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 내가 핸드폰 도둑이다.’
    해주는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지만 그 생각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해주는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해주 앞으로 다가오는 선생님의 발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뜨겁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 심장 속으로 들어와 새처럼 퍼덕거렸다. 해주는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 가방과 책상 서랍 속을 모두 확인한 선생님은 연아에게 말했다.
    “어디에 떨어졌는지 모르니까 다시 한번 찾아보자.”
    연아가 책상 위에 엎드렸다. 연아 머리 위 리본이 나비처럼 살랑 흔들렸다. 그 사이 해주의 심장 속 생각이 날갯짓을 멈췄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연아가 갔던 곳을 모두 다니며 다시 찾아보았지만 핸드폰을 찾지 못했다. 선생님은 연아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여러 번 걸면서 교실 안과 밖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청소 당번인 해주는 책상을 정리하고, 빗자루로 휴지를 쓸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남자아이들 몇은 걸레를 던지고 발로 차면서 놀았다. 한참 동안 놀던 아이들 중에서 키와 덩치가 젤 큰 경수가 소리쳤다.
    “청소 끝!”
    그 말에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나갔다. 해주는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척 하면서 책상 아래 쭈그려 앉았다. 민영이가 나가면서 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해주야, 안 가?”
    해주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으, 응. 이것만 치우고…… 먼저 가.”
    “나 먼저 갈게. 학원 늦었어.”
    민영이가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가자마자 해주는 아무도 없는지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사물함 쪽으로 다가갔다. 사물함 속에서 둘둘 뭉쳐 있는 까만 목도리를 꺼냈다. 목도리 속에서 회색 벙어리장갑을 꺼냈다. 장갑 속에 손을 넣자 보드랍고 매끈한 연아의 분홍색 핸드폰이 한 손에 쏙 들어왔다.
    해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핸드폰 도둑이 아니야. 연아의 핸드폰을 일부러 훔친 건 절대 아니야. 그냥 핸드폰을 주웠을 뿐이야. 잠시 맡고 있을 뿐이야. 잠깐 갖고 있다가 돌려줄 거야.’
    3교시 수업 시간 종이 울리기 조금 전이었다. 해주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로 막 뛰어갔다. 잽싸게 오줌을 누고 나오려는데, 휴지 걸린 곳 위에 연아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해주는 연아에게 갖다줄 생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연아 등에는 구불거리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머리끝은 분홍색으로 염색이 되어 있는데 백화점에 진열된 인형 머리카락처럼 예뻤다.
    연아가 가진 물건들은 다 예뻤다. 연아는 이 핸드폰은 새로 산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신상품이라서 100만원도 넘는다고 했다. 연아는 핸드폰에 새 옷을 입히듯 매일 새 케이스로 갈아 끼웠고, 반짝이는 액세서리와 귀여운 캐릭터 인형으로 치장했다. 아이들 말로는 케이스와 액세서리도 엄청 비싼 거라고 했다. 해주는 연아가 이깟 핸드폰쯤 잃어버려도 아까워하지 않을 거라고, 연아의 엄마가 더 좋고 더 최신식인 핸드폰을 사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주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분홍 케이스의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느낌이 좋아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며칠만 갖고 있다 주면 안 될까……’
    핸드폰으로 게임을 해보고 싶었다. 친구들이랑 문자 대화도 하고 영상 통화도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서로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키득거리곤 했다. 해주는 그럴 때마다 혼자서만 무인도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핸드폰을 사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해주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엄마랑 아빠는 간신히 전화랑 문자만 되는 오래된 핸드폰을 쓰고 있다. 그러니 몇십만원씩 하는 핸드폰을 사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는 다니던 영어 학원도 잠시 쉬기로 했다. 컴퓨터 무료 동영상으로 공부해도 충분하다는 엄마의 말에 해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린 쌍둥이 동생들이 먹는 우유 배달도 끊었다. 아빠는 일 년이 넘게 매일 오전 느지막하게 나갔다가 어깨가 축 처진 채 이른 오후에 들어오곤 했다. 아빠가 새 직장을 찾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해주는 연아의 핸드폰 전원 버튼을 살며시 눌렀다. 핸드폰 화면에 불이 반짝 들어오면서 환해졌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선 것처럼 설레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 문을 열려면 비밀 신호가 필요했다. 해주는 이리저리 선을 그어보았다. 기역, 니은, 디귿, 시옷, 연아의 리본 핀, 연아의 곱슬머리, 연아의 구두, 연아의 가방, 연아의 웃음, 연아의 분홍…… 하지만 비밀 신호를 맞출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비밀 신호를 맞출 수 없었다.
    열 번도 넘게 틀린 비밀 신호를 입력하자 핸드폰 첫 화면이 바뀌었다. 또다른 비밀 암호를 입력하라는 글자가 떴다. 더 깊숙한 미로로 빠져든 것 같았다. 해주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 쉽게 열릴 리는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핸드폰이 부우웅부우웅 움직였다. 해주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핸드폰 화면에 붉고 진한 색으로 ‘마귀할멈’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누굴까? 해주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참 동안 몸을 떨던 핸드폰은 조용해졌다. 잠시 뒤, 다시 또 화면에 뜨는 마귀할멈. 부우웅부우웅, 다시 또 부우웅부우웅, 부우웅부우웅, 부우웅부우웅. 부우웅부우웅…… 수십 차례 몸을 떨던 핸드폰이 어느 순간 얌전해졌다.
    조용해진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다시 또 부우웅부우웅, 마귀할멈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잘못 건드렸으면 마귀할멈이랑 통화를 할 뻔 했다. 해주는 휴우! 한숨을 쉬었다. 마귀할멈은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해주는 책상 밑에서 꿈틀꿈틀 기어나왔다. 핸드폰을 연아의 책상 서랍 속에 슬그머니 밀어넣었다. 핸드폰은 서랍 속에서도 부우웅부우웅, 길 잃은 동물처럼 울고 또 울며 발버둥을 쳤다.
    가방을 메고 일어서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니 연아 혼자서 운동장 귀퉁이 그네 근처에서 발밑을 쳐다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항상 새침때기에 잘난 척만 하는, 분홍투성이의 얄미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좀 달라 보였다. 핸드폰 때문이었을까? 핸드폰에 연아의 쌀쌀맞음과 얌체와 잘난 체가 들어 있던 걸까? 핸드폰이 연아의 무언가를 가져가버린 것일까?
    해주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연아는 여전히 바닥을 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해주는 철봉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철봉을 잡고 펄쩍 뛰어 철봉에 허리를 걸쳤다. 다리를 철봉에 걸고 무릎을 접은 다음 손을 놓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다. 연아가 돌아봤다.
    해주는 거꾸로 매달린 채 흙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연아가 철봉 쪽으로 다가왔다.
    해주는 동그라미 밖에 큰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밖에 더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들이 양파처럼 겹겹이 겹쳤다. 그 옆에 그리고 또 그렸다. 뚱뚱한 양파가 세 개 네 개 점점 많아졌다.
    “점심시간에 잠깐 여기 왔었는데…… 여기에도 없네. 너도 내 핸드폰 못 봤지?”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꾸로 매달린 채 끄덕이니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양파들 때문인지 약간 눈이 매운 것도 같았다. 양파를 이리저리 뭉개버렸다.
    “그거 어떻게 해?”
    해주는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하면서 말했다.
    “해볼래?”
    “할 수 있을까?”
    “어렵지 않아. 내가 도와줄게.”
    해주는 망설이는 연아를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게 했다. 연아는 처음에는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맸지만 해주가 방법을 알려주자 금방 따라했다.
    해주는 거꾸로 매달린 연아 옆 철봉에 발을 걸고 냉큼 올라가 매달렸다. 거꾸로 매달린 채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피가 몰려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해주는 눈을 감고 몸을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여긴 통닭집이야. 난 통닭이야! 숯불구이 통닭”
    연아가 웃었다.
    “하하하, 난 양념 통닭.”
    연아가 해주를 따라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울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 분홍 양념으로 무친 양념 통닭.”
    해주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연아를 바라보았다. 연아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분홍색 머리끝이 흙바닥에 닿아 있었다. 연아는 연분홍색 티셔츠와 진분홍색 바지를 입고 있어서 분홍색 양념 통닭이란 말이 딱 맞아 보였다.
    해주는 좀더 힘껏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연아가 해주를 따라 몸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그러자 연아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작고 무거운 것이 모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둘은 철봉에서 내려와서 찾았지만 그것은 어느새 모래 속으로 들어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거……”
    해주는 연아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잠깐! 말하지 마. 내가 맞혀볼게.”
    해주는 철봉 아래 모래 속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거렸다. 겉모래는 보슬보슬하고 말라 있는데 속 모래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연아도 철봉에서 내려와 해주를 따라 모래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깜짝 놀라 빼면서 말했다.
    “윽! 누가 오줌 쌌나?”
    해주의 손에 뭔가가 잡혔다. 해주는 소리를 지르며 꺼내올렸다.
    “찾았다!”
    그건 새끼손가락만한 토막 연필이었다. 해주는 의기양양하게 연아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아니야.”
    해주는 다시 모래 속을 휘휘 저었다.
    “이거야?”
    연아가 큭큭 웃으며 해주가 찾아낸 녹슨 열쇠 한 개를 받았다.
    “이것도 아니야. 이걸로는 아무 데도 못 열겠다.”
    “그럼…… 이거?”
    해주는 모래 속에서 작은 실 핀 한 개, 10원짜리 동전 한 개, 100원짜리 동전 두 개, 녹이 슨 열쇠 한 개, 토막 연필 한 개, 반쪽짜리 지우개, 클립 한 개를 찾았다.
    해주는 손바닥 위에 모래 속에서 꺼낸 것들을 늘어놓고 말했다.
    “이중에서 뭐야? 네가 잃어버린 게?”
    “없어.”
    “그럼 뭔데?”
    연아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붙일 듯 말듯 하면서 말했다.
    “요만한 건데, 핸드폰 이어폰 구멍에 꽂는 작고 반짝거리는 분홍색 키티 인형.”
    ‘핸드폰’이란 말에 다시 또 해주의 가슴속 새가 날개를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찾을게.”
    해주는 두 팔을 걷어붙인 채 모래 속에 손을 푹 집어넣고 휘휘 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휘저어도 모래만 잡혔다. 그 조그만 인형을 찾을 수 없었다.
    연아가 해주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
    해주는 연아의 팔을 뿌리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야. 내가 찾는다니까.”
    “정말 괜찮아. 집에 또 있으니까.”
    연아의 말에 해주는 팔에 스르르 힘이 빠졌다.
    해주는 손에 묻은 모래를 털면서 말했다.
    “넌 좋겠다. 엄마, 아빠가 갖고 싶은 것 맘대로 다 사주고……”
    연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아빠가 사주지 못하는 것도 있어.”
    해주는 연아를 쳐다보았다. 연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물이 살짝 고였다가 사라졌다.
    해주는 팔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와, 신기하다. 여긴 마치 보물섬 같아.”
    해주의 말에 연아도 펄쩍펄쩍 뛰며 소리쳤다.
    “우린 해적이야! 드디어 보물섬을 발견한 거야.”
    “보물은 다 우리 거야!”
    해주는 소리를 지르면서 운동장을 뛰었다. 연아도 해주 뒤를 따라 팔짝팔짝 뛰었다.
    해주는 정글짐 쪽으로 뛰어갔다.
    “여긴 원숭이 정글이야. 원숭이들이 우리를 쫒아오고 있어. 빨리 도망가야 해.”
    해주는 정글짐 안으로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해주의 말에 연아는 끽끽거리는 원숭이 소리를 흉내내면서 해주를 쫓아왔다.
    “우리 섬을 차지하러 온 나쁜 해적을 잡아먹을 테야. 끼끼끽. 나는 괴물 원숭이 대왕이다!”
    해주는 정글짐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진짜로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뒷머리랑 등이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찌릿하고 간질간질했다. 해주는 무시무시한 원숭이를 피해서 높은 산꼭대기로 날아오르듯 올라갔다.
    연아는 해주처럼 정글짐을 빨리 오르지 못했다. 정글짐에 오른 해주는 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서서 휘 둘러보았다. 운동장이랑 학교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연아는 곧 해주를 따라 올라와 해주의 옷자락을 잡았다.
    “왁! 잡았다. 나쁜 해적! 내 보물 내놓고 사라져라!”
    해주는 주머니 안에 있던, 철봉 아래 모래밭에서 찾아낸 흙투성이 물건들을 연아에게 주었다.
    “살려주세요. 제 보물 다 드릴게요. 히히히.”
   연아는 물건들을 받으면서 말했다.
   “알겠다. 그럼 한 번만 봐주지. 대신 당장 이곳에서 꺼져라. 하하하.”
   한 줄기 바람이 땀에 젖고 흙투성이가 된 연아의 머리카락을 휘리릭 넘기고 지나갔다. 분홍빛이 도는 연갈색 긴 머리카락은 엉켜 있고, 얼굴은 땀에 젖고 빨갰지만 연아의 눈은 반짝반짝했고 얼굴 가득 함박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다. 하하하”
   크게 웃던 연아가 갑자기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굳어졌다.
   “왜 그래?”
   연아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어.”
   “지금 핸드폰 없잖아.”
   “글쎄 말이야. 우리 엄만 내가 학원가는 걸 핸드폰으로 꼭 확인하거든. 노느라고 깜박 잊어버렸었어. 지금 울 엄마 연락 안 된다고 펄펄 뛰고 있을 거야.”
   해주는 연아를 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해주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꺼냈다.
   “사실 네 핸드폰……”
   해주는 말을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가슴속 새가 다시 또 파닥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해주의 말에 연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혹시 네가?”
   해주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냐, 훔친 거. 화장실에서 주웠어.”
   “그런데 왜 아까 말하지 않았어?”
   “그…… 그건…… 미안해.”
   해주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목소리도 조금 떨렸다.
   “네 서랍 속에 넣어뒀어. 정말 미안해.”
   그러자 연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핸드폰이 없어서 이렇게 놀 수 있었는걸.”
   해주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아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정말이야. 괜찮다니까.”
   연아는 해주의 어깨를 툭 쳤다. 해주는 연아가 못 보게 재빨리 스윽 눈가를 문질렀다. 해주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마귀할멈이 누구야?”
   “마귀할멈?”
   “네 핸드폰에 여러 번 찍히던데?”
   연아는 푸훗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무시무시한 할멈이야.”
   연아의 말에 해주는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진…… 진짜? 너희 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워?”
   연아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아니야. 같이 사는 할머니 없어. 마귀할멈은 우리 엄마야.”
   “너희 엄마?”
   “응. 우리 엄마.”
   해주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해적이랑 원숭이랑 마귀할멈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연아가 냉큼 대답했다.
   “원숭이! 그 원숭이는 힘이 엄청 센 괴물 원숭이거든.”
   연아와 해주는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속에 가득 찼다. 해주는 심장 속에서 퍼덕이던 새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둘의 웃음소리를 타고 검고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우미옥

물건들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주변을 어떤 물건들로 채우고(비우고), 물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끊고), 어떻게 헤어져야(만나야) 하는지 고민 중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나에게 딱 맞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집중한다면 나는 더 나다워지고, 지구는 조금 더 편안히 숨 쉴 수 있겠지요.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