내원이 2번 칸으로 들어왔다.
“즐거운 봄소풍이 끝났네요. 우리 직원들은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천백스물일곱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 맛을 보며 차장님의 마지막 운행 파티를 했어요. 우리가 어릴 때 먹고 싶었던 환상적인 맛의 아이스크림이었어요. 모두 승객님들 덕분이죠. 이제 곧 열차가 출발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타지 않았는데 열차가 출발해도 되나요?”
지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안내원은 아주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두 가고 싶은 곳으로 갔으니까요. 영원히 사탕이 녹지 않는 곳으로 떠났답니다. 더 좋은 여행을 하고 있을 거예요.”
안내원이 다음 칸으로 가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만요, 제 새로운 친구들의 표를 여기서 직접 살 수는 없을까요? 급히 타느라 표를 사지 못했어요.”
“무슨 말씀이시죠?”
“이 아이들 말이에요.”
모두 열차 안을 둘러보았지만 오두막집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제 친구들을 못 보셨나요? 우리와 비슷한 키의, 그러고 보니 우리와 아주 많이 닮은……”
“아무도요.”
안내원이 바닥에 나뒹구는 사탕 봉지 몇 개를 줍더니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그때 한 손에는 공을 한 손에는 가방을 든 이레가 아이들에게로 왔다.
“너희가 열차에 올라탄 뒤 아이들이 이 가방을 조심스럽게 올려주었어. 선물이래. 그리고 자신들은 오두막집에 남겠다고 말했어. 언젠가 다시 놀러 오라고도 말했고.”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창가로 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 아이들은 조금도 외롭지 않은 것 같아.”
지무가 중얼거렸다.
“오빠, 다음에 우리 다시 여기 오자. 그리고 쟤네들도 만나고……”
이레는 가방을 들고 지은이와 지무의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을 벗어난 열차는 어느새 양쪽으로 숲이 우거진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입속에 남아 있던 사탕은 향기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레야, 네 얼굴은 혈색이 좋아 보여.”
인형을 이레 가까이 대 보이며 지은이가 말했다.
“나는 이제 건강해졌어. 그리고 이제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
“설마 그곳은 지은이네 집이니?”
지은이가 인형을 이레 앞에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맞아. 그네도 미끄럼틀도 없고 텔레비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그 동네. 땅콩이 네가 살고 있는 그 집이야.”
세 아이들은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며 기뻐했다.
“이제 이 가방을 열어보자, 열차가 출발 한 뒤 열어보라고 했어.”
이레가 가방을 열자 작은 강아지 두 마리가 뛰어나왔다.
“난 이 강아지와 종일 뛰어놀 거야.”
이레가 강아지를 안고 쓰다듬었다.
열차가 어두운 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지은이와 지무와 이레와 강아지들은 잠이 들었다.
지은이가 눈을 떴을 땐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며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꿈인 줄 알았어. 사탕처럼 달콤한.”
잠이 든 이레를 보며 지은이가 말했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안고 열차에서 내리자 역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시 돌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신나는 매일매일 보내기를!”
세 아이는 떠나는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열차가 사라져 마침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송미경
먼 곳의 이야기는 가까이, 친근한 이야기는 낯설게 쓰고 싶다. 평소에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문장에 관심이 많다. 최근 그림책으로 시선을 돌려 그림을 그리고 있다. 동화 『돌 씹어 먹는 아이』를 냈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