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동산은 죽지 않는다
1.
냄새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감도는 퀴퀴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오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냄새가 심각할 정도로 지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5층에서 날 만한 냄새는 아니었다. 구축이긴 하지만 구축이기 때문에 정남향으로 볕이 잘 드는 곳에 집이 지어져 있었다. 주방 쪽에 있는 다용도실 창문을 열면 뒤쪽으로 바로 산이 있었다. 지대가 높은 편이라 바람이 잘 통했다. 그런데도 집에서는 살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살았던 반지하를 떠올리게 했다. 반지하라고 하지만 거의 지하에 가까워서 집안에 난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한 뼘 정도에 불과했다. 그 한 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발이 전부였다. 어느 날인가 아내는 가뜩이나 어두운 집안에 암막 커튼까지 달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 창밖을 볼 때마다 발에 짓이겨지는 기분이야. 그 순간 그는 이사를 결심했다. 때마침 부동산 경매 사이트에서 이 집을 발견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구축의 나홀로 아파트를 샀다고 하니 주변에서 하나둘 말을 보탰다. 왜 그 쓰러져가는 집을 사냐, 신혼부부 특공으로 청약을 넣지, 중소기업 다닌 지 십 년 차 아니냐, 라고 물으면서 좆소가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중소기업 특공 쓰는 거 아니냐, 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른다. 아무리 혼인율이 낮다고 해도 여전히 박터지는 게 신혼부부 특별공급이오, 그나마 확률이 높다는 중소기업 특공은 또 어떤가.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나라 전체 기업 숫자의 99퍼센트가 중소기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전체 근로자 수의 88퍼센트가 중소기업 종사자고 나머지 12퍼센트가 대기업 근로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보다 청약이 되도 골치가 아팠다. 나날이 치솟는 분양가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나와 아내로서는 이 집이 조건에 맞았다. 서울 안에 있을 것, 집값이 비싸지 않을 것, 또 한 가지는 발전 가치가 있을 것. 왜 이 집을 샀냐고? 이곳이 곧 재개발이 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냄새를 제외하면 다른 부분은 기대 이상이었다. 삼십 년도 훨씬 넘은 구축 아파트이긴 했지만 바로 직전에 주인이 집의 일부를 개수해 내부는 깨끗했다. 실거주 목적이 아닌 투자 목적이 많아 빈집이 많았다. 실제 살고 있는 가구수는 고작 여섯 가구였다. 그냥 집을 놀릴 수 없어 간간히 세를 준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여러모로 인프라가 부족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으니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오고 나니 층간 소음 걱정도 없고 담배 연기에 눈살 찌푸릴 일도 없어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화이트 톤으로 통일성을 준 인테리어는 우리 부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고급 자재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횡재다 싶었다. 따로 벽지나 장판을 하지 않았다. 바퀴벌레나 개미도 집안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누군가 오래된 아파트는 배관을 타고 쥐가 드나든다고 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왜 그런 집을 샀냐고 말하던 사람들도 막상 우리 집에 오면 부러워했다. 경매로 집을 사는 것도 능력이라며 알려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 예외는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아내의 이모님이었다. 이모님은 이집에 강한 기운이 있다고 했다. 그 기운으로 사람들을 모아 집값은 많이 오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참 곰곰이 생각하던 이모님이 입을 열었다.
당장 이사 가.
이모님은 나를 돌아보더니 다그쳤다.
이번에는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
나는 이모님의 호통에 당황스러웠다. 사실 이모님은 아내에게 엄마와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장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님을 일찍 여의고 이모님 밑에서 자랐다. 이모님은 젊은 시절 꽤 이름을 날린 무당으로 쭉 혼자 사셨다. 집도 건물도 여러 채 있었는데, 신도를 가장한 사기꾼을 만나 모두 잃어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도 이모님을 찾지 않았다.
에이, 이모 왜 그래, 축하해주러 온 거잖아.
아내가 이모님을 잡아끌었다. 이모님은 못마땅한 듯 집안을 둘러보더니 거실 벽으로 가더니 품에서 노란 부적 한 장을 꺼내 붙였다. 곧 이어 이모님은 기도를 했다.
곧 죽어도 이 집에서 살고 싶다면 말이다. 절대 떼지마라.
그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아내와 이 문제로 조금 다퉜다. 이모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언뜻 경멸이 섞여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모님은 나와 아내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제 욕심대로 해서 너를 고생시킬 거라고 했단다. 맞춰주는 척하면서 고집대로 하는 거라고, 속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아내가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사실 아내와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모님의 그 말은 내게 결혼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집도 비밀은 있었다. 이전 주인들 내외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유는 사업상 생긴 빚 때문이라고 하지만 경찰은 집에서 나간 흔적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고 했다. 아내에게 이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화내지 마.
나는 걱정과 불신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걱정? 아니 그렇게 앞날을 잘 아는 분이 사기꾼한테 당해?
여보! 그 말은 진짜 좀 심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을 몇 번이나 두드리고 미안하다고 말해도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사과를 하면서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 싶었다. 나는 그저 열심히 살려고 한 죄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 생각을 하는데 부적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길로 부적을 잡아 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2.
여보, 냄새가 좀 심해지는 것 같지 않아?
어느 날인가 아내가 말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2박 3일 만에 아내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아내의 말에 바로 이틀 전을 떠올려보았지만 그때보다 얼마나 심해진 건지 쉬이 비교할 수 없었다.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 왜곡되기 마련이므로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아내는 계속해서 킁킁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식욕이 떨어지고 기운이 빠졌다. 아내가 이모님의 말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다시 기분이 상했다.
난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밥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사실은 그랬다. 냄새가 났다. 제법 심하게. 그런데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울살이 오 년 만에 내 손으로 산 집이었다. 출장 내내 이 조건에 구할 수 있는 다른 집들을 알아봤는데, 형편없었다. 형편을 논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내가 번 돈으로 집을 사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전세도 재계약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2년이 지나면 나가달라고 했다. 전세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이 집에 살면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없다는 게 좋았다.
아, 그래?
아내가 짧게 대답했다. 식탁에는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적막만이 흘렀다. 고개를 들어 반찬을 보는데,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불고기에 조기 새끼도도 굽고, 연어를 넣은 샐러드까지 있었다. 생일도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정성 가득한 식탁을 보자 새삼 미안해졌다. 아내의 수고로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언제나 잘 정돈된 집안도 아내의 노력 덕이리라.
여보.
나는 아내를 조용히 불렀다. 아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핏 아내의 어깨가 떨리는 게 보였다. 혹시 울고 있는 건가 싶었다.
여보.
나는 다시 아내를 불렀다. 그때였다. 아내가 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막 달렸다. 그러더니 어느 시점에서 멈췄다. 무릎을 짚고 고개 숙인 아내의 뒤통수 아래에서 진득하고 시큼한 뭔가가 후드득 떨어졌다.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바닥을 닦았다. 아내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나만 그런가, 나만 냄새가 심한가 하고 말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하는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아내가 예민하다 싶었다. 이전에 반지하에서도 이보다 못한 냄새가 났다. 그때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 건지 싶었다. 생활이 나아질수록 예전에 어려웠던 생각은 못하는 법이라고 그런게 사람이라고 말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사는 내내 가족들을 고생만 시켰다. 녹슬지 않는 칼이라며 세라믹 장미칼을 만드는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다. 녹이 슬지 않으니 사람들은 새로 칼을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는 내내 다 처분하지 못하고 집에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 집에도 열 자루가 넘게 있었다. 나는 아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빠르게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부동산이 최고였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인데 그 돈을 벌려면 투기밖에 답이 없었다. 집이 냄새가 좀 나면 어떠냐 싶었다. 인근에 집값이 제일 비싼 주상복합 아파트도 여름만 되면 똥 냄새가 났다. 근처에 피혁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렇게 냄새가 난다는 거였다. 정작 그 사람들은 냄새는 무슨 냄새냐며 우겨댔다. 후에 들리는 이야기는 구청에 민원을 넣어 공장에 냄새 여과기를 장착하게 했다는 거였다. 내가 생각하는 포인트는 이거였다. 집값은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였다. 그러니 굳이 냄새가 난다고 광고하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매일 같이 부동산에 들러 커피를 사들고 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죽치고 앉아 얻어낸 정보였다. 투기도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 싶었다.
토사물이 거실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바닥을 닦고 있는데, 식탁 위에 전화기가 웅웅하고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스팸일지 모르지만 혹시나 싶어 받았다.
나다.
이모님이었다. 어째서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내 전화를 받지 않아서 말야.
그랬다. 말은 안 했지만 아내도 이모님께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틱틱댔던 게 순간 미안해졌다.
그 부적 말이다. 잘 붙이고 있는 거지?
네, 붙이고 있어요.
이사 가면 좋겠지만, 내가 입 댈 처진 아니고. 너희들 생각하며 매일같이 기도드리고 있어.
이모님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어디냐고 물으니 계룡산에 있는 한 동굴 안이라고 했다. 결혼 전에 산중에서 기도 중인 이모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여름인데도 동굴 안은 한겨울처럼 추웠다. 퍼뜩 그 생각이 났다.
몸조심하시고요.
전화를 끊기 전 이모님이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바닥에 떨어진 토사물을 치우는 건 쉬웠다. 문제는 거실 벽에 달라붙은 것들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실크 벽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벽지에 우아한 매력을 더하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은빛 물결들 위에 오물이 튀자 눈에 크게 띄었다. 아무리 살살 닦아내도 은빛 코팅지가 같이 밀려나왔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보니 거실 벽 여기저기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실크지 때문에 티가 나지 않아 그동안 모르고 지낸 거였다. 갈라진 틈에서 미지근한 바람 같은 것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꽤나 깊은 균열인 모양이었다. 냄새야 참는다고 한다지만 갈라지는 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건설업을 하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당장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이런 모양으로 난 균열은 안전에 크게 문제는 없는데, 연식이 오래된 건물에 이 정도 균열도 없는 게 말이 되냐.
그것도 그건데 이상한 냄새가 나.
냄새가 뭐? 얼마나 심하길래 그러냐?
가족만큼 가까운 친구라 그런지 그간의 일이 술술 입 밖으로 나왔다. 냄새뿐 아니라 이모님과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털어놨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더니만 야, 너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여? 라는 되먹지 않은 농담을 하는 바람에 헛웃음을 지었다. 친구는 내게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살이 몇 년 만에 내 집 마련한 게 쉬운 일이냐고 말이다.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친구는 그렇게 말하더니 잔뜩 뜸을 들였다. 이번에도 무슨 재미없는 농담을 하려나 기다리는데, 친구가 답했다.
집주인이야, 임마. 세입자는 어디 서러워 살겠냐. 귀신든 집도 세놓는 게 집주인이야, 임마. 집주인이 됐으면 그 정돈 이겨내야지.
그러더니 전화를 끊기 전 한마디를 보탰다.
친구야,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게 서울의 부동산이다, 잊지 마라.
건설과 관계된 커뮤니티에 물어보니 그들의 반응도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균열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페인트를 사다 바르면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페인트를 바르면 냄새도 차단할 수 있다는 말에 다행이다 싶었다. 다만 페인트 냄새가 독하니 주의하라는 말이 있어 아내는 잠시 나가 있게 했다.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양손에 니트릴 장갑을 끼고 있자니 대단한 수술을 준비하는 의사처럼 여겨졌다. 정화하게 원인을 찾아냈으니 이제 집도할 일만 남았다 싶었다. 페인트 냄새가 독하면 얼마나 독하겠냐 싶었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마스크 사이를 귀신같이 파고들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조금 지나자 울렁거리던 속이 제법 나아졌다. 붓으로 균열이 있는 틈을 메워 나갔다. 별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어서 금방 끝났다. 거의 다 발라갈 때였다. 마지막에 제법 크게 난 틈에 붓으로 넣어 칠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틈에 낀 붓을 뺄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잡아당겼더니 붓대 절반이 찢겨나왔다. 붓은 머리채가 쥐어뜯긴 것처럼 초라해져 있었다. 손으로 벽에 박힌 솔 부분을 잡아딷으려 해도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뽑히지 않았다. 있는 힘껏 잡아당겨도 소용없었다. 한참 후에 아내가 돌아왔을 때, 내 붓을 보면서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솔이 다 뜯어지냐고 웃었다. 내가 아내에게 틈에 솔이 껴서 뽑아버렸다고 말하니 어느 부분이냐고 물었다. 거실 벽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거짓말처럼 솔이 사라진 것이었다.
여보 나 놀리는 거지?
아내는 도무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한참 후에 내가 페인트 브러쉬를 다시 찾은 곳은 엉뚱하게도 화장실 세면대에서였다. 아내는 내게 벌써부터 깜빡깜빡하면 안 된다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다. 어찌 된 일인지 브러쉬는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빨간색 페인트를 썼던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브러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뚝 하고 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화장실 천장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거기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신고한 지 십 분 만에 경찰이 도착했다. 집안에 들어서는 표정에 긴장이 역력했다. 나는 그들에게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쥔 아내의 손이 차디찼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는데, 금세 경찰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들어가보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핏물은커녕 핏자국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갈라진 틈은 그대로였지만 거기도 깨끗하게 말라 있었다. 타일이 오래되어 붉게 물때 낀 흔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돌아보니 뒤에서 경찰들이 낮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억울한 마음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고, 그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막아 세우며 말렸지만 서로 간에 감정이 상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경찰 둘 중에 젊은 쪽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만 아니고 여기서 몇 번 이런 신고가 들어왔어요.
그럼 신고한 사람이 아니라 경찰이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젊은 경찰 표정이 확 구겨졌다. 옆에 나이가 좀 있는 쪽이 알아차리면서 그만하라는 듯 가운데로 들어섰다. 젊은 경찰은 할 말은 해야겠다며 지지 않고 말했다. 피가 보인다. 누가 쳐다보고 있다고 말해서 막상 와보면 타일이 깨져 있거나 물때거나 벽지가 찢어져 있는 걸 잘못 보고 그런다는 것이다.
경찰 말고 보수 업체에 먼저 의뢰하세요, 네?
나는 경찰이 왜 그렇게 무례하게 말하는지, 아무리 내가 기분 나쁘게 했기로서니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으로 대하는 게 무엇 때문인지 알았다. 이 집에 살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집에 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더구나 몇 세대 없는 아파트라 관공서에 민원을 넣어도 반응이 심드렁했다.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창 아버지의 장미칼 사업이 망해 오랫동안 비어있던 상가 건물에 월세를 산 적이 있었다. 바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있던 집이었는데, 현관문은 얇디얇은 유리문 하나가 전부였다.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다녔다. 집안에 세면대도 화장실도 없었다. 집이라기보다 창고였다. 밤중에 술 취한 사람이 문이 부서지라 두드려서 신고한 적이 있었다. 도착한 경찰이 떠나기 전 부모님에게 말했다.
그냥 이사를 가세요.
그때 결심했다. 번듯한 집을 사야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아등바등 노력했다. 이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돌아서는 경찰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 바람에 경찰의 목이 뒤로 확 젖혀졌다. 누군가 옆에서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나도 모르게 그 손아귀를 떨쳐내려고 밀쳤다. 그 순간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경찰의 눈이 커졌다. 그 시선을 따라 돌아보는데, 그제야 옆에 선 사람이 아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뿌리친 건 아내의 손길이었다. 순식간에 아내는 내게 떠밀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쿵― 소리와 함께 아내의 머리가 식탁 모서리에 부딪혔다.
여보!
내가 다가설 틈도 없이 경찰들이 먼저 다가가 아내를 부축했다. 아내는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아내의 상태를 살피던 경찰이 나를 바라봤다. 살펴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지체 말고 연락주세요.
경찰이 아내에게 말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아내나 때리는 파렴치한으로 몰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불쾌해졌다.
그냥 우연이에요.
이마를 한 손으로 짚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그냥 실수일 뿐이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맞아요, 집이 오래돼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아내는 어찌 된 일인지 텅 빈 벽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3.
핏자국은 착각이라고 쳐도 브러쉬가 사라졌다는 건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헛것을 본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건 상식을 벗어난 범주였다. 상식을 벗어났다는 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봤던 것과 이 기분 나쁜 악취와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이제 집에 돌아와 내가 하는 일은 벽에 생긴 틈을 하나하나 살피는 일이었다. 그 틈으로 혹시 핏물이나 체액 같은 것들이 흘러나오지 않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자니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불안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또 헛것 본 거 아니야? 이모님이 주신 부적 놓고 다니지?
어릴 때부터 헛것을 자주 보는 통에 이모님이 부적을 써주셨다. 부적과 팥을 몇 개 넣어서 늘 지니고 다니라고 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응, 그럼 있지.
나는 행여 버렸다고 오해할까 싶어 버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헛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벽면에 피가 스며나오는 것을 봤다. 다시 돌아봤을 때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여러 번 신고를 했는데도,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어서 능숙한 범죄자의 소행일 거라 짐작했다. 내가 확신을 하면 할수록 아내는 도리어 나를 걱정했다. 아내는 내게 며칠 어디서 좀 쉬고 오는 게 좋겠다며, 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같이 가는 게 내키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는 건 어떠냐는 거였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그런 것이다 싶었는데, 거듭해서 집에서 내보내려는 아내가 점점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아내는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집에 돌아오면 쉬지 않고 말을 하던 아내였다. 어떤 때는 아내의 말을 들어주기가 벅찰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카나리아라고 불렀다. 그랬던 아내가 이제 내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번은 자고 있나 싶어 방문에 귀를 가져갔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와 통화 중인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간간히 들리는 말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주 작게 들렸지만 분명했다. 이제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전화기 좀 줘 봐.
나는 말과 동시에 아내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거친 내 손길에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상 통화목록을 보니 의심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세상에,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아내가 나를 노려봤다. 매섭게 나를 보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더니 아내가 내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크게 실수한 것 같았지만 차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문 앞에서 두드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뺨 위로 뭔가가 스쳤다. 바닥으로 툭하고 하얀 게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임신 테스트기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들어보니 선명한 두 줄이 보였다.
이런 미친놈도 아빠라고!
나는 얼떨떨한 것도 잠시 아내를 끌어안았다. 아내가 내 뺨을 막 후려쳤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 여보. 이제 당신 아빠야.
아내가 괜찮다고 만류했지만 내가 괜찮지 않아 집을 나섰다. 포도와 딸기, 족발이 먹고 싶다는 주문을 받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 위험한 일은 하지 마, 괜한 일에 집착하지 말고. 냄새야 뭐 업체 시켜서 처리하지 뭐.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여보, 어디 가서 좀 쉬고 오자, 응? 당장 내일이면 더 좋고.
나는 기꺼이 그러리라 말했다.
아내는 내가 나가기 전 이모님이 꾼 꿈을 말해줬다. 거대한 뱀이 아내를 집어삼키는 꿈을 꿨다는 거였다. 한밤중에 이모님이 전화를 걸어 당장 이사를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길 들었을 때는 이미 아내는 자신이 임신한 걸 안 뒤라 속으로 웃었다고 했다. 이제 아내가 왜 그렇게 웃었는지, 그렇게 전화 통화를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집이 보였다. 인근에 가로등 몇 개만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걸 보니 아이가 태어나 혼자 이 길을 걸으면 꽤나 위험하겠다 싶었다. 가장 가까운 학교가 어디 있더라, 생각해보니 큰길을 두 번이나 건너야 했다. 초품아라고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인기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곳은 아이와 살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사를 가야하나 싶기도 했다. 어쩌면 이사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애써 그냥 버티며 살았지만 냄새 또한 아이에게 좋지 않을 거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 집은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그냥 안전하게 우리 세 식구 살 수 있는 집이면 됐지. 순식간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을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산 거지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거의 홀린 듯이 산 거나 다름없었다. 원래 그렇게 집은 번갯불에 콩 볶듯이 계약하는 거라고 했다. 사람이 집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집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아내와 여행을 가서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아내 역시 여기 살면서 이런저런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그동안 내가 예민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같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야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아이라니, 우리의 아이라니 꼭 닫은 입 밖으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라니! 아이가 나를 보며 아빠, 하고 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자식이 생긴다는 건 어떤 걸까 싶었다. 아버지에게 묻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죽는 그날까지도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했고 끊임없이 실패했다. 어차피 망할 일이니 시작도 하지 말란 말은 아버지에게 통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아버지는 미안하다며 모든 게 너희를 위해서라고 했다. 아버지의 숨이 꺼져가는 와중에 그 말이 기막혀서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되물었었다. 아버지는 임종 뒤에 놀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그 기억에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포도와 딸기, 족발을 사 가지고 돌아오며 계단을 오르는 길에 문득 이웃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마음속으로 이미 이 집을 떠나야겠다 마음먹으니 더 그랬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간 이웃과 마주친 일이 없다 싶었다. 그저 출퇴근 시간이 달라 그렇겠거니 한 거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어차피 집을 내놔야 한다면 이 집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편이 좋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웃을 찾기로 했다. 먼저 맨 아랫집을 찾았다. 처음 이사 올 때 잠깐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가는 이웃과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그래도 거기에 사람이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본 기억이 없었다. 집 밖에 자전거는 있었는데,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다음은 404호를 찾아 문을 두드려봤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조용했다. 잠시 귀를 현관문에 대보니 안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문을 돌려봤다. 문이 열려 있었다.
계세요? 저 501호 주민인데요.
살림살이가 갖춰져 있었지만 어쩐지 묘하게 색이 바래 있었다. 계세요, 하고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내 목소리만 울렸다.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은 무려 석 달 전 것이었다. 찻잔에 시커멓게 핀 곰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작스럽게 집주인이 떠난 것처럼 사람만 없다뿐이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예전 체르노빌 지역의 영상을 봤을 때와 같았다. 이상하게 섬뜩해져 밖으로 나왔다.
그길로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몹쓸 호기심이 일었다. 아무리 몇 가구 없다고 해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706호를 찾았다. 거기에는 확실히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손잡이를 슬며시 돌리자 그대로 문이 열렸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쌓아놓은 짐만 입구에 놓여 있었다. 딱 봐도 여행을 가려고 준비한 상황인데, 짐만 놓고 나가버렸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렇게 해서 1003호까지 가게 되었다. 이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는 마지막 이웃이었다. 한편으로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발길이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 사람이 사라져버리다니. 여기에는 제발 사람이 있으면, 그래서 내게 뭐라도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계세요?
나는 관성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사실 이쯤 되니 어떤 대답이 들릴까 봐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요. ……기요.
그 목소리에 다가가니 안방이었다. 안방 문 앞에는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한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저 좀 꺼내주세요.
여자는 고개를 웅크리고 있었다. 여자는 멀쩡해 보였다. 안색이 좀 창백했다뿐이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디 불편하세요?
여자의 손을 잡아끌려고 하는데 기운이 없었다. 여자의 몸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서는 더없는 악취가 났다.
저기 일어나보세요.
여자를 잡아당기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여자는 죽어 있었다. 확실했다. 다만 여자의 다리가 침대 프레임 사이에 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조금만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정체를 찾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자의 발밑에 틈이 있었다. 그 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도와달라고, 안 들려?
그러더니 여자는 순식간에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오면서 퍼뜩 아내 생각이 났다. 홀로 있을 아내는 괜찮을까. 나는 서둘러 집으로 올라갔다. 집안은 고요했다. 들어가자마자 아내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 봤던 광경 때문에 겁이 났다.
여보, 왜 그래?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화장실이었다.
당신 거기 있어?
응!
빨리 나와봐, 여보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우리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돼.
아이참, 여보! 나도 큰일 났어!
왜?
휴지가 없어, 여보! 휴지가!
휴지?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화장실에 두루마리 휴지를 두 개씩 놓고 있었다. 하나는 밖에, 하나는 여분으로 수건을 놓는 수납장 안에 놓고 있었다. 아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빨리 가져다줘!
아내의 목소리가 유독 멀리서 들린다 싶었다. 나는 아내에게 응, 하고 대답하면서 화장실 문으로부터 멀어졌다. 퍼뜩 휴지통에 버린 부적 생각이 났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들여다본 휴지통에 잘게 찢어진 노란 조각들이 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히 빌었다. 내 아내가, 우리 아이가 부디 무사하기를. 그렇게 거의 다 맞춰나갈 때였다. 화장실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선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여보? 내가 나갈까?
그때였다. 퍼뜩 친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게 서울의 부동산이다, 잊지 마라. 라는 말이. 나는 땀에 전 부적 조각을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곧이어 싱크대 수납장에 넣어둔 세라믹 칼을 빼 들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말했다.
아니, 내가 들어갈게.
냄새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감도는 퀴퀴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오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냄새가 심각할 정도로 지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5층에서 날 만한 냄새는 아니었다. 구축이긴 하지만 구축이기 때문에 정남향으로 볕이 잘 드는 곳에 집이 지어져 있었다. 주방 쪽에 있는 다용도실 창문을 열면 뒤쪽으로 바로 산이 있었다. 지대가 높은 편이라 바람이 잘 통했다. 그런데도 집에서는 살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살았던 반지하를 떠올리게 했다. 반지하라고 하지만 거의 지하에 가까워서 집안에 난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한 뼘 정도에 불과했다. 그 한 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발이 전부였다. 어느 날인가 아내는 가뜩이나 어두운 집안에 암막 커튼까지 달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마침내 아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 창밖을 볼 때마다 발에 짓이겨지는 기분이야. 그 순간 그는 이사를 결심했다. 때마침 부동산 경매 사이트에서 이 집을 발견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구축의 나홀로 아파트를 샀다고 하니 주변에서 하나둘 말을 보탰다. 왜 그 쓰러져가는 집을 사냐, 신혼부부 특공으로 청약을 넣지, 중소기업 다닌 지 십 년 차 아니냐, 라고 물으면서 좆소가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중소기업 특공 쓰는 거 아니냐, 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른다. 아무리 혼인율이 낮다고 해도 여전히 박터지는 게 신혼부부 특별공급이오, 그나마 확률이 높다는 중소기업 특공은 또 어떤가.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나라 전체 기업 숫자의 99퍼센트가 중소기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전체 근로자 수의 88퍼센트가 중소기업 종사자고 나머지 12퍼센트가 대기업 근로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엇보다 청약이 되도 골치가 아팠다. 나날이 치솟는 분양가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나와 아내로서는 이 집이 조건에 맞았다. 서울 안에 있을 것, 집값이 비싸지 않을 것, 또 한 가지는 발전 가치가 있을 것. 왜 이 집을 샀냐고? 이곳이 곧 재개발이 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냄새를 제외하면 다른 부분은 기대 이상이었다. 삼십 년도 훨씬 넘은 구축 아파트이긴 했지만 바로 직전에 주인이 집의 일부를 개수해 내부는 깨끗했다. 실거주 목적이 아닌 투자 목적이 많아 빈집이 많았다. 실제 살고 있는 가구수는 고작 여섯 가구였다. 그냥 집을 놀릴 수 없어 간간히 세를 준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여러모로 인프라가 부족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으니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오고 나니 층간 소음 걱정도 없고 담배 연기에 눈살 찌푸릴 일도 없어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화이트 톤으로 통일성을 준 인테리어는 우리 부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고급 자재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횡재다 싶었다. 따로 벽지나 장판을 하지 않았다. 바퀴벌레나 개미도 집안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누군가 오래된 아파트는 배관을 타고 쥐가 드나든다고 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왜 그런 집을 샀냐고 말하던 사람들도 막상 우리 집에 오면 부러워했다. 경매로 집을 사는 것도 능력이라며 알려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 예외는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아내의 이모님이었다. 이모님은 이집에 강한 기운이 있다고 했다. 그 기운으로 사람들을 모아 집값은 많이 오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참 곰곰이 생각하던 이모님이 입을 열었다.
당장 이사 가.
이모님은 나를 돌아보더니 다그쳤다.
이번에는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
나는 이모님의 호통에 당황스러웠다. 사실 이모님은 아내에게 엄마와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장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님을 일찍 여의고 이모님 밑에서 자랐다. 이모님은 젊은 시절 꽤 이름을 날린 무당으로 쭉 혼자 사셨다. 집도 건물도 여러 채 있었는데, 신도를 가장한 사기꾼을 만나 모두 잃어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도 이모님을 찾지 않았다.
에이, 이모 왜 그래, 축하해주러 온 거잖아.
아내가 이모님을 잡아끌었다. 이모님은 못마땅한 듯 집안을 둘러보더니 거실 벽으로 가더니 품에서 노란 부적 한 장을 꺼내 붙였다. 곧 이어 이모님은 기도를 했다.
곧 죽어도 이 집에서 살고 싶다면 말이다. 절대 떼지마라.
그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아내와 이 문제로 조금 다퉜다. 이모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언뜻 경멸이 섞여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모님은 나와 아내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제 욕심대로 해서 너를 고생시킬 거라고 했단다. 맞춰주는 척하면서 고집대로 하는 거라고, 속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아내가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사실 아내와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모님의 그 말은 내게 결혼 결심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집도 비밀은 있었다. 이전 주인들 내외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이유는 사업상 생긴 빚 때문이라고 하지만 경찰은 집에서 나간 흔적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고 했다. 아내에게 이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화내지 마.
나는 걱정과 불신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걱정? 아니 그렇게 앞날을 잘 아는 분이 사기꾼한테 당해?
여보! 그 말은 진짜 좀 심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을 몇 번이나 두드리고 미안하다고 말해도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사과를 하면서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 싶었다. 나는 그저 열심히 살려고 한 죄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 생각을 하는데 부적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길로 부적을 잡아 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2.
여보, 냄새가 좀 심해지는 것 같지 않아?
어느 날인가 아내가 말했다.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2박 3일 만에 아내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아내의 말에 바로 이틀 전을 떠올려보았지만 그때보다 얼마나 심해진 건지 쉬이 비교할 수 없었다.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 왜곡되기 마련이므로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아내는 계속해서 킁킁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식욕이 떨어지고 기운이 빠졌다. 아내가 이모님의 말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다시 기분이 상했다.
난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밥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사실은 그랬다. 냄새가 났다. 제법 심하게. 그런데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울살이 오 년 만에 내 손으로 산 집이었다. 출장 내내 이 조건에 구할 수 있는 다른 집들을 알아봤는데, 형편없었다. 형편을 논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내가 번 돈으로 집을 사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전세도 재계약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2년이 지나면 나가달라고 했다. 전세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이 집에 살면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없다는 게 좋았다.
아, 그래?
아내가 짧게 대답했다. 식탁에는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적막만이 흘렀다. 고개를 들어 반찬을 보는데,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불고기에 조기 새끼도도 굽고, 연어를 넣은 샐러드까지 있었다. 생일도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정성 가득한 식탁을 보자 새삼 미안해졌다. 아내의 수고로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언제나 잘 정돈된 집안도 아내의 노력 덕이리라.
여보.
나는 아내를 조용히 불렀다. 아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핏 아내의 어깨가 떨리는 게 보였다. 혹시 울고 있는 건가 싶었다.
여보.
나는 다시 아내를 불렀다. 그때였다. 아내가 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막 달렸다. 그러더니 어느 시점에서 멈췄다. 무릎을 짚고 고개 숙인 아내의 뒤통수 아래에서 진득하고 시큼한 뭔가가 후드득 떨어졌다.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바닥을 닦았다. 아내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나만 그런가, 나만 냄새가 심한가 하고 말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하는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아내가 예민하다 싶었다. 이전에 반지하에서도 이보다 못한 냄새가 났다. 그때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 건지 싶었다. 생활이 나아질수록 예전에 어려웠던 생각은 못하는 법이라고 그런게 사람이라고 말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사는 내내 가족들을 고생만 시켰다. 녹슬지 않는 칼이라며 세라믹 장미칼을 만드는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다. 녹이 슬지 않으니 사람들은 새로 칼을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는 내내 다 처분하지 못하고 집에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 집에도 열 자루가 넘게 있었다. 나는 아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빠르게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부동산이 최고였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인데 그 돈을 벌려면 투기밖에 답이 없었다. 집이 냄새가 좀 나면 어떠냐 싶었다. 인근에 집값이 제일 비싼 주상복합 아파트도 여름만 되면 똥 냄새가 났다. 근처에 피혁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렇게 냄새가 난다는 거였다. 정작 그 사람들은 냄새는 무슨 냄새냐며 우겨댔다. 후에 들리는 이야기는 구청에 민원을 넣어 공장에 냄새 여과기를 장착하게 했다는 거였다. 내가 생각하는 포인트는 이거였다. 집값은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였다. 그러니 굳이 냄새가 난다고 광고하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매일 같이 부동산에 들러 커피를 사들고 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죽치고 앉아 얻어낸 정보였다. 투기도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 싶었다.
토사물이 거실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바닥을 닦고 있는데, 식탁 위에 전화기가 웅웅하고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스팸일지 모르지만 혹시나 싶어 받았다.
나다.
이모님이었다. 어째서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내 전화를 받지 않아서 말야.
그랬다. 말은 안 했지만 아내도 이모님께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틱틱댔던 게 순간 미안해졌다.
그 부적 말이다. 잘 붙이고 있는 거지?
네, 붙이고 있어요.
이사 가면 좋겠지만, 내가 입 댈 처진 아니고. 너희들 생각하며 매일같이 기도드리고 있어.
이모님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어디냐고 물으니 계룡산에 있는 한 동굴 안이라고 했다. 결혼 전에 산중에서 기도 중인 이모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여름인데도 동굴 안은 한겨울처럼 추웠다. 퍼뜩 그 생각이 났다.
몸조심하시고요.
전화를 끊기 전 이모님이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바닥에 떨어진 토사물을 치우는 건 쉬웠다. 문제는 거실 벽에 달라붙은 것들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실크 벽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벽지에 우아한 매력을 더하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은빛 물결들 위에 오물이 튀자 눈에 크게 띄었다. 아무리 살살 닦아내도 은빛 코팅지가 같이 밀려나왔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보니 거실 벽 여기저기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실크지 때문에 티가 나지 않아 그동안 모르고 지낸 거였다. 갈라진 틈에서 미지근한 바람 같은 것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꽤나 깊은 균열인 모양이었다. 냄새야 참는다고 한다지만 갈라지는 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건설업을 하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당장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이런 모양으로 난 균열은 안전에 크게 문제는 없는데, 연식이 오래된 건물에 이 정도 균열도 없는 게 말이 되냐.
그것도 그건데 이상한 냄새가 나.
냄새가 뭐? 얼마나 심하길래 그러냐?
가족만큼 가까운 친구라 그런지 그간의 일이 술술 입 밖으로 나왔다. 냄새뿐 아니라 이모님과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털어놨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친구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친구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더니만 야, 너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여? 라는 되먹지 않은 농담을 하는 바람에 헛웃음을 지었다. 친구는 내게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살이 몇 년 만에 내 집 마련한 게 쉬운 일이냐고 말이다.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친구는 그렇게 말하더니 잔뜩 뜸을 들였다. 이번에도 무슨 재미없는 농담을 하려나 기다리는데, 친구가 답했다.
집주인이야, 임마. 세입자는 어디 서러워 살겠냐. 귀신든 집도 세놓는 게 집주인이야, 임마. 집주인이 됐으면 그 정돈 이겨내야지.
그러더니 전화를 끊기 전 한마디를 보탰다.
친구야,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게 서울의 부동산이다, 잊지 마라.
건설과 관계된 커뮤니티에 물어보니 그들의 반응도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균열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페인트를 사다 바르면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페인트를 바르면 냄새도 차단할 수 있다는 말에 다행이다 싶었다. 다만 페인트 냄새가 독하니 주의하라는 말이 있어 아내는 잠시 나가 있게 했다.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양손에 니트릴 장갑을 끼고 있자니 대단한 수술을 준비하는 의사처럼 여겨졌다. 정화하게 원인을 찾아냈으니 이제 집도할 일만 남았다 싶었다. 페인트 냄새가 독하면 얼마나 독하겠냐 싶었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마스크 사이를 귀신같이 파고들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조금 지나자 울렁거리던 속이 제법 나아졌다. 붓으로 균열이 있는 틈을 메워 나갔다. 별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어서 금방 끝났다. 거의 다 발라갈 때였다. 마지막에 제법 크게 난 틈에 붓으로 넣어 칠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틈에 낀 붓을 뺄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잡아당겼더니 붓대 절반이 찢겨나왔다. 붓은 머리채가 쥐어뜯긴 것처럼 초라해져 있었다. 손으로 벽에 박힌 솔 부분을 잡아딷으려 해도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뽑히지 않았다. 있는 힘껏 잡아당겨도 소용없었다. 한참 후에 아내가 돌아왔을 때, 내 붓을 보면서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솔이 다 뜯어지냐고 웃었다. 내가 아내에게 틈에 솔이 껴서 뽑아버렸다고 말하니 어느 부분이냐고 물었다. 거실 벽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거짓말처럼 솔이 사라진 것이었다.
여보 나 놀리는 거지?
아내는 도무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한참 후에 내가 페인트 브러쉬를 다시 찾은 곳은 엉뚱하게도 화장실 세면대에서였다. 아내는 내게 벌써부터 깜빡깜빡하면 안 된다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다. 어찌 된 일인지 브러쉬는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빨간색 페인트를 썼던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브러쉬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뚝 하고 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화장실 천장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거기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신고한 지 십 분 만에 경찰이 도착했다. 집안에 들어서는 표정에 긴장이 역력했다. 나는 그들에게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에 쥔 아내의 손이 차디찼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는데, 금세 경찰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들어가보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핏물은커녕 핏자국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갈라진 틈은 그대로였지만 거기도 깨끗하게 말라 있었다. 타일이 오래되어 붉게 물때 낀 흔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 돌아보니 뒤에서 경찰들이 낮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억울한 마음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고, 그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막아 세우며 말렸지만 서로 간에 감정이 상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경찰 둘 중에 젊은 쪽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만 아니고 여기서 몇 번 이런 신고가 들어왔어요.
그럼 신고한 사람이 아니라 경찰이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젊은 경찰 표정이 확 구겨졌다. 옆에 나이가 좀 있는 쪽이 알아차리면서 그만하라는 듯 가운데로 들어섰다. 젊은 경찰은 할 말은 해야겠다며 지지 않고 말했다. 피가 보인다. 누가 쳐다보고 있다고 말해서 막상 와보면 타일이 깨져 있거나 물때거나 벽지가 찢어져 있는 걸 잘못 보고 그런다는 것이다.
경찰 말고 보수 업체에 먼저 의뢰하세요, 네?
나는 경찰이 왜 그렇게 무례하게 말하는지, 아무리 내가 기분 나쁘게 했기로서니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으로 대하는 게 무엇 때문인지 알았다. 이 집에 살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집에 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더구나 몇 세대 없는 아파트라 관공서에 민원을 넣어도 반응이 심드렁했다.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창 아버지의 장미칼 사업이 망해 오랫동안 비어있던 상가 건물에 월세를 산 적이 있었다. 바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 있던 집이었는데, 현관문은 얇디얇은 유리문 하나가 전부였다.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다녔다. 집안에 세면대도 화장실도 없었다. 집이라기보다 창고였다. 밤중에 술 취한 사람이 문이 부서지라 두드려서 신고한 적이 있었다. 도착한 경찰이 떠나기 전 부모님에게 말했다.
그냥 이사를 가세요.
그때 결심했다. 번듯한 집을 사야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아등바등 노력했다. 이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와 달라진 게 없다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이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돌아서는 경찰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 바람에 경찰의 목이 뒤로 확 젖혀졌다. 누군가 옆에서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나도 모르게 그 손아귀를 떨쳐내려고 밀쳤다. 그 순간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경찰의 눈이 커졌다. 그 시선을 따라 돌아보는데, 그제야 옆에 선 사람이 아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뿌리친 건 아내의 손길이었다. 순식간에 아내는 내게 떠밀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쿵― 소리와 함께 아내의 머리가 식탁 모서리에 부딪혔다.
여보!
내가 다가설 틈도 없이 경찰들이 먼저 다가가 아내를 부축했다. 아내는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아내의 상태를 살피던 경찰이 나를 바라봤다. 살펴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지체 말고 연락주세요.
경찰이 아내에게 말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아내나 때리는 파렴치한으로 몰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불쾌해졌다.
그냥 우연이에요.
이마를 한 손으로 짚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그냥 실수일 뿐이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맞아요, 집이 오래돼서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아내는 어찌 된 일인지 텅 빈 벽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3.
핏자국은 착각이라고 쳐도 브러쉬가 사라졌다는 건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헛것을 본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건 상식을 벗어난 범주였다. 상식을 벗어났다는 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봤던 것과 이 기분 나쁜 악취와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이제 집에 돌아와 내가 하는 일은 벽에 생긴 틈을 하나하나 살피는 일이었다. 그 틈으로 혹시 핏물이나 체액 같은 것들이 흘러나오지 않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자니 불쾌한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불안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또 헛것 본 거 아니야? 이모님이 주신 부적 놓고 다니지?
어릴 때부터 헛것을 자주 보는 통에 이모님이 부적을 써주셨다. 부적과 팥을 몇 개 넣어서 늘 지니고 다니라고 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응, 그럼 있지.
나는 행여 버렸다고 오해할까 싶어 버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헛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벽면에 피가 스며나오는 것을 봤다. 다시 돌아봤을 때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여러 번 신고를 했는데도, 별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어서 능숙한 범죄자의 소행일 거라 짐작했다. 내가 확신을 하면 할수록 아내는 도리어 나를 걱정했다. 아내는 내게 며칠 어디서 좀 쉬고 오는 게 좋겠다며, 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같이 가는 게 내키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는 건 어떠냐는 거였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그런 것이다 싶었는데, 거듭해서 집에서 내보내려는 아내가 점점 의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아내는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집에 돌아오면 쉬지 않고 말을 하던 아내였다. 어떤 때는 아내의 말을 들어주기가 벅찰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카나리아라고 불렀다. 그랬던 아내가 이제 내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번은 자고 있나 싶어 방문에 귀를 가져갔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와 통화 중인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간간히 들리는 말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주 작게 들렸지만 분명했다. 이제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전화기 좀 줘 봐.
나는 말과 동시에 아내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거친 내 손길에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상 통화목록을 보니 의심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세상에,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아내가 나를 노려봤다. 매섭게 나를 보던 아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더니 아내가 내 손을 뿌리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크게 실수한 것 같았지만 차마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문 앞에서 두드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뺨 위로 뭔가가 스쳤다. 바닥으로 툭하고 하얀 게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임신 테스트기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들어보니 선명한 두 줄이 보였다.
이런 미친놈도 아빠라고!
나는 얼떨떨한 것도 잠시 아내를 끌어안았다. 아내가 내 뺨을 막 후려쳤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 여보. 이제 당신 아빠야.
아내가 괜찮다고 만류했지만 내가 괜찮지 않아 집을 나섰다. 포도와 딸기, 족발이 먹고 싶다는 주문을 받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 위험한 일은 하지 마, 괜한 일에 집착하지 말고. 냄새야 뭐 업체 시켜서 처리하지 뭐.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왔다.
여보, 어디 가서 좀 쉬고 오자, 응? 당장 내일이면 더 좋고.
나는 기꺼이 그러리라 말했다.
아내는 내가 나가기 전 이모님이 꾼 꿈을 말해줬다. 거대한 뱀이 아내를 집어삼키는 꿈을 꿨다는 거였다. 한밤중에 이모님이 전화를 걸어 당장 이사를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길 들었을 때는 이미 아내는 자신이 임신한 걸 안 뒤라 속으로 웃었다고 했다. 이제 아내가 왜 그렇게 웃었는지, 그렇게 전화 통화를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멀리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집이 보였다. 인근에 가로등 몇 개만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걸 보니 아이가 태어나 혼자 이 길을 걸으면 꽤나 위험하겠다 싶었다. 가장 가까운 학교가 어디 있더라, 생각해보니 큰길을 두 번이나 건너야 했다. 초품아라고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인기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곳은 아이와 살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사를 가야하나 싶기도 했다. 어쩌면 이사를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애써 그냥 버티며 살았지만 냄새 또한 아이에게 좋지 않을 거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 집은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그냥 안전하게 우리 세 식구 살 수 있는 집이면 됐지. 순식간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을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산 거지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거의 홀린 듯이 산 거나 다름없었다. 원래 그렇게 집은 번갯불에 콩 볶듯이 계약하는 거라고 했다. 사람이 집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집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아내와 여행을 가서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아내 역시 여기 살면서 이런저런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그동안 내가 예민하게 군 것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같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야겠다 싶었다. 그나저나 아이라니, 우리의 아이라니 꼭 닫은 입 밖으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라니! 아이가 나를 보며 아빠, 하고 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자식이 생긴다는 건 어떤 걸까 싶었다. 아버지에게 묻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죽는 그날까지도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했고 끊임없이 실패했다. 어차피 망할 일이니 시작도 하지 말란 말은 아버지에게 통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아버지는 미안하다며 모든 게 너희를 위해서라고 했다. 아버지의 숨이 꺼져가는 와중에 그 말이 기막혀서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되물었었다. 아버지는 임종 뒤에 놀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그 기억에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포도와 딸기, 족발을 사 가지고 돌아오며 계단을 오르는 길에 문득 이웃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마음속으로 이미 이 집을 떠나야겠다 마음먹으니 더 그랬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간 이웃과 마주친 일이 없다 싶었다. 그저 출퇴근 시간이 달라 그렇겠거니 한 거치고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어차피 집을 내놔야 한다면 이 집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편이 좋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웃을 찾기로 했다. 먼저 맨 아랫집을 찾았다. 처음 이사 올 때 잠깐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가는 이웃과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그래도 거기에 사람이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본 기억이 없었다. 집 밖에 자전거는 있었는데,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다음은 404호를 찾아 문을 두드려봤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조용했다. 잠시 귀를 현관문에 대보니 안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문을 돌려봤다. 문이 열려 있었다.
계세요? 저 501호 주민인데요.
살림살이가 갖춰져 있었지만 어쩐지 묘하게 색이 바래 있었다. 계세요, 하고 다시 한번 말하는데 내 목소리만 울렸다.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은 무려 석 달 전 것이었다. 찻잔에 시커멓게 핀 곰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작스럽게 집주인이 떠난 것처럼 사람만 없다뿐이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예전 체르노빌 지역의 영상을 봤을 때와 같았다. 이상하게 섬뜩해져 밖으로 나왔다.
그길로 집에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몹쓸 호기심이 일었다. 아무리 몇 가구 없다고 해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706호를 찾았다. 거기에는 확실히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손잡이를 슬며시 돌리자 그대로 문이 열렸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쌓아놓은 짐만 입구에 놓여 있었다. 딱 봐도 여행을 가려고 준비한 상황인데, 짐만 놓고 나가버렸다니 뭔가 이상했다.
그렇게 해서 1003호까지 가게 되었다. 이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는 마지막 이웃이었다. 한편으로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발길이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이렇게 사람이 사라져버리다니. 여기에는 제발 사람이 있으면, 그래서 내게 뭐라도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계세요?
나는 관성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사실 이쯤 되니 어떤 대답이 들릴까 봐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차라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요. ……기요.
그 목소리에 다가가니 안방이었다. 안방 문 앞에는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한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저 좀 꺼내주세요.
여자는 고개를 웅크리고 있었다. 여자는 멀쩡해 보였다. 안색이 좀 창백했다뿐이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디 불편하세요?
여자의 손을 잡아끌려고 하는데 기운이 없었다. 여자의 몸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서는 더없는 악취가 났다.
저기 일어나보세요.
여자를 잡아당기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여자는 죽어 있었다. 확실했다. 다만 여자의 다리가 침대 프레임 사이에 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조금만 도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정체를 찾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여자의 발밑에 틈이 있었다. 그 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도와달라고, 안 들려?
그러더니 여자는 순식간에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오면서 퍼뜩 아내 생각이 났다. 홀로 있을 아내는 괜찮을까. 나는 서둘러 집으로 올라갔다. 집안은 고요했다. 들어가자마자 아내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 봤던 광경 때문에 겁이 났다.
여보, 왜 그래?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화장실이었다.
당신 거기 있어?
응!
빨리 나와봐, 여보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우리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돼.
아이참, 여보! 나도 큰일 났어!
왜?
휴지가 없어, 여보! 휴지가!
휴지?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화장실에 두루마리 휴지를 두 개씩 놓고 있었다. 하나는 밖에, 하나는 여분으로 수건을 놓는 수납장 안에 놓고 있었다. 아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빨리 가져다줘!
아내의 목소리가 유독 멀리서 들린다 싶었다. 나는 아내에게 응, 하고 대답하면서 화장실 문으로부터 멀어졌다. 퍼뜩 휴지통에 버린 부적 생각이 났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들여다본 휴지통에 잘게 찢어진 노란 조각들이 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히 빌었다. 내 아내가, 우리 아이가 부디 무사하기를. 그렇게 거의 다 맞춰나갈 때였다. 화장실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선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여보? 내가 나갈까?
그때였다. 퍼뜩 친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게 서울의 부동산이다, 잊지 마라. 라는 말이. 나는 땀에 전 부적 조각을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곧이어 싱크대 수납장에 넣어둔 세라믹 칼을 빼 들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말했다.
아니, 내가 들어갈게.
*2020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선정 작가 작품.
변미나
2018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데뷔.
소설을 쓰지만 아직 소설집은 없습니다. 매일 5km씩을 달립니다.
꾸준히 열심히 재미있게.
2022/06/28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