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아홉 살 겨울, 어쩌면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거울이 타일 바닥과 부딪쳐 산산조각났을 때만 해도, 유리 파편에 스친 얼굴에 자잘한 핏방울이 맺혔을 때만 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자전거를 겨우 피했을 때, 야구공이 하나로 모아 묶은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때, 식탁에서 떨어져 내린 과도가 엄지발가락에서 1센티미터 떨어진 곳으로 내리꽂혔을 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빙판길에서 미끄러진 순간,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빙판 위로 코피가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몸을 일으키자 팔꿈치와 무릎이 망가진 듯 얼얼했다. 절뚝이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디디,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갑자기 왜 디디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머플러를 칭칭 감은 채 아픈 곳을 쳐다보았다. 발목은 복사뼈의 흔적을 없애버릴 만큼 퉁퉁 부어있었고, 살빛은 푸르스름하게 죽어있었다. 나는 죽는 대신 발목을 접질렸다.
   그 겨울 굽이 높은 신발은 신지 않았다. 초록 불이 깜빡일 때는 길을 건너지 않았고, 뾰족한 물건들은 최대한 멀리했고, 이어폰을 꽂은 채 멍하니 걷지도 않았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서는 얌전히 방안에 틀어박혔다. 겨울은 더디게 흘러갔다. 그 사이 문득문득 디디 생각이 났다. 화분 하나가 얼어 죽은 것만 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뜨거운 커피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날에, 나는 넘어지지도, 개에게 위협을 당하지도,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고 디디에 대한 생각도 점점 잊혀졌다.

2

   스무 살 여름, 처음으로 남자와 잤다. 상대는 대학 동기였다. 남자애는 골초였고, 나 역시 담배를 피웠고, 모임에서 흡연자는 세 명뿐이었다. 우리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빠끔거렸다. 한 아이가 담배를 비벼 끄고 자리를 옮겨 버리자, 남자애와 나 둘만 남았다. 뿌연 담배 연기에 둘러싸인 남자애는 몇 번이나 재채기를 했다. 취기가 알큰하게 오른 나는 남자애가 재채기할 때마다 깔깔대며 웃었다. 내 담배가 떨어지자 남자애 담배를 피웠다.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피웠던 담배였다. 그 후로 남자애와 종종 만나 담배를 피웠다. 내내 담배만 피우다가 가끔은 마주 앉아 밥을 먹었고, 때로는 술도 마셨다. 남자애와 나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이였다. 굳이 따지면 어느 범주에든 넣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애매모호함이 남자애와 만나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모든 게 분명해지면 시시한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관계가 끝나고 난 다음, 나는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사과 주스를 마셨다. 주스는 달기만 할 뿐 사과 맛은 나지 않았다. 남자애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고, 남자애도 엉거주춤 바지를 입었다. 옷을 입는 동안 우리는 평소처럼 농담을 했다. 남자애가 먼저 웃었고, 내가 따라 웃었다. 평소와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텔에서 나온 우리는 약간 떨어져서 걸었다. 6월이었지만 공기는 벌써 후텁지근했다. 먼저 버스에 오른 내가 손을 흔들었고, 버스 창밖에서 남자애도 손을 흔들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상한 기분은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버렸다.
   전화가 걸려온 건 벽에 못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 벨이 울리자마자 망치를 든 채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는 내게 나야, 하는 남자 목소리.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누구신데요? 맥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발치에는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이 널려있었다. 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긴장해?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나와. 안부를 묻고, 농담을 하고,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을 때 그가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망치를 들고 있었다. 디디였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빠져나오자 여름 햇살이 창으로 들이쳤다. 나는 눈이 부셔서 속눈썹을 찌르르 떨었다. 지하철 맨 끝 칸에 타고 있으면 플랫폼에서 기다리다 올라타겠다고, 수화기 너머의 디디가 말했다. 만나기로 한 역이 바로 다음이었다. 왼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단단히 감아쥐었다. 그냥 지나쳐 버릴까. 망설이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문이 열렸고, 닫혔고,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재채기를 하는 순간 툭, 누군가 어깨를 쳤다.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 풀어진 무방비 상태로 돌아보자 씩 웃어 보이는 얼굴. 하얀색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는, 디디였다. 스무 살 디디는 마지막으로 봤던 열일곱 살 디디와는 전혀 달랐고 오히려 열다섯 살의 디디와 꼭 닮아있었다. 당황한 나를 우습다는 듯 보고 있던 디디는 다시 툭, 내 어깨를 쳤다. 오랜만. 나 역시 디디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오랜만.
   디디와 내가 내린 곳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주거 구역의 지하철역이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지만 풍경은 내가 사는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차선 도로, 고층아파트, 음식점, 편의점, 베이커리, 갓길에 세워진 오토바이, 가로등, 플라타너스…… 나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묶었다. 끈끈해진 목덜미에 손부채질을 하는 나와는 달리, 디디는 더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었다. 커다란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데도, 모자의 눈부신 색감 때문인지 산뜻해 보였다. 내 그림자는 디디 그림자의 어깨 정도에 닿아 있었고, 두 그림자는 점점 기울어졌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걷기만 했다. 언젠가 디디와 오늘처럼 걸었던 적이 있다. 야자수가 듬성듬성 돋아 있는 흙먼지 속을, 디디와 나는 오랫동안 걷고 또 걸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자. 열다섯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야자수 그늘에 서 있던 디디의 얼굴에는 뾰쪽한 이파리 모양 그림자가 얼룩처럼 그어져 있었다. 너 겁 많구나. 디디는 환한 뙤약볕 아래로 성큼 나와 섰다. 디디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꺼낸 것은 구겨진 지폐 한 뭉치였다. 이정도면 됐지, 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디디는 휙, 뒤돌아 걸어갔다. 디디의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을 때, 야!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제야 디디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걱정 안 해! 디디도 소리쳤다. 가끔, 이렇게 없어지니까. 디디의 목소리는 변성기를 거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갈라진 목소리 틈으로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이 묻어났다.
   그 순간의 디디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디디와는 전혀 달랐다. 굳은 얼굴로 조용히 집안을 누비던 디디는 어느새 또래 남자애들처럼 장난기 많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달려가 디디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디디가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끌려왔다. 니가 뭘 알아! 응? 소리를 질러대며 발을 굴렀다. 바짝 마른 흙먼지가 디디와 나 사이에 피어올랐다. 디디는 내 손을 뿌리쳤다. 시끄러워. 짜증이 난다는 듯 팔목으로 이마를 문질러댔다. 나는 씩씩거리며 디디를 보고 있었다. 근데 너. 디디의 한쪽 눈썹이 심술궂게 삐죽 올라갔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냐?

   기억이 되살아나자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그게 좋은 느낌인지, 불쾌한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블록쯤 걸었을까.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잎이 무성한 플라타너스 아래로, 빨간색 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헌혈차였다. 디디는 앞장서 헌혈차 안으로 들어갔다. 헌혈차 내부에는 누울 수 있는 침상이 오른쪽으로 두 개 붙어있었고, 왼쪽에는 서랍과 여닫이문이 빼곡히 달린 수납고가 세워져 있었다. 내부에 고여 있던 암갈색 빛이 천천히 일렁였다.
   디디의 피가 호스를 따라 투명한 봉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디디는 손을 오므렸다 폈다 오므렸다. 손놀림은 차분하고 익숙했다. 피가 담긴 봉투는 시소를 타듯이 왔다, 갔다 움직였다. 체리주스처럼 새빨간 피가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모자를 벗고 무표정한 얼굴로 누워있는 디디는, 조금 피로해 보였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제법 나이가 느껴졌다. 소년 디디의 뺨에 어려 있던 것이 팽팽한 긴장감속에 서려 있던 권태였다면, 이제 디디의 뺨에는 그보다 차갑고 무료한 권태가 머물러 있었다. 봉투에 모아진 피를 보고 있자니 조금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디디는 피가 담긴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끊임없이 손을 오므렸다, 폈다, 오므렸다.

3

   이사 하던 날, 나는 거실 한구석에 서서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등에 찰싹 달라붙은 티셔츠를 떼어내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노란색 캡모자를 쓴 사내들은 가구들을 옮기느라 분주했고 엄마는 가구의 위치를 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차례 이사를 다녔지만, 그때 만큼 엄마를 흥분시킨 이삿날은 없었다. 운동화를 신고 발랄하게 지시를 내리는 엄마는 생기가 넘쳤다.
   사업가 D는 엄마가 원하는 것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절반 정도는 이뤄 줄 것처럼 보였다. 잡지에 나오는 예쁜 집을 갖는 건 엄마의 꿈들 중 하나였다.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엄마는 D를 졸라 새집을 샀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방 네 개짜리 아파트였다. 나는 두 캔 째 콜라를 따며 엄마가 침대나 화장대, 식탁 따위의 앤티크 풍 꿈들을 여기저기 배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리에 꽃이나 포도 같은 게 양각으로 새겨진 값비싼 가구들은 엄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떤 것들은 꽃무늬가 너무 많아 메스꺼울 정도였지만, 나는 엄마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콜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의 꿈들은 어딘가 진부한 데가 있었다. 나는 금방 지루해졌고, 세 캔째 콜라를 땄다. 벽에 몸을 기대 하품을 하다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눈앞이 환했다. 도화지처럼 새하얗고 각이 반듯하게 잡힌 이 인용 소파. 소파는 단번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언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 깨끗하고 심플한 녀석은 결코 엄마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당황했다. 소파의 귀퉁이를 잡고 있던 노란 캡 사내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가 주춤주춤 다시 전진했다. 나는 소파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콜라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만지면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가 날 것 같은 새하얀 소파를 보고 있었다. 사내들은 끙끙대다가 결국 아무 곳에나 소파를 널브러뜨렸다. 엄마는 셔츠의 소맷부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자신이 고른 가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파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나는 콜라 캔을 조금 우그러뜨렸다.
   흰색 반팔 와이셔츠에 감색 교복 바지를 입은 남자아이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와 비슷한 키에 목이 기다랗고 얼굴이 하얀 남자애. 쭈그리고 앉으면 접이식 의자처럼 몸이 차곡차곡 접힐 것 같이 마른, 팔꿈치 뼈가 도드라진 남자애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남자애는 소파 옆에 섰다. 나는 그 애를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D의 아들, 디디였다.
   디디가 나타나자 엄마는 소파가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며 디디를 맞았다. 디디는 소파를 자기 방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소파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 디디는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콜라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현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슬쩍 디디의 방을 훔쳐보았다. 문틈에 눈을 가져다 대자, 디디의 네모난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벽은 지중해 같은 파랑. 그 푸른 방 한가운데 새하얀 소파가 놓여있었다.

4

   헌혈차에서 나온 디디와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디디는 빵을, 나는 우유를 먹었다. 어지럽진 않아? 디디에게 물었다. 괜찮아. 디디가 말했다. 어차피. 디디는 빵 봉지를 구겼다. 비닐 빵 봉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피 못 쓸 거야. 디디는 길가에 세워져 있는 철제 쓰레기통에 빵 봉지를 던졌다. 빵 봉지는 아슬아슬하게 쓰레기통을 빗겨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우유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미지근한 우유는 비릿했다. 쓰레기통을 향해 우유 팩을 던졌다. 우유 팩은 쓰레기통 가장자리를 맞고 튕겨나 나왔다. 우유 팩은 디디가 던진 빵 봉지 옆으로 떨어졌다. 바람이 불자 빵 봉지는 뒹구르르, 어디론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디디는 쿡쿡 웃어댔다.
   디디는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디디를 겨우겨우 쫓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디디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점점 불안해졌다. 카우보이모자에 가려진 탓에 디디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 미안해 디디. 급한 일이 생겼어. 두 마디 말이면 디디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 입술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불쑥, 골목 안으로 들어갔을 때야 디디와 내가 소용돌이 모양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택가 골목인가 싶었는데 작은 간판이 도닥도닥 붙은 상점가가 나왔고, 아파트 단지를 지나는가 싶다가, 을씨년스러운 공터 옆을 지나기도 했다. 어쨌든 디디와 나는 계속 왼쪽으로, 왼쪽으로, 왼쪽으로만 꺾어 들어가고 있었다. 동선이 점점 짧아지다가 모퉁이를 도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디디, 중얼거리며 손을 내뻗었을 때 먼저 내 소맷부리를 잡아당긴 건 디디였다. 디디의 얼굴 가득 햇살이 내리비쳤다. 눈이 어리어리했다. 디디의 웃는 얼굴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디디의 눈꼬리만 슬몃, 햇빛 위로 떠올랐다. 나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디디는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5

   문에 삐딱하게 기대선 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린 채, 레이스 슬립을 입고 있던 엄마의 하얀 등줄기 위로 물방울이 톡, 톡 떨어졌다. 삼십 대 중반인 엄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엄마는 여행 가방을 싸고 있었다. 나에겐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느닷없이 여행이라니. 엄마는 가족여행이라는 어휘를 사용해가며, 여행의 중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다. 찌푸린 눈썹 앞머리에는 단호함이 매달려 있었고,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엄마는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로 변해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기억하는 어머니의 얼굴.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가며 나를 죽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썼던 고집 센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내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엄마는 한바탕 늘어놓은 물건 사이를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여행은 덥고 지루했다. 낮에는 가이드의 꽁무니를 따라 이곳저곳 쓸려 다니다가, 저녁에는 레스토랑에서 질긴 바비큐를 먹었다. 그 사이사이 엄마는 끊임없이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필사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나는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디디는 결코 렌즈를 보지 않았다. 매번 정면 사진 찍기에 실패한 엄마는 금방 디디를 포기했다.
   돌아가기 전날 우리는 지프니를 탔다. 천장은 낮았고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유리가 없어 밖과 그대로 트여있는 구조였다. 지프니가 속도를 올리면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흩날렸다. 우리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현지인들과 섞여 지프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의자가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더 이상 앉을 곳이 없게 되니 남자들이 차 바깥에 매달렸다. 신발 앞코를 겨우 걸치고 봉을 움켜쥔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익숙한 일상인 듯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지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던 엄마는 후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면 된다고 가이드가 엄마에게 말했다. 우리는 오래된 성당에 가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와 D, 가이드, 나, 디디 순서로 나란히 앉아있었다. 정류소마다 사람들이 내렸고, 내린 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올라탔다. 사람들이 타고 내리느라 분주한 틈에 디디가 D에게 말했다. 뒤에 매달려도 돼요? 허락을 바라고 묻는 것은 아니었다. D의 얼굴이 굳어졌다. D는 냉랭한 눈으로 디디를 바라보았고, 디디는 기다렸다는 듯 D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엄마의 입꼬리가 꿈틀, 비틀린 순간 가이드는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요, 속도가 느린 차라서. 눈치 빠르게 덧붙였다. 다음 정류장에서 디디는 지프니 뒤에 매달렸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있었고, D는 엄마와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었고, 가이드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나는 디디를 보고 있었다. 디디의 반바지가 바람에 날려 펄럭거렸다. 디디의 허리 위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발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도로에 나동그라질 터였다. 오토바이가 클랙션을 울려댔다. 지프니를 추월하는 오토바이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디디쪽을 보았을 때, 디디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 하는 사이 지프니가 멈춰 섰다. 새로운 정류장이었다. 엄마와 D, 가이드는 디디가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지프니가 다시 출발했을 때, 나는 나 역시 디디처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지프니는 흙먼지 사이로 멀어졌다. 뒤를 돌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디디가 보였다.
   태양은 노랗게 이글거렸다. 잊을 만하면 지프니가 한 대씩 지나갈 뿐, 도로 가에는 디디와 나 두 사람뿐이었다. 대책도 없이 내려버린 나는 결국 디디를 따라갔다.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린 어느새 나란히 걷고 있었다. 디디를 가까이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디디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고, 나는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학원에 갔다. 우리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구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학 간 반에는 서너 그룹의 무리가 있었지만 낯선 전학생이 낄 자리는 없었다. 나를 받아들여 준 곳은 담배를 피우는 그룹이었다. D의 고급 담배만 있으면 언제든 그들 틈에 낄 수 있었다. 지린내 나는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들과 둥글게 모여서 담배를 피웠다. 그래놓고 집에 와선 아이들에 대한 역겨움을 일기장 한가득 써 내려갔다. 늘 속이 울렁거렸다. 복통을 핑계로 가끔씩 학교를 빠졌다. 나는 그들 안에 속하고 싶기도 했고,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복통 연기도 잦아졌다. 연기를 하면 할수록 실제 통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담배를 피워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복통이 아니라, 혼자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 날도 복통을 핑계로 혼자 집에 있었다. 맨발로 엄마의 가구를 하나하나 밟으며 돌아다녔다. 앤티크 풍 탁자를, 물푸레나무 의자를, 소파 쿠션에 새겨진 분홍색 장미꽃을 꾹꾹 밟으며 돌아다니다가 실크 커튼을 활짝 젖혔다. 창을 열자 서늘한 가을 기운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담요를 몸에 두르고서 콜라를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 넘길 때마다 탄산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목구멍을 태울 것 같았다. 음악을 틀어놓고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담배를 피우자 쿵, 쿵, 심장이 나지막이 튀어 올랐다. 콜라캔에 다 피운 담배를 떨어뜨리고, 캔을 우그러뜨렸다. 디디의 방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비틀자 포스터 칼라 냄새가 풍겨왔다.
   디디의 방에는 가구 하나 없었다. 파란 방의 중심에 하얀 소파가 구름처럼 떠 있을 뿐이었다. 소파와 마주하고 있는 벽면에는 파란색 커튼이 매달려 있었고, 커튼을 열자 네모난 창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쪽 벽은 붙박이장이었다. 장을 열자 텅 빈 방의 미스터리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커다란 오디오 스피커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고, 책, 만화책, 노트, CD, 수동 사진기, 레고 블록, 옷가지, 양초 따위의 잡다한 물건들이 장 안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건 여느 창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문을 닫으면 감쪽같았다. 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6면이 모두 코발트블루인 특별한 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디디의 방을 훔쳐보는 동안 디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디디가 읽는 책, 디디가 듣는 음악, 디디의 글씨체, 디디의 손자국, 디디가 그린 낙서들. 소파는 예상했던 것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디디의 소파에 기대어 디디의 책을 읽고, 디디의 음악을 듣고, 디디의 그림을 봤다. 디디의 향초에 불을 붙였다가 훅, 입으로 바람을 불어 꺼 버리기도 했다.
   디디와 나란히 걷는 텅 빈 흙길 위에는 눈 부신 햇살만이 가득했다. 나는 손차양을 하고,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디디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디디의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넌 훔쳐보는 게 취미구나. 디디가 쿡쿡 웃어가며 말했다. ……뭐? 아님 그냥 훔치는 게 취민가.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단 두 마디 말에 디디가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디디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의 방에 드나들고 있었다는 것을. 때때로 그의 물건을 내 방에 가져다가 내 방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입속에서 무슨 말인가 질겅질겅 씹혔지만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 마디라도 내뱉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 입안에서 질겅거리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수치였다. 방에 드나드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잖아. 디디가 다시 쿡쿡 웃기 시작했다. 비뚤게 걸려있던 그림, 귀퉁이가 접힌 노트, 두 개비의 담배, 반대로 뒤집어 놓은 티셔츠…… 조금씩 어수선해져 있던 방 안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방을 몰래 드나들던 건 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뚝, 발을 멈췄다.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동안 디디가 사라져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디디는 사라지는 대신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디디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 자그마한 나무 간판이 보였다. 오랫동안 걷고 걸어 처음 발견한 간판이었다. 어!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디디의 눈도 반짝 빛났다. 가자. 콜라가 그려진 간판을 향해, 디디는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새 손을 잡고서, 서로를 팽팽하게 당기며 달려갔다.

6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내게는 새로운 아버지 K와, 새로운 언니와, 새로운 강아지가 생겼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아버지와 언니였지만, 어쨌든 내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엄마가 말했다. D와 헤어진 후로 엄마는, D나 디디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게 엄마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그게 엄마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기도 했다.
   엄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K는 뼈를 푹푹 끓인 사골국을 유난히 좋아했다. 일주일 내내 집 안 가득 수증기가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어느 날,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엄마는 아침프로그램을 보며 이것저것 참견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는 네, 네, 하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부엌에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엄마. 불러 봐도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불러 봤지만 역시나 대답이 없었고,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성급히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사골국을 젓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엄마의 어깨는 국 쪽으로 허물어지듯 기울어 있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엄마에게 다가갔다. 칼, 칼이 말이야…… 엄마는 멍하니 사골국을 가리켰다. 응? 엄마의 손끝은 국통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증기 사이로 뿌연 사골국이 팔팔 끓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칼이…… 엄마에게 국자를 빼앗아서 국통 안을 휘휘 저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국자 끝에 걸렸다. 삐죽 떠오른 것은 뾰족한 칼끝. 커다란 부엌칼 하나가 사골국 안에서 팔팔 끓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엄마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때가 많아졌다. 그럴 때면 밑으로 가라앉은 속눈썹이 엄마의 눈동자를 가리곤 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엄마는 그 순간만큼은 어둡고 탁한 그림자에 잠식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두려웠던 이유는 그 그림자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전 열 시.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는 D의 부음 이었다.

7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키가 크고, 몸에서 체리 냄새가 나고, 귀걸이가 반짝거리고, 발가락이 휘어진 여자.
   디디는 일곱 살 이후로 친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재혼해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너희 아버지는?
   키가 작고,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고, 콧등이 반질거리고, 새끼발가락이 짧은 남자.
   나는 디디식으로 지껄였다. 사실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내 출생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열아홉 살 엄마의 자궁에 생겨났다가 엄마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태어났다는 것뿐이었다.
   담임은 어떤 사람이야?
   안경에, 입에서 묵은 커피 냄새가 나고, 엄지손톱엔 때가 끼어있고, 베이지색 조끼.
   플루트 선생은?
   꼬불거리는 파마, 두꺼운 볼 터치, 늘어진 귓불, 입술 끝에 팥알 같은 점.
   디디와 나는 낄낄거리며 아무렇게나 지껄이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디디는 정식으로 나를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디디는 소파의 오른쪽 끝에 앉는 것을 좋아했고, 나는 소파의 왼쪽 끝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D와 엄마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평일에는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둘 다 집을 비운 주말 오후에는 내내 함께 있곤 했다.
   열어둔 창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디디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처음엔 디디를 밀쳐버릴까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모든 게 귀찮아지는 그런 오후였다. 그래서 디디를 그냥 내버려뒀다. 디디 역시 다시 일어나기에는 너무 귀찮아진 것 같았다. 엄마가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잠시 모른 척하기로 했다. 두루마리 휴지가 풀리는 것처럼 포르르,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디디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디디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디디의 얼굴이 아닌 디디의 눈썹 결, 디디의 엉킨 속눈썹, 디디의 콧등, 옴폭 파인 인중, 뺨에 난 점 하나하나까지, 내 눈 속에 각인시켰다. 디디는 더 이상 어떠한 인상이나 제스처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내가 어딘가에 완전히 속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곳이 푸른 방이든, 디디의 방이든, 디디이든 상관없었다. 현기증이 날 만큼 기분 좋은 흥분감이 밀려왔다.
   디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디디는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다시 조금 오래 입을 맞췄다. 디디가 내 무릎에서 일어났다. 더워. 이번에는 내가 디디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땀이 배어 나온 등에 셔츠가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디디는 내 등에 들러붙은 셔츠를 떼 주었다. 등과 셔츠 사이에 바람이 들어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디디는 티셔츠를 벗었다. 나 역시 티셔츠를 벗었다. 옷을 다 벗고 나서 우리는 발가벗은 서로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때 우리의 몸은 아직 빚어지지 않은 진흙 덩어리 같았다. 디디의 몸통은 긴 팔다리에 비해 지나치게 좁았고, 내 가슴은 밋밋했다. 거웃은 반쯤 나다 말았고, 골반은 납작했다. 우리는 소파에 기댄 채 서로의 뼈를 꼭 끌어안았다.
   디디의 발작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어쩌면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을 하얗게 뒤집고서 사지를 뒤틀고 있는 디디를 보던 그 순간은, 내 생에 가장 길고 무서운 시간이었다. 디디는 몹시 아파 보였고, 그게 디디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았지만,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디디를 관통하고 지나간 다음, 디디는 관절 마디마디가 망가진 인형처럼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현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옷을 주워 입었다. 소파 팔걸이에 걸려있는 셔츠를 집어 들 때, 디디가 내 손목을 잡았다. 뿌리치려고 하자 디디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디디의 손을 잡아떼려 애썼다. 하지만 디디의 손가락은 가시 달린 야생 식물처럼 날카롭고 집요하게 손목을 죄어왔다. 탁, 탁, 절단하듯 디디의 손을 내리쳤다. 디디의 손자국은 며칠간 지워지지 않았다.
   D와 엄마의 사이는 나와 디디보다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멀어졌다. 그들은 싸우기 시작했고, 조그만 일에도 언성을 높이다가, 어느 순간엔 서로에게 무관심해졌다. 디디가 살이 찌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방에서 나온 디디는 그동안의 시간을 피부 속에 축적시키기라도 한 듯 몸이 거대해져 있었다. 디디가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시절, 나는 그런 디디를 모른 척했다. 디디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몸도 많이 변해 있었다. 가슴은 점점 둥글어졌고, 판판했던 엉덩이와 젓가락 같던 다리에는 부드러운 살이 붙었다. 디디가 입 맞췄던 동전 같은 가슴과 디디를 끌어안던 연약한 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자 더 이상 구토증이 일어나지 않았고, 더 이상 일기도 쓰지 않았다.
   D와 엄마의 싸움도 한풀 꺾이고 커다란 집은 병든 짐승처럼 고요하게 숨을 죽였다. 어느 새벽,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방 밖으로 나왔을 때, 디디의 방에서 흘러나온 빛이 복도 쪽으로 막대기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디디의 방 틈으로 시큼한 음식물 냄새가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조심스레 문틈으로 눈을 가져다 댔다. 내가 본 것은 소파 위에 포대자루처럼 늘어져 있던 디디였다. 잠든 디디는 생각만큼 추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디디는 평온해 보였고, 디디의 두툼한 껍데기 속에 빼빼 마른 열일곱 살 소년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거대한 살가죽을 뒤집어 쓴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디디는 손가락을 빨며 잠들어 있었다.

8

   디디와 나는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하늘이 점점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사람들 틈바구니로 겨우 몸을 밀어 넣었다. 지하철이 출발했고, 디디와 나는 빼곡한 사람들의 무리 속에 꼿꼿이 박혀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목적지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속에서 한마디 말이 질겅질겅 맴돌았다. 사람들의 어깨에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나는 턱을 딱, 딱, 맞부딪쳤다. 시큼한 땀 냄새가 지하철을 가득 메웠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톡, 누군가 가볍게 어깨를 쳤다. 비치볼을 통, 쳐내는 것 같은 경쾌한 감촉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디디의 하얀색 카우보이모자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서야, 유리문 밖에 서 있는 디디를 볼 수 있었다. 손을 흔들 새도 없이 지하철이 출발했다. 디디가 사라지고 나자 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 것은, 열다섯 살 디디도, 방금 만난 스무 살 디디도 아닌, 열일곱 살 디디의 모습이었다. 검은 양복 속에 갇혀있던 거구의 디디. 디디가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하고서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툭, 혼잣말을 내뱉었다. 디디, 왜 날 찾아온 거야?

9

   스무 살 겨울, 난 다시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가 빠진 유리잔에 입술을 베였을 때만 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중 추돌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복면을 쓴 사내와 스쳐 지나갔을 때, 전등이 고장 난 복도에서 마지막 계단을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디었을 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몸이 붕 떠올랐을 때,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오토바이는 쏜살같이 사라졌고, 나는 바닥에 누워 오토바이 꽁무니를 보고 있었다. 찝찌름한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방금 산 홍시가 바닥에 터져 있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홍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홍시는 툭, 다시 잿빛 시멘트 바닥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 끝에 홍시의 붉은 살점이 찐득하게 묻어났다. 발을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밀자 온몸 구석구석 둔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문을 닫고 나자 새까만 어둠이 집안에 들어찼다. 미리 전등을 갈아둘 걸, 생각했다. 보일러를 켜두지 않은 집안에는 냉랭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발목을 까딱 움직인 순간 격심한 통증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나는 죽는 대신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그 날카로운 통증 끝에 디디, 난 다시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황윤하

너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때까지

2018/08/28
9호